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상혁 대중문화부
"호적에도 못 오른 게." 여자가 쏘아붙이자 다른 여자가 대꾸한다. "애도 못 낳은 게." SBS 수목드라마 '상속자들'에 나오는 제국그룹 회장의 본처와 '첩(妾)' 사이의 대화다.
첩이 지상파 TV 드라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난달 종영한 MBC '스캔들'의 김혜리는 1980년대 톱여배우이자 건축재벌 박상민의 첩으로, KBS '예쁜 남자'의 양미경도 MG그룹 회장의 아들을 낳은 첩으로 등장했다. MBC '금나와라 뚝딱'에선 아예 한 집에 두 명의 첩을 뒀다.
드라마 속 축첩(蓄妾)은 이미 제재를 받은 바 있다. 지난 2011년 KBS '로맨스 타운'은 본처와 첩이 한집에 산다는 설정 등 가족·사회 질서에 어긋나는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시청자에 대한 사과 및 관계자에 대한 징계'를 받은 것.
그럼에도 엄연한 일부일처제 사회에서 현행법 위반인 '축첩'이 버젓이 드라마에 출몰하는 까닭은 뭘까. 전문가들은 "이야기 전개가 쉽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첩과 함께 서자(庶子)가 등장하면서 출생의 비밀, 집안 내의 권력 쟁투가 상투적·기계적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들이 모두 재벌가의 얘기를 다루는 만큼 '첩이라는 소재는 권력·돈으로 대표되는 그 세계에 대한 상징(이인철 변호사)'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우려도 상당하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김은실 교수는 "사랑이 아닌 야욕 때문에 남성에게 속박되는 비뚤어진 여성상이 굳어질 수 있다"고 했다. 대사에 '첩'과 '서자'가 난무하는 드라마를 보고 자란 미래 세대가 축첩을 이미 오래전 폐지된 악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이 왕조시대냐"는 시청자들의 비판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