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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삼국지 사가에서는 젊은 시절의 정치적 행보나 하북 평정 과정은 한 두줄로 요약해버리고, 관도대전 무렵의 삽질을 부정적으로 조명하는 인물이다. 특히,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이 작정하고 꼴통화시키면서 안습으로 전락했으며 현대에 들어와 조조가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한 지도자로 부각되면서 라이벌인 원소는 수구꼴통이나 우유부단한 찌질이 기믹을 맡게 되었다.
조조를 추켜세우려면 라이벌을 높게 평가해야 조조의 가치도 높아지는 거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이는 후세인들이 역사를 읽으면서 현실에 대한 은유로 대입하고 싶은 욕구에 기인한다. 즉 역사인물에 대한 절대평가가 아니라, 역사를 읽는 인물이 현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떠한 프레임을 반영시키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소는 승리자인 조조 지지자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폄하되어왔고, 현대인들도 원소를 조조보다 뒤처지는 수구꼴통으로 다루려고 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또한,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원소는 어리석고 용렬한 소인배 느낌인데다, 대다수의 미디어에서 신나서 덤벼들어 되도 않는 분석이랍시고 까기에 적합한(...) 명문가 타이틀도 지니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찌질이로 왜곡하기 편했다.
전통적인 삼국지 문화에서 원소는 흔히 '귀족주의에 쩌들고 사람을 명성과 신분으로만 판단하며 귀가 얇고 판단력이 흐린 암군' 정도로 평가되었고, 관련 창작물에서도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거나, 혹은 어느정도 유능하지만 보수적이고 한계가 뚜렸한 인물로 여겨져 조조, 유비 등 삼국시대 주요 네임드들과의 확연한 클래스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비교대상으로 취급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팬덤 내에서는 2010년대 전후부터 작지만 꾸준하게 재평가 논의가 나오는 추세이며, 본 위키의 해당 항목도 이런 경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독보적인 삼국지 정치력 끝판왕, 폭넓은 인간들과 대의명분을 이용할 수 있었던 희대의 정치가. 젊은 시절의 원소를 보기 위해 몰려든 행렬로 거리가 마비되었다는 영웅기의 기록이나, 지혜있는 선비들은 원소의 계책과 의론에 매료되었으며, 용맹한 무사들은 원소의 과감성에 목숨 바치기를 서로 다퉜다는 범엽의 평,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계층에서 원소를 흠모했다는 헌제춘추의 기록 등을 보면 원소는 쇼맨십에 대단히 능했고, 개인적으로도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년상 등의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행으로 야권세력인 청류파의 아이돌(...)로 군림했던 초반의 행적이 유교적 가치관에 얽매이는 보수적인 인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원소의 정치력과 대의명분을 통제하는 능력은 삼국지에서도 가히 독보적이며 그와 동시에 누구보다 독살맞은 정치인이었다.[61]
원소는 원봉의 얼자로 이미 죽은 원성의 가문으로 입적되었으니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으나, 양부와 적모의 6년상으로 효자를 자처했고, 동탁이 자리잡은 정부의 칙사를 살해하고 반란을 부추겨 정작 친어머니와 일족 50인을 제물로 바쳤다. 이후 20년 간의 무정부상태를 초래하며 사실상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후한과 친족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원소의 이런 행보는 관이 극도로 부패하던 영제 치하의 분위기 속에서 청렴한 효자로 칭송되며 정치적 거물로 인정받았고, 동탁이 아무런 명분 없이 황제와 태후의 폐위라는 전례 없는 폭거를 저지른 상황 속에서 전국적인 호응을 받고 동정표[62]까지 더해졌으며 원소는 스스로의 입지를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는 소위 애국열사 로서 확고히 포장했다.
원소 자신이 유교적 가치관에 얽메었다기보다는, 영제의 금권정치와 당고의 금으로 대표되는 철권통치에 대한 반발로 호족사회 내에서 원리주의적이고 교조적인 도그마에 가깝게 변질되어 있던 충효의 개념을 자신의 정치적 영달이라는 목적에 맞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철저하게 이용한 것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청류파 인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던 만큼, 영제 사후 십상시를 위시한 환관 세력들에 대한 원소의 공세는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는데, 하태후가 십상시를 비호하는 상황에서 1)보정대신 하진은 직접적으로 하태후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2)하태후는 십상시의 파직을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목적 아래 정원을 시켜 수도의 요지인 맹진에서 학살을 저질렀으며 정보를 통제해 이를 흑산적의 소행으로 위장, 영제와 십상시가 주도한 대 흑산적 유화정책을 탄핵했다.
동탁 등 지방의 장군들을 소집한 것은 '흑산적의 위협'이라는 음모론을 조작하고, 계엄령에 가까운 공포 분위기를 유지하며 정보를 통제하는 한편 십상시의 축출이 성공한 뒤 동탁 등과 합세해 흑산적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로 불만여론을 환기시키려는 포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행히도(?) 하진이 암살당하고 정국이 요동치면서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는 가루가 되도록 까여야 마땅한 부분이나, 씁슬하게도 훗날 공손찬이 찬표소죄상을 쓸때 이 일을 간단히 언급하며 원소를 비난한 것 외에는 의외로 비난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원소의 지지층은 더욱 결집했으며, 원소 스스로도 십상시를 척결한 것을 자신의 주요 업적으로 선전했다(…).
현대에서도 삼국지 초반부를 가볍게 읽은 사람들은 진작에 십상시를 쳐죽이면 되지 왜 뜬금없이 지방 군웅들을 소집하냐고 멍청하다고 비난하지만, 원소가 어떤 이유로 외부의 장군들을 소집했고, 구체적으론 무슨 일을 꾸민 것이며 그 과정에서 원소가 보였던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극단적인 추진력(…)과 맹진항 사건같은 잔혹한 패륜성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 편이다. 어떤 의미로는 후한말 호족사회의 위선성과 영제가 벌인 폐정의 결과를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나쁘게 보면 시대가 낳은 괴물이며, 좋게 보면 시대의 풍운아. 이러한 원소의 입체적인 모습은 라이벌인 조조와 비슷하여 오히려 조조의 비윤리적 행보를 강조하기 위해 잘 표현되지 않는다.
동탁과 정원으로 대표되는 지방 군벌을 불러온 것조차도, 사실 궁극적으로 원소에게는 그리 큰 손해는 아니었다. 하진이 암살당한 이후 정국이 몇 차례나 시소를 탄 끝에 어쩌다보니 운 좋게 황제의 신변을 확보한(...)동탁이 중앙군을 흡수해 권력을 잡게 되는 상황까지는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지지기반 없이 권력만 잡은 동탁이 권력 독점을 위해 연이은 무리수를 던져 중앙이 개판이 되는 난세는 자신의 명망을 이용하여 엄청난 세력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동탁에게 너만 칼이 있느냐고 호통치던 패기는 결코 허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소는 자신이 나서면 동탁의 허수아비 정부 쯤은 압도할 만한 전력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을 것이며 이는 실제로 드러났다. 그 과정에서 후한은 사실상 멸망해버렸지만.
십상시 → 동탁 → 한복 → 공손찬 → 조조로 이어지는 라이벌 구도에서 대의명분을 가지고 노는 수준으로 상대방의 정치적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집요하게 공격하던 모습은 특기할 만하다. 여기서 조조를 제외하면 모두가 철저히 능욕당했고, 비록 원소 본인은 조조에게 패하고 세력이 사라졌으나, 관도대전 당시 원소가 정립한 '조조 = 천자를 겁박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의 프레임은 끈질기게 남아 유비가 충실히 계승한다. 과거 한헌제의 정통성을 대놓고 부정했고, 한때 스스로 칭제를 계획했던 원소 본인의 이력이야 어쨌든간에 이 논리에 따르면 원소는 한의 대장군으로 '간적 조조'와 싸우다 죽었으니 마지막까지 '충신'으로 남은 셈. 이런 식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야 사실상 눈가리고 아웅에 가깝지만 훗날 다 털린 원상이 오환으로 달아날 당시에 10만 호가 따르고, 유비 또한 원소의 논리를 계승, 발전시키며 유용하게 써먹은 것에서 볼 수 있듯 최소한 지지세력의 결집에는 유효했고, 중앙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와 맞서려면 어떤 논리로 대응해야 하는지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63]
위선자라는 평가는 이미 당대에도 범람하고 있었지만, 그의 온후관대한 겉모습 때문에 당대에 원소를 추종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원소는 당대에 보편적인 모범으로 여겨지던 유교적 가치관에 더해 현인에게는 지식을 무인에게는 과감성을 무기로 추종되었듯 여러 계층에 따라 제각기 다른 미덕을 보이고 인정받으며 광범위한 추종자를 얻었으나, '희노의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고 평해지듯 진심을 보이는 일이 없었으며, 실제 행적으로도 단물이 빠지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는 표리부동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코에이 삼국지 플레이어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른 미덕을 보인다는 것이 말이야 쉽지만 원소가 어떤 식으로 6년상을 지내며 효자임을 인정받았는지 생각해보면 무서울 정도로 섬찟한 인간성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괴물'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정치력 만렙. 시세를 읽고 명분을 만들어 세상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던 정치력은 삼국지 내에서 비길 사람이 없다.
호족, 군벌 억제를 통해 제왕적 통합을 추구했으나 급한 병사로 인하여 결과를 보지 못한 독재자.
원소는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적인 군주론에 입각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호족과 세력가들은 숙청하면서 백성들에게는 유화적인 선전 책략을 매우 잘 썼다. 이런면에서 원소는 제왕적 통합주의, 조조의 엘리트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원소는 보편적인 통합을 중시하는 황제적인 전략을 추구했다. 대표적으로 외교면에서 조조와 원소를 굳이 나누자면, 조조는 평판이 나쁜 독재자들도 괘념치 않는 러시아적인 외교술, 원소는 막강한 소프트파워와 도덕주의로 여론을 휘어잡으면서 뒤로는 나쁜 독재자들을 잘 써먹고 제거하는 미국 정도의 외교적 차이를 보인다. 유비처럼 평판이 좋은 인물은 앞에 세우고 나쁜 놈들은 잘 써먹다 죽였다. 여러가지로 원소와 비슷한 인물은 조조였지만, 조조가 '친인척과 능력자 위주의 친목'에 특화되어 군벌활동에 유리한 성격이었다면, 원소는 '통합주의적 제왕의 정책'을 추구했던 것이다. 심지어, 원소는 이런 통합적 시야를 통하여 당시에 이미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국가를 만들어낸 수준이었다.
집권을 위한 정치적 능력은 만렙에 가깝지만, 강역 내에서의 실제적인 통치 능력은 특정한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상을 그리기 어렵다. 긍정적인 기사와 부정적인 기사가 혼재하는데, 부정적인 기사로는 조조가 원상을 격파하고 기주를 평정한 뒤 기주민들에게 내린 포고령에 따르면 원소의 정치는 방만해서 호족들의 발호가 심했다고 하며, 곽가전에 언급된 십승십패론에서 곽가는 한나라의 정치가 지나치게 관대해서 망했는데, 원소는 관용으로 그르쳐진 정치를 관용으로 바로잡으려 하니 답이 없고, 사나움으로 바로잡아 위아래가 제각기 분수를 아는 조조의 통치가 훌륭하다고 평했으며, 왕수전에서도 원소의 비호 아래 권세가들이 재물을 많이 축적해 심배의 재산이 억대에 달했다는 기사가 있다.
한편 긍정적인 기사로는 순유가 원소는 평소 한족과 오랑캐를 아우르며 널리 은혜를 베풀었으니 비록 (조조가) 하북을 점령했지만 진심으로 이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진언한 순유전의 기사가 있으며, 헌제춘추에서는 원소의 정치가 관후하여 크게 존경을 받았고, 원소의 통치가 미치는 하북 4주의 지체 높은 사대부로부터 비천한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막론하고 원소를 흠모해 불평하는 목소리가 없었으며, 원소가 죽었을 때는 온 도시의 저자가 통곡과 비탄으로 마비되었으며 심지어 그의 죽음을 두고 부모상을 치르는 백성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편 괴담집인 수신기에는 도삭군 신앙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원소가 사후 민간에서 신격화되어 숭배받던 흔적으로 보인다.
긍정적으로 보는 쪽이든 비판적으로 보는 쪽이든 관용과 은혜로 다스린다는 평가는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러 정황을 봤을때 협천자라는 강력한 권위를 통해 둔전제와 병호제 등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추진했던 조조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토호들과의 느슨한 연립체계에 가까웠고, 그만큼 권력이 분산되어 효율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만들진 못했던 것이 사실에 가까워 보이지만, 호평을 받은 기록을 감안한다면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이 그럭저럭 운용되었고, 명색이 은혜와 관용을 내세웠던 만큼 빡센 수탈은 없었던 듯. 일반 백성들 기준에서 당장 동탁, 조조, 원술, 공손찬 등과 비교할 경우 성군이 맞을 것이다(...).
곽가가 원소의 정치를 까면서 조조를 치켜세우긴 했지만 자영농의 몰락과 예속화, 토호의 귀족화와 지배층의 부패라는 후한말의 시대적 흐름은 조조가 세운 위왕조에서도 이어졌고 조조는 이를 막지 못했으며, 조조의 후계자인 조비는 구품중정제로 오히려 박차를 가해 위왕조의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은 서진왕조에서 정점을 찍고 당나라때까지 쭉 이어진다.
이후 조조는 원소의 잔재를 없애려 했는지 원소의 본거지 업군의 인구를 대규모로 타지로 이주시키고[64] 자신을 따르는 측근 호족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는 '수도 조성 사업'을 감행했다. 조조의 세력은 여러모로 원소의 업적을 흡수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원소의 통치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는데, 은혜와 관용을 내걸었다곤 하나 이것도 연이은 군사적 성공으로 안정적인 강역을 확보해 여유가 생긴 뒤에나 그랬던 것으로 보이고, 궁핍했던 초반에는 잘만 약탈하고 다녔다.[65] 또한 196년의 협천자 논의부터 시작해 관도대전에서 정점을 찍은 원소와 호족 출신인 저수, 전풍 등과의 격렬한 대립과 곽도를 필두로 하는 예주 출신 인사들의 대두는 어리석은 암군 원소와 현명한 충신 저수, 전풍. 간신 곽도, 봉기의 구도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었으나 최근에는 원소의 권력 강화에 따른 토호세력 숙청과 일족, 친위 파벌 육성을 통한 정치체계 개편으로 보는 해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후한서를 쓴 범엽의 관점도 굳이 치자면 이쪽에 가깝다. 물론 범엽의 관점은 정치체계 개선이라는 거창한 해석보다는 권력을 탐하며 숙청을 일삼는 독재자의 그것에 가깝게 보며 비판하는 것이 정확하다.
전략적 개념에서는 단 한번도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았던, 정치와 전략을 연결한 책략형 군주.
정치와 전략 양쪽에서 모두 삼국지의 인물 가운데 최정상급의 군주였기 때문에, 두가지 능력의 시너지를 통해서 당당한 군벌로 성장했다. 심지어 선입견과는 달리, 원소는 조조, 유비, 손견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오합지졸 군대로 자신보다 훨씬 큰 군벌들을 연파하며 최강의 세력으로서 키워냈다. 물론 초기에는 순수한 군사적 승리보다 책략을 동원한 승리에 가깝지만 손자병법을 본다면 어떤 의미로 굉장히 똑똑한 지휘관이었다.
원소는 관도대전의 패배로 머릿수만 믿고 밀어붙이는 이미지로 과소평가되지만, 군사적 재능은 동시대 군벌들 중 매우 뛰어난 편이다. 오히려 원소는 불리한 정세에서 극적인 승리를 여러 차례 보인 인물이며, 관도대전 이전까지의 활약상은 보기에 따라서 오히려 조조를 압도한다. 4개 주에 영향력을 떨치던 공손찬을 오히려 불리한 전황에서도 수차례 무찔렀고, 관도대전에서도 오소 이전까지 확실한 우위를 점하며 전략적으로 조조를 완전히 몰아넣었다. 다만 사람들이 오소 습격 이후의 모습만을 기억해서 문제다.
반동탁연합 해산 시점까지 원소의 입지는 군사력이 아닌 여론의 지지뿐이었다. 즉, 명성만큼은 높았으나 실제 세력은 미약해 자력으로 군세를 유지할 역량조차 없이 한복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독자적인 군벌로 보기에도 애매한 군사력만 있었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원소는 문관 출신으로 시어사를 사직한 뒤 호분중랑장과 중군교위를 역임하긴 했으나 실전 경험은 전무한 정치군인에 가까웠다. 흔히 책상물림으로 여겨지는 왕윤이나 공융조차 당시의 원소보다 군사적 커리어가 훨씬 나은 상태였다.
이렇게 군사력이 부족했던 원소를 지원했던 한복은 동탁에게서 원소에 대한 통제, 감시역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가 원소를 후원한 동기는 여론이 원소에게 있으니 그를 후원하는 것이 얻을 것이 많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원소가 반동탁연합의 맹주로 추대된 것도 연합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런데 반동탁 연합군은 소득 없이 해산되었고, 이 시점에서 한복과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원소는 더이상 이용가치가 떨어진 얼굴마담이자 제대로 된 군사력도 없는 정치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원소는 공손찬을 끌어들여 한복을 대파하고 그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인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복이 크게 약해졌다고 해도, 원소는 아예 제대로 된 군벌이라고 부르기엔 경험 자체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원소는 한복과 공손찬을 싸움 붙여서, 한복의 주력이 공손찬에게로 향한 사이, 장양과 어부라 등 다른 기주 군벌들을 신속히 격파, 병합하여 군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물론 애초에 군세의 자력 유지가 불가능하던 상황에서 더욱 수를 늘렸으니 일단은 허장성세에 가까운 오합지졸이었다.
당황한 한복의 측근들은 원소를 열흘 안에 격파할 수 있다고 호언했지만, 한복으로서는 얕보던 원소가 당장 저리 커버렸으니 원소에게 전력을 집중했을 때, 공손찬이 남하할 경우 결국 동귀어진이 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덕분에 원소는 한복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와서,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흔히 원소가 지닌 계략의 주도면밀함만이 강조되는 경향이 강하나, 기본적으로 장양, 어부라의 신속한 격파, 병합이라는 군사적 능력까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66]
이후 원소는 계교전투에서 공손찬을 격파한다. 물론, 위 문단에서도 나오듯이 이때 원소의 군대는 시원찮은 오합지졸이었다. 그런데 원소는 단순한 군사수의 차이, 편제, 숙련도까지의 압도적인 열세와 막장으로 치닫는 대내외적 정치상황이라는 악재 속에서, 회전 한 차례로 공손찬을 완파하고 전세를 반전시켰다. 당연히 공손찬도 당대 중국 최강의 세력이었기에, 금방 세력을 수습하여 재공세로 전황이 장기화됐다. 하지만 원소는 용주에서 또다시 공손찬을 대파해 기주에서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급조한 군대를 가지고도 국경의 정예군들에게 연승을 거둘 정도면 원소의 군재와 책략이 무시받을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어진 장연과의 대결에서는 아예 근거지를 완전히 함락당하는 상황에 놓였다. 심지어 장연이 장안 조정의 관리를 통해 지배 공고화에 들어간 상황에서, 원소는 공손찬과의 전쟁을 막 마친 군세를 이끌고 귀환해, 성을 끼고 항거하는 우독의 1만 군세를 5일만에 전멸시켰으며, 다시 산을 타고 넘어가면서 험요지에 주둔한 군세를 상대로 공격을 거듭해 이들을 연이어 패퇴시키고는, 상산으로 쭉 올라가 장연의 본대까지 털어버렸고, 패주하는 장연을 추격하는 시점에서야 군사들이 퍼져서 물러났다.
이런 원소의 군사적인 업적들은 제대로 조명되기는커녕 언급되는 일조차 없어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원소가 당시에 급조한 군대를 이끌고 한복-공손찬-장연으로 연달아 벌어지는 불리한 대립구도에서 빵빵 터트린 극적인 군사적 성공은 그야말로 미쳐 날뛰는 천재적인 수준이다.
이후 원소의 대규모 군사 운용은 198년의 역경 공략 이전까지 확연히 줄어드는데, 이미 한복 파벌은 저수를 제외하고 모조리 숙청되었으며, 공손찬은 용주에서의 패배 이후 유우를 격파하고 세력을 만회하려 했지만 유화를 앞세운 원소의 공작과 유우 잔당들의 봉기로 내상을 심하게 입어 그 자신은 역경루에 틀어박힌 채 각지에 파견된 자사들이 원소의 수하들에게 각개격파당했고, 장연은 패하여 그 많던 무리가 와해되었다는 기록뿐이지만, 수십 개에 이르는 연립세력의 맹주라는 특성상 장연 본대의 참패로 극심한 내부 분열을 피하기 어려웠을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점의 원소는 직접 대규모 기병에 나서 현장을 통제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기주는 그나마 안정되어 있어 다른 주들과 다르다는 저수의 발언(출처: 《후한서》 〈원소전〉), 원소 세력의 압도적인 물량 이미지 역시 결국은 초반의 연이은 군사적 대성공을 통해 통령체계를 빠르게 설립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공손찬이나 원술 같은 인물들이 다스리던 영역에서 백성들이 굶어죽다 못해 인육이 횡횡하는데도 더더욱 수탈에 열을 올렸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싸울 때마다 전쟁에 지고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단지 군사력의 증강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자 그들 자신의 생명줄이 되어 선택지를 강요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점점 과격해지는 북한의 선군정치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67]
계교에서 공손찬을 격파하고 상산에서 장연을 격파할 당시 부장으로 종군하던 국의와 여포의 활약상이 부각되다 못해 원소는 한 게 아무것도 없고 국의와 여포가 독자적으로 공손찬, 장연의 대군을 격파했다는 식으로 심심찮게 발전하지만, 계교전투 당시 국의의 병력은 800명[68], 상산전투 당시 여포의 병력은 기병 수십기로, 기록에 나타난 이들의 역할을 살펴보면 공손찬의 기병을 유인해 무력화시거나, 연속적인 기동으로 장연군의 전열을 교란하는 보조적인 활약에 그쳤다. 물론 국의와 여포가 회전에서 본대 싸움이 벌어지기 전 상황을 유리하게 이끈 것은 맞지만, 이들을 기용하고 포진한 것 역시 지휘관의 능력이고, 애초에 회전에서 전세 자체를 결정짓는 것은 여포와 국의가 아니라 결국 원소가 이끄는 본대의 역할이다.
사실 관도대전의 패배 역시도, 전투에서의 전략, 전술적 능력의 부재라기보다는한방을 노리다가 역관광 평소 그의 제왕적, 유아독존적 태도로 인해 유발되던 불합리와 휘하 인물들의 충성심 저하 등의 고질적인 문제가 오소 사건을 기점으로 선을 넘으면서 한번에 터져나온 정치적인 문제가 크다. 고작 기습으로 무너진 것이니 능력을 확신할 수 없다는 축도 있지만 애초에 장합, 고람이 이끌던 군이 조조의 최후 거점인 관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것을 볼 때 그 규모가 작았다고 판단할 수 없고, 경계가 이루어지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의 갑작스러운 반란이라는 점, 혼란을 지속시키기 위해 영채에 불을 지르고 조조 측에 투항했다는 점 등을 볼 때, 오히려 이걸 멀쩡히 수습하는 쪽이 세기의 명장이지세기의 명장은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일단 제껴두고 수습 못한 원소가 무능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전술가 중 하나로 꼽히는 조조[69] 역시도 원소에게 패배한 정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더더욱.
군사적 능력 자체는 대단히 우수한 편에 속하지만 최소한 관도대전 당시에는 성질 급한 모습을 곧잘 보여주고 주의력이 부족했던 측면이 있다.
일례로 원소는 연진으로 향한 조조의 의군에 낚여 본대의 도하 장소를 연진으로 설정하며 안량 등을 고립시켰는데, 원소가 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에 대해 기록에서 명시되어 있진 않으나, 당시 선봉의 포진은 안량, 곽도, 순우경 등의 올스타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고 숫자상으로도 1만 이상의 대군이었으며, 지도를 살펴보면 연진에서 백마로 향하면서 조조를 포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를 살펴보면 원소의 구상은 안량 등의 선봉대가 쉽게 무너질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그 사이 연진을 확실히 점거함으로서 혹시 모르는 배후 공략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백마의 안량과 합류하며 안량을 치러 들어간 조조를 역포위할 수 있으니 오히려 조조의 의도에 낚여주는 척 일타쌍피를 노린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안량이 쓸데없이 전방에서 지휘하다 원턴킬 나면서 결과는 시궁창(...) 관우가 조원 대결에 지대한 공헌을...
관도대전의 명운을 가른 오소전투 당시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오소가 넘어갈 경우 보급에 치명타를 받는 게 뻔한 상황임에도 오히려 승리를 확신하고 본진의 공세를 강화했으며 오소의 원군으로는 기병대만을 파견했다. 이 역시 기동성을 중시한 포진으로 조조가 순우경과 싸우는 사이 조조 본대의 후열을 박살내고 주력군이 빠진 조조군 본진도 정리하는 일타쌍피를 노린 전략으로 볼 수 있고, 이번에도 조조가 순우경군을 먼저 박살내면서 결과는 시궁창(...) 그나마 순우경의 경우 쓸데없이 전방에서 지휘하다 원턴킬 났던 안량과 달리 간발의 차로 지긴 했다.원소 : 아니 그걸 왜 못해?(선수들이 답답한 천재 감독)
이런 행보에 대해서는 정규군 10만을 동원한 장거리 원정이라는 군벌시대 당시로서는 유래 없던 일을 벌였던 데다, 내부적으로는 전풍, 저수 등 반대파들을 모조리 숙청시키는 초강수를 두며 거창하게 원정을 시작했던 만큼 전쟁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상황이었다는 분석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전선을 끝까지 지켜내며 변화를 기다리자는 순욱의 진언 또한 이 과정에서 전쟁이 길어질 경우 언젠간 터지게 될 원소군 지휘부의 내분 요소를 순욱이 간파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전략상의 대립+정치적 문제 등으로 허유가 이탈하면서 예측이 맞아떨어진 것으로 본다.순욱 : 원소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냥 내가 더 잘났을뿐
또한 저수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다고도 하나 황하 도강 이후 저수의 헌책들은 특별히 대단하다기 보단 세심하게 수비와 경계를 보강한다던가, 혹은 안정적으로 공세 전략을 유지하는 상식선의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원소는 이런 충고들을 모두 거부했는데 그 또한 많은 전쟁을 겪어온 사령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만 가지고 외부 경계를 강화하자는 상식선의 조치들을 무시했다고 보긴 어렵다. 이 경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일종의 방심이라고 보는게 더 타당할 듯[70]
사실 계교 전투에서도 본대와 떨어져서 앞서나가다가 다 이긴 판을 공손찬군의 역습으로 죽을 뻔한 전력이 있다. 공손찬 상대로는 특유의 뚝심과 과감한 역습으로 위기를 헤쳐나왔지만 관도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했고 (상대가 전에는 공손찬이었지만 관도에선 이순, 곽가수경팔기?, 정욱 등 당대 최고의 두뇌들을 가졌고 본인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조조였다는 점이 차이랄까) 이것이 질래야 질 수 없었던 관도의 패전으로 이어졌다. 사실 조조가 오소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굳이 본진을 공격할 이유도 없었고 조조의 오소 습격만 확실하게 막아내고 전세만 유지했어도 충분히 이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성급하게 본진 공격을 지시하면서 사태가 꼬이기 시작했고 여기에 세력 내부의 인사, 정치적인 문제가 터지면서 1선 사령관들의 이반으로 이어진다.
유비가 서주에서 조조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원소가 아들의 병을 핑게대며 지원을 늦게 해주는 바람에 유비가 패망했다는 점을 들어서 고작 가족의 병 때문에 거병하지 않은[71] 원소의 전략적 안목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반박이 만만찮은데, 범엽에게 겉으로 본심을 비친 일이 없었다고 평해졌듯 원소는 기본적으로 자기 감정을 곧이 곧대로 드러내는 인간이 아니고, 더욱이 과거 원씨 일족이 동탁에게 몰살당할 것을 알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역이용한 전적이 있던 원소의 행적까지 봤을때 '자식이 아프다'는 구차한 핑계는 그야말로 군대를 일으키기 싫어서 내놓은 변변찮은 핑계에 가깝다. 또한 당시 시점에서 보자면, 원소는 서주와 유비의 지원에 그리 크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 원소는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 주를 차지하고 있었고, 조조 세력은 연주와 예주, 사예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유비는 서주를 보유하고 있고, 후방에는 형주의 유표도 있다. 즉, 원소(4), 조조(2.5), 유비(1), 유표(1) 이라는 세력비다. 전력비를 보면 원소의 우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게다가 설사 조조가 유비를 물리치고 서주를 차지한다고 해도, 이미 조조는 서주대학살을 벌인 전력이 있어 서주에서 조조의 지배가 확고하게 굳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즉, 원소는 조조가 유비를 멸망시킨다고 해도 불리해지는 것이 전혀 없다.
원소가 유비를 홀대해야 할 이유는 오히려 '전후처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조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 조조를 적대하는 유비가 세력을 유지하고 살아남으면 자기 세력을 이끌고 조조와 직접 교전한 공적이 있는 유비의 정치적 발언력은 크게 올라간다. 조조와 직접 교전한 공적은 유비에게 돌아가며, 원소는 그저 유비를 지원한 것으로 격하될 위험이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 주를 지배하는 유력 군벌로서 유비가 응당 받아야 할 정치적 댓가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원소는 '전후처리'에서 유비에게도 어느 정도 지분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고, 거기다 조조 패망이 확실해지면 유표까지 끼어들 것이 분명하여 원소는 '승리의 과실'을 독점할 수 없게 된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해서 이기면 유비, 유표에게도 상당한 관직을 앉혀주고 원소도 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궁극적으로 '원소가 주도하는 국가'를 만드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원소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자세력만으로도 조조를 압도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유비'따위'를 동맹으로 끼워서 '승리의 과실'을 나눠줄 필요성은 없다고 판단내리는 것이 무리수는 아니다. 원소는 충분히 유비의 1은 조조에게 일단 줘버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세력 4로 조조의 세력 3.5를 전부 삼키는 전략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전략은 반 정도는 맞았다. 결국 조조에게 패망한 유비는 겨우 몸만 도망쳐 나와서 원소에게 '명분'을 가져다 바치는 존재로 전락했다. 원소로서는 아주 잘 풀린 셈인데 서주를 차지한 유비는 존중해줘야 할 대상이지만 객장에 불과한 유비는 그저 실권은 전혀 주지 않아도 상관없기 때문. 사실 원소 입장에서는 유비가 조조에게 죽어버려도 '명분'은 이미 얻었으니 상관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살아있는 유비보다는 죽은 유비가 나중에 귀찮지 않으니까 그쪽을 더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따지고 보면 한복의 기주목 양도를 위해 장양과 어부라를 격파, 병합해 세를 늘렸지만 장양,어부라의 병합은 물리적인 격파 자체보다는 교섭이 주된 이유였고, 그조차도 역시 실질적인 전력증강에는 일절 도움이 안 되는 한복과의 협상용 패였으며, 업성 탈환 역시 전과 자체로는 어마어마한 포스를 보이긴 했지만 결국 도승으로 대표되는 흑산적 두령들 사이의 내부분열과 이를 이용한 각개격파에 가깝고, 후기 공손찬과의 전투 역시 대대적인 선전공작을 통해 싸그리 털어먹은 뒤 역경루에 틀어박힌 공손찬을 형세의 우위를 통해 소모전으로 압살했는데, 어떤 의미로는 조조처럼 전투 자체에 강한 장군이라기보다는 정치,전략적 개념의 연장으로 전쟁을 접하는 정치가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원소 자신은 자신이 참전한 모든 전투 중 계교전투를 가장 기적적인 대승[72]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모략을 좋아하며 과감성이 없다는 평가는 이런 측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국지적인 과감성은 보였을지 몰라도, 형세 자체가 극도로 열세해 사실상 회전을 강제당한 계교전투나 절묘한 판짜기로 조조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음에도 생각 외로 전선이 고착되면서 조급증이 극에 달한 관도대전 후반의 모습 정도를 제외하면 전투 자체를 통해 형세를 결정짓기보단 대체로 모략을 통한 형세의 우위로 이미 짜여진 각본 안에서 날로 먹는 전개를 선호했기 때문.[73]
좋은 결과로든 나쁜 결과로든, 제왕적 독선주의와 카리스마로 숙청을 자유롭게 구사한 정치가.
구습을 타파하며 유재시거를 외치던 개혁가 조조 vs 사람을 신분이나 명성으로 판단하는 수구꼴통 원소라는 식으로 왜곡하기도 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구현령은 제도적인 실질이 수반되지 않은 구호에 가까웠고, 원소는 한족 기준에선 오랑캐 수령인 답돈을 사위로 맞은 데다, 조조 측의 사람인 이통에게서 도적이나 강도 같은 무뢰배들을 임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며 비판받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이는 완전한 허상에 가깝고, 실상은 사료가 괴멸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비교가 어렵다.
오히려 원소 자신의 직속 측근이 법령을 어기자 이를 처형한 뒤 보고한 견초를 문책하지 않고 기특하게 여기며 높게 평가했다는 일화가 견초전에 남아있기도 한데, 이런 일화를 보면 꼰대스럽기는 커녕 공명정대하고 대인배스러운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일화성 기록을 배제하고[74] 전반적인 행적에서 용인술과 인사관리 측면을 살펴봤을때 기주 입성 이후부터의 원소는 혈족중시+ 자신의 정치적 명성과 권력에 모여든 구름같은 무리들 중 적당한 인물을 필요한 곳에 뽑아 쓰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곧바로 숙청하고 다른 적당한 인물을 뽑는 식의 인사갑질를 반복한다는 인상이 유난히 두드러지는데, 권력자의 혈족중시 경향이야 조씨,하후씨의 요직 독점까지 갈 것도 없이 동서고금 무론하고 만국공통이지만(사실 조씨 하후씨 가운데에서는 정말 혈족빨로 먹고산 인물도 있지만무능대표 하후무 할 말 없게 대단한 활약을 한 인물도 있다 유능대표 조인) , 숙청의 경우 그렇게 괴멸적으로 기록이 적은 가운데 사서에 이름이 남은 네임드만 주한,장도,유훈,동소,여포,장홍,국의,경포,전풍,저수 등 측근으로 활약하다 숙청당하는 기록이 남은 인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당대 군벌들 중 도무지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정원,동탁,조조,유비,원술 등 내노라하는 군벌들 통수를 치며 배신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여포를 단물만 빨아먹고 통수친 용자라는 점에서 그 클래스를 알만하다.
충성경쟁을 조장하기 쉬운 이런 인사는 조직을 경직되고 비효율적으로 만들지만, 그만큼 우두머리의 권력은 천하무적이 된다는 이점이 있었고[75], 원소 자신도 이를 의도한 것으로 보이나 관도대전 패배를 결정지은 장합의 배신이나 관도 패배 이후 세력 내의 전국적인 반란에서 보이듯이, 외부적 요소 때문에 자신의 카리스마가 무너진다면 내분으로 헬게이트를 열 가능성이 높았다. 원소 자신은 군사,정치적인 노회함으로 번번히 위기를 극복했고, 관도 패전 이후에도 무수한 반란을 가혹히 진압하면서 오히려 신격화에 이를 정도로 세력기반 내에서의 권력을 확고히 했으나, 원소가 죽고난 뒤 후계자가 이런 카리스마를 대체하기는 어려웠고, 여기에 원소가 급사했다는 것, 원상의 나이가 어렸다는 것, 폐출된 원담이 후계에 도전했다는 것, 원상의 후견인으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 하필이면 전략적 식견도 포용력도 전무한 심배였다는[76] 것 당연하게도 이를 틈탄 조조가 쳐들어오는 등의 몇 가지 요소가 맞물리면서 최악으로 흘러가 사실상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 타이밍 완벽하게 약점을 잘 파고든 조조의 승리
종합해 보면 권모술수에 능하고 위선적이며 부하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전형적인 독재자형 용인술인데, 동탁,공손찬,여포,원술,유표 등이 특정 계파를 지나치게 무시해 반발을 사거나 혹은 지나치게 중시하다가 오히려 휘둘리거나 통수를 맞는 것과 비교하면 조직관리의 측면에선 확실히 낫다고 볼 수 있고[77], 기존의 질서나 가치관 따위는 쥐뿔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권력에만 몰두했던 만큼 인재를 보는 기준은 도적떼의 무리조차 거리낌없이 임용한다고 비판받았듯 권력에 도움이 되냐 아니냐의 합리적(?)인 관점이지, 신분과 명성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판단하지 않고 이용하다 버렸다
혈족중시 경향, 무수한 친정을 통한 군사적 권위 확보, 열사 이미지를 통한 정치적 권위 확보, 폭넓은 인사 임용,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내부 인사에 대한 가차없는 숙청과 견제, 지속적인 측근 교체와 충성경쟁 유도 등, 궁극적인 목적이 본인 1인으로의 권력 집중/강화라는 측면에서 조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보여주는 명성 관리는 완벽했으나, 실제로는 지배자로서 이기주의를 극한까지 추구하며 모든 것을 이용한 군주.조조가 패도 이미지를 가져가 배아픈 진성 패도주의자
한마디로 요약하면 조조못지 않은 간웅.
기존의 해석(연의의 영향)으로는 냉혈한 개혁가 조조와 대비되는 우유부단하고 온건한 인물로 여겨졌다. 원소는 정치적으로 관후하여 백성들에게 칭송받고 조조의 하북 평정 이후로도 원소의 정치를 그리워하는 백성들이 있었다는 기록 때문에 동탁, 원술, 공손찬 같이 대놓고 막장 통치를 하던 군벌적인 효율성만을 추구해 가혹한 정치를 편 조조와 비교해 나름대로 도덕군자였다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었지만... 사실은, 원소는 십상시를 몰아내기 위해 맹진항 사건을 꾸며 백성들을 죽이고, 3년상으로 효자 코스프레를 해놓고선 기회가 되자 낙양의 일족들을 저버리고 반동탁연합의 수장이 되는 등 위선적인 면을 보인다.
후한말 군벌난립기에 온갖 다양한 막장 인간군상이 있었지만 동탁, 원술, 공손찬, 여포는 그저 탐욕만 추구하던 악당이고 간웅이라는 조조는 오히려 직설적이고 솔직한 인물로 보일 지경이다. 후한말의 풍운아로 막장스러운 시대에 출현한 막장스러운 세기말 정치가. 말 그대로 시대가 만들어낸 압도적인 정치 괴물(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가 공존) 이라는 평이 적절할 것이다.
국내 팬덤의 경우 지속적인 미번역 사료 번역과 관련 기록 및 비문 추적, 여러차례에 걸친 꾸준한 해석과 논의로 원소의 재평가를 심도있게 파고들었던 초창기 원빠들은 빠들의 예상조차 훨씬 뛰어넘은 원소의 굉장한 능력과 거대한 존재감에 감탄했지만, 동시에 당대 기준으로도, 현대 기준으로도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패륜적인 정치력에 치를 떨며 원까를 넘어 군벌까로 전향했다(...)
영웅주의 사관의 영향이 강한 삼국지 팬덤에서 흔히 '시대를 선도하는 영웅'과 대비되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으면서 불평만 많은 지식인' 포지션 쯤으로 취급되던 공융 같은 인물이 재조명된 것도 당시 원빠들의 영향. 공융 항목에서 그 잔해를 확인할 수 있다.
원소는 삼국지의 부정적인 기록을 부풀리고 재해석한 삼국지연의의 묘사에 다시 이런저런 살이 붙으며 수구꼴통 혹은 암군 이미지로 폄하되었다. 하지만 이를 걷어내고 보더라도 기회주의적이고 부패한 정치인의 표상과도 같고, 어떤 의미로는 경지에 달한 통찰력과 카리스마로 정치,외교,행정,군사 등 다방면에 뛰어난 역량을 보인 걸물이기도 했던, 명암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여러 가지 의미로 도덕 따윈 초월해버린 문제적인 책략가. 너무나 압도적으로 도덕을 왜곡해버린 정치가라서 도리어 감탄이 나온다. 현대의 인물상에 비유하자면, 공도 있지만 과 역시 너무 뚜렷해서 평가가 극명히 갈리는 능력있지만 냉혹한 독재자 스타일의 인물이 원소다.
어떻게 보면 조조가 지닌 '간웅'이라는 인물상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크고 아름다운 수컷을 의미하는 웅자는 확실히 들어맞되, 원소의 우악스러운 카리스마를 덮기에는 부족하다. 표독스러움을 강조한다면 효웅이 들어맞는 표현이겠지만, 哮라는 글자에는 맹렬하고, 거칠고 사나운 정도의 의미가 강해 특유의 표리부동하고 음험한 위선성을 나타내기는 부족하다. 굳이 원소의 인물상에 딱 들어맞는 글자를 찾자면 간(奸)이나 효(梟) 보다는 '거스름. 일그러짐, 사악함, 혼란스럽게 함, (본질을)감춤. 갑자기 나타나다. '등의 뜻을 가진 패(悖)라는 글자가 가장 어울릴 것이다. 패왕 할때 쓰이는 패(覇-으뜸 패) 와는 다른 글자인데, ('패권주의' 할때 보이듯 覇라는 글자 자체도 별로 도덕적으로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이 悖는 보통 패륜,패악,패역,행패 등 간이나 효가 무색해질 정도로 정말 안 좋은 의미의 극단을 나타낼때 쓰이며 사실상 간과 효를 포괄하는 개념. 근데 의외로 딱 들어맞는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남겨진 원소열전 첫머리부터 언급되듯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하며, 신분과 교육수준, 성격,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타인의 환심을 사는 것에 극도로 능숙했던 것은 특유의 쇼맨쉽 덕분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루키즘에서 오는 이익 또한 엄청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6년상과 낙양에서의 재야활동/ 맹진 학살과 원씨 일족 몰살이라는 사례를 제외하고 봐도 정치 쇼를 자주 벌였는데, 동탁과 대판 싸우고 낙양을 떠날 때는 낙양성 동문에 관인과 부절을 보란듯이 걸어놓고 나가면서 동탁 집권의 정당성을 대놓고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퍼포먼스를 벌였고[78], 한복 자택에 테러를 벌였다는 이유로 주한을 참수했지만, 전풍,심배,주한을 기용하여 대놓고 충성경쟁시키듯 구 한복파에 대한 회색테러를 조장[79]했던 것이나, 경포를 시켜 칭제를 건의하도록 하다가 여론이 나쁘자 경포를 죽여 입막음해버린 사건도 교묘한 느낌을 주기는 마찬가지. 여포의 경우는 세력 내부의 여론이 나쁜 것을 감지하자 여포 스스로 원소에게 자신이 낙양으로 떠나겠다고 건의했는데, 사례교위직을 여포에게 양도하며 환송식까지 거하게 벌여놓고 뒤로는 자객을 보냈다(....). 물론 정치쇼 벌이던 군벌들은 조조유비손권 포함해 한둘이 아니지만 유독 두드러지는 편.
겉으로는 관후하나 시의심이 많다는 평가는 이런 측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나 쇼맨쉽이 꼭 이렇게 더러운(...) 쪽으로만 나타난 건 아니라서, 공손찬과의 전투에서 포위되자 도망은커녕 관모를 집어던지며 선두에서 분전해 포위를 풀거나 장연의 업성 전복 소식으로 멘붕에 빠진 참모진을 태연자약하게 하드캐리하는 폭풍간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정태는 동탁에게 아첨하면서 원소를 수도에서 나고 자라 외모만 반듯한 멀대 같은 인간이며 한주먹거리도 안될 겁쟁이로 평가했다. 정작 정태는 원소와 내통하고 있었으며 동탁의 호의를 사 군사를 얻으면 함께 동탁의 뒷통수를 후려갈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본심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본디 원소가 관료로서의 뚜렷한 군사,행정적 업적이나 기반은 거의 전무한 채 재야에서의 반정권 퍼포먼스와 여론몰이 등 명분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나쁘게 보면 정치적 선동에 가까운 방식으로 거물로 성장했던 점을 볼때 나름대로 뼈가 있는 평가. 물론 겁쟁이라는 평가는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각종 암살 위협이 빈번한 마도가 된 낙양을 내부에서 뒤엎겠다는 배짱으로 볼 때는.
한편 겉으로는 온후관대하나 희노의 (진짜) 감정을 얼굴에 나타낸 적이 없었다는 후한서의 평을 볼 때, 정작 스스로는 감정적으로 극히 절제된 채 매사에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읽고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무척 정치하는 로봇 피곤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노동에 가까운 삼년상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것도 연이어 지냈던 걸 보면 기본적인 체력이 어지간히도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자기학대에 가까웠던 생활양식은 스트레스가 쌓이기 매우 쉽고 또 실제로도 결코 장수한 편은 아니다. 때문에, 체력이 쇠퇴하는 중장년에 접어들면서 급사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유년기부터 친구였던 조조에게서 매사 자유분방하고 괄괄한 성격이 두드러졌던 것과는 매우 뚜렷하게 대비되는 부분.
익히 알려져 있듯 조조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는데, 이 때문에 라이벌 플래그를 만드는 매체들이 많다. 대부분의 삼국지 창작물에서 원소는 어린 시절부터 일방적으로 조조에게 열폭하는 모습을 보이나, 원소에 대한 기록이나 원소 자신이 남긴 글을 보면 원소는 조조를 그다지 라이벌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원소는 오히려 동탁, 원술, 공손찬을 의식했던 기록들이 많다.
오히려, 조조 측에서 원소를 의식했던 인상적인 기록들이 많다. 조조가 젊은 시절의 원소를 보며 장차 역적의 우두머리가 될 자라고 욕했다던가(황보밀 일사전), 원소의 편지 한 통에 흥분해 히스테리 증세를 보였다던가(삼국지 순욱전), 조조의 책사들이 원소를 의식하는 조조에게 양자의 재능의 차이를 비교하며 조조를 격려하는 하는 기록이 수두룩하다. 즉, 현대 삼국지에서 원소와 조조의 묘사는 정반대인 셈.
훗날의 대립구도와 개혁가 조조vs.수꼴 원소의 이미지 때문인지 서로를 경멸하는 관계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으나,[80] 오히려 원소는 조조를 잘 대접했다. 삼국지 원소전 첫머리부터 조조와 유년기부터의 교분이 언급되어 있고, 숙청을 밥먹듯이 벌였던 시절에도 원소는 조조를 동군태수로 삼고, 조조가 협천자로 원소의 뒤통수를 치기 전까지 원소는 조조를 꾸준히 후원했다. 조조 역시 원소의 무덤에서 장례지내며 곡을 한 사건을 보면 정말로 친했을 것이다.[81]
조조는 죽기 전에 쓴 유촉에서 원소를 언급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원소를 미워하는 감정이 전혀 없으며, 단지 원소가 워낙 편협하고 이기적이라 같이 왕실과 조정을 돕기로 했던 맹세를 어긴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 덧붙였다. 스스로 충신이라고 선언하는 자기 미화자뻑를 걸러내고 보면, 조조 개인적으로는 원소 가족의 말로에 대해 죽는 순간까지 내심 죄의식 비슷한 씁쓸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원소는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원담과 원상) 미적거리다가 죽었다는 말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소는 원담을 폐출시켜 원소의 대가 끊어지지 않는 이상 승작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등, 이미 죽기 한참 전부터 원담을 후사에서 명백하게 배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담이 독립적인 군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앞선 조치들은 무의미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후계자에서 강제로 밀려난 장자가 군권을 가지고 있을 경우 대부분 쿠데타가 발생했다. 원담을 죽이거나 모든 권한을 제거하지 않은 이상 반란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원소는 원담에게 군권을 주고도 뒤처리를 못 한 채 급사해 버렸으며 이는 원담의 반란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원상의 나이가 어린 상태에서 급사해버려 경력이나 권력기반이 전무한 원상이 가뜩이나 조조와의 대립이 치열한 상황에서 후사를 이어받는 모양새가 되자, 폭발하는 현실론(=원담 대세론)을 막을 수가 없었다.
원소가 원담을 폐출이라는 극단적인 형태까지 발전될 정도로 사이가 멀어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 대해서 사서상의 기록은 없다.[82] 원상을 굳이 후계자로 지목해 사후의 후계구도에 풍파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삼국지와 후한서는 모두 원상의 미모를 기이하게 여겼기 때문(...)이라 적고 있고, 삼국지 강의의 저자 이중텐은 이에 대해 '멋쟁이의 후계자는 당연히 젊은 멋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루키즘에 찌든 발상으로 해석했다. 물론, 루키즘의 이익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누렸으며 그 원소 자신도 기막혀할 정도의 미모였다면 중요한 고려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미모만으로 후계자가 됐다는 사서들과는 달리, 원소 사후 권력기반이 극도로 불안정했을 때 원상은 나이조차 어림에도 상당히 분투하며 유능한 모습을 보였다. 거꾸로 독자적인 기반도 있고 나이도 한참 많았던 원담, 원희의 행보는 심히 졸렬했다. 결과적으로 원소의 후계자를 보는 눈은 오히려 선견지명에 가까웠으며 미모만으로 후계자를 삼았다는 서술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재평가 여론도 있다. 원소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위엄이 있는 타입이라는 묘사를 볼 때, 굳이 아랫것들에게 후계자 선정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요약하자면 후계자 선정 자체는 나쁜 것보단 좋은 선택에 가까웠지만, 시대상 장자에 대한 권위, 그렇게 숙청을 잘하던 인물이 정작 후계자에서 배제한 세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 그 결과로 그 후계자의 기반을 위협할 세력을 조장시켰고 그 정리가 명확치 않은 상태에서 생을 마감함으로써 일을 크게 만들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원소는 우유부단해서 확고한 결단력을 지닌 조조에게 밀렸다는 평가가 널리 퍼져 있고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원소가 살아오면서 했던 각종 숙청이나 전략적 행동력을 보면 오히려 조조보다도 단호한 결단력을 보여준 인물이다.
예를들어, 원소는 하진 휘하에서는 거리낌 없이 십상시 주멸을 건의 했고, 십상시 주멸을 위해 거짓 반란을 꾸미거나 외부군벌을 개입시키는 것도 개의치 않았으며, 이의 부작용으로 외부 군벌 동탁이 정권을 잡고 진류왕을 천자에 옹립하자 반대로 반동탁연합군을 창설하고 동탁이 세운 천자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황손인 유우를 천자로 내세우려고 까지 했다. 당시 원소는 동탁과 대립하며, 동탁이 옹립하고 있는 천자와 이를 위시한 장안의 조정은 인정할 수 없다며, 장안 조정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신하들까지 주저없이 주살하였다.
이런 그의 과거를 살펴보면, 우유부단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결단이 빠르고 성급하였으며, 무모해 보이는 계획이라 할지라도 주저없이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었다. 살아생전 결단을 못내려서 실행이 지지부진하거나 주저한 적이 거의 없었고, 불완전한 계획일지라도 일단 실행부터 하다가 되려 뒷수습에 애를 먹을 정도였다. 예컨데 십상시 주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외부군벌을 개입시킨 결과 예기치 않게 동탁이 섭정을 맡게되어 이를 수습하기 위해 꽤 고생하였다.
더불어 애초에 원소세력이 조조에 대항해 무너진 이유도 원소의 우유부단함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원소세력이 멸망한 이유는 모든 권력이 지도자에게 집중된 체제를 형성하다가 갑자기 1인자였던 원소가 병사하는 바람에 조직의 단결력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우유부단한 원소'라는 인물평은 조조를 띄우기 위한 왜곡이라는 반론이 나오는 추세다. 굳이 말하자면, 위진 시대의 원소를 까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들이 후세에 전해진 것과 후대 정치가들에 의한 조조의 인기, 더불어 명장인 장비를 단순한 맹장으로 만들어버리고 주유를 제갈량을 시기하다 피 토하며 죽게만든 삼국지연의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원소는 우유부단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부자(傅子)》의 기록에 따르면, 멋을 부리는 경향도 있었는지 전투에 나설 때도 항상 투구를 쓰지 않았다. 대신에 점잖은 패션아이템 정도였던 모자나 두건 따위를 썼다. 이는 원소뿐만이 아니라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삼국지 8과 진삼국무쌍 3이래 노란색 투구 캐릭으로 변신한, 심지어 삼국지 영걸전 시리즈에서도 시종일관 투구를 씌워 놓은 KOEI의 작화는 고증의 에러 측면이 있다. 공개된 일러스트를 보면 삼국지 13에서도 이 에러는 여전하다
정사의 기록(원소전)에 공손찬에게 쫓길 때 "전풍이 원소를 끼고서 퇴각하여 빈 담 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원소가 두무 兜鍪(흔히 투구로 번역)를 땅에 벗어두고 말하길 “대장부가 적 앞에 당하여 죽게 되어서 담장 틈으로 들어왔으니, 어찌 살아날 수 있겠소?” 라 했다."는 구절이 있어, 부자의 주석과 달리 투구를 쓴 것 아니냐는 말도 있으나, 이 뜻은 본래 "가마"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투구 외에도 관이나 두건의 윗 부분으로도 볼 수 있다. (당장 두무의 두兜가 두건의 두다) 고로 원소가 투구를 썼다는 근거가 정사에 있다는 해석은 분명치 않다. 관을 벗어던졌으면 레알 투혼인데
원소가 전쟁과 동떨어진 듯한 복장을 한 것은 전국적으로 군벌이 날뛰던 세기말에 역설적으로 신사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선전술의 일환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원소는 군주의 위엄을 갖췄다는 자신의 외모를 극대화하여,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전쟁터에 나오는 파격적인 선전 책략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현대로 따지면 전쟁터 한복판에 제왕 같은 외모의 지도자가 전투복 대신 정복을 입고 강림해서 시크하게 폭풍간지를 날려대는 격이다.
원소는 정치 선전술의 경지를 구축한 인물이었고, 원소 자신만이 아니라 부하들까지 비슷한 스타일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여담으로 동시대의 손견도 투구를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는 머리에 화살 혹은 돌을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 실제로는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비에는 보호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직사거리에서 화살에 직격당하면 투구도 거의 소용이 없다.
(다른 집안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소(紹)라는 이름이나 적모상의 대상이 원술의 어머니였다는 황보밀의 기록을 보아 친부는 원봉이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워 보이지만 상술된 바와 같이 정확한 여부는 불분명. 상술했듯 어머니는 노비였으며, 원술과 공손찬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지만 원씨의 핏줄이 아닌 사생아라는 설이 있었다.
원봉의 자식이 맞다면 원봉의 세 아들 중 차남이나 얼자였고, 원성의 뒤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종가에서 폐출된 것으로 보인다. 정작 원소 본인이 똑같은 방법으로 장남인 원담을 폐출시켰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음침하게 보일 수 있는 출생배경이나 이름과 달리 정작 본초(本初)라는 자는 정 반대로 시초,근본이라는 의미이기에 아주 의미심장하다. 원소의 행적에 맞춰 해석한다면 기존의 원씨 일족을 모조리 쳐죽이고 자신이 새로운 원씨 일족의 시조가 되겠다는 속내를 표출한 듯 하다. [83]
한편 후한서에 따르면 원소 사후 심배,봉기와 함께 원상을 옹립한 주축인 원소의 부인 유부인은 후처라고 한다. 유부인의 출신이나 원상의 생모가 맞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원소가 원상을 후계자로 삼은 이유가 황족 출신인 유부인의 소생이라 외가 쪽으로는 황실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본인이 아니더라도 차대에 원상을 통해 원씨 왕조를 세우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떡밥이 있었다.
원소 사후 유부인이 총첩 5인을 살해했다는 전론의 기록을 봤을때 상당히 많은 첩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 젠틀한 이미지를 표방했지만 이쪽도 여자 밝히기로는 친구인 조조 못지 않았던 듯(...)[84] 삼국지와 후한서는 일관되게 원소의 아들이 원담,원희,원상 셋 뿐이라 적고 있기에[85] 어쩌면 딸부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원소가 죽고 조조가 원소의 후계자 원상을 격파하여 업을 함락했을 때, 조조와 조씨 일족은 많은 원소의 딸과 며느리들을 범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원희의 부인이었던 문소황후를 빼앗아 강제로 처로 삼은 것이다. 공융은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왕은 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를 주공(周公)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조조와 조씨 일가를 조롱하는 말이었는데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하던 조조는 공융이 워낙 박식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웃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융이 경전을 인용해 자신을 두둔한다고 착각했다.[86]
첫판왕 동탁과 중간보스에 해당하는 여포, 원술에 이은 최종보스. 한때는 조조조차 그에게 투항하려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고, 관도대전 이후로도 넘사벽의 세력비를 유지하여 중국의 최강자로서 죽었다. 조조는 원소가 살아있을 때까지 싸움은 커녕 수비하기도 급급한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최종보스. 하지만 결국에는 깨지니까 최종보스인거다.
위의 오해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원소는 협천자 논쟁으로 뒤통수를 맞기 이전까지는 조조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원소는 자신의 처지가 약소했던 시절부터 조조를 꾸준히 지원했으며, 오히려 조조 측에서 원소에 대한 열등감을 보인 기록이 많다. 그 잔인했던 조조가 원소의 무덤에서 곡을 하고 죄책감을 기록으로 남긴 것도 이런 관계 때문이었다. 후대 삼국지 창작물들이 얼마나 왜곡이 많은지 알 수 있다.
삼국지 무제기에서는 원소의 가족에 관련된 서술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관도 대전은 매우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원소전보다 무제기에 실린 내용이 더 풍부하다. 조조의 일대기 자체가 조조 vs 원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무제기의 인물평[87][88]에도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는 등 여러가지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훗날의 촉과 오 역시 강한 세력이었으나 각각 산맥과 강이라는 지형적인 장벽을 두고 오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반면 원소는 황하를 두고 허도의 바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의 생존 자체를 결정할 수 있었다. 심지어 무제기는 유비나 손권보다도 원소의 후계자들과의 싸움인 원상, 원담에게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고, 위서 유이열전에서는 오와 촉의 신하들은 (원소 시대) 기주의 병사들에 미치지 못하고, 손권과 유비 역시 원소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물론, 위는 유비의 한중왕 선언으로 조조가 제대로 엿먹기 이전의 평가라서, 위의 문장만으로 다른 인물들까지 평가해선 안 될 것이다. 아무튼 조조의 일대기에 자기 열전만큼 기록이 많다는 점만 보더라도, 조조의 인생에서 적으로든 친구로든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은 인물이었다. 조조에게 원소는 본편의 최종보스, 유비는 확장팩의 히든보스 쯤 될 것이다.
비록 신뢰성 면에선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나무위키지만 후한 삼국시대에 대해 진수의 삼국지 정사와는 그 내용이 많이 다른 후한서의 기록을 토대 분석한 글이라 흥미로워 퍼와봅니다.
글 전체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눌러 나무위키로 가시길.
첫댓글 아 이 원소구나..
ㅋㅋㅋㅋㅋㅋ
원소라길래
"수헬리베붕탄질산플네나마알규인황염아칼칼"인줄...
ㄹㅇ 그리고 삼국지 나오길래 당황
역사게시판이구나 제목만 보고 학술게시판인줄..ㅋㅋ
ㄴㄴ 2222
뭐야...내가 생각하던 원소가 아니잖아
이 원소일줄은...
모두가 하나된 생각
모에빔맞은 수소생각하면서 들어왔는데
불 물 땅 공기 생각했는데...
요즘 삼국지 방송을 봐서 그런가 바로 삼국지 원소 생각났네요. 용주!
원소가 연의보다는 상당히 뛰어난 사람이라고는 알고있었는데 이정도일줄이야
ㅇㅇ 사람들이 관도대전 이후만 기억하는 바람에 우유부단하고 미련한 인물로 오도되는 인물이죠. 실제는 미천한 하인에서 시작해 일본을 통일하고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정치력과 군사적 능력 뒤지게 뛰어난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