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 동안 속해있던 교회를 떠나, 지난 3월 초 영천에 있는 실로암교회로 적을 옮기고 약 100일 동안의 손님생활을 거쳐 정교인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나와 가족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고민을 하였다. 사실 많은 고민들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가는 것도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혹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형제가 있다면, 그래서 먼저 고민하고 행동한 경험이 유익이 있을 수 있다면, 몇몇 정리되지 못한 단상들이라도 정리해 보는 것이 유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일정한 형식이나 주제를 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 볼 생각이다.
오늘은 먼저 교회생활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며 실제라는 주제를 나눠볼까 한다.
개혁주의 신학을 천명하는 고신교단 출신이지만 30대 초반 전후해서야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신학에 대해 눈을 뜨게 된 나는, 제대로 된 개혁주의신학과 신앙에 대해 공부할 생각으로 <기독교강요>를 시작으로, 교단 교회가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비롯해 개혁교회가 채택한 3일치 신조들을 혼자 공부해보기 시작했다.
너무도 감사하게도 <기독교강요>는 공부해보고자 하는 멤버들을 만나 몇번을 되풀이해 공부하게 됐는데, 그럴 수록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모습과 너무도 큰 괴리를 느끼게 되었다. 저마다 칼빈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칼빈의 신학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의 교회들. 자기들의 생각과 욕망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것을 하나님도 기뻐할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하는 죄악들...
또 벨직, 하이델베르크, 도르트신경 등 개혁교회들이 고백해온 신앙고백들은 물론, 대부분의 장로교회가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웨신의 내용과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너무도 거리가 있었다.
당연히 오랜시간을 고민하게 됐다. 신앙의 절대표준인 성경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이고 교회 가운데 구현하는가를 정리한 신앙고백 문서가 무시당하고 외면당한다면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라 자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신앙의 선배들은 왜 그런 신앙고백을 작성하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며, 상속해 가는 것에 자신들의 생명을 걸었단 말인가. 그것이 그만큼 절박하고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같은 의미는 동일하게 받아들여지고 적용되어져야 했다.
주로 고민한 내용들은 직분과 성례, 계시(sola scriptura와 tota scriptura), 교회 등이었고 성경원리가 현실에 가려지고 왜곡되는 모습에 가슴 아팠다. 목사 장로 집사 3직분이 어떤 사역을 해야 하는지, 교회 가운데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에 의한 사역.... 성례의 의미가 오염되는 특히, 진중세례-당회에 의한 고백을 확인하는 절차가 생략되거나 최소화된, 주기적인 성찬이 가능할 수 없는-와 강단초청, 인간적 권위에 의해 성경의 원리가 잠식되는 교회의 사역 등등....
<웨신>의 더 순수한 교회와 덜 순수한 교회, <벨직>의 참교회와 거짓교회 사이에서 난 8년여의 시간을 고민했다. 그리고 마지막 공동의회를 통해 '자의반 타의반' 난 고민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난 지금.
교회의 삶은 이론이 아니었다. 바르지 못한 현실에 대한 반작용도,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며 바르지 못함을 정당화할 일도 아니었다. 교회는 삶이었고, 완전할 수 없지만 표준을 지향하며 걸어가는 실체적 삶이었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이신 성령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에, 말씀의 지시를 따라 직분(자)을 세워 교회를 당신의 뜻대로 다스려 가시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직분은 그래서 너무도 중요하며 직분의 상호견제와 협력을 통해 교회의 온전함을 지향하게 하신 것이다.
이곳에서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장로들은 심방을 하고 당회를 통해 교회의 영적인 문제를 다뤄가고, 집사들은 교회의 재정문제와 자비와 구제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누구도 교회에서 주장하는 자세를 가질 수도 없고 그러지도 않는다. 신실하게 직분을 담당하고 합당한 권위와 존중이 있다. 직분자들은 상호 평등하며 직분적 사역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더 오랜 시간이 흐르고 교회생활을 계속하면서, 이곳에도 문제가 있고 있을 것이지만, 말씀의 원리를 따라 가야 한다는 원칙이 분명한 교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소교리문답과 히이델베르크문답을 통해 스스로의 고백으로 성찬상에 나갈 수 있도록 교육받고 있으며, 어른들은 교회 가운데 세상의 가치와 원리를 가져오지 않는다. 교회의 상속을 생각하며 신앙을 전수함에 있어 성경이 말하는 그 신앙, 16,7세기 개혁자들이 다시 분명히 했던 그 신앙에서 벗어나거나 생소하지 않은 모습을 붙잡고 그것을 상속하려 한다.
개혁교회는 이론이 아니라 교회적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드러날 수 있는 실제이다. 너무도 뒤섞이고 혼돈속에 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고 포기할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로 드러나야 하고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 여러가지 제약이 있어 첫번째 글에 아쉬움이 많다. 하지만 앞으로 몇가지 구체적인 주제들을 차분하게 다루게 된다면 이런 아쉬움은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첫댓글 이직 등의 이유로 한동안 서울 주변의 알려진 개혁주의 교회를 찾아 방문하며 헤매(?)다녔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개혁교회라면, 개혁주의 신학 이론에 기반을 둔 그 교회적 삶이 가시적으로 꼿꼿하게 드러나 보일수 있는 실제적 교회여야 한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지금은 개혁교회를 찾아 교회적 삶을 드러내며 살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최재호님의 첫번쩨 글을 읽고 님의 지남 글들과 생각이 과정이 어떠한 것일까 아주 가끔 궁금 했는데
그렇구나 하는 끄덕임이 있었습니다
글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