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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7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사도 8,26-40
복 음 : 요한 6,44-5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생 때, 영적 독서를 추천받아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책으로 샤를 드 푸코 성인의 영적 수기였습니다.
성인은 프랑스 군인이었다가 퇴역 후 모로코 탐험가가 되었습니다.
그 뒤 성지순례를 갔다가 예수님을 선택해서 사제가 됩니다.
특히 무려 30년 동안 거칠고 힘든 노동을 하며
단조로운 일상 안에서 예수님을 선택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끝자리를 원했기에, 그 자리를 빼앗으려고 드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성인은 가난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하라 사막으로 가셨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하느님을 깨닫는 행복을 누리셨습니다.
그의 좌우명은 ‘예수 사랑’이라는 두 단어였습니다.
성인의 책을 읽으며, 저 역시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가 된 후, 오히려 세상의 것만을 보고 있었음을 반성합니다.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저의 영광을 드러냈던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단순히 고급 스포츠를 즐기지 않고, 비싼 물건을 소유하지 않으면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관한 생각으로 하느님을 온전히 만나고 있지 않았다면,
영적인 갈증 속에서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인께서 보여주셨던 그리고 가장 먼저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화려하고 풍족한 겉모습이 아닌, 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끝자리 선택을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끄신다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궁극적인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구원을 받는 사람은 예수님께 오는 사람,
곧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은 이사야 예언서에 예언되었듯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 제자가 된 사람들이며,
이들만이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 스스로를 ‘생명의 빵’이라고 이야기해 주십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굳게 믿는 사람은 주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려하고 풍족한 겉모습이 중요한 세상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겸손 안에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삶으로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생명의 빵’이신 주님 안에서 진정한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의 어린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경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었지만,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경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보여졌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고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그때 이미 신부가 되었습니다.
훗날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신앙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믿음은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응답의 책임이 필요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한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하고 말씀하셨듯이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오시는
아들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고 선언하셨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통하여 살아있는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하십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말합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고해성사야말로 영혼과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시켜주는 매우 훌륭한 방법입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모시기 바랍니다.
성체는 살아계신 예수님이십니다.
“별로 할 일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우 할 일이 많은 사람도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많이 영성체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영성체로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명나라 시인 진계유는 “뒤에야 알았네.”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시인은 ‘후회’의 감회를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후회는 선택에 대한 감정이 많습니다.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의 청을 거절하고 그 선택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책을 읽고 기도하기보다는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에 시간을 빼앗긴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받았던 제자 유다는
예수님께서 잡혀간 뒤에야 자신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값으로 받았던 은전 서른 닢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후회는 감정은 있지만 행동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후회는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처럼
행동이 있어도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회개는 후회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와 후회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후회는 감정이지만 회개는 감정을 넘어서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크게 성공한 야곱은 형에게 돌아와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형은 동생 야곱을 따뜻하게 맞이하였습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니네베 백성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유산을 모두 탕진한 둘째 아들은 거지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잔치를 벌여 주었고, 아들에게 반지를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은 비록 그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로 가는 사람일까요?
후회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도 예수님께 갈 수 없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것처럼
여전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할 것입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조롱하고, 가시관을 씌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은폐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힘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느닷없이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는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한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 대한 성경 말씀을 듣고
기꺼이 세례를 청했던 에티오피아 사람도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10일 동안 요르단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삶의 터전으로 돌아갑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얻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며
후회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회개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가는 것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그리스도께 갈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선물 덕분에 그리스도께로 왔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 가는 길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사랑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다.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방법은 강요가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이끄신다.
이 이끄심은 하느님의 일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절)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아드님은 그 말씀을 듣는 이를 끌어당기신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죽음을 취하셨고, 죽음을 이기도록 돌아가셨다.
이 생명께서 당신께서 취하신 육에도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분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당신의 말씀을 시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양식이요 생명으로 주신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언제나 갈망으로 배고파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 음식을 갈망할 때,
그들은 한층 더 흡족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빵을 통하여 그분과 한 몸, “그분 몸의 지체”(에페 5,30)가 된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이 빵이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하늘의 빵이 되게 하시며 생명을 주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51절)
그분은 아버지의 완전한 빵으로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
우리가 당신의 삶을 통하여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아버지의 영인 불사의 빵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 빵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많은 밀알이 모이고 갈리고 섞여서 하나가 되어 빵이 되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주님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고, 그 몸을 통하여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생명을 주신 말씀은 육안에 머무르고 계셨기에 그 육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만드셨다.
그러기에 그분의 몸은 그것을 먹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 몸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말씀으로 완전히 충만해진 그 몸은 부패를 사라지게 한다.
이 성체성사를 잘 준비하고 영하여야 할 것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사도행전은 사마리아로 갔던 필리포스의 또 다른 활동을 이어서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필리포스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자쪽으로 내려가는 외딴 길로 가라고 하지요.
그곳에서 필리포스는 에티오피아 여와이 내시를 만나는데
그는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왔다가 돌아가는 수레에서
이사야 예언서 ‘수난받는 주님의 종 넷째 노래’(이사 53,7-8)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필리포스가 천사의 말대로 수레 가까이 다가가 고관에게
성경의 그 내용을 이해하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그가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라고
필리포스에게 대답합니다.
그 고관은 필리포스에게 예언자가 말하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그제야 필리포스는 그 고관에게 예언의 내용인 ‘주님의 종’이
바로 예수님에 해당 된다고 설명하지요.
그러자 고관은 필리포스에게 세례 받기를 원하지요.
필리포스는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고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다른 곳으로 가게 합니다.
그래서 필리포스는 아스톳에서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오천 명을 위하여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베푸신 후에
계속 이어서 ‘생명의 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과의 일치에 대해서 설명하시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만나와 연결시켜서 생명을 주시는 빵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만나’라는 것은,
조상들로부터 들어 온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시나이 사막에서 유랑할 때
하느님께서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내려주신 것입니다.(탈출 16,35)
하느님의 대리자 모세의 말을 듣고 희망과 함께 이집트를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은
사막에서 당장 생의 위협을 겪는 것은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말합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탈출 16,3)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모세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주실 것인데,
매일 먹을 만큼의 양식만 거두어들이라고 이르시며 그들에게 만나를 내리십니다.
성경 본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14-15절)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음식을 ‘만나’라고 했는데
그것은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맛이었다.
그리고 탈출기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착지에 도착했을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 길갈에서 첫 파스카 축제를 지냅니다.
여호수아 본문을 그들이 먹던 만나와 연결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 후로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당년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여호 5,10-12)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을 가진 ‘만나’는
글자 그대로라면 ‘만 후’라는 발음일 것입니다.(탈출 16,13-15; 민수 11,9)
신명기 저자는 이 만나에 대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깊은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2-3)
신명기 저자는 당장 생명을 부지하는 육신의 빵은 사라지지만
영혼을 살리는 하느님의 말씀은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에 바탕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와
당신이 주시는 생명의 빵과 비교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 6,49-50)
성체성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주님의 몸은 죄인을 살리시는 생명의 빵이신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에게, 사람들에게 보내시더니,
이번에는 사람들을 아드님에게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과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고 엮어 주신 것이지요.
이 관계 형성의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 하시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대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구원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필리포스의 선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령께서 이르시는 대로 어떤 수레에 다가간 필리포스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에티오피아 궁전의 고관인 한 내시를 만납니다.
그는 이사야서 53장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를 읽는 중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사도 8,33)
대목에서 멈칫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내시라는 신분은 보통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권력에 근접해 있기는 하지만
보통 사람이 누리는 생명을 이을 권리는 내려놓은(박탈당한) 이들인데,
말씀은 대개 읽는 이의 실존을 건드리며 다가오시기에 그렇습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8,31)
말씀을 읽고 다가오신 말씀에 머무르는 자체는
이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 현존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현존을 알아보고 깨닫는 눈은
아버지의 이끄심으로 열린다는 걸 그 내시가 고백한 셈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시지요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러니 예수님 곁에 모여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는
이미 아버지의 손길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엮인 사람들입니다.
복음 후반부에서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점층적으로 열립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하시더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3) 하시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누구나 곡식 가루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빵"과,
인간 육신을 구성하는 "살"은 둘 다 생명을 지탱하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재료와 중요도 면에서는 천지 차이의 가치를 지닙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 자식 입에 넣어 줄 빵을 사다 건네는
인간 부모의 사랑도 참으로 고귀한데
예수님은 당신 생명인 "살"을 주고 먹으라 하십니다.
결국 아낌없이 목숨을 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예수님의 살이 일시적으로 배를 불렸다가 꺼지는 물리적 빵과 비교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영원성"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고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주어졌던 지상의 생명을 초극하는 은총입니다.
다시 독서의 내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필리포스를 통해 "예수님에 관한 복음"(사도 8,35)을 전해 들은 내시는 자원하여 세례를 받습니다.
보통 사람이 영원성에 대한 본능적 생명 욕구를 자자손손 이어지는 후손을 통해 성취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의 살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영원히 살 것이라 하니
그에게는 진정 기쁜 소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시는 통에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사도 8,39)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내시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시기 위해 쓰신 도구(필리포스)가 사라졌어도
말씀을 통해 기쁜 소식을 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그는 개의치 않습니다.
기쁘게 제 갈 길을 갔다는 표현에서 그가 이미 영원한 생명에 들어섰음이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서는
우리 신앙생활의 두 축인 말씀과 성체에 대한 본질이 담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으로, 성체로 현존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말씀과 성체께로 이끌어 주시며,
성령께서 이를 알아듣도록 우리 내면을 들썩이시고 불을 놓으시고 감응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한 삼위 하느님의 협력에 순응하는 이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요한 6,47) 것입니다.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기 여호수아 수녀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빵을 먹으라고 하신다.
그래서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다.
빵이 된다는 것..
먹이가 된다는 것..
먹힌다는 것..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외양간의 구유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이신 예수님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오신 것으로도 모자라
동물의 먹이통인 구유에 뉘여짐으로써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이
우리의 밥이 되어,
살이 되어,
피가 되어
–희생하심으로-
세상을 구원으로 이끄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밥이 되심으로
우리는 늘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된다.
그 사랑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그 사랑이 우리에게 스며든다는 것이고
그 스며든 사랑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삶을,
빵의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끝까지 드러내셨다.
그 사랑에 완벽한 보답은 결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나도 작은 ‘사랑의 빵’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출처] 요한 6,44-51 부활 제3주간 목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