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440) "탁란(托卵)"
입력2023-02-15 18:52 수정2023-02-17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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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못 낳아 쫓겨난 화실댁
금강산 초입에 주막 차리는데
세상 얌전하고 요조숙녀인 화실댁이 시집인 권 대감 댁에서 쫓겨났다. 3년을 기다렸는데도 아이를 못 낳는 석녀(石女)로 낙인찍힌 것이다.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사랑방으로 가 시아버지 권 대감에게 큰절을 올려 작별 인사를 했다. 눈물을 훔친 권 대감이 묵직한 전대를 밀어줬다. 표독스러운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조우하지 않겠다고 아침 수저를 놓기 바쁘게 마실을 가고 없었다.
별당에서 과거 공부를 하는 신랑 권 초시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그는 화실댁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고 오래오래 흐느꼈다. 화실댁은 울지 않았다. 입을 옥다물었다. 속은 숯이 되었고 눈물샘은 말라붙어 나올 눈물도 없었다.
백일기도를 올렸고 평소에도 의지했던 유화사 주지 스님께 작별 인사를 올린 뒤 승복 한벌을 얻어 입고 삿갓을 쓰자 영락없는 남자 중 탁발승이 되었다. 될 대로 되라지, 인생이 별건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화실댁은 체념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조선 땅에 태어나서 금강산도 못 가보고 죽을 수는 없는 일이다.
들판에는 아지랑이 아른거리고 햇살은 잠뿍 내려앉아 대지를 흔들어 깨운다. 산 넘고 물 건너 금강산을 향하여 걷고 또 걸었다. 소백산 자락, 죽령고개 마루에 오르자 마주 보는 시커먼 도솔봉에 그믐달이 걸리고 주막 초롱이 바람에 흔들린다.
“스님, 어쩌지요. 방이 꽉 찼는데.”
할 수 없이 합방했다. 이목구비가 훤칠한 남자가 개다리소반을 차고앉아 국밥에 자작 술을 하고 있다가 얼른 술잔을 놓고 합장했다. 벽에 걸린 도포나 큰 갓으로 봐 막돼먹은 장돌뱅이가 아닌 게 다행이다.
“스님, 곡차 한잔 들어보세요. 세상만사가 불심으로 넘쳐납니다.”
에라, 모르겠다. 널름 술잔을 받아 한잔 쭉 들이켜고 나니 간땡이가 부풀어 올랐다. 화실댁이 너비아니 안주 한접시에 청주 한 호리병을 샀다.
이 싱거운 남자가 술잔을 계속 비우더니 파락호 본색을 드러냈다. 부잣집 아들로 과거에 계속 낙방하자 노름꾼에 오입쟁이에 술주정뱅이가 되었다. 자신은 동기(童妓) 머리도 얹어줬고 대갓집 안방마님도 안아보고 심지어 무당까지 품어봤는데 단 한사람, 여승을 안아보지 못했다며 화실댁을 찬찬히 훑어봤다.
산전수전 다 겪은 파락호가 어설프게 승복으로 남장을 한 곰살스러운 여인을 못 알아볼 턱이 있나. 화실댁도 은장도를 빼 들지 않았다. 그날 밤 화실댁은 닳고 닳은 오입쟁이로부터 기상천외한 희롱을 당하고는 금강산 구경을 하고 용소에 몸을 던지려던 생각을 거둬들였다. 양반집 며느리가 아니어도 살 만한 인생이란 걸 깨달았다.
몇날 며칠을 걸었나. 마침내 꿈에 그리던 금강산 구경을 했지만 유점사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거간꾼을 찾아 금강산으로 가는 초입마을에 아담한 집을 사서 주막을 차렸다.
선비도 안방으로 끌어들이고 한량도, 땡추도, 심마니도 끌어들여 온갖 남자 맛을 다 봤다. 몇달이 지났는데 몸에서 이상한 조짐이 드러났다. 헛구역질이 나고 유자가 먹고 싶어졌다. “그럴 턱이 없지. 나는 석녀야, 석녀!”
저잣거리 의원을 찾아갔더니 청천벽력 회임을 했다는 것이다. 그날 밤 화실댁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가을에 화실댁은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다. 어느 날 저녁에 아들의 아비인 파락호가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고 꼴에 양반 기침을 어험어험 내던지며 마당에 들어섰다.
찬모할매가 업고 있던 달덩이를 쑥 뽑아서 번쩍 치켜올렸다가 가슴에 품어 안았다. 그날 밤도 요란하게 보내고는 아침 수저를 놓자 파락호는 바람처럼 휑하니 사라졌다. 기둥서방처럼 주막에 눌러앉아 헛기침이나 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게 좀 미안했다.
그럭저럭 좋은 세월이 흐르는데 시댁이 어찌 됐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주막집을 소개해준 거간꾼을 불러 고향 풍기에 내려보냈다. 한달 만에 돌아온 거간꾼으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신랑 권 초시도 새로 들인 재취로부터 아들을 얻어 금이야 옥이야 집안이 들떠 있다는 것이다. 풍기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쫄딱 망한 양반집 홍 진사네 셋째딸은 열다섯살 때부터 몰래 보부상 총각과 눈이 맞아 물레방앗간에서 수없이 치마를 벗다가 부자 양반집 권 대감댁 재취며느리로 들어가 보부상의 아들을 낳아 탁란(托卵)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권 대감댁에서는 남의 씨를 금이야 옥이야 키운다는 것이다. 웃음거리가 되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