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5주일
요한 15,1-8
기도의 시작: 네 안의 가난을 찾았는가?
오늘 복음은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니
당신께 붙어 있어야 성령의 수액이 들어와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붙어 있을 필요를 못 느끼게 만드는 우리 안의 교만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88회에 ‘엄마의 말을 따라야 사는 위기의 13세 영재 아들’에서 초등학생 나이에
대학생 수준의 성적을 내게 만든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게임만 하려고 하고
엄마에게 폭력까지 쓴다고 제보한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제는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지나치게 아이에게 욕심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큰딸로서 희생을 강요받아 대학에 가지 못한 설움을 자신은 아들을
잘 키우려 영재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이용당하는 것 같아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화가 납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열립니다.
그러나 교만은 사랑을 혼자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2018년 6월 1일, 조선일보에 ‘내겐 짐, 아들엔 힘. 전 남편을 어떡하지?’란 제목으로 실린 사연입니다.
중학생 아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자퇴하겠다며 어머니의 속을 썩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바닥에 누워 천장만 쳐다봅니다.
아들이 초3 때 이혼하였지만 엄마의 노력으로 아들도 잘 성장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기까지 마음속에 엄마에 대한 원망을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울어도 봤지만 본척만척합니다.
혼자만의 싸움에 지칠 때면 가끔 이혼한 남편이 생각났습니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무관심한 가장이었지만 그런 남편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남편에게 연락합니다. 아이의 마음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으니
아들과 자신 사이에 잠시만 서 있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아이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편안함 속에 한 번 결혼에 실패했는데, 이젠 이혼에도 실패하는 게 아닌지
궁금해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랑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 맺히는 열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신부가 경남 산청의 나환자촌에서 봉사활동 하며 경험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번은 손과 발이 뭉툭해진 한 할머니를 도와드리려고 다가서는데,
그 할머니가 “베드로, 괜찮아. 안 도와줘도 돼. 먼저 네 안에 있는 가난을 찾아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생은 마음속으로 ‘내 안에 있는 가난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산골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베드로는 걷기에 불편한 그분들을 위해 열심히 눈을
치웠습니다. 무언가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에 어깨가 우쭐했습니다.
그때 뒤에서 그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 수고했어!”
마치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음성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뒤로 자신이 쓸었던 눈들이 이미 햇빛으로 다 녹아있었습니다.
해가 뜨면 저절로 녹게 되어 있는 눈인데 헛수고를 한 셈입니다.
헛수고하면서도 자신이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우쭐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또한 신학교에 입학해서 주님께 무언가 도움이 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제가 나무가 되고 그분이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다 ~ ” 주고 계셨습니다.
이 깨달음에 감사하며 제가 주님께 “주님, 제가 이제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바치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셨던 성경 구절이 당신이 포도나무고 나는 가지이지 당신께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오늘 복음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진정한 성체조배가 시작되었고 다른 이들을 성체조배로 이끌었습니다.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이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흔들리는 버스에 서서 있으면 사람들은 잡고 있을 손잡이부터 찾습니다.
이것은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혼자 버틸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빈곤함을 알고 기도로 주님께 붙어 있으려는 자세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짧게라도 하루에 50번 정도 기도했다고 합니다.
마치 자신 앞을 지나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소리소리 쳤던 소경처럼
우리는 겸손해질수록 그분께 더 붙어 있을 수밖에 없어집니다.
마음의 가난을 먼저 찾읍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