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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3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 사도 2,14.22ㄴ-33
제2독서 : 1베드 1,17-21
복 음 : 루카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폭력은 신체적 폭력도 있지만 정신적 폭력도 있습니다.
이 둘 중에서 어떤 폭력이 더 무서울까요?
사실 뇌에서는 똑같은 크기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신체적 폭력을 당할 때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는데,
인간관계에서 거절당하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똑같은 부위가 활성화됩니다.
이렇게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은 똑같습니다.
둘 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이레놀 등의 진통제를 먹으면 이별의 고통이나
왕따로 인한 괴로움도 훨씬 완화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정신적 폭력도 신체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적 폭력으로 인간관계가 깨질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우리에게 이는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을
뇌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큰 아픔을 주었다고 다시는 안 보겠다고 다짐해보지만,
마음은 너무나 불편하지 않습니까?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아픔과 상처를 주신 것처럼 책임을 몰면서
주님을 믿지 않으며 멀리하겠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과연 몸과 마음 모두 편안할 수 있을까요?
그럴수록 주님과 함께해야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침통한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고향 엠마오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예수님을 향해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루카 24,18)라고 말하면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만이 예수님을 경멸하기 위해 쓰던 호칭이었지요.
그만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실망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며 고향 엠마오로 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믿음이 없으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그러나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60스타디온을 함께 걸었습니다.
스타디온은 그리스식 길이 단위로 계산하면 약 11.5km 정도입니다.
걸어서 두 시간 정도의 거리지요.
두 시간 동안이나 함께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 시간을 믿음이 굳어지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즉,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알아보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 많은 고통과 시련을 주는 육체적 정신적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라면 즉,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다면
그 폭력의 상황에서도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가장 힘센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복음 루카복음 24장 13~ 32절은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 모든 기대를 걸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포기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시련이 닥쳐올 때 쉽게 좌절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두 제자가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걸음은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동행합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길을 따라 함께 걸어도 좋습니다.
두 사람을 뒤따라 걷던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고는 멍한 표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힘없이 멈추어 서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그들은 며칠 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의
깊은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무감과 슬픔에 잠긴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십시오.
스승을 잃고 슬픔과 허탈감, 울분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느끼셨을까요?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들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힘이 있는 예언자’라고 말하는 클레오파스의 속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클레오파스는 분명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었던 스승은 십자가형에 의해 죽음을 달했습니다.
큰 능력이 있는 예언자인 줄 알고 따랐다가 처참하게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절망에 빠진 클레오파스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차분하게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길을 가면서 성경 구절을 인용해 참 구세주가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고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상기시켜 주십니다.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긴 인생 여정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은 가만히 다가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주시는 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보라고 주님은 속삭여 주십니다.
오히려 그 일이 주님의 오묘한 계획안에서 일어났음을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끄시면서 깨닫게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주시면서
예수님은 비로소 당신의 존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열매입니다.
기도는 바쁘게 가던 길을 멈추고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지요.
이 기도의 시간에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빵을 떼어주십니다.
그제야 우리의 눈이 열리게 되고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 삶의 여정에 함께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분이 말씀을 나누어주시는 순간 우리 삶은 충만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삶의 의미를 하나씩 풀이해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은 뜨겁게 차오릅니다.
우리의 삶이 영적으로 차오르는 순간 주님은 비로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제 두 제자가 느꼈을 감동의 순간에 머무르십시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함께 길을 가며 새로운 삶을 열어준 사람이
예수님임을 깨닫게 된 그들은 자신들이 느꼈던 감동을 되새깁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빵을 떼어주실 때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빵을 떼어주시는 모습에서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을까요?
그것도 며칠 전 마지막 만찬에서 빵을 떼어주시면서
“이는 내 몸이다”라고 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기도 안에서 어떤 깨달음이 옵니까?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떤 강한 느낌이 오면 거기에 머무십시오.
제자들은 빵을 떼어주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예수님이 당신의 전부를 나누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빵이며 사랑의 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지만 늘 함께 계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심을 느끼며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부활하셔서 자기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실의에 빠져 떠나오던 길을 그들은 환희에 젖어 다시 달려갑니다.
기쁨에 가득 차 힘차게 걸음을 내딛는 두 제자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기쁨 안에 머무십시오.
그들은 공동체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 이미지는 새로운 공동체, 곧 교회의 새로운 시작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길을 떠났고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이제 공동체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이제 감사한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삽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3년 전입니다. 코로나로 모든 성당의 문이 닫혔을 때입니다.
저는 가톨릭방송을 통해서 부활 제2주와 3주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때의 강론을 읽어 보니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잠시 그때의 강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언제든지 찾아가서 기도할 수 있었던 성당의 문은 닫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던 미사가 중지되었습니다.
성가를 부르고, 강론을 듣던 신자들이 그립습니다.
미사가 시작되었지만 늦게라도 성당 문을 열고 들어오던 신자들이 그립습니다.
항상 먼저 성당에 오셔서 묵주기도를 하시던 어르신들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주일 그토록 혼잡했던 성당 마당의 주차장은 텅 비어있습니다.
차량 안내를 맡아서 수고하셨던 형제님들도 그립습니다.
농구장에서 뛰어놀던 학생들도 그립습니다.
주일 미사 후에 음식을 준비하던 자매님들도 그립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싶었던 새 사제들은
더욱 신자들이 그리울 겁니다.
신자들의 마음도 비슷할 겁니다.
고백성사를 볼 수 있었던 시간이 그리울 겁니다.
강론을 듣고, 성체를 영하던 순간이 그리울 겁니다.
미사 후에 제의를 입고 신자들과 담소를 나누던 사제가 그리울 겁니다.
한 달에 한 번 봉성체를 하였던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은
성체를 모시고 오던 사제가 그리울 겁니다.
본당 단체 모임 중에 함께 하였던 사제들이 그리울 겁니다.
함께 웃고, 함께 고민하며 문제를 해결하였던 시간들이 그리울 겁니다.
사제들이 준비하였던 피정, 특강이 그리울 겁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시간이 그리울 겁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강복과 파견을 하였던 시간이 그리울 겁니다.
다시 만나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환하게 웃는 시간이 오면 좋겠습니다.”
3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백신을 맞았습니다. 치료약도 생겼습니다.
아직은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우리는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성경 말씀처럼 코로나 팬데믹은 지나갔습니다.
3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저는 다시 가톨릭방송 미사를 이렇게 봉헌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부르시어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먹고 마시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고,
수많은 표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배불리 먹이셨고,
남은 광주리가 12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팬데믹으로 모든 신앙 활동이 멈추었던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던 예수님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늦은 밤에 체포되었습니다.
가야파와 헤로데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종려나무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님은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썼고, 채찍으로 맞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표징과 기적을 보여주었던 권위와 권능을 볼 수 없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는 실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절망과 고통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던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비참하게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는 이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자리에 없던 토마사도에게도 나타나셔서
“토마야 네 손으로 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토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 같았던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들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나 나누어 주셨을 때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그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 마음 안에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이웃에게 드러내고 증거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전례에서도 파스카의 의미를 신앙의 빛에 비추어 알아들으려 하는
노력하고 그 부활 체험을 증거하여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즉 성령강림이 주님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한다.
즉 주님이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 올라가 성령을 부어주실 수 있었다는 말이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의 도달점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성경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알아듣고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예로니모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Comment. in Isaiam. Prol., PL 24,17; 계시 27)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는 구약성경의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권위 있는 해석을 하고 계시다.
부활 날, 두 제자가 실망에 가득 차 엠마오로 가면서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어떤 낯선 사람이 동행하며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때 제자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바가 모두 무너져 침통하다는 말을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형당함으로써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흘째나 되었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의미이다(21절).
두 제자와 다른 모든 사람이 어떤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나타나고 있다.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하였지만, 십자가의 일은 정반대의 일이었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성경이 어떻게 예언하였는가를 깨우쳐 주신다(25-27절).
그러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였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 성경의 예언은 하느님의 옳으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인들과 제자들은 성서의 말씀을 왜곡하고 편리하게 해석하여
참 의미를 외면함으로써 멋대로 해석하였다는 것을 꾸짖고 계신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성경의 참된 의미를 되찾아 주신다.
이렇게 하여 성경의 본래 의미가 되살아난다.
이렇게 신앙의 메시지로서의 성경의 말씀은
오직 믿는 마음을 통해서만이 그 풍부한 의미를 다 드러낼 수 있다.
예수께서 성경에 관해 설명해 주실 때에 두 제자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한다.
그들은 그 낯선 동행인이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이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경을 받아들일 때,
성경은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서와같이 가장 권위 있는 주석가가 될 것이다.
또한, 성경과 더불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표지가 바로 성체성사이다.
두 제자에게 낯선 여행자가 초대되어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체성사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절).
성체성사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31절).
제자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았다.”(35절) 한다.
이것으로 믿음은 인간에게 파스카 신비를 열어 보여줄 뿐 아니라,
믿음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그 행위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부활과 만남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그 부활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활의 원인이며 또한 결실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표징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우선은 성경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되며,
그 안에서 성경에 대한 주석가는 가장 권위 있는 예수님으로 모시게 될 것이다.
그 성경이 이제부터 나에게 있어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있게 된다면 말이다.
또 하나는 성체성사의 표지이다.
이는 이제 우리가 성체를 이루는 삶을 살면서, 우리 자신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삶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예상할 수 없으면 믿을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이는 마치 미사의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를 설명해 놓은 것 같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라고 하는 것처럼
말씀이 성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길에서 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이유는
이미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를 준비시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이해의 과정이 생략되었기에 주님을 알아볼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길에서 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이유는
이미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를 준비시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이해의 과정이 생략되었기에 주님을 알아볼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믿게 하도록 어떤 역할을 할까요?
‘예상’하게 합니다. 예상하지 못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예상하지 못하여 어머니도 못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가발을 쓰신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머리숱이 거의 없으십니다.
그런데 그날은 처음으로 가발을 쓰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어디서 많이 본 아줌마로 생각했습니다.
가발을 벗으셨을 때야 비로소 어머니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제자들도 부활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머리카락이 다시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가발이란 것이 있음을 알아야 어머니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제자들도 부활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머리카락이 다시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가발이란 것이 있음을 알아야 어머니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그들도 부활을 믿을 수 있어야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상하게 만드는 일을 성경 말씀이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을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순종을 통한 죽음과 부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죽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바쳐야 하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랬더니 축복의 부활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다 이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죽음과 부활을 사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하인을 보냈을 때
하인은 어떤 방법으로 신붓감을 알아보려 했을까요?
그가 주님께 자신이 물을 청할 때 자신과 자기 낙타들에게도
자발적으로 물을 주는 여인이 자신이 찾는 여인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창세 24,14 참조).
이사악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리스도를 만나 한 몸이 될 준비가 된 사람은
이렇게 말씀으로 이미 착해진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한 이들은 진정 착해집니다.
죽음과 부활을 살 줄 알기 때문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해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봐야 이해됩니다.
부산교구 김홍석 신부가 용호 성당 보좌로 있을 때
병자 성사를 위해 폐암 말기 환자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환자는 성체를 알아보기는 했지만, 성체를 영하는 순간 가래침과 함께 뱉어버렸습니다.
김 신부는 영대로 가래가 묻은 성체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체를 땅에 묻으려고 했다가 그것이 예수님을 서운하게 해 드리는 것 같아
눈물을 흘리며 성체를 영했습니다.
성체를 영한 후 심한 고열과 함께 24시간을 깨어나지 못했는데,
그때까지 290 이하로 떨어져 보지 못한 혈당 수치가 100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출처: ‘요나 신부의 서랍 속 이야기; 예수님께 받은 100점!’, 생활성서사 2016년 4월호]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드디어 성경을 실천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나그네를 대접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세 나그네를 잘 맞아들여 집 안에 축복이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결국 성경 말씀은 이웃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게 만들어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 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 드리기 위해 먼저 실천해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순종해 봅시다. 그러면 그 선악과를 통해 나에게 오시는 생명나무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제노 수녀
부활 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엠마오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침통한 표정을 하고 예루살렘을 떠난 이들이 엠마오에서 다시 돌아올 때는
그들의 마음이 타오르고 환희에 가득 차 있습니다.
엠마오로의 길 위에서 그리고, 그들이 머문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복음은 ‘바로 그날’이란 말로 시작됩니다.
‘바로 그날’ 주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 몇이
향료를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는데
무덤이 열려있고,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여자들이 이를 제자들에게 알리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달려가 보니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예수님은 보지 못한(24, 1-12) 바로 그날입니다.
주간 첫날 부활의 아침 해가 떠올랐지만,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때입니다.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침통한 마음과 혼란을 안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이셨고,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기대한 분이셨지만,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였고,
이 일이 일어난 지 벌써 사흘째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확신이 흔들리고 무너진 지도 이미 사흘이나 되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태입니다.
몇몇 여자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전하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혼란과 실망 속에서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가시어 함께 걸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있습니다.
때로 지나친 슬픔과 혼란, 실망 속에 있을 때는
우리는 주위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곤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그들의 상처 나고 흐트러진 마음을 풀어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해 기록된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초대한 말씀의 식탁에서 예수님을 경청하면서 두 제자의 마음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마음이 움직이고 있던 중에
그들의 목적지에 도착하고, 이제 그들이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함께 음식을 나눔은 가장 친밀한 시간입니다.
서산에 노을이 지고 있는 저녁 무렵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나눕니다.
그분이 빵을 떼어 나눌 때 제자들의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봅니다.
주님 성찬의 식탁에서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우리를 말씀과 성찬의 식탁으로 초대하시어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시고,
성찬의 식탁에서 당신을 우리 안에 모심으로(영성체) 당신과 일치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언자이시고 해방자이신 그분을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34절)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때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사건과 상황들로 인해
신앙이 흔들리고, 예수님이 정말 계실까?
그분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가?
내가 믿는 신앙이 나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회의가 들기도 하고, 지치고 실망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 눈이 가리어져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내 곁에 가까이 오시어 나의 혼란 속에서 함께 걸으시고,
나에게 말을 건네시고, 나의 눈을 열어주시며, 나를 당신의 식탁에 초대하시어
당신을 나누어 주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하시길 바랍니다.
비록 내 눈이 가리어져 있어도 나를 위해 수난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나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시어 당신을 알아뵙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주여, 머무르십시오,”
[출처] 루카 24,13-35 부활 제3주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