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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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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자유게시판 스크랩 진주 용암사지. 열불 나는 훼불 현장
교남 추천 0 조회 199 09.05.13 16:1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진주 용암사지 불교문화재 관리 소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절터에 더부살이 신세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역사가 농축된 현장

성보문화재 해체되어 문중재실 부재로 마구 사용

입구의 축사 등 관람환경과 관리대책 절실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는 신라말~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한

용암사(龍巖寺) 옛 절이 있던 곳이라 동네 이름이 용암리다.

 용암사는 도선국사가 성모천왕으로부터 “세 개의 암사(巖寺)를 창립하면

삼한(三韓)이 통일되어 전쟁은 저절로 그치게 된다”는 부촉을 받고,

선암사(仙巖寺)·운암사(雲巖寺)와 함께 이 절을 지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고,

고려시대 용암사는 웅장하고 화려했었는데,

충숙왕 1년(1314년) 무외국통(無畏國統)은 용암사를 크게 중창하였고,

1318년에는 80여 칸의 당우를 새로 짓고 20여 칸을 중수했고,

왕명에 따라 대장경(大藏經)을 만들고, 부족한 장경(藏經)을

강화도 판당(板堂)에서 찍어와 무려 600여 함의 상자에 넣어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는 곳이다.

 

산속 외진 곳에 자리한 복주머니 형국의 이 절터는,

임진왜란 이후 이 지역에 터전을 잡은 공신 정문부(1565~1624) 공의

후손들 세거지가 되면서부터는 마을과 함께 용암사 터도

해주 정씨 문중의 사유지로 바뀌었고,

일부 남은 불교문화재는 옛 주인이었지만,

지금은 남의 땅이 돼버린 사유지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참담한 실정이다.

현재 남아있는 불교유물은 보물 372호 용암사지부도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4호 석불좌상,

그리고 비지정문화재인 석등과 홍자국통비석이 있고,

절터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해주 정씨 재실인 장덕재(章德齋. 1945년도 이전 건축물)에도

탑재(塔材)를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해체되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재실 짓는데 탑 한 채(기)가 다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이외에도 전각을 이루었을 많은 석재들이 재실 혹은 부속물로 전용되어 있으며,

절터입구를 재실과 관리사 등이 점유하고 있고,

절터를 찾는 방문객들은 남의 마당과 건물을 돌아

뒷마당에 가서야 옛 절터를 만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문 앞은 관리사에 거주하는 관리인이

농업과 축산업을 하는 관계로 축사(소 우리)와 분뇨,

사료더미 등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이곳을 방문하여도 절터라는 분위기를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환경이다.

 

현재 남아있는 유물 중 보물로 지정된 부도도

1962년도에 원위치를 벗어나 파손된 채 산속에 방치된 것을

수습해 제자리에 보수하여 모시면서 1963년문화재 지정을 하였으나,

일부 결실된 부분을 보충한 부재는 원 모습과 달리 밋밋한 모습이다.

원래 중대석에는 당시 유행한 운룡문 조각이 아름다웠다는데,

지금은 아무 조각이 없는 화강석으로만 보충하였다.

 

 

이런 실정을 감안해 진주시에 대책을 질의하였더니,

“지자체에서 할 수 있는 권한은 없고, 나름대로 개선방안을 세워 정씨 문중과 협의하였으나,

토지소유자인 문중에서 응하지 않아 어쩔 도리가 없으며,

다만 입구의 축사를 비롯한 주변 환경은 문중에서 관리인에게 철거를 권유하고 있고,

관람·참배를 금지하지는 않으니 별도의 진입로는 필요치 않다”는 답변이었다.

 

국가지정 문화재를 비롯한 소중한 문화재가 있고,

1200년 역사의 옛 대가람이 어떤 사정에서 비롯됐든

소유권에 가로막혀 제 모습을 잃고 있다는 것은,

소유권의 문제보다도 더 상위개념인 보편의 양식과,

문화민족으로서의 책무를 도외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더구나 문중은 용암리 마을(본동)에 대규모의 정문부 공 사당

충의사(忠義祠. 경남도문화재자료61호)이 있고,

충의사에는 용암사터에서 보관하다가 옮긴 정문부 공의

문집 경판을 보관하는 경판고를 비롯한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는데,

굳이 절터를 점유해야할 당위성도 없어 보인다.

 

문화재청을 비롯한 관계기관에서는

정씨문중과 협의·보상을 통해 용암사지를 복원하고,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문화재 보수와 제 자리 찾기,

정확한 사료확인을 거쳐 역사적 사실규명에도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뜻있는 불교단체들의 적극개입이 요청되는

참담한 또다른 유형의 훼불의 현장이다.

 

가까이에 위치한 경남수목원에 들렀다가 안내판을 보고 이곳을 어렵게 찾았다는,

 마산에서 왔다는 한 답사객은 사찰의 전각과 탑의 부재가 재실건축에 사용된 모습을 보며

“자기 조상 귀하면, 남의 역사도 존중해야 진짜 양반”이라는 소감을 말했다.

한편, 안내문 등에 고려시대 폐사 추정부분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된 내용으로 봐서
어떤 형태로든 조선시대 즉 정씨문중의 점유 때까지는
사찰이 존속했었다는 설도 숙고해야 할 것이다.

                    <사진>

 

 1. 용암사지를 가로막고 있는 입구의 환경

 

 

2. 용암사지를 점유하고 있는 재실의 정면 (대문 안으로 재실인 장덕재가 보 이고, 그 건물 뒤 옹색한 터에 불교유물이 있다)

 

3. 사유지로 바뀐 옛 절터. 뒷마당인 셈이다.

 

4. 재실인 장덕재에 탑재 등이 사용된 모습

 

5. 경남도유형문화재4호 석불좌상

(지장보살 형상에 지권인을 한 독특한 모습)

 

6. 비지정 문화재인 석등(앞)과 보물372호 용암사지부도

 

7. 홍자국통 비석(비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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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5.13 21:24

    첫댓글 너무나 소중한 자료를 올려 주셨습니다. 옥룡자 도선국사께서 창건하셨다는 용암사지에 얼마나 많은 분들의 애원들이 서려 있을지 생각못한 파렴치한들 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전국 곳곳에 이와 유사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주 남산의 천룡사지에 가서보면 통일신라때의 유물들이 묘지앞에 제단용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많은 유물을 찾아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용암사지도 슬기로운 분을 만나서 잘 보존되기를 기원합니다.

  • 09.05.13 21:38

    수고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성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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