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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9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사도 5,17-26
복 음 : 요한 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종종 기도가 너무 어렵다는 분을 만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 미사’ 참석하는 것도 힘든데,
평상시에 시간을 내어 기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정말로 힘든 일일까요? 물론 기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마음의 평화도 얻고, 자기 삶을 정리할 수 있어서 분명히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기도하기까지가 너무 힘들다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냐고 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정의하지요.
아주 친한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절친’이라는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만났고,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까?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한 마디의 대화도 하지 않고서
‘절친’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계속 만나고 대화해야지만 가능합니다. 하느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사를 한 뒤에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 양치질을 하실 것입니다. 원래 인류는 양치질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양치질한 지는 10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양치질합니다.
양치질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더럽다고 피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본인이 찝찝해서 못 견딥니다.
하다못해 껌이라도 씹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습관이 되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기도가 어려운 이유는 습관이 되지 않아서입니다.
양치질이 인간 치아 건강에 큰 도움을 준 것처럼,
우리 삶에 기도는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습관적이라도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을 만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하십니다(요한 3,16 참조).
따라서 주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데 집중하는 습관이 가장 좋은 것이며
우리에게 꼭 필요한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습관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습관을 들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 3,19)라고 하십니다.
빛이신 주님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어둠의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면서 그 어둠의 길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빛으로 나아가면서 주님의 뜻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좋은 습관을 나의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양치질처럼 당연히 해야 하는 기도와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는 사제수품 성구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라는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처신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성찰은 합니다.
우리가 가슴에 품어야 할 성경 구절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삶이 풍요로워지리라 확신합니다.
그중에 하나로 오늘 성경 말씀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비록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죄가 있든 없든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 ‘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 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 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된 것이 심판입니다.
하늘로부터 또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보다 무서운 심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부터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던 것은 1995년이었습니다. 어느덧 28년 전입니다.
해외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였습니다.
교우들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있었습니다.
교구에서는 사제들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의 허락을 받고 성지순례를 신청했습니다.
친한 동창신부님들도 8명이 함께 신청했습니다.
해외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고, 성지순례에 대한 이해도 적었습니다.
성지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공생활을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곳(Holy Land)을 뜻합니다.
베들레헴, 나자렛, 갈릴래아, 가파르나움, 예루살렘과 같은 곳입니다.
교회가 시작되면서 사도들이 선교한 곳, 교우들이 순교한 곳,
성인과 성녀들이 살았던 곳(Holy Place)도 성지가 되었습니다.
해외에도 성지가 많지만, 우리나라에도 성지가 많습니다.
교우들이 순교한 곳, 순교한 교우들이 묻힌 곳,
성인과 성녀들이 신앙을 증거한 곳들이 있습니다.
절두산, 새남터, 미리내, 솔뫼, 치명자산과 같이 한국에서 성지가 많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왜 성지순례를 가는 걸까요?
저는 성지순례의 목적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날 과음을 했거나 과로를 했으면 얼굴의 모습이 까칠할 것입니다.
직장의 일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자녀의 문제로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할 것입니다.
분노와 불만이 있다면 화난 모습일 것입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와 충분한 수면을 취하면 생기가 가득한 모습일 것입니다.
감사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얼굴은 환한 미소가 보일 것입니다.
나눔과 희생으로 자선을 베풀면 온화한 얼굴이 될 것입니다.
성지라는 거울을 통해서 나의 신앙을 돌아보는 것이 성지순례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간다는 생각으로 성지순례를 가면 성지순례의 목적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듬뿍 안고 성지순례를 가면 성지순례를 왜 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가기에 앞서서 미리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9일 기도를 하면서 특별한 기도 지향을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왜 성지순례의 목적을 이야기할까요?
28년 전에 저는 거울을 보는 심정으로 성지순례를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미리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9일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동창신부님들과 함께 간다는 즐거움에 성지순례의 목적과 의미를 망각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배를 타면서 주변의 경치는 보았지만,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의 마음은 몰랐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던 예수님의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왜 그리 믿음이 약하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다.
수위권 성당에서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은 찍었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베들레헴 주님 탄생 성당에서 경배하면서
저는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께 봉헌할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서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기보다는,
베로니카처럼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기보다는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23년 성지순례를 시작하면서 성지라는 거울에 비치는 저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의 간절함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잡아보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갔던 자캐오처럼
주님의 발자취를 찾아 한 걸음씩 걷겠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처럼 저도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부활의 영광으로 올리셨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하면서 베들레헴 성당에 있는 글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려고 합니다.
“당신이 이곳에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나가십시오.
당신이 이곳에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나가십시오.”
주님! 이번 성지순례에 함께 하시어 순례에 함께한 모든 이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 나아가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 하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그런데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 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와 같은 것들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 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 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이며,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받게 되지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줄곧 그분의 마음을 상해 드렸는데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을 위해 그분은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귀중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이 헐벗고 나그네 되었을 때도 우리는 못 본 체했고,
무엇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오신다.
첫 번째 오심은 이미 지났고 지금 계속되고 있으며, 두 번째는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이 첫 번째 오심은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두 번째 오시기 전까지는 심판하시는 대신에 용서를 베푸시며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8절)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심판받을 필요가 없고,
믿지 않는 자들은 불신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판은 이미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판받을 사람들은 하느님께 충실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유혹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기도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은 이러하다.
그들은 어둠을 떠나 빛으로 달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다.
빛이 자신에게 오는데도 빛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신이 눈이 먼 것을 빛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원이나 멸망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21절)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선행이다.
선은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선은 당연히 드러나며 그것을 기뻐한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나아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빛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선행하고, 단식하고 베풂으로써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바른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다.
여기서 올바른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감사드리며 기쁘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며, 빛의 자녀로 영광의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즉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빛과 어둠이 교차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이 말씀은 성경에 담긴 구원 역사의 한 줄 요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믿는 이들을 "멸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죽음"에서 "구원"으로 옮겨 주십니다. 즉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해 주십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요한 3,21).
진리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지요(요한 14,6).
진리를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르며 실제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분의 존재와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빛에서 나신 빛, 참 빛이십니다. 그분께는 어둠이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면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닙니다.
빛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우리도 빛을 받아 빛에 흡수됩니다.
우리 안에 어둠은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습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요한 3,19).
슬프게도 세상은 빛보다 어둠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어둠을 더 선호하지요.
말하자면 죄와 악, 미움과 증오, 차별과 소외, 이기심과 분열 쪽으로
더 쉽게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지만,
여간 정신 차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사도들이 등장합니다.
"밤"(사도 5,19)과 "감옥"(사도 5,18)은 어둠의 영역입니다.
또, 대사제와 동조자의 "시기심"(사도 5,17) 역시 어둠의 힘이지요.
반면 "주님의 천사"(사도 5,19), "이른 아침"(사도 5,21), "성전, 생명의 말씀"(사도 5,20)은
빛의 영역입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라." (사도 5,20).
천사는 사도들을 풀어주면서 멀리 도망가라거나 깊이 숨으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성전 한가운데 서서 말씀을 전하라고 보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을 잡아 가둔 적대자들의 눈에 띄기 쉬운 곳으로 다시 보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탈옥이나 탈출이 아니라 복귀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원래 있어야 할 제자리인 빛으로 되돌아가 말씀을 선포합니다.
결국 사도들은 다시 적대자들에게 소환되지요.
어둠이 빛을 삼키려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도들은 아무리 큰 시련과 박해가 닥친다 해도
굴하지 않고 거듭거듭 빛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들 안에 더 이상 어둠의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실존 안에도 빛과 어둠이 공존하지요.
실존적 어둠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을 닮아보려 부족한 영혼을 일으켜 까치발을 드는 사이
어느새 우리에게 빛이 찾아올 것입니다.
백 번 어둠으로 고꾸라져도 백한 번째에 다시 일어나 빛을 향하면,
언젠가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우리 존재 자체가 빛과 하나 될 것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이 말씀이 너무 추상적이고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아주 작고 소소한 일부터 구체적으로 하나씩만 해보아도 좋겠습니다.
세포에 속속들이 박힌 어둠을 떼어내는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기 어려우니까요.
어둠에 무너지거나 자지러지지 않고 겸손하고 끈기 있게 빛을 향하는 사이
어느새 성큼 빛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자리할 것입니다.
빛이 우리를 환하게 비추다 못해 우리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빛이 될 것입니다.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마리문 모 수녀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21)
진리를 아는 것은 쉽지만,
진리를 실천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매 순간 느낍니다.
하느님의 진리가
나의 입으로
나의 손으로
나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만큼 어렵고 힘겹지만,
그 무게를 이겨내고
빛으로 나아갔을 때,
하늘을 바라보며
당신 덕분이라고
환하게 미소 지을 날을 희망합니다.
[출처] 요한 3,16-21 부활 제2주간 수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