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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Ⅰ. 머리말
Ⅱ. 수도의 개념과 명칭
Ⅲ. 수도의 위상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수도(首都)란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위치하는 도시’를 가리킨다. 전근대 왕정 시기에는 국왕의 소재지가 곧 수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근대 이전에는 수도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고려사』·『고려사절요』와 조선왕조실록에서 수도는 검색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수도라는 단어는 근대 이후에 들어온 capital의 번역어인 것으로 보인다.
전근대에 수도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해서 수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개념사 연구자들의 말을 인용하면, 근대적 수도의 개념이 전근대에는 어떤 용어들로 표현되었는가, 그 용어들은 언제 어떻게 근대적 수도의 개념으로 수렴되었는가 하는 문제들이 탐구되어야 한다.1)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한국사에서 수도의 개념을 네 사람의 연구자가 각각 고대·고려, 조선 전기, 조선 후기, 근대
* 이 논문은 2010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인문사회연구역량강화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0-413-A00002).
1) 나인호, 2011 『개념사란 무엇인가 -역사와 언어의 새로운 만남-』, 역사비평사
2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이후 등 4시기로 나누어 연구하였다. 이 공동연구는 근대적 수도의 개념을 먼저
정의하고, 근대적 수도 개념을 표현하는 전근대 용어들을 조사한 다음 각 시기별
로 수도의 개념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수도를 가리키는 전근대 용어들을 정리하면서 각 시기별 수도의 위상을 함께
검토하였다. 한국 전근대에는 경도(京都), 경성(京城), 도성(都城), 왕도(王都) 등
다양한 단어들이 수도를 가리켰지만, 같은 단어로 지칭된 수도의 위상은 각 시기
별로 달랐다. 이러한 변화를 통시적으로 정리하면 곧 한국의 수도사(首都史)가
될 것이다. 이 논문은 그 가운데서 고대, 고려시대 수도의 위상 변화에 초점을 맞
추어 정리한 것이다.
국왕이 소재하는 수도는 언제나 여러 도시들 가운데 수위(首位)에 위치하였다.
더욱이 본격적인 다경제(多京制)나 배도(陪都)의2) 전통이 약했던 한국의 경우 수
도의 독점적 위상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 고려시대에는 수도의 독
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었는데, 우선 계서적인
지방제도에서 수도를 군현 위계의 정점에 위치시킨 것이 그것이었다. 그뿐 아니
라 신라의 경위(京位)·외위(外位) 제도 및 골품제, 고려의 본관제 등 시대별로
독특한 제도를 통해 수도의 위상을 뒷받침했다. 이러한 제도들은 모두 지역 간
위계와 경(京)·외(外) 차별, 즉 수도·지방의 차별을 바탕으로 성립되고 운영되
었으며, 결과적으로 수도의 독점적 위상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 논문은 이러한 가설을 바탕으로 고대 삼국과 고려시대 수도의 개념과 위상
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먼저, 고대·고려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어떠한
것들이 쓰였는지, 그리고 각국 수도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해보았다. 수
도의 위상과 관련해서는 지방제도에서 경·외 차별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살
폈으며, 이어 신라의 골품제와 고려의 본관제가 경·외 차별을 통해 수도의 독점
적 위상을 유지하는 기제가 되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전근대 수도
의 위상 변화를 통시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한국의 수도성(首都性)을 특징
짓는 것으로 생각되는 ‘차별과 독점’의 역사적 연원을 찾아보자 하였다.
2) 多京制란 중국에서 흔히 나타나는 三京制, 兩京制 등을 가리키고, 陪都란 정식 수도 외에 따로 건립한 보조 수도를 말한다. 중
국의 陪都에 관해서는 조영헌, 2011 「원·명·청 시대 首都 북경과 陪都의 변천」 『歷史學報』209 참조
서울학연구 LⅡ (2013. 8) 3
Ⅱ. 수도의 개념과 명칭
한국 전근대, 특히 고대 삼국과 고려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로는 경성(京
城), 경도(京都), 경사(京師), 도성(都城), 도읍(都邑), 왕경(王京), 왕도(王都), 왕
성(王城), 황도(皇都)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3) 이러한 단어들은 각각 독특한 의
미와 쓰임새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 사용함에 있어서 엄밀하게 구분
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경성과 도성, 왕성은 건축물로서 성(城), 또는
성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어서 그저 수
도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았다. 또 경사와 황도는 중국, 즉 책봉-조공 관계 아래
서 책봉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말로서 특별한 쓰임새가 있었지만, 고려에서 자존
(自尊)의 의미나 아칭(雅稱)으로 고려 수도를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었다.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는 이처럼 다양했으며, 시기별로도 조금씩의 차이가 있
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 고대 삼국과 고려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
들을 찾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에서 삼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경도와
왕도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4) 『삼국사기』에서는 경사가 13회,5) 경성이 7회, 왕성
이 5회, 도성과 왕경이 각 4회, 도읍이 3회, 왕기(王畿)가 2회, 경기(京畿)가 1회
검색되는 데 비하여 경도는 64회, 왕도는 34회로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삼국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는 경도와 왕도였다고 할 수
있다.6) 한편, 엄밀한 의미에서 왕성은 왕이 거처하는 궁성(宮城)을 뜻하고,7) 도성
은 나성(羅城)으로 둘러싸인 수도를 뜻하지만8) 왕성과 도성 모두 수도를 의미하
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가 조금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
3) 朴龍雲, 1996 『고려시대 開京 연구』, 一志社 ;金鎬詳, 2001 「新羅王京硏究(1) -『三國史記』에 표현된 三國의 王京名稱考察」
『慶州史學』20
4) 金鎬詳, 2001 앞의 논문, 144쪽
5) 『三國史記』에서 京師는 삼국의 수도보다는 漢 또는 唐의 수도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6) 신라에서 王京과 王都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그를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9-47쪽 참조.
7) 余昊奎, 2007 「三國時期 都城史 硏究의 현황과 과제」 『역사문화연구』26, 149-158쪽에서는 왕성과 도성의 차이에 주목하여
왕성에서 도성으로의 발달 과정을 검토하였다.
8) 全德在, 2010 「韓國 古代의 王京과 都城, 地方都市」 『歷史學報』207, 332쪽
4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사』 세가에서 수도 관련 단어들을 검색해보면 경성이 80회로 가장 많고 왕경이
29회, 경도가 18회로 그 뒤를 이으며, 그밖에 도성 7회, 황성 5회, 왕도 2회, 도읍
2회의 순이다.9) 한편, 경사도 73회 검색되지만 대부분 중국, 즉 책봉국의 수도를
가리키며 고려의 수도를 가리키는 용례는 4건에 불과하다. 또 황성의 사용례 5건
가운데 2건도 중국의 수도를 가리킨다.
이러한 결과는 『삼국사기』에서 주로 경도와 왕도를 사용했던 것과 대비된다.
그런데 좀 더 흥미로운 것은 『삼국사기』에서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많이 쓰였
던 왕도가 『고려사』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두 신라의 수도를 가
리키는 용도로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고려사』 세가의 왕도 사용례는 다음의 2
건이다.
○高 鬱府將軍能文率士卒來投 以其城近新羅王都
· · · ·
(방점 필자, 이하 같음)勞
慰遣還 唯留麾下侍郞盃近 大監明才·相述·弓式等(『高麗史』 권1, 世家1
太祖 8년 10월 己巳)
○羅 王率百僚 發王都
· ·
士庶皆從之(『高麗史』 권2, 世家2 太祖 18년 11월 甲午)
『고려사』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왕도의 용례는 1건이 더 찾아질 뿐이다. 지리
지의 다음 자료이다.
○王 京開城府… 王都
· ·
鎭山松嶽<一名崧岳巓 有神祠>(< > 안은 세주. 이하 같
음) 又有龍岫山 進鳳山 東江<在貞州> 西江<卽禮成江> 碧瀾渡 (『高麗史』
권56, 志10 地理1)
하지만 위의 경우는 왕경 개성부의 진산(鎭山)을 수록하기 위한 일종의 표제로
서 『고려사』 편찬 당시의 표현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왕도가 고려의
9) 고려시대의 개인 기록인 墓誌銘에는 洛都, 帝京, 皇都 등과 같은 雅稱도 쓰였다. 金龍善 編著, 1997 『高麗墓誌銘集成 索引』,
翰林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6쪽의 開城 항목 참조
서울학연구 LⅡ (2013. 8) 5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로는 사용되지 않았던 셈인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신
라의 수도와 구별하고자 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황제국 또
는 책봉국의 수도를 지칭하는 경사와 황성이 고려의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
용된 것은 고려의 다원적 천하관에 따른 ‘외왕내제(外王內帝)’의 국가 체제와 관
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10)
결국 고려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경성이고, 그
다음이 왕경이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이 엄밀하게 구분되어 사용된 것은 아니었
으며, 심지어는 같은 기록에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우
왕 3년(1377) 천도 논의 사실을 기록한 다음 두 기사에서 경도와 경성은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以 京都
· ·
濱海 畏倭寇 欲遷內地 議可否 衆慮後禍皆欲遷 瑩獨陳徵師固守之
策(『高麗史』 권113, 列傳26 崔瑩)
○以 京城
· ·
濱海 畏倭寇 欲遷都內地 議可否 崔瑩以爲不可遷 陳徵師固守之策
(『高麗史』 권126, 列傳39 姦臣2 李仁任)
이러한 사례는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경성, 왕경, 경
도, 도성, 도읍 등이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고, 경사와 황성은 중국과
고려의 수도를 가리키는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특이하게 왕도는 고려
의 수도를 가리키는 말로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상이 고려시대 이전의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에 관한 분석이라면, 고유
명사로서 수도의 이름은 따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고대 삼국과 고려는 모두 수
도의 고유한 명칭을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우선, 고구려의 수도는 『삼국사기』에
○自 朱蒙立都紇升骨城
· · · ·
歷四十年 孺留王二十二年 移都國內城
· · ·
<或云尉那巖
城 或云不而城>… 歷四百二十五年 長壽王十五年 移都平壤
· ·
歷一百五十
六年 平原王二十八年 移都長安城
· · ·
歷八十三年 寶藏王二十七年而滅(『三
����������) 고려시대의 多元的 �天下觀에������� 대해서는 盧明鎬����������������, 1999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 『韓國史硏究』105 참조
6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國史記』 권37, 雜志6 地理4 高句麗)
이라 한 데서 수차례 이도(移都)하는 동안 흘승골성, 국내성, 평양, 장안성 등이
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역시 『삼국사기』에
○按 古典記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本扶餘至慰
· 禮·
城
·
立都稱王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高句麗南平壤 都漢城
· ·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 移都熊川
· ·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移
都所夫里
· · ·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年一百二十二 至唐顯慶五年
是義慈王在位二十年 新羅庾信與唐蘇定方討平之(『三國史記』 권37, 雜志
6 地理4 百濟)
라고 하여 위례성, 한성, 웅천, 소부리 등을 수도의 이름으로 밝혀 놓았다. 이 가
운데 웅천은 웅진(熊津)으로도 불렸고, 소부리는 사비(泗沘)라고 불렸다.11)
신라는 건국 이후 천도를 하지 않았으므로 수도가 지금의 경주 한 곳이었다.
이곳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가 문제인데, 『삼국사기』와 『고려사』 지리지에는 서
야벌(徐耶伐), 사라(斯羅), 사로(斯盧), 계림(雞林), 신라 등 국호에 대한 언급만
있고, 수도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금성(金城), 월성
(月城) 등의 명칭이 등장하지만 이것들은 국왕이 거처하는 궁성의 이름이다.12) 따
라서 수도의 고유 명칭은 밝혀져 있지 않은 셈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13) 신라에서는 530년대에 비로소 수도를 왕경이라고 부르
기 시작했고, 통일기에 들어 왕경을 금성, 또는 금경(金京)이라고 불렀으며, 그밖
에 대경(大京), 동경(東京)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본래 금성은 신라 초기에 왕
이 거처하던 궁성의 이름이었는데, 통일기에 이르러 왕경의 영역을 축소하면서
왕경의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금경은 금성과 왕경의 합성어이고,
11) 『三國史記』 권37, 雜志6 地理4 百濟 “熊川州<一云熊津>… 所夫里郡<一云泗沘>”
12) 『三國史記』 권34, 雜志3 地理1 新羅疆界 “初赫居世二十一年 築宮城 號金城 婆娑王二十二年 於金城東南築城 號月城 或號
在城 周一千二十三步 新月城北有滿月城 周一千八百三十八步… 始祖已來處金城 至後世多處兩月城”
13) 전덕재, 2009 앞의 책, 162-165쪽
서울학연구 LⅡ (2013. 8) 7
동경은 신라에 존재한 여러 개의 서울[경] 가운데 동쪽에 위치한 서울이란 의미
이며, 대경은 지방에 위치한 소경(小京)에 대비되는 표현으로 각각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신라의 수도는 멸망 후 경주로 개칭되기 전까지는 금성이라고 불렸다
고 할 수 있다.
고려의 수도는 개경(開京)이었다. 그런데 개경이라는 이름이 언제 붙여졌는지
를 비롯하여 연혁이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개경의 연혁을 전하는 사료의 문
제 때문인데, 우선 기본 자료가 되는 『고려사』 지리지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本 高勾麗扶蘇岬 新羅改松嶽郡 太祖二年定都于松嶽之陽爲開州
· ·
創宮闕
立市廛 辨坊里 分五部 光宗十一年改開京
· ·
爲皇都
· ·
成宗六年更定五部坊里
十四年爲開城府
· · ·
管赤縣六畿縣七 顯宗九年罷府置縣令 管貞州·德水·江
陰三縣 又長湍縣令管松林·臨津·免山·臨江·積城·坡平·麻田七縣 俱
直隸尙書都省 謂之京畿 十五年又定京城五部坊里 二十年京都羅城成 文
宗十六年復知開城府
· · ·
事 都省所掌十一縣皆屬焉 又割西海道平州任內牛
峯郡以隸之 忠烈王三十四年設府尹以下官 掌都城內 別置開城縣 掌城外
恭愍王七年修松都外城 恭讓王二年分京畿爲左右道…(『高麗史』 권56, 志
10 地理1 王京開城府)
『고려사』의 이 기사는 왕경 개성부의 연혁을 정리한 것이지만, 수도인 왕경과
왕경 주변의 경기를 구분하지 않고 있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14) 위의 기록을
그대로 읽으면 고구려의 부소갑(扶蘇岬)이 통일신라 때 송악군(松嶽郡)이 되었다
가 고려 건국 후 919년(태조 2) 수도가 되면서 개주(開州)로 개편되었고, 개주가
황도(皇都)를 거쳐 고려 후기에 개성부(開城府)가 된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하지
만 고려 초에 설치된 개주는 수도가 된 옛 송악군 지역뿐 아니라 인근의 개성군
및 송악·개성 2군의 영현(領縣)이었던 강음·송림·덕수·임진현을 포함하는 지
역이었다.15) 따라서 개주는 엄밀하게는 왕경, 즉 수도의 이름으로는 적절치 않으
14) 정학수, 2006 「고려 개경의 범위와 공간구조」 『역사와 현실』59, 167쪽의 각주 28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였다.
15) 박종진, 2012 「고려전기 開城府의 변천과 지리적 범위」 『東方學志』157, 171-172쪽
8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며, 왕경을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 기록에서 광종 11년(960)에 “개경을 고쳐 황도(皇都)라고 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 기록대로라면 광종 11년 이전에 이미 개경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경이란 개주와는 달리 경기 지역을 제
외한 왕경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 개경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
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자료가 없어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밖에 없다.
우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개경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935년(태조 18)
신라 경순왕의 귀부 사실을 알리는 기사에서이다. 두 사서 모두 그해 11월에 신
라왕이 “개경에 들어왔다[入開京].”고 되어 있다.16) 따라서 개경이 그 이전에 이
미 존재했다고 할 수 있지만, 역시 언제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서경(西京)의 설치 시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경이 수도인
개경보다 먼저 설치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경의 연혁에 대해서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太 祖元年 以平壤荒廢 量徙塩·白·黃·海·鳳諸州民以實之爲大都護府
尋爲西京 光宗十一年改稱西都…(『高麗史』 권58, 志12 地理3 西京留守官
平壤府)
위 기록에 따르면 평양은 태조 1년(918)에 대도호부가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
아[尋]’ 서경으로 되었다. 『고려사』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평양이 대도호부가 된
것은 태조 1년(918) 9월의 일이었으니,17) 서경은 그로부터 얼마 뒤에 설치된 것이
다. 이와 더불어 고려 초 ‘양경(兩京)’의 존재가 눈에 띤다. 즉, 태조 2년(919)년 3
월 기록에
ㅈ
○ 創法王·王輪等十寺于都內 兩 ·
京
·
塔廟肖像之廢缺者 並令修葺(『高麗史』 권
1, 世家1 太祖 2년 3월)
16) 『高麗史』 권2, 世家2 太祖 18년 11월 癸卯 ;『高麗史節要』 권1, 太祖 18년 11월 癸卯
17) 『高麗史』 권1, 世家1 太祖 원년 9월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閒 因而侵掠邊
邑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列評守之”
서울학연구 LⅡ (2013. 8) 9
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양경(兩京)’이란 개경과 서경을 가리킨다. 고려
시대에 경을 칭한 행정구역으로는 개경과 서경·동경·남경밖에 없었는데, 동경
은 성종 6년(987), 남경은 문종 21년(1067)에 처음 설치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
다.18) 그렇다면 개경과 서경이라는 이름은 태조 1년(918) 9월부터 이듬해 3월 사
이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사이인 태조 2년(919) 1월 수도를 철원
에서 송악으로 옮기고 궁궐을 창건하였을 때19) 개경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렇게 개경의 존재를 분명히 하면 『고려사』 지리지의 왕경개성부 연혁 기사가
좀 더 명료하게 읽힌다. 즉, 태조 2년(919) 1월 종전의 송악군 지역에 수도를 정
하고 그곳을 개경이라고 하였으며, 이 개경과 종전의 개성군 및 송악·개성군 영
현 지역을 아울러 개주라고 한 것이었다. 이때까지는 개경이 개주에 포함되어 있
었지만,20) 개경이라는 독자적인 이름을 가지고 오부(五部)·방(坊)·리(里)의 행정
조직을 갖추는 등 개주 안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었고, 따라서 향후 분리될 가능
성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개주는 왕경과 경기로 분리되어 각각 독자적인 변화의 과정을 밞았다.
즉, 개주에 포함되어 있던 개경은 광종 11년(960) 황도로 개칭되었고,21) 성종 6
년(987)과 현종 15년(1024) 두 차례에 걸쳐 오부방리가 정비되었으며, 현종 20년
(1029)에는 나성이 완성되어 영역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300년 뒤인
충렬왕 34년(1308)에 개성부로 개편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수도의 이름은 국초
부터 개경이었고, 고려 후기에 개성부가 되었으며, 그 사이 광종 때 잠깐 황도라
고 불린 적이 있었다. 즉, 고려 전기에는 개경과 황도가, 고려 후기에는 개성부가
수도의 공식적인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 개경의 옛 이름인 송악군에서
유래하는 송도(松都), 송경(松京) 등이 개경의 이칭(異稱)으로 사용되었다.22)
18) 『高麗史』 권57, 志11 地理2 東京留守官慶州 “太祖十八年敬順王金傅來降國除爲慶州 二十三年陞爲大都督府… 成宗六年改
爲東京留守” ;권56, 志10 地理1 南京留守官楊州 “高麗初又改爲楊州… 文宗二十一年陞爲南京留守官 徙旁郡民實之”
19) 『高麗史』 권1, 世家1 太祖 2년 정월 “定都于松嶽之陽 創宮闕 置三省六尙書官九寺 立市廛 辨坊里 分五部 置六衛”
20) 정학수, 2006 앞의 논문, 163쪽에서는 ‘개주 직할 읍’의 개념을 사용하고, 그것이 개경의 범위와 같다고 하였다.
21) 光宗 11년(960)은 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시행한 해이다. 연호의 사용과 수도 이름을 皇都라고 고친 것은 서로 짝을 이
루는 조치였다. 따라서 光宗 14년(963) 송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송의 연호를 사용하면서(『高麗史』 권2, 世家2 光宗 14년 12
월 “行宋年號”) 峻豊 연호가 중단되었을 것이므로 皇都도 開京으로 환원되었을 것이나 이 사실은 『高麗史』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22) 朴龍雲, 1996 앞의 책, 52-55쪽
10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한편, 태조 2년(919)에 설치된 개주는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대로 성종 14년
(995)에 개성부로 개편되어 적현(赤縣) 6개와 기현(畿縣) 7개를 관령하게 되었
다. 이때 송악군이 적현 중에 포함되었는지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지만, 태조 2
년(919)에 개경이 설치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던 송악군이 새삼 부활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송악군 대신 정주를 적현에 포함시킨 최근 연구가23)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결국 성종 14년(995)의 이 조치는 개주를 개성부로 개
편하면서 수도인 개경과 그 주변의 적현·기현을 구분함으로써 이후 개경과 경
기를 제도적으로 분리하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현종 9년(1018)에는 개성부가 13개 적·기현을 관령하던 체제를 대폭 변
경하여 개성부를 없애고 개성현과 장단현(長湍縣)이 주현이 되어 각각 정주·덕
수·강음현과 송림·임진·토산·임강·적성·파평·마전현 등을 속현으로 거느리
는 주현-속현 체제로 개편하였다. 그와 동시에 개성현·장단현 등 2개 주현과 나
머지 10개 속현을 묶어 상서도성에 직예(直隸)시키고 경기라고 하였는데, 이로써
경기가 성립하면서 개경과 경기가 제도적으로 확실하게 분리되었다.24)
경기는 이후 문종 16년(1062)에 또 한 번 개편되었다. 이때 개성부가 다시 설
치되고 상서도성에서 관할하던 11개 현이 모두 개성부에 소속되었으며, 서해도
평주의 속현이던 우봉군이 개성부로 이속되었다. 이때 기존의 2개 주현, 10개 속
현 가운데 개성현이 개성부로 승격되고 장단현 이하 나머지 11개 현과 평주에서
이속된 우봉군이 개성부의 속현이 됨으로써 경기가 단일 주현 체제로 통합되었
다.25) 그 결과 개경은 도성 안에서 오부방리의 행정조직을 통해 통치되고, 도성
밖의 경기는 지방기구인 개성부를 중심으로 12개 속현이 통치되는 구조를 갖추
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가 고려 전기의 경기제로서 약 300년 동안 유지되
었다.
그 뒤 경기제가 개편된 것은 고려 후기 충렬왕 34년(1308)의 일이었다. 이때
23) 박종진, 2012 앞의 논문, 177-178쪽
24) 邊太燮, 1971 「高麗時代 京畿의 統治制」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245쪽 ;박용운, 1996 앞의 책, 69쪽
25) 邊太燮, 1971 앞의 책, 250쪽 ;박종진, 2012 앞의 논문, 187쪽
단, 윤경진은 문종 16년(1062) 개편 때 장단현이 개성부의 속현으로 되었다는 『高麗史』 地理志 기록에 의문을 표시하였는데
(윤경진, 2009 「고려전기 京畿의 편성과 운영」 『역사문화연구』33, 54-55쪽), 그에 대해서는 박종진의 반론이 있다(박종진,
2012 앞의 논문, 187쪽의 각주 56).
서울학연구 LⅡ (2013. 8) 11
“(개성부에) 부윤(府尹) 이하의 관리를 두어 도성내(都城內)를 관장하게 하고, 개
성현을 따로 설치하여 성외(城外)를 관장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의 이 기사는 ‘도성내’와 ‘성외’의 차이에 주의하며 읽을 필요가 있
다. ‘도성내’란 수도 개경을 가리키고 ‘성외’란 도성 밖, 즉 개경 밖의 경기를 가리
킨다. 따라서 이때 개경을 개성부로 개칭하면서 동시에 경기에는 개성현을 따로
두고 개성현 중심의 행정체계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개성현은 문종 16년
(1062)에 설치되어 장단현 등 12개 속현을 거느렸던 개성부가 개편된 것이었다.
이처럼 고려 건국 직후인 태조 2년(919) 천도와 함께 개경이라는 이름이 생겼
고, 그와 동시에 개주가 설치되었는데, 개주는 개경과 주변 지역을 포함하는 행
정구역이었다. 이후 개주는 개경과 기타 지역이 각각 왕경과 경기로 분리되어 발
전하였다. 성종 14년(995) 개성부 및 적·기현 설치는 개경과 개성부가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고, 현종 9년(1018) 경기 설치는 그러한 분리를 제도적으로 완결지은
것이었다. 따라서 명칭에 있어 고려 전기에는 개경이 수도인 왕경을, 개성(개성
부, 개성현)이 왕경 주변의 경기를 각각 가리켰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경과 개성
이 구별되지 않고 혼용되었는데, 경기를 개경이라고 부르는 일은 없어도 왕경을
개성이라고 부르는 일은 많았다. 고려 후기에는 왕경과 경기 모두 개성(왕경은
개성부, 경기는 개성현)이 되었으나 개경이라는 명칭도 여전히 관용되었다.
Ⅲ. 수도의 위상
전근대의 수도는 국왕의 소재지이며 정치의 중심지였던 만큼 다른 지역과 구
별되는 특별한 위상을 지녔다. 수도를 다른 지역과 구별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달
랐지만, 계서적인 지방 행정제도의 정점에 위치시킴으로써 특별한 지위를 부여
하는 것은 모든 시대가 같았다. 중국과 한국의 전통적인 지방행정제도인 군현제
는 주·현 등 지방행정 단위들 간에 위계를 설정함으로써 계서적인 구조를 이루
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에서는 지방제도를 구성하는 주·현과 부(府)·도독부·
도호부 간에 서열이 정해져 있었고, 그 가운데 경조부(京兆府)·하남부(河南府)·
12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태원부(太原府) 등 3부가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수도 장안이
위치한 경조부가 정점에 있었다.26) 조선에서도 지방의 행정편제에는 도시 위계가
적용되었고, 그러한 위계의 최정점에 수도인 한양이 자리하고 있었다.27) 이 점에
서는 고대 삼국과 고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은 모두 수도와 지방의 행정기구가 서로 달랐다. 수도의 경우 고구려와 백
제는 중·동·서·남·북부 등 5부(部), 신라는 훼부(喙部)·사훼부(沙喙部)·잠훼
부(岑喙部)·본피부(本彼部)·한기부(漢祇部)·사피부(斯彼部) 등 6부로 편성되어
있었다. 신라의 6부는 물론이고 고구려의 방위명 5부도 본래는 계루부(桂婁部)·
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소노부(消奴部) 등 고유명 부
로서 국가 성립기에 단위 정치체로 존재하던 것이 중앙집권화의 진전에 따라 수
도의 행정구역으로 성격이 변한 것이었다.28) 반면 지방은 고구려의 경우 군(郡)-
성(城)-촌(村), 신라의 경우 주(州)-군-촌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러한 지방제도
는 삼국이 중앙집권적인 영역국가로 발전하면서 영역 내의 지방민들을 직접적으
로 지배하는 과정에서 성립한 것이었다.29)
따라서 삼국의 수도와 지방은 행정구역을 편성하는 원리부터 달랐고, 수도가
지방과 구별되는 독특한 행정구역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수도와 지방, 즉 경·외를 차별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행
정체계상의 위계는 당연히 수도가 높았는데, 통일신라에서 특별히 5소경을 두고
왕경의 기능을 대신하게 한 데서 수도의 우월한 지위를 엿볼 수 있다.30)
고대 삼국에서 수도의 우월한 지위는 지방제도에 의해서만 보장된 것이 아니
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수도와 기타 지방은 신분적인 위계에 의해 차별되었
다. 예를 들어, 신라의 골품제는 왕경인과 기타 지방민을 차별하는 확실한 수단
이었다. 골품제는 신분에 따라 관등과 관직의 승진뿐 아니라 일상생활까지 철저
하게 차별하는 기능을 하였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왕경 6부의 지배층이 진골
26) 崔宰榮, 2002 「唐 前期 三府의 정책과 그 성격 -唐朝의 京畿强化策과 관련하여-」 『東洋史學硏究』77, 51-58쪽
27) 고동환, 2011 「조선시대 한양의 수도성 -도시의 위계와 공간표현을 중심으로-」 『歷史學報』209, 38-42쪽
28) 고구려의 고유명 부가 방위명 부로 전환된 시기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64-168쪽
참조
29) 전덕재, 2007 「중고기 신라의 지방행정체계와 郡의 성격」 『한국고대사연구』48, 119쪽
30) 전덕재, 2011 「新羅의 王京과 小京」 『歷史學報』209
서울학연구 LⅡ (2013. 8) 13
이하 6두품, 5두품, 4두품 신분에 편제되고 지방민들은 거기서 배제되었다.31)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진골은 왕경 6부 가운데 가장 우월한 훼부와 사훼부의
지배층, 6두품은 나머지 4부의 지배층과 훼부·사훼부의 지배층 일부, 5두품은 훼
부·사훼부의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계층과 나머지 4부의 지배층 일부가 각각 편
제되었다고 한다.32)
신라에서 7세기 전반에 골품제가 성립하기 이전에는 경위와 외위를 따로 두어
왕경과 지방민을 차별하였다. 이처럼 왕경과 지방을 차별하는 것은 왕경 6부가
본래 사로국으로서 신라 국가 형성의 모체가 되었던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즉, “중고기에 왕경은 단지 수도로서의 위상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경위를 수여
받으며 지배자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6부 지배층이 집주(集住)하는 배타적 공간”
이었고,33) 신라의 왕경과 지방에는 ‘넘을 수 없는 경계’가34) 있었던 것이다. 고구
려와 백제에도 골품제와 같은 제도가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아마 신라와 마
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는 태조 2년(919) 철원에서 왕건의 본거지인 송악의 남쪽[松嶽之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수도의 이름을 개경이라고 하였다. 이후 태조 18년(935)에 신라
가 멸망함으로써 금성은 이제 수도의 위치에서 탈락하여 경주로 격하되었고, 그
와 더불어 신라의 중요한 지배질서였던 골품제가 폐지되었다. 그 이듬해 후삼국
통일과 함께 개경은 통일왕조의 수도가 되었는데, 골품제 폐지 이후 수도의 우월
성은 어떻게 보장되었을까? 지금부터는 고려의 지방제도 및 본관제와 관련하여
수도 개경의 위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 초 지방제도의 정비과정에서 수도 개경과 기타
지방이 분리되었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3품 이상 장관이 파견되는 경·도호부·
목(牧)과 5품 이상 장관이 파견되는 주·부·군·방어진(防禦鎭), 7품 이상 장관이
파견되는 현·진(鎭) 등 3단계로 정비되었다.35) 고려 중기 이후 5도·양계가 중간
기구로 설치됨으로써 5도·양계·경기 등 세 지역이 서로 다른 행정 제도를 갖게
31) 전덕재, 2002 『한국고대사회의 왕경인과 지방민』, 태학사, 15쪽
32) 위의 책, 282쪽
33) 전덕재, 2011 앞의 논문, 15쪽
34) 전덕재, 2003 「신라의 왕경과 지방, 넘을 수 없는 경계」 『역사비평』 65
35) 邊太燮, 1968 「高麗前期의 外官制」 『韓國史硏究』 2 ;1971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38쪽
14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되었고, 이점이 고려 지방제도의 특징으로 설명되기도 한다.36) 하지만 개경은 일
찍부터 이들 세 지역과 또다른 독자적인 행정구역으로 존재하였다. 개경에는 태
조 2년(919) 천도와 동시에 동·남·서·북·중부 등 5부가 설치되고 방리제(坊里
制)가 실시되었다.37) 개경의 오부방리는 성종 6년(987)과 현종 15년(1024) 두 차
례에 걸쳐 개정되었으며, 그 결과 5부, 35방, 344리로 정착되었다. 개경의 오부방
리제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연구 주제가 되겠지만,38) 개경에만 유일하게 이러한
제도가 적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수도 개경의 특별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고 하겠다.
개경 오부에는 사·부사·녹사 등의 관직이 설치되었는데, 이들이 모두 외직이
아닌 경관직(京官職)이었던 것도 다른 지방과 다른 점이었다. 『고려사』 백관지에
는 문종 때 오부의 관제를 정하여 사 1인, 부사 1인, 녹사 각 2인을 두었다고 되
어 있고,39) 식화지에는 문종 30년(1076)에 제정된 오부사·부사·녹사에 대한 녹
봉 규정이 나와 있다.40) 문종 16년(1062)에 개경과 개성부가 분리되었으므로 문종
30년 녹봉 규정에서 개성부의 사·부사·판관·법조 등이 외관록(外官祿) 규정에
포함된 것은41) 당연한 일이지만, 그와는 달리 오부의 관원들은 비록 권무(權務)이
기는 해도42) 외관이 아닌 경관으로 취급되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오부의 관제를 기록한 『고려사』 백관지의 기사는 좀 더 눈여겨 볼 대목
이 있다. 문종 때 오부 관원의 품질과 정원을 정비하면서 사 1인과 부사 1인을 두
고 녹사는 ‘각’ 2인을 두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43) 여기서 각 2인을 두었다는 것
은 각 부마다 2인씩 두었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그와는 달리 사와 부사는 오부사
(五部使) 1인과 오부부사(五部副使) 1인을 두었다는 말이 되겠다. 따라서 오부는
처음 설치할 때는 개경의 5개 부라는 의미를 가졌지만 점차 하나의 관서로 정착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오부가 동·남·서·북·중부로 구성된 것 또한 사실
36) 邊太燮, 1968 「高麗按察使考」 『歷史學報』40 ;1971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1-192쪽
37) 『高麗史』 권56, 志10 地理1 王京開城府
38) 고려 개경의 五部坊里에 대해서는 홍영의, 2000 「고려전기 개경의 오부방리(五部坊里) 구획과 영역」 『역사와 현실』 38 및 정
학수, 2010 「고려시기 개경 행정구획과 ‘里’의 양상」 『한국중세사연구』 28 참조
39) 高麗史』 권77, 志31 百官2 五部
40) 『高麗史』 권80, 志34 食貨3 祿俸 權務官祿
41) 『高麗史』 권80, 志34 食貨3 祿俸 外官祿
42) 문종 관제에서 五部使와 副使가 品官權務였음은 朴龍雲, 1996 앞의 책, 101쪽에 밝혀져 있다.
43) 『高麗史』 권77, 志31 百官2 五部 “文宗定五部使一人四品以上 副使一人五品以上 錄事各二人甲科權務”
서울학연구 LⅡ (2013. 8) 15
이었고 녹사는 각 부마다 파견되었으므로 동부녹사(東部錄事), 중부녹사 등의 사
례가 찾아지는 것은44)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각 부의
녹사를 총칭할 때는 오부녹사라고 하였을 것이다.
오부 관원의 구성을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오부의 행정체계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개경과 경기가 분리된 현종 9년(1018) 이후 개경 오부가 중앙 관서와 직접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지만,45) 좀 더 구체적으로는 각 방리의 사무
가 각 부 녹사를 거쳐 오부로 모아지고, 그것이 오부사·부사를 통해 중앙으로
보고되었으며, 거꾸로 중앙의 지시는 오부를 거쳐 각 부 녹사에게로 하달되는 행
정 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46) 여기서 오부는 마치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主縣)과
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주현과 속현의 관계와는 다르게 각 부별로 직속
의 방·리를 통솔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위계 속에서 수도 개경의 위상을 좀 더 살피기 위해서는
개경 이외의 3경(서경, 동경, 남경)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경은 고려
시대 지방행정의 위계 속에서 가장 상위에 위치하였다. 서경은 고려 건국 직후에
이미 설치되었고, 동경은 성종 6년(987), 남경은 문종 21년(1067)에 처음 설치되
었는데, 남경 설치 이전에는 서경·동경을 개경과 함께 3경(三京)이라고 부르기
도 했지만47) 그 이후에는 개경을 뺀 나머지 서경·동경·남경을 합쳐 부를 때 3경
이라고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 禮部奏 兩界·三京·三都護·八牧 每當元正·冬至及至元節 表賀坤成殿
以爲恒式 制可(『高麗史』 권12, 世家12 睿宗 원년 정월 戊戌)
44) 五部 관직의 임명·재직 사례는 朴龍雲, 1996 앞의 책, 103-104쪽에 조사되어 있다. 고려 후기에는 東部令, 西部副令 등 各
部 令·副令의 사례가 발견된다. 『高麗史』 百官志에는 忠烈王 13년(1287)에 副使를 副令으로 고쳤다는 간단한 기록이 있지
만 이때 使도 令으로 개칭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와 동시에 五部使·副使가 各部令·副令으로 개편되면서 정원도 늘어났
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위 책에 조사된 사례에서 各部令·副令이 모두 충렬왕 13년 이후에 출현했던 사실을 눈여겨볼 필
요가 있다.
45) 邊太燮, 1971 앞의 논문, 261쪽 ;朴龍雲, 1996 앞의 책, 127-130쪽
46) 고려 후기에는 충렬왕 13년(1287) 五部使·副使가 各部令·副令으로 개편됨에 따라 각 부가 중앙 관서와 직접 연결되는 번
거로움이 생겼을 것이지만, 이 문제는 충렬왕 34년(1308) 開城府의 설치로 해결되었을 것이다.
47) 『高麗史』 권57, 志11 地理2 東京留守官慶州 “(顯宗)二十一年復爲東京留守 時銳方所上三韓會土記有高麗三京
3 3
之文 故復
置之”
16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制 自三京·四都護·八牧以至郡縣館驛之任 並用武人(『高麗史』 권19, 世
家19 明宗 3년 10월 壬戌)
예종 원년(1106)과 명종 3년(1173)의 기록에 도호부·목 등과 나열되어 있는 3
경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서경·동경·남경이었고, 따라서 개경이 3경에 포함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개경이 다른 3경과 달랐음은 관원들에 대한 녹봉 규정에서
도 확인된다. 개경을 제외한 다른 3경의 유수(留守) 등 모든 관원들은 외관록(外
官祿)의 규정을 받았고,48) 이 점이 개경과 달랐다. 단, 서경에는 국초부터 유수 등
외관과는 별도로 낭관(廊官), 아관(衙官) 등 독자적인 속관(屬官)을 설치했고,49)
서경관(西京官)에 대한 녹봉을 따로 규정하는 등50) 특별하게 대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경 역시 어디까지나 지방으로서 중앙인 개경과는 비교되지 못하였다.
개경과 나머지 3경의 차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좁아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1308년(충렬왕 34) 관제 개편에서 그러한 양상이 두드러진다. 즉, 그 해에 충선
왕이 복위하여 실시한 관제 개편에서 개경을 개성부로 고친 것을 비롯하여 동경
과 남경을 각각 계림부(雞林府)와 한양부(漢陽府)로 고쳤다.51) 서경의 경우는 『고
려사』 백관지에 “충선왕 이후 평양부로 고쳤다.”고만 되어 있지만,52) 아마 이 해
에 평양부로 개편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 전기의 개경과 3경이 모두 ‘부(府)’
로 개편된 셈이었다. 그리고 관원으로는 개성부에 판윤(判尹) 이하 윤·소윤·판
관이, 나머지 3부에는 윤·소윤·판관이 두어졌다.53) 개경이 다른 3경에 비해 판윤
이 더 있고, 관원의 수도 더 많았지만 이때 처음으로 같은 명칭의 관원들이 설치
된 것은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개경과 다른 3경의 질적인 차이가
점차 소멸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거꾸로 그 이
전까지 개경과 다른 3경 간에 차별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고려의 수도 개경은 계서적인 지방행정제도의 정점에
48) 『高麗史』 권80, 志34 食貨3 祿俸 外官祿
49) 『高麗史』 권77, 志31 百官2 外職 西京留守官
50) 『高麗史』 권80, 志34 食貨3 祿俸 西京官祿
51) 『高麗史』 권56, 志10 地理1 王京開城府 “忠烈王三十四年設府尹以下官 掌都城內” ;南京留守官楊州 “忠烈王三十四年改爲
漢陽府” ;권57, 志11 地理2 東京留守官慶州 “忠烈王三十四年改稱鷄林府”
52) 『高麗史』 권77, 志31 百官2 外職 西京留守官 “忠宣王以後改平壤府”
53) 『高麗史』 권76, 志30 百官1 開城府 ;권77, 志31 百官2 外職 西京留守官 ;東京留守官 ;南京留守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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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행정적인 위계보다 더 근본적으로 군
현 간의 위계를 규정하는 것이 있었다. 군현제 지역과 부곡제 지역의 차별, 군현
제 지역 안에서 주현과 속현의 차별이 그것이었다.54) 고려의 본관제는 이러한 계
서적 지방제도를 기반으로 주현과 속현, 군현제 지역과 부곡제 지역을 차별하는
기능을 하였다.55)
본관제는 고려 건국 후 국가와 지방 유력층, 즉 호족들의 타협의 결과로서 탄
생한 것이었다. 본관제를 통해 국가는 신라 말에 성장한 호족들을 국가의 지배질
서 속에 흡수할 수 있었고, 호족들은 지방사회에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태조 23년(940) 주·부·군·현의 명호(名號) 개정과 토성(土姓) 분정은 본관제 실
시의 토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본래 송악의 호족에서 출발하였
으나 점차 여타의 호족들과 구별되어갔던 고려 왕실의 본관은 어떻게 처리되었
을까? 또 왕실의 본관지였던 개경의 토성은 어떻게 분정되었을까?
주지하듯이 고려 왕실의 성씨는 왕씨이며, 그것은 왕건 당대에 비로소 성씨로
굳어졌다.56) 『고려사』에 실려 있는 「고려세계(高麗世系)」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왕
건의 할아버지는 작제건(作帝建), 아버지는 용건(龍建)이었다. 하지만 신라 말 지
방 호족들이 성을 자칭하는 분위기 속에서 왕건도 왕씨를 자칭하였을 것이다. 그
리고 토성 분정과 함께 본관제가 시행되면서 왕씨의 본관은 개경이 되었을 것이
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같은 후대의 자료에는 고려
왕실의 본관이 개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개성유후사(개성부)의 토성으로 고(高)·김(金)·왕(王)·강(康)·전(田) 등 5
개 성씨가 기재되어 있다.57)
본관제 하에서 개성의 특수한 위상은 왕씨의 본관이 개성뿐이었다는 데서 우
선 찾을 수 있다. 애초에 토성은 지방의 호족들에게 분정되면서 한 군현에 여러
개의 토성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고, 또 같은 성씨가 여러 지역에 분정되는 경우
54) 박종기, 2002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178-184쪽
55) 고려시대의 본관제에 대해서는 蔡雄錫, 2000 『高麗時代의 國家와 地方社會 -‘本貫制’의 施行과 地方支配秩序-』, 서울대학
교출판부 참조
56) 李樹健, 1984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40쪽 ;李鍾書, 1997 「羅末麗初 姓氏 사용의 擴大와 그 背景」 『韓國史論』37,
78쪽
57) 『世宗實錄地理志』 舊都開城留後司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 上 姓氏
18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도 많았다. 왕씨의 경우는 개성과 강릉 두 곳에서 토성으로 나타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왕씨가 개성과 강릉 이외에도 이천현과 청주목, 목천현, 연기현, 면
천군, 동래현, 의성현, 원주목, 평산도호부, 토산현, 풍천군의 성씨로 기재되어
있지만, 모두 망성(亡姓 ;목천현, 토산현, 풍천군)이거나 내성(來姓 ;이천현, 연
기현, 동래현, 의성현, 평산도호부), 망래성(亡來姓 ;청주목, 면천군, 원주목)이
고 토성으로는 개성유후사와 강릉대도호부 두 곳밖에 없다. 그 중 강릉의 왕씨는
고려 초에 김순식(金順式) 등 명주(溟州 ;강릉)의 호족에게 사성(賜姓)한 것이었
으니,58) 본래 왕씨의 본관은 개성이 유일했던 셈이다.59)
고려~조선 초에 단일 본관을 갖는 성씨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왕씨가
희성(稀姓)이 아님에도 단일 본관이 된 것은 왕실의 성씨로서 특별한 취급을 받
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시대에 왕씨 성이 특별하게 취급되었음은 사성의 사례
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앞의 김순식뿐 아니라 태조 초에는 해광주(海光州 ;
춘천) 출신의 박유(朴儒)에게 왕씨를 사성하였고,60) 태조 17년(934) 발해가 멸망
하고 그 세자 대광현이 귀부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려준 적이 있었다.61)
태조 이후에는 현종 때 청주 출신의 이가도(李家道)에게 사성한 사례가 있으며,62)
고려 후기에도 충선왕이 권재(權載)를 아들로 삼고 왕후(王煦)라는 성명을 하사
하였다.63)
사성은 왕실과 의제적 친족 관계를 맺음으로써 왕실에 대한 공로를 현창하고
충성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려 일대를 통해 불과 몇몇 사례가 찾
아질 정도로 대단히 드물게 시행되었다. 왕씨 성이 이렇게 특별한 목적으로, 그
리고 매우 한정적으로 활용되었다면, 고려 초 토성 분정 과정에서 일반 토성처럼
취급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토성
분정이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지방 세력과의 타협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는 본래
취지를 감안한다면 왕씨를 ‘분정된’ 토성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점
58) 『高麗史』 권92, 列傳5 王順式
59) 李樹健, 1984 앞의 책, 139쪽에도 같은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60) 『高麗史』 권92, 列傳5 王儒
61) 『高麗史』 권2, 世家2 太祖 17년 7월 “渤海國世子大光顯率衆數萬來投 賜姓名王繼…”
62) 『高麗史』 권94, 列傳7 王可道
63) 『高麗史』 권110, 列傳23 王煦
서울학연구 LⅡ (2013. 8) 19
에서 왕씨가 고려 왕실의 성씨로서 개성을 단일 본관으로 하게 된 이유가 납득이
된다.
고려시대에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사성이나 중국계 귀화인을 제외하면 모
두 왕건의 친족과 그 후손들로64) 개성을 본관으로 하였을 것이다. 단, 신라 말 고
려 초에는 지방 호족들이 성을 자칭하는 분위기 속에서 왕씨 성을 자칭한 경우가
왕건 말고도 더 있었을 것이다. 공주인(公州人)이면서 속성이 왕씨로 나타나 있
는 승려 긍양(兢讓)이나,65) 광주인(廣州人) 왕규(王規) 등이66) 그러한 예일 것이
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고려 왕실의 지위가 강화되고 본관제가 점차 정착되
면서 고려 왕실이 왕씨 성을 독점하는 한편 다른 왕씨들은 토성으로 계승되지 않
은 것으로 보인다. 위의 긍양이나 왕규의 예에서 보이는 공주와 광주에 왕씨가
토성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은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왕씨의 유일한 본관이 개성이었다는 사실을 좀 더 연장하여 개성의 다른 토성
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는 개성(개성유후사, 개성부)의 토성으로 왕씨와 함께 고(高)·김(金)·강(康)·전
(田)씨가 기재되어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 자료에서 왕씨를 제외하고 개성(개주
포함)을 본관으로 하는 사람으로는 고려 중기 문신인 고령신(高令臣)과 김준(金
晙),67) ‘개주병정(開州兵正)’ 김준양(金俊陽)과 ‘주리(州吏)’ 김대경(金代卿) 등이 찾아진다.68) 사례가 극히 적지만 이들이 모두 개성의 토성으로 기재된 고씨와 김
씨라는 점에서 조선 전기 지리지의 성씨 기록에 신빙성을 둘 수 있다. 그런데 ‘개
주인’, ‘개주병정’, ‘(개)주리’ 등으로 표기된 이들이 과연 개경을 본관으로 하는 것
일까 하는 점이 검토의 대상이다.
조선 전기 자료에 등장하는 개성유후사나 개성부는 고려 후기의 개성부와 개
성현을 통합한 것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천도하고 그 이듬해에 구경(舊京), 즉 개성부를 개성유후사로 고치고 개성현령을 없앴다고
64) 李樹健, 1984 앞의 책, 141쪽
65) 「聞慶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文」(한국역사연구회 편, 1996 『譯註 羅末麗草金石文』(上), 혜안, 262쪽)
66) 『高麗史』 권127, 列傳40 叛逆1 王規. 李樹健은 王規가 태조에게 귀부하여 賜姓받았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나(李樹健, 1984
앞의 책, 131쪽) 賜姓 사실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67) 『高麗史』 권97, 列傳10 高令臣 ;金晙
68) 「王冲墓誌銘」 (金龍善 編著, 2012 『高麗墓誌銘集成』 第五版, 한림대학교 출판부, 175쪽) “公諱冲… 外王父金俊陽開州兵
正… 公先娶州吏金代卿女”
20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하였으니,69) 충렬왕 34년(1308)에 설치되었던 개성부와 개성현이 이때 개성유후
사로 통폐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개성유후사는 고려 후기의 개성부와 개성현,
즉 문종 관제의 개경과 개성부를 모두 포함하며, 그 앞으로는 고려 초 개경을 포
함하는 행정구역이었던 개주로 연결된다. 개주는 공식적으로는 태조 2년(919)부
터 성종 14년(995)까지 사용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수도 개경과 개성부 지역을 아
우르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개주는 개경과 개성부를 모두
포함하며, ‘개주인(開州人)’이라고 하면 개경이나 개성부를 본관으로 하는 사람을
모두 가리킬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개주인’이 개경이 아닌 개성부를 본관으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 예는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公諱冲 字天隱 姓王氏開州人 七世祖萬歲寧海公 我太祖堂弟也 曾王父逈
猷尙舍奉御 王父蔡追封衛尉注簿 父里民追封尙□奉御 外王父金俊陽開州兵
正… 初侍中金公出守開州時 見公所爲異常 權令就學… 公先娶州吏金代卿女
(王冲墓誌銘)70)
왕충이 개주인이라고 한 데 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고, 왕충의 외조 김준
양과 처부 김대경은 개주의 향리였으므로 이들의 본관은 개주였을 것이다. 그리
고 이들의 본관지인 개주는 개경이 아닌 개성부였을 것이다.71) 김준양이 지냈다
는 병정(兵正)은 지방 군현에서나 볼 수 있는 향리직이고, ‘시중 김공이 개주에
출수(出守)’했다는 표현도 경관직이 두어졌던 개경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관이 개주라고 기재되어 있더라도 위 자료의 김준양과 김대경은 개
경 이외의 개성부 지역을 본관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더 이
상 확인할 길이 없지만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개성의 토성으로 기재되어 있는
고(高)·강(康)·전(田)씨도 김씨와 마찬가지로 개성부 지역을 본관으로 했을 가
69) 『世宗實錄地理志』 舊都開城留後司 “三年甲戌 遷都漢湯 四年乙亥 改舊京爲開城留後司 置留後·副留後·斷事官·經歷·
都事各一員 罷開城縣令”
70) 金龍善 編著, 2012 앞의 책, 175쪽
71) 朴龍雲, 1996 앞의 책, 49쪽 ;윤경진, 2009 앞의 논문, 51쪽
서울학연구 LⅡ (2013. 8) 21
능성이 크다. 무엇보다도 고려 건국 이전부터 송악군에 기반을 두었던 고려 왕실
이 송악군의 다른 호족을 인정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또 이들이 개경 안에서
읍사(邑司)를 구성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
다면 개경은 왕씨의 유일한 본관지일 뿐 아니라 왕씨만의 본관지가 되고, 그러한
점에서 개경은 본관제 하에서 매우 예외적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본관제를
초월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개경이 왕씨의 유일한 본관지이며, 왕씨만의 본관지였다는 추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두 가지 사실을 좀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개주인(開州人) 왕충(王
冲)’의 존재이고, 또 하나는 경래성(京來姓)의 문제이다.
바로 위에 인용한 자료에서 묘지명의 주인인 왕충이 개주인으로 기록되어 있
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가문을 개성 지역의 토성이족(土姓吏族)으로 보는 견해
가 있다.72) 그러나 그의 선조인 만세(萬歲)가 태조의 당제(堂弟)라고 밝혀져 있으
므로 왕실의 친족임이 분명하며,73) 그렇다면 처음부터 토성이 아닌 왕실 성씨로
서 왕씨를 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왕실의 방계 후손으
로서 개성부의 향리와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 때문에 위 묘지명처럼 ‘개주
인’으로 표기된 것이 아닌가 한다.74) 따라서 개주인 왕충의 사례가 개성부 지역의
토성으로서 왕씨가 분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는 아니라고 생각되며, 추후 검
토할 여지가 있지만, 현재로서는 왕씨의 본관이 개경으로 한정되고 개성의 다른
토성인 고·김·강·전씨는 개경을 제외한 지역의 토성으로 분정되었을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경래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경래성’으로 분류해놓았거나 내
성·망래성 가운데 ‘개경래(開京來)’, ‘경래(京來)’ 등으로 주기해 놓은 경우를 말
한다.75) 충청도만 해도 청주목의 황보(皇甫)·왕(王), 연기현의 왕(王), 임천군의
진(陳)·이(李), 한산현의 전(田), 아산현의 임(林) 등이 경래성으로 기재되어 있
72) 李樹健, 1984 앞의 책, 143쪽
73) 萬歲가 太祖의 堂弟임은 고려 왕실 족보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대해서는 김기덕, 2002 「고려시대 왕실 선원록의 복원 시도 -
『고려성원록』의 분석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43, 150쪽 참조
74) 王冲 가문을 개성의 土姓吏族으로 보는 데는 開州를 都城外, 즉 개경 이외의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크게 작용하였으므로(李
樹健, 1984 앞의 책, 143쪽의 주15) 이 점에서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75) 李樹健, 1984 앞의 책, 100쪽
22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다. 이 경래성은 말 그대로 ‘개경에서 유입된 내성’으로 해석되어 본래 개경의 토
성이었던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나, 개경에 거주하던 관인이 낙향한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설명이 이미 있다.76)
개경은 본래 왕씨 이외에는 토성이 없는 곳으로서 다양한 본관을 가진 관인들
이 상경종사하면서 잡거하였고, 이들을 ‘왕경인(王京人)’이라고 불렀다. 왕경인이
왕경, 즉 개경에서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은 다음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公 諱諴 字子和 姓崔氏 其八代祖書遷韓南人 漢南今之水州也 書遷有二
子 其季諱韓用 入朝仕至侍中 始居京師 其後世爲王京人
· · ·
(崔諴墓誌銘)77)
고려시대 자료에서 ‘◯◯인’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왕경인’만은 다른 뜻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왕경인
이 외향이나 처향 등 자기 본관지가 아닌 곳에 낙향해서 정착하면 경래성으로 간
주되었던 것이니, 경래성의 존재가 개경이 왕씨만의 본관지였다는 가설을 부정
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시대에는 풍수지리도 수도 개경의 특수한 지위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되었다. 신라 말, 고려 초 지방 호족들의 등장과 함께 풍수지리가 유행했
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당시 풍수론의 가장 중요한 관심과 기능은 수도에 관한
풍수, 즉 국도풍수(國都風水)에 있었다.78) 고려는 건국 직후 국도풍수를 통해 지
역의 중심을 경주에서 개경으로 옮겼고, 그 과정에서 서경의 전통적인 권위를 활
용하였다. 태조의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으로 되어 대업이 만대 동안 이어질 터전이다.”라고 밝힌 것이 그것이다. 그
리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개경을 실질적 수위로 하면서 서경의 상징적 권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국도풍수의 내용이 정리되었다.
풍수지리에서 개경의 신성성을 강조했음은 의종대에 김관의가 지은 『편년통록
編年通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왕실의 출자를 기록한 이 책에서는 개경
76) 위와 같음
77) 金龍善 編著, 2012 앞의 책, 183쪽
78) 국도풍수에 관한 서술은 張志連, 2010 「高麗, 朝鮮初 國都風水 硏究」(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에 의거하였다.
서울학연구 LⅡ (2013. 8) 23
(부소산=송악의 남쪽)이 왕건 선대부터 이미 후삼국을 통일하는 왕조의 수도로
서 예정되어 있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풍수지리에 의한 개경의 신비화는 이
후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에 따라 서경 및 남경 천도론의 빌미가 되기도 하지
만, 고려시대 전 기간에 걸쳐 개경이 다른 지역과 다른, 특별한 지역이라는 인식
의 저변을 형성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고대 삼국 및 고려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피고, 각 왕조별로 수도의 고유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해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계서적인 지방제도 아래서 수도를 정점에 위치시키는 것 이외에도 신라
의 골품제와 고려의 본관제가 수도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는 제도로서 기능하
였음을 밝혔다.
한국 고대 및 고려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로는 경성, 경도, 경사, 도성,
도읍, 왕경, 왕도, 왕성, 황도 등이 엄밀한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세가를 검색한 결과 삼국시대에는 경도와 왕도가 많이 쓰였고, 고려시
대에는 경성, 왕경, 경도의 순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사』에서 왕도가 신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용도로만 쓰인 점이 눈길을 끌었고, 책봉-조공 질서에서 책봉
국의 수도를 뜻하는 경사, 황도가 다원적 천하관에 따라 고려의 수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점도 주목되었다.
각 왕조의 수도를 부르는 고유 명칭은,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삼국사기』 지
리지의 기록대로 흘승골성, 국내성, 평양, 장안성 및 위례성, 한성, 웅천(웅진),
소부리(사비) 등이었고, 신라는 통일 이후 금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고려
는 건국 직후 철원에서 수도를 옮긴 이래 줄곧 개경이라고 하여 주변의 개성(개
성부, 개성현)과 구별하였다. 고려 후기에 개경을 개성부로 고쳤으므로 수도의
공식 명칭으로는 개경과 개성이 시기적으로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고려시대 내
내 개경과 개성 모두를 수도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24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수도의 위상과 관련해서는 삼국과 고려 모두 경·외 차별에 따라 수도가 다른
지방들과 구별되는 독점적 지위를 배타적으로 유지하였음에 주목하고, 수도와
지방을 차별하는 기제로서 계서적인 지방제도와 신라의 골품제 및 고려의 본관
제에 대하여 살폈다.
먼저, 삼국과 고려는 모두 계서적인 지방제도를 편성하고 수도를 그 정점에 위
치시켰다. 삼국과 고려 모두 배도나 별경(別京) 등 수도의 기능을 분산시킬 수 있
는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지 않았으므로 수도의 독점적 위상은 더욱 강화되
었다. 또한 삼국과 고려는 수도, 즉 중앙과 지방에 서로 다른 행정제도를 적용함
으로써 양자를 차별하였다. 특히 삼국에서는 수도와 지방의 행정제도를 편성하
는 원리부터가 달랐는데, 수도는 국가 성립기에 단위 정치체로 존재하던 부(部)
를 행정구역으로 개편한 것이고, 지방은 중앙집권적인 영역국가로 발전하면서
영역 내의 지방민들을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과정에서 행정제도를 정비한 것이었
다. 고려 역시 건국 직후 개경을 설치하고 오부방리제를 실시함으로써 여타의 지
방과 전혀 다른 행정제도를 마련하였다. 이처럼 수도가 계서적인 지방제도의 정
점에 위치하며, 다른 지방과 구별되는 독특한 행정제도를 가졌다는 점만으로도
그 차별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방제도 이외에도 신라의 골품제와 고려의 본관제는 수도와 지방을 차별하고
수도의 독점적 위상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였다. 우선 골품제는 그 이전에 경위와
외위를 따로 두어 왕경과 지방민을 차별하던 전통을 계승하여 왕경 6부의 지배층
만을 대상으로 편제함으로써 수도와 지방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렇게 신라에서 수도와 지방을 차별하는 것은 수도, 즉 왕경 6부가 신라 국가 형
성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의 후신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본관제 역시 군현제 지역과 부곡제 지역, 주현과 속현의 지역 간 차별
을 기반으로 성립되고 운영되었다. 이러한 지역 간 차별의 정점에 역시 수도 개
경이 위치하였을 것인데, 이 논문에서는 왕실 성씨인 왕씨와 수도인 개경의 관계
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왕씨의 유일한 본관이 개경이고, 동시에 개경을 본관으
로 하는 유일한 성씨가 왕씨였을 가능성을 제시해보았다. 앞으로 더 밝혀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의 논의 결과만으로도 개경과 왕씨가 고려
서울학연구 LⅡ (2013. 8) 25
의 본관제 아래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음은 어느 정도 확인된 셈이라고 할 수 있
다. 여기에 더하여 고려시대에는 국도 풍수를 중심으로 하는 풍수지리가 개경의
신성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수도의 독점적 지위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신라의 골품제와 고려의 본관제는 해당 시기의 사회를 운영하는 기본 원리였
다. 그런데 이 두 제도가 모두 수도를 포함한 지역 간의 차별을 바탕으로 성립되
고 유지되었다면, 결국 신라와 고려에서 수도의 차별성과 독점적 지위는 구조적
으로 보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신라의 골품제와 고려의 본관제를 비교할 때 수도와 지방을 차별하는 정
도에 있어 전자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수도와 지방
의 격차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진전되었을 것이라는 또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
다. 실제로 고려 후기로 갈수록 본관제가 점차 형해화되고 풍수지리의 영향력이
축소되면서 수도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는 유형, 무형의 장치가 사라져갔다. 그
렇다면 조선 시대에는 수도의 차별적 위상을 어떻게 유지하였을까? 특히 조선의
한양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실과 연고가 없는 수도였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리라고 본다.
고대 삼국과 고려시대 수도의 개념과 위상을 검토한 결과 지방제도와 골품제,
본관제 등을 통해 수도의 차별성과 독점적 성격이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현재 한국의 수도 서울이 가지고 있는 수도성
(首都性)으로서 차별성과 독점적 성격의 역사적 연원을 밝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심포지엄발표일 : 2013. 5. 22 최종원고제출일 : 2013. 7. 31
주제어 : 수도, 경·외 차별, 계서적 지방제도, 골품제, 본관제, 국도풍수
26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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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한국 고대, 고려시대 京·外 차별과 수도의 위상
ABSTRACT
Discrimination between the Capital(京) and outer
regions(外), and the Status of the Capital city,
in the Ancient and Medieval Periods of Korea
Lee, Ik-Joo
Professor, University of Seoul
Examined in this article, are the terms that were used to refer to the Capital city during
the ancient ‘Three dynasties’ period as well as the Goryeo dynasty period. Also examined
are certain systems which were utilized in maintaining the Capitals’ superior status, such
as a hierarchy-based local administrative system, the Golpum system of Shilla and the
Bon’gwan institution of Goryeo.
In the ancient and medieval periods of Korea, various terms such as Gyeong’seong(京城),
Gyeong’do(京都), Gyeong’sa(京師), Do’seong(都城), Do’eub(都邑), Wang’gyeong(王京),
Wang’do(王都), Wang’seong(王城) and Hwang’do(皇都) were randomly used to refer to
the Capital. 『Samguk Sagi』, as well as the ‘Sega(世家)’ section(“Chronology section”) of
『Goryeo-sa』, show us that during the Shilla period terms like ‘Gyeong’do’ and ‘Wang’do’
were more frequently used, while during the Goryeo period terms like ‘Gyeong’seong,’
‘Wang’gyeong’ and ‘Gyeong’do’ were mostly used, and also in such order. It should be noted
that the word ‘Wang’do’ was only used in referring to the capital of the late Shilla. And
it is rather interesting to see that terms like ‘Gyeong’sa’ or ‘Hwang’do,’ which were used in
East Asia to refer to the capital of a superior state entitling other states, which was impe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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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in many cases, were used to refer to the captial of Goryeo. This should have been
one of the results of the Goryeo people’s “plural view” upon the world order(多元的天下
觀).
In case of Goguryeo and Baekje, according to the Geography section of 『Samguk Sagi』,
terms like Heul’seung’gol-seong(紇升骨城), Guk’nae-seong(國內城), Pyeong’yang(平壤),
and Jang’an-seong(長安城) were used for the Goguryeo capital, while terms like Wi’ryeseong(
慰禮城), Hanseong(漢城), Wungcheon(熊川[Wungjin, 熊津]) and Soburi(所
夫里[Sabi, 泗沘]) were used for the Baekje capital. Meanwhile, Shilla used the term
“Geum’seong(金城)” after the unification. Goryeo called its own capital as “Gae’gyeong(開
京)” since it was moved from the Cheol’weon area right after the dynasty’s foundation. It
was a term which also distinguished itself from the ‘Gae’seong(開城)’ area which was also
called “Gae’seong-bu” or “Gae’seong-hyeon.” But “Gae’gyeong” was changed to Gae’seongbu
in the latter half period, and while ‘Gae’gyeong’ and ‘Gae’seong’ were used in different
periods, in reality they were both used as words to refer to the capital.
In terms of the status and authority of the capital, it is here examined that the capitals
of both Shilla and Goryeo had a distinctively authoritative status compared to the other
regions. A hierarchy-based local administration system, as well as institutions like the
Golpum system of Shilla or the Bon’gwan system of Goryeo, served as methods of distinguishing
the capital from the other regions.
The ancient Three dynasties as well as Goryeo all designed a hierarchy-based local
administrative system, and placed the capital at the center. All these countries did not establish
either supplemental(陪都) or secondary capitals(別京), and did not divide its functions,
so the status of the capital was higher than ever, while its functions were also stronger
than ever. Added to that, all of these countries had different administrative systems for the
capital and local regions. In case of the Three dynasties, the basic principle beneath the
administrative structures of the capital and the local regions were different. The Capital
was an administrative entity transformed from a Bu(部) unit which had been a political
entity during the time of the dynasties’ foundation. On the other hand, the local areas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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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orbed by the center later on, when the center was transforming itself into a centralized
state which was beginning to rule its subjects in a more direct fashion. Goryeo as well established
Gae’gyeong right after its foundation, and initiated the Five Bu units with Bang
& Ri subunits(五部坊里制), in order to differentiate the inner structure of the capital
from those of the other regions. The Capital city was at the height of a hierarchy structure,
and with a status that was fairly different from other regions, boasted its unique and different
nature.
Aside from the local administrative system, Shilla’s Golpum system and Goryeo’s
Bon’gwan system too both distinguished the capital from the other regions, and enforced
the superiority of the central capital. By these systems, the local regions were treated differently.
In case of the Golpum system, there were subsystems for the Capital hierarchy(京位)
and Local hierarchy(外位) respectively. Residents of the Six Bu units inside the capital(王
京6部) received titles according to the former subsystem, while residents in local areas
received titles according to the latter. This was because these Six units of the capital were
components of the Saro-guk(斯盧國) entity, which later became the origin of the Shilla
dynasty.
Operations of the Bon’gwan system of Goryeo were also based upon discriminative
administration practices between Gun/Hyeon regions and Bu’gok-type regions, as well as
between regions where central officials were dispatched and regions where they were not.
In the meantime, the Gae’gyeong capital was above them all. Examined in this article i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oyal Wang house and the Gae’gyeong capital, and it is confirmed
that the Wang house’s sole Bon’gwan region was Gae’gyeong, and Gae’gyeong had only
one house which had Gae’gyeong as its Bon’gwan: the Wang house. There are some things
that should be clarified in the future, but it cannot be denied that the Wang house and
Gae’gyeong had a special relationship, under the Goryeo Bon’gwan system. Also, prevailed
the Goryeo dynasty period was a Pungsu theory concerning the location of the capital(國
都風水), which brought a holy image to Gae’gyeong and consolidated its superior status.
The Golpum system of Shilla and the Bon’gwan system of Goryeo all provided ba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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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forms for governing. And these two systems were based upon discrimination of local
areas from the capital, and different statuses among local units. We can see the capitals’
unique and exclusive quality of was an institutionally guaranteed constant in both Shilla
and Goryeo periods.
The Shilla Golpum system was more harsh in discriminating the local areas, compared
to the Goryeo Bon’gwan system. It would be safe to assume that the discrimination between
the capital and local areas might have diminished as time went on, from Shilla to
Goryeo. In fact the Bon’gwan system continued to lose its relevance, as the Goryeo dynasty
was entering its second half. And as the authority of the geomantic Pungsu theory was
gradually losing its influence, both physical or philosophical foundation to maintain the
capital’s exclusive authority was slipping away as well. Then, how such distinguished status
of the capital would have been retained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especially when its
capital Han’yang was the first in the history of Korea to have had no meaningful connection
with the dynasty’s royal family?
Examination of the capitals of the ancient Three dynasties and also that of the Goryeo
dynasty, we can see that their unique status and authority was maintained for a long time
thanks to a hierarchy-based local administration system as well as unique institutions such
as Golpum and Bon’gwan. Based on these historical facts, the quality as a capital(首都性),
embedded in the Seoul city we have today, should be explored more. They may shed some
light on the historical nature of the Seoul capital.
Keywords: Capital city, discrimination between the capital city(京) and outer
regions(外), hierarchy-based local administrative system, Golpum system, Bon’gwan system,
Pungsu theory concerning the location of the capi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