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0년 만에 발견된 미륵사탑 사리장엄. 2002년 본격적인 해체 조사가 진행되면서 1층 해체 조사를 추진하던 중 유물 505여 점이 나왔다. 목탑을 딴 석탑인 미륵사지석탑. 목탑은 대개 심초석 아래에 사리기가 안치된다. 그런데 이번엔 심초석까지 내려가기도 전인 1층에서 사리기가 우연찮게 나온 것이다. 그 발견은 놀라운 우연이었지만 국보 중의 국보였다.

▲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금제 사리호의 발견

◀ 미륵사리호. 동체를 상하로 각각 나눠 제작하여 내부에 소형 사리함을 안치해 조립하여 완성할 수 있는 이중구조이다. 매우 훌륭한 국보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제 무왕 대 창건 된 사찰인 미륵사. 무왕과 그의 부인이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므로 경의를 표한 뒤 부인이 왕에게 절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니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고 절을 짓는다. 미륵사지석탑은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규모가 장대하고 석재를 사용하여 목재탑을 표현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의 시원으로 그 가치가 크다.

◀ 미륵사리호의 정교한 문양
미륵사지석탑은 2002년부터 본격적인 해체 조사가 진행되면서 1층 해체 조사를 추진하던 중 심주석 상면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되고 내부에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이 발견되었다. 목탑의 경우 심주는 그냥 하나의 커다란 기둥이기 때문에 비록 석탑으로 만들었지만, 목탑양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심주에서 무엇이 나올 것이란 예상을 아무도 하지 못했다. 미륵사 해체는 21세기의 첨단 장비를 모두 활용했다. 200여개의 석재를 정밀 3D 스캔해 일일이 저장하고 발견된 사리호를 X-ray 촬영한 결과 내부에 사리병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 탑에 서식하는 미생물 분석을 위해 생물학자까지 투입하는 그야말로 대작업이었다.
유물 출토

◀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
1층 심주석 중앙에 방형 사리공을 설치하고 그 바닥에 바닥면을 덮을 수 있는 크기의 판유리를 깔고 그 위에 다양한 공양품을 차례로 안치하였다. 먼저 사리공 사면 모서리에 원형합 6개를 두고 이들 합들 사이에는 녹색 유리구슬을 채운 뒤 남측에는 은제관식과 금제소형판들을, 북측에는 직물에 싼 도자(작은 칼) 5자루를 두고, 서측에는 2자루의 도자를 각각 올려놓았다. 그리고 남측 벽면에 비스듬히 금제 사리호를 올려놓고 정 중앙에 금제 사리호를 안치한 상태로 확인된다.

◀ 사리공(구멍)에서 출토된 유물들
또 <금제사리봉안기>는 백제 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에 탑을 조성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발원문이다. 금판 앞뒷면에 한 줄에 총 194자를 새겼으며 특히 앞면에는 금판에 음각하고 붉게 주칠하여 문자를 더욱 선명히 드러나게 했다. 이것은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금석문 자료인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는 유물인 것이다.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
백제시절 왕이 주도하는 사리 공양에는 몇 급 관리까지 참여했을까. 사리장엄에서 발견되는 금제소형판은 백제의 4급 관리인 '덕솔'이 공양에 참가했음을 나타내 주는 유물이다. 이는 사리 공양에 참가하는 백제 관리들의 실태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공양 참가자의 직위가 있는 기록은 지금까지 없었으며 이를 통해 관료 중에서 4급 인물이 사리 공양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은제 관식. 얇은 은판을 겹쳐 대칭되게 제작한 관식이다. 중심 줄기 좌우에 당초문과 꽃봉오리 형태로 장식 하였다. 관식은 당초문과 꽃봉오리 장식 1단과 2단의 2종이 확인되었다
또한 출토된 은제관식 2개를 분석하면서 한 개는 매우 정교하게 세공돼있고, 다른 하나는 정교함이 떨어지는 점에 비춰, 1,2,3급이 착용하는 은제관식과 4,5,6급이 차는 은제관식으로 나눠졌을 가능성이 있어 백제의 관등 조직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물이 되고 있다. 더불어 백제의 정교한 금속공예술을 엿볼 수 있다. 또 ‘사륙변려문’을 구사해 백제 무왕 시대에 이미 한문에 대한 교육과 이해 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리기에서 무왕은 ‘대왕폐하’로 아내는 ‘왕후’로 지칭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당시 백제의 자주적 세계관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물고기알 무늬(어란문: 魚子紋)를 가득 찍는 것은 중국 수·당 때 유행했고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퍼진 서역 기법인데, 삼국시대 사리기에서 온전히 표현된 사례는 처음이다.
과연 서동요 설화는 가짜인가?
미륵사와 왕궁지에는 무왕의 소망이 들어있다. 관세음응험기와 익산 천도, 왕궁리 석탑의 사리장엄은 무왕을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미륵사는 마지막 백제의 부흥을 위한 무왕의 애끓은 증표이자 살아있는 백제를 구현해 주는 마지막 유물인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봉안기에는 미륵사 건립 발원자가 백제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금제사리봉안기에 한문으로 된 “我百濟王后佐平沙積德女(나 백제의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내용은 <백제 왕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한명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판독자에 따라 <백제 왕후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두 명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무왕이 여러 명의 왕후를 뒀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번 사리장엄의 출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새로운 의문을 던져 주고 있다.

◀금제사리봉안기(앞면과 뒷면)
《삼국유사》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백제 서동왕자가 왕이 된 후 용화산 아래 미륵사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석탑 조성의 내력을 밝힌 금제 사리봉안기를 통해 미륵사 창건 주체가 백제 무왕의 왕비이자 백제 최고관직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밝혀짐에 따라 미륵사는 백제의 독자적인 기술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커졌으며,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결혼 자체에도 의문점이 남는다. 과연 그들은 설화처럼 사랑하는 사이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