<2021.10.13.연중 제28주 수요일>
<루카11,42-46>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44 너희는 불행하여라!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핫한 넷플에서 만든 오징어게임을 보셨나요?
사람들이 열광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즐거운 전래놀이를 매회 테마로 하여 만들었는데, 우리들이 지면 죽는다고 하면서 게임에서 나가고 다시 한명이 이기면 그 팀을 모두 살리는 것이 대부분 우리놀이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합니다.
탈락하면 총으로쏘아 죽이고 숨이 붙어있으면 몰래 빼돌려 장기를 팔아먹고 죽은이들은 화장을 합니다
게임참가자는 사회의 약자 실패자들로 돈이 절박한사람들이고 한명이 죽을때마다 그만큼 돈이 늘어나는데 게임기획자는 돈 많은 시한부인생이라 심심해서 이런 옛놀이를 만든거라고 합니다. 오늘 기사에서도 7살아이가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그려 유투브에 정PD님 힘내세요 하고 올린게 떳다고 합니다.
자극적이고 끔찍한 테마로 시청자의 주목을 받고 있고 세계적으로 난리라네요.
돈 많고 심심하면 이런 게임을 해도 되나요? 요즘 여러 방면에서 긍정적효과를 가진 K전통문화가 심각하게 훼손된거 같아요.”
이상은 우리나라의 전통 전래놀이 보존을 위해 애쓰고 계신 친척 누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글입니다.
얼마전에는 왕따를 당하던 학생이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더 악랄해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와 선생님께 왜 이야기를 안 했다고 합니다.
주변에 있는 학생들은 왜 침묵을 했을까요?
인간의 개인주의화가 강조되면서 자유와 평화를 최대한 중요한 가치로 여기면서 세상은 더 소외되고 더 소통이 안 되는 이기적인 삶이 되었지요.
코로나19도 인간의 이기적인 삶의 결과인 것이지요.
이제는 사회가 오염되었어도 나 혼자만 잘 살면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잘 사는 세상을 가꾸어가야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회성을 발달시켜야 합니다.
사랑이 뇌를 키운다고 합니다.
엄마들이 뇌발달에 대해 너무 많이 관심 갖고 질문하고 좋아하지요.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가능하면 뇌 성장이 균형있게 발달되면 좋지만,
인간의 뇌 발달의 과정을 보면 제일 먼저 발달하는 것이 정서 발달(변연계, 무의식적 자아)), 그 다음이 사회적 발달(사회적 자아, 슈퍼에고), 그 다음이 대뇌피질 인지기능(자아, 에고)이 발달하는 것입니다.
변연계는 원초적 본능이 있는 곳이며 무의식적인 자아의 영역입니다.
변연계는 속상한 마음 기쁜마음 즐거운 마음 불쾌한 마음 등의 여러가지 감정들을 하나하나의 악기라고 보면은,
오케스트라처럼 잘 울리도록 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아이에게 정서적 반응을 해주어야, 그것도 사랑으로 해주어야 변연계가 발달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서발달이 기본이 되서,
사회성이 발달이 되고,
그리고 나서,
인지 발달도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너무 일찍 학습교육을 먼저 시키면,
뇌발달에 문제가 발생이 됩니다.
이 시기에 너무 일찍 학습교육을 먼저 시키면,
뇌발달에 문제가 발생이 됩니다.
왜 우리 아이들한테는 엄마가 필요할까요?
왜 아이들은 엄마 옆에 있으려고 할까?
이것에 대한 연구가 있습니다.
2차대전시 ‘르네 스피츠 박사의 모성박탈/고아 연구’
-연구배경: 2차 세게대전 후(1940년대) 부모 잃은 아이들이 많아졌음
-연구과정: 엄마를 잃고 4개월 이상 보호시설에서 자란 아이들 관찰
삼시세끼 먹이며 잘 돌봄.
엄마의 정서적 반응과 돌봄을 받지 못한 보육시설 아이들은 대부분 2살이 되기전 사망
살아남았더라도 무기력하고 지능과 정서 발달에 장애가 있었다.즉, 정서적으로 돌보아주는 엄마가 없으니 많은 수는 2살 이내에 사망하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많은 수가 발달장애 발달지연을 겪었습니다.
뇌사진을 보면 붉은 색은 뇌가 기능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아이들이 기능이 떨어져 있고 구조도 변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왜 엄마가 필요할까요?
왜 엄마곁에 있으려고 할까요?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살기위해서입니다.
아이들은 엄마 또는 엄마처럼 해주는 사람과 정서적인 교감이 없으면 생존을 못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영spirit”이 “하느님의 영Spirt” 을 향하지 않으면 “마음”이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의식이 없어지고 세상적 가치에만 향해있게 됩니다.
결국 마음이 이기적인 나를 향하게 되지요.
“영spirit”의 세계인 마음이 이기적인 나를 향하니, “혼soul”의 세계인 “생각”도 이기적인 나를 향하게 됩니다.
“혼soul”의 세계인 뇌발달을 보면 변연계(무의식적 자아,정서), 전두엽(사회적 자아, 사회성), 대뇌피질(자아, 인지성) 순서입니다.
하느님 없이 교육된다면, “’나’라는 영spirit”이 자신을 향하게 되어서,
아이들에게 제일 발달이 빠른 “무의식적인 나(변연계)”가 이기적인 나를 먼저 배우게 됩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 지구사랑”인데 그것을 엄마로 부터 정서적인 교감을 통해서 잘 배우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무의식적인 나(변연계)에는 오케스트라 악기와 같은 감정들이 있어서 웅장하게 울려퍼지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도록 사랑으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다음 순서가 사회적 자아(전두엽)의 발달입니다.
소통과 공감을 해주는 것을 엄마나 엄마와 같은 존재로 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시제는 성공하려면 사회적 자아인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없으면 이 마저도 인간적인 차원으로 떨어지겠지요.
끝으로 인지능력인 자아(대뇌피질)의 발달입니다.
요즈음 부모들은 아이의 정서(변연계), 사회성(전두엽)에 앞서서 공부(인지능력, 대뇌피질, 자아)를 먼저 가르키려 하지요.
아이들이 극도로 이기적이되고, 정서적으로 공감이 안되고 사회적으로 대처능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왕따를 시키기도 왕따가 되기도 하지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군중들에게는 하느님을 전하는 어머니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자신을 향함으로써, 이기적인 삶으로 떨어지고, 보이고 변하는 가치를 살다보니 위선전인 삶이 된 것이지요.
이러한 악의 한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구원을 이끌어 내십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느님과 이웃 사랑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외면당하고, 지구 사랑이 파괴와 발전으로 무너져도,
하느님은 당신의 선을 끌어내실 수 있다는 희망의 메세지가 우리의 가정과 경제 사회 정치 그리고 문화 안에서 우리의 작은 실천과 사랑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실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악이 만연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창조를 과정으로 두셨고, 지금도 계속 창조가 일어나며,
전능하신 분께서 악을 허락하신 이유가,
그 악을 통해서 우리가 회개와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섭리와 주님의 능력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방법?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 지구사랑을 위해
나의 작은 실천을 해보는 것입니다.
<Luke11,42-46>
42 Woe to you Pharisees! You pay tithes of mint and of rue and of every garden herb, but you pay no attention to judgment and to love for God. These you should have done, without overlooking the others.
43 Woe to you Pharisees! You love the seat of honor in synagogues and greetings in marketplaces.
44 Woe to you! You are like unseen graves over which people unknowingly walk."
45 Then one of the scholars of the law said to him in reply, "Teacher, by saying this you are insulting us too."
46 And he said, "Woe also to you scholars of the law! You impose on people burdens hard to carry, but you yourselves do not lift one finger to touch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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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다섯 가지 습관
1.플래너의 자질이 있다
명문대에 합격한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부터 살펴보자. 이들은/ 실천 가능한 장단기 학습 계획을 먼저 세운다. 읽을 책을 미리 정하고 습득해야 할 정보를 정리한 다음, 언제까지 어느 정도의 학습을 해야 하는지 계획한다. 그리고 계획대로 실천한다.
2.실패를 가장 큰 공부로 삼는다
누구도 100% 정답을 써낼 순 없다. 그래서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사람은 실패에 좌절하는 대신 실패 요인을 분석하고 다음번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대비한다.
반면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답이 틀렸을 때 어떤 문제가 틀렸는지, 정답은 어떻게 찾아볼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으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실패의 요인을 찾아내야 한다. 실수를 피하는 방법을 깨닫게 하는 것, 실패가 때로는 가장 큰 공부가 된다.
3.끊임없이 ‘왜?’라고 질문한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책을 보거나 강의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갸우뚱한다. ‘아! 그렇구나’ 하기 전에 ‘왜?’ 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질문이 없다. 아는 게 없으니 궁금한 것도 없다. 모르는 게 부끄러워 질문하기를 주저하기도 한다.
공부는 모르는 것을 알아 가는 과정이다. 모르는 게 왜 부끄러워?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 물어라. 요즘은 인터넷이나 전화로 질문할 수 있는 창구가 많다. 모르는 것은 그냥 넘어가지 말고 질문해서 답을 찾아내자. 그게 공부다. 이해의 시작은 ‘아!’가 아니라 ‘왜?’라는 것을 명심하자.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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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자기 행실이 선한지 악한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나요?
인간에게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과 양심이 있어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1749-1754, 1757-1758](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43)/
환경과 인간을 파괴하는 거짓 자유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참된 자유를 함께 배우는 학교를 세우며, 우리 삶을 통해서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과,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참된 자유가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다른 이들에게 보여줍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2006년 셩령 강림 대축일 전야 미사)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습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기쁨과 희망>)
다음과 같은 기준들은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더 잘 구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1)내가 선한 의도로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는 좋은 의도로 은행을 털었다 할지라도, 은행 강도는 언제나 나쁜 짓입니다.
2)내가 하는 행위가 실제로 선한 일일지라도 악한 의도로 행한다면 그 행위 전체는 악한 것이 됩니다. 만약 어떤 할머니를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돕는다면 그것은 분명 착한 일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집을 도둑질하기 위해 도운 것이라면, 할머니를 도운 행위 전체는 나쁜 짓이 되고 맙니다.
3)행위하는 상황이 행위에 대한 책임을 덜어 줄 수는 있지만, 그 행위가 지닌 선하거나 악한 속성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가 먼저 자녀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녀가 자기 어머니를 폭행하는 것은 예외 없이 나쁜 행위입니다.->295-297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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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인간 행위의 도덕성
->1749 인간은 자유로써 도덕적 주체가 된다. 인간이 의도적인 행동을 할 때, 그는 이를테면 그 행위의 주인이 된다. 인간의 행위, 곧 의식의 판단에 근거하여 자유로이 행한 행위들은 도덕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것들은 선하거나 악한 것이다.
I.도덕성의 근원
->1750 인간 행위의 도덕성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 달려 있다.
-선택된 대상.
-의도하는 목적이나 의향
-행위의 정황.
대상과 의향과 정황은 인간 행위의 도덕성의 ‘근원’, 곧 구성 요소가 된다.
->1751 선택된 대상이란 의지가 의도적으로 지향하는 선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 행위의 질료이다. 선택된 대상은 이성이 인지하고 그것이 참된 선에 부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함에 따라서 이루어진 의지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규정한다. 도덕성의 객관적 기준들은 양심에 따라 입증된 선악의 합리적 질서를 일러 준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62)/
->1752 의향은 대상과는 대조적으로 행위의 주체 편에 자리잡고 있다. 의향은 행위의 자발적 근원과 가까운 것이면서, 목적을 통해 그 행위를 결정짓기 때문에 행위의 도덕성을 평가하기 우위한 핵심 요소이다. 목적은 의향의 첫 번째 귀결점이며 행위가 추구하는 목표를 가리킨다. 의향은 목적을 향한 의지의 움직임이며 행위의 귀결점과 관련된다. 의향은 의도된 행동이 기대하는 선을 지향한다. 의향은 우리의 개별 행위들의 방향을 잡아 주는 데 머물지 않고, 여러 행위들을 동일한 목적으로 향하게 할 수 있고, 또 삶 전체를 궁극적 목적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봉사는 이웃을 돕는 것이 목적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모든 상대방의 호의를 얻거나 또는 사랑하기 위해서 봉사를 하는 경우처럼, 동일한 행동도 여러 가지 의향을 지닐 수 있다.
->1753 선한 의향(예를 들어 이웃을 돕는 것)은 그 자체로 무질서한 행동(거짓말이나 비방)을 선하게 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국민을 구하는 합법적 수단으로 죄 없는 사람을 단죄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반대로, 그 자체로는 선한 행위일 수 있지만(자선 행위와 같은 것)(마태6,2-4 참조) 나쁜 의향(예컨데 허영)이 개입할 경우에 그런 행위는 악한 행위가 된다.
->1754 결과들이 포함되어 있는 정황은 윤리적 행위의 부차적 요인이다. 정황은 인간 행위의 윤리적 선악을 가감시킨다(예를 들어 도둑질한 돈의 액수). 또 정황은 행위자의 책임도 가감시킨다(죽음의 공포 때문에 저지른 행위 등). 정황 자체가 행위의 도덕적 특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정황은 악한 행위 자체를 선하게 하거나 정당화할 수 없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63)/
간추림
->1757 대상과 의향과 정황은 인간 행위에 도덕성의 세 가지 ‘근원’이다.
->1758 선택된 대상은 이성이 그 대상의 선악을 분별하여 판단함에 따라 의지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규정한다. pH(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64)/
IV.창조의 의미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신다
->295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지혜9,9 참조). 그러므로 세계는 어떤 필연성이나, 맹목적 운명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피조물들을 당신의 존재와 지혜와 선에 참여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세계가 생겨났음을 우리는 믿는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만물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생겨났고 또 존재합니다.”(묵시4,11). “주님께서 하신 일이 많고도 많건마는, 그 모든 것을 지혜로써 이룩하시었나이다”(시편103[104],24). “주님게서는 온갖 것을 선으로 대하시고ㅡ 일체의 조물들을 어여삐 여기시나이다”(시편144[145],9).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창조하신다.
->296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위하여 이미 존재하는 아무 것도 아무런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1: DS 3002 참조). 창조가 신적 실체의 필연적인 유출은 더욱 아니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에 대하여, cc. 1-4: DS 3023-3024 참조). 하느님께서는 자유로이 ‘무에서’ 창조하셨다(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제2장, ‘가톨릭 신앙에 관하여’: DS 800; 제1차 바티칸 고의회, Dei Filius,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에 대하여, c. 5: DS 3025)
“하느님께서 이미 존재하는 물질로 세계를 만드셨다면 특별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장인(匠人)도 재료를 주면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능은 바로 무로부터 당신께(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44)/
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만드신다는 데서 드러납니다(아티오키아의 성 테오필루스, ‘아우톨리쿠스에게’, 2, 4: SC 20, 102(PG 6, 1052).
->297 성서는 ‘무에서’ 창조하신다는 신앙을 가능성과 희망이 넘치는 진리로서 증언한다. 이를테면 일곱 아들의 어머니는 그 아들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이렇게 북돋아 준다.
“너희들이 어떻게 내 뱃속에 생기에 되었는지 나도 모른다. 너희들에게 목숨을 주어 살게 한 것은 내가 아니며, 또 너희들의 신체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너희들은 지금 너희들 자신보다도 하느님의 율법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사람이 출생할 때에 그 모양을 만들어 주시고 만물을 형성하신 창조주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하늘과 땅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생각하지 마라. 인류가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2마카7,22-23.28).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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