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대담 中
- 질문자 : 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술과 악연이 많아서 부모님 두 분 다 술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고, 그 해답을 신앙에서 찾았어요. 주위에 교회 다니는 분도 없었지만 그런 해답을 찾기 위해 초등 2학년 때부터 제 발로 걸어들어가서 교회에 다녔어요. 주일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교회 다니면 천국 가고 안 다니면 지옥 간다”는 목사님 말씀을 철썩 같이 믿어 왔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엄청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였거든요. 중학생이 되어 교회 다니는 것이 귀찮아서 늦잠 자서 안 나갈 때도 항상 “교회 안 나가면 지옥 간다”는 말을 들어왔어요.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니까 “예수천국 불신지옥” 그런 가르침들이 너무나 혐오스러워요.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제가 어떻게 사랑해야 될까요?
- 법륜스님 : 기독교인이라는 것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 질문자 : 예수님의 희생하심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 법륜스님 : 그렇죠.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기도가 끝날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요. 이 말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자각했다는 뜻이예요.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자각했는데 세상에 겁날 것이 있어요, 없어요?
- 질문자 : 없습니다.
- 법륜스님 : 그래서 세상에 나가서 진리를 설파했어요. 그런데 진리를 설파하는 내용이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의 가르침과 달랐어요. 그래서 갈등이 생긴 거예요. 그 중에 한 가지 예를 들면 유대교는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다. 그래서 구원은 유대인만 받을 수 있어요. 유대인 아닌 사람은 구원을 못 받아요. 구원의 기준이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것이였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아닌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그래서 난리가 났어요. 도대체 니가 누군데 그런 엄청난 얘기를 하느냐는 거죠. 지금 보면 상식적인 얘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고 혹세무민하는 얘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셨어요. “여러분 여기 중환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못하는 버려진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율법주의 학자들이나 바리새 교인들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그 환자를 보고 잘 돌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가 더 좋아 보였겠습니까?” 그러니까 거기 앉아 있던 대중이 전부 다 “사마리아인요.” 이랬어요. 이게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얘기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 소식이에요. 구원의 기준이 유대교는 민족인데, 예수님께서는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구원이 되는 게 아니라 여기 작은 자 하나를 보고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이것이 구원의 기준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것은 뒤에 가면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 이렇게 나옵니다. 왕께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일으켜 세워서 양떼와 이리떼를 나누듯이 다 나누고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지옥에 갈지언정...”, “왜 우리가 지옥에 가야됩니까?”,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지 않았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걸 주지 않았고, 내가 목 마를 때 마실 걸 주지 않았고, 내가 나그네 됐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보러 안 왔다” 이랬습니다. “주가 언제 그런 적이 있고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니라" 하셨어요, 이게 구원의 기준이에요.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거예요. 뭐 태양이 지구를 돈다 이런 얘기는 예수님의 말에 없어요. 구약에는 있는지 몰라도요.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여기 환자가 하나 있는데 신부님과 목사님은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스님이 지나가다 그를 돌봤다. 하나님 보시기에 누가 좋아 보이시겠느냐?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간다면 구원이 교회 안에 있다 하는 것은 유대교적 논리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마치 불교가 사람이 죽어 소 됐다가 개 됐다가 돼지 됐다가 하는 것은 힌두교의 논리이지 불교 논리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인들은 그것이 마치 불교인냥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질문자도 지금 상황에서는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즉 십자가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느냐? 혹세무민 한다고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고 못 박았을 때, 저 같으면 어떻게 말했겠어요? “주여, 내가 참고 참았지만 저 두 인간은 지옥에다 집어 넣어주세요.” 그랬겠죠. (대중웃음) 그게 솔직한 심정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주여,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그랬어요. 지금 우리가 흉내 내려 해도 안 돼요. 예수의 육신은 십자가에 매달고 죽일 수 있었어도 그의 영혼은 아무 상처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몸은 죽어도 그 마음은 죽일 수 없는... 뭐 몸둥이가 3일 만에 살아나고 어쩌고 그런 건 제가 볼 때는 핵심이 아니에요. 그러니 그것을 다른 종교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기독교 속에 이미 세상에 열린 자세를 갖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대로 돌아가시면 돼요.
- 질문자 : 정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금요 예배를 갈까 여길 올까 고민을 하다가 여기를 왔는데 하나님께서 제 생각을 스님을 통해서 열어 주신 것 같아요. 스님과 예수님께서 항상 동행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대중들 큰 웃음)
- 법륜스님 : 네. 맞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방식으로 얘기해도 아무 모순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 방식으로 말하면 이 세상의 천하 만물은 다 창조주의 피조물 아닙니까? 그럼 스님도 피조물이죠.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통해 역사를 하고 자기 뜻을 관철시킵니다. 그러니까 스님을 통해서 역사를 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맞는 얘기에요. 그러니 스님을 통해서도 은혜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대중 웃음과 박수)
제가 볼 때는 성경 속에 이미 수행적 관점이 광장히 많습니다. 우리 불교에 이런 말이 있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돼라. 이것을 “수처작주” 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성경의 말을 빌리면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줘라.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줘라” 이 말입니다. 누가 5리를 가자 그러면 억지로 끌려가잖아요. 내가 종속적인 존재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10리 가 줄께 이러면 그 상황에서 주인은 내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 분의 육신은 죽어도 그 분의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어요. 우리는 몸이 아프면 마음이 따라 움직여서 괴로워하지요. 그런데 몸을 죽였는데도 그 영혼이 거기에 구애를 안 받았잖아요. 그들을 용서하라는 마음을 냈잖아요. 이것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과 열반이에요. 몸은 죽여도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잖아요. 그러니까 꼭 불교라 안 해도 기독교 신자가 남편이 바람을 폈다고 "이 놈이!’ 하다가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자신을 죽여도 용서했는데 바람 정도 피웠다고 용서 못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이죠. (대중웃음)
그러니 불교다, 기독교다 이런 얘기는 그리 중요한 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똑같다는 얘기도 아니에요. 각각의 묘미가 있고 맛이 있는 거예요. 한 단계 넘어서서 진리를 봐야 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이 일어나서 그것을 지금까지 움켜쥐고 있었을 뿐이지 그것을 탁 내려놔 버리면 바로 해방되는 거예요. 문제는 이 깨달음의 길을 갈 것이냐 아니면 어리석은 생각을 움켜쥐고 괴로움의 세계로 갈 것이냐 갈림길에서 자기 선택인 겁니다.
출처 : 에펨코리아
첫댓글 저 질문자도 기독교 교리 내용 상 보면 천국 못 가죠. 교회 나간다고 해서 천국 가는게 아니죠. 그리고 법률스님이 기독교를 불교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네요. 기독교는 자기 선택이 아니라 신이 주신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죠.
@라티움 기독교에선 믿는것도 신이 믿을수 있도록 해줘야 믿을수있다고 하죠.
@라티움 수행과 고행의 차이죠
@havoc(夏服ㅋ) 이 부분은 카톨릭과도 다르네요. 여기는 신이 주신 자유의지로 인간이 믿음을 갖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뉴에이지 아, 그렇죠.^^;;
@라티움 예수의 근본 정신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지 다른 곳에 구원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죠. 다른 곳에 구원이 있다면 예수께서 신이 예비하신 길, 십자가의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죠. 성경에 보면 구원 받는 것은 딱 하나,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든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에 신이 예비해 주신 길인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 죄를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No 99 SCV 그렇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기독교와 타 종교 혹은 무신론자 들간의 가장 대립이 일어나는 부분이죠. 기독교 교리 자체가 유일신 사상이므로 다른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데 비종교인들은 그것 때문에 기독교를 배타적으로 보는 결정적 포인트가 되죠. 불교 또한 자신의 수행으로 득도한다고 가르치기에 예수님도 성인으로 인정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만이 길이다 라고 하기 때문에 비종교인들이 보기에 불교는 저렇게 관대한데, 니들은 왜 그러냐 이런식으로 보일수 밖에 없죠.
기독교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는 천국갈라고 믿는거죠
그것은 극히 협소한 보수신학의 입장일 뿐입니다.
@mr.snow 좀더 자세하게 설명좀 해주실수 있나요????
@쌍광 진보적인 신학의 경우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적을 현세에 하느님의 나라, 즉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이 오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심장>이라는 책에 잘 설명되 있지요.
@mr.snow 제가 아는 셩경이랑은 많이 다르네요. 현세에도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걸위해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게 아닌데요. 성경 전체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설명해야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궁금하네요!!
@쌍광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도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책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mr.snow 헐. 기독교에서 육신이 죽어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협소한 보수신학의 입장이라니오? 진보적인 신학 타이틀 걸고 이상한 논리를 전파하는 곳이 많은가 봅니다.
@안세 신학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답니다. 공부해보시면 알게 되실겁니다.
@mr.snow 스노우님 이 경우엔 책읽어 봐라 공부해 보면 안다 이러케 말하는게 아니라 님이 이것 저것 자료를 가져와서 제 말에 반박하는게 기본이겠죠
예전에 누군지 기억은 안나지만 여기는 수준높은 사이트니 쟈료는 니덜이 알아서 찾아라 이러셨는데 그게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일단 자기가 먼저 쟈료 들이밀고 주장을 하시는게 순서죠. 아님 저한테 제 주장의 근거를 요구하셔도 되구요.
기독교 정확히 개신교도 인간의 자유 의지로 믿음을 선택합니다. 다만 그 믿음으로의 길도 주님께서 예비해놓으신 거죠
결국 이 대화는 알맹이 없는 수박겉핥기식의 헛소리일뿐입니다. 질문자도 교회를 자기 위안으로 다녔고, 스님도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몰라서 하는 얘기입니다. 옳니 그르니 하는 논쟁 자체가 필요없는 상황입니다. 태클 들어오실까봐 말씀드리면 위에 법륜스님 말중에, 윗부분 반은 맞는 얘깁니다. 그런데 아래쪽에 내려오면 이상한 말을 합니다.'......뭐 몸둥이가 3일 만에 살아나고 어쩌고 그런 건 제가 볼 때는 핵심이 아니에요' 이게 완전 기독교 교리와 정반대 되는 말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속죄의 희생제물이 되어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몸둥이(?)가 3일만에 살아나
지 않으면 기독교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성경 속에 이미 수행적 관점이 광장히 많습니다.' 혹은 '....이것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과 열반이에요.' 이것도 기독교 교리와 반대됩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수행,고행을 한다거나 해서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게 아니고, 단지 믿음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핵심교리를 불교와 교묘하게 섞어버리는식으로 말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