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칼럼] 김혜진 '경청'에서 보는 듣지 않으려는 사회
민병식
김혜진(1983 ~ ) 작가는 대구 출생으로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치킨런'으로 등단,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집으로 ‘어비’, ‘너라는 생' 등이 있고, 장편소설로 ’중앙역‘, ’딸에 대하여‘등이 있다. 중앙장편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대산문학상, 2021년 2022년 젊은 작가상을 수상한바 있다.
김혜진 작가
주인공 임해수는 촉망받는 심리상담가로서 시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명 배우에 대해 언급을 했다. 몇 달이 지나고 그 배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매스컴에서 배우의 죽음을 방송에서 한 해수의 발언 때문이라고 떠들어 대고 많은 사람들이 해수를 악플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해수를 향한 비난이 끊이지 않자 직장에서는 해수에게 권고사직을 요구했다 . 이 일 때문은 아니지만 남편과도 이혼을 했고 일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해수는 기자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의 억울함을 담은 절박한 편지다. 기자 뿐만 아니라 변호사, 회사 동료, 상사, 죽은 배우의 아내, 친구 등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내가 방송에서 한 말은 다른 출연자들도 했던 것이라고,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애써 그 상황을 변명했다. 그러나 그편지는 그냥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어차피 그들은 해수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쓸데없는 편지쓰기와 동네 산책이 전부다. 그런데 산책도 어렵다. 해수를 알아보는 사람 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 네이버
어느 날 해수는 심하게 다친 들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데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은 해수 뿐만이 아니었다. 또래보다 덩치가 큰 세이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세이는 고양이에게 순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릴없는 일상에서 고양이 순무와 세이를 기다리는 날들이 많아진다. 세이를 기다리다가 학교 안까지 들어간 해수는 피구연습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세이를 발견하고는 그냥 모른 척 해준다. 해수는 순무를 병원에 데려가 치료하고 싶다. 그러나 사람을 무서워하며 피하는 순무를 잡기는 꽤 어려웠다. 해수를 돕는 세이와 함께 순무를 억지로 잡지 않고 스스로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세이와 순무를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지면서 편지를 쓰는 시간이 점차 줄어든다. 어느 날 순무가 다가와 해수에게 몸을 비빈다. 그렇게 세이가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억지로 묻지 않고 스스로 말하길 기다리면서 순무를 치료하면서 해수는 옆에서 가만히 바라봐 주고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아픈 마음 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가며 자신의 마음도 치유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말을 전하려고만 하지 상대들의 말에는 경청을 하지 않는다. 특히 sns상에서는 더 그렇다. 전후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판단해버리는 매스컴, 그것을 아무런 검증없이 받아들이고 악플을 쏟아붓는 대중 들, 거기에 편지로 어떤 변명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어차피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바 대로만 움직이지 절대 편지의 내용을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수는 세이가 친구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고 조용히 지켜봐 준 끝에 소설의 끝부분에는 드디어 세이가 해수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경청이 꼭 귀로 듣는 것만은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곁에서 지켜보며 기다리는 것도 경청이다. 앞을 다투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불균형적인 과잉소통의 시대에 작가는 타인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아예 귀를 닫아버린채 내 말만 소리 내어 읊어대고 그 말에 상처를 입든 말든 아랑곳 하지 않는 폭력에 너무 익숙한 현대인의 모습을 꼬집고 있다. 나는 어떠한가. 상대의 감정과 말은 필요없고 오로지 나만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또 다른 주인공을 만들고, 세이를 만들고 순무를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확성기는 아닐지 돌아볼 일이다.
사진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