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되어 첫 근무하는 날은 바쁘다.
통학버스 안전도우미 일을 하려고 8시 이전에 학교에 도착해야 한다.
아침에 얼른 나서겠다고 맘먹었는데 더 느린 6시 반이 지나서다.
나주 쪽을 지나오는데 저수지에 분홍 연꽃이 고개를 한껏 들어올리고 있다.
방고후와 돌봄 교실 등 아이들의 출석을 확인하고
혼자서 교무실을 지키다 보니 전화받기도 바쁘다.
오후엔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조용해 진다.
연꽃을 보러 어디로 갈까? 해남에도 저수지가 많을텐데
가능하면 공재윤두서 가옥이나 윤탁가옥 가까이에 있으면 좋겠다고
알아보니 현산면 공재고텍가는 길에 연꽃 저수지 글이 몇 보인다.
삼산에서 여름의 해창주조장을 보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작년 겨울방학한 날쯤에 금쇄동을 찾아돌아다니다가
들른 적이 있다. 그 때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5시 반쯤에 해창주조장 앞 창고 앞에 차를 세운다.
웃통을 벗은 남자는 술병을 박스에 담아 나르고 여성은
테이프로 붙이고 있다.
여성이 인사하며 지금은 택배 준비로 바쁘니
정원 구경하고 시음실에 쉬고 계시라 한다. 막걸리도 한잔 하고 가라고 한다.
비가 많이 안와서인가? 생각보다 나무 아래의 이끼는 푸르지 않다.
암행어사 였다는 백파 신현구의 비석을 본다.
정다산의 이시는 이라는 말이 있는데 다산의 시는 보이지 않는다.
5년을 나라의 세곡을 감시하는 일을 하며 살았을까?
다시 돌아가 조선 왕조의 개국의 과정에 역할을 했다하니
다시 부름을 받아 자신의 뜻을 펼쳤을까?
황국신민서사비도 다시 보고 백제인 수수보리의 글없는 비도 본다.
원나라 왕자가 심었다는 백일홍은 얼른 믿기지 않는다.
1980년대 후반에 고천암호가 막혔다니 그 전까지는 이곳에서
해창의 흔적을 충분히 찾았을 것이지만
나의 부족한 상상력으로는 백제인이나 고려인들이
외국과의 교류항으로서 이 부근을 드나들었다는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음실에 갓 홍보자료를 보고 있는데 다리를 다친 남자의 가족이
따라오며 육박나무 앞에서 이야기를 한다.
나중에 땀을 흘리며 남자가 막걸리 한병을 가지고 와 잔에 따뤄준다.
지난 사월에 서울에서 만난 정구가 주조장 이야기를 한 것이 생각나 말을 꺼내니
1년에 한번은 왔다간다고 같이 오라한다.
10여년째 찹쌀과 맵쌀로만 화학 첨가제를 쓰지 않고 술을 빗고 있다고 한다.
전국에 수많은 막걸리 주조장이 첨가제를 쓰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12도라며 두잔 마셔도 운전에 지장이 없을거라고 한다.
만원에 팔지만 술집에서는 오만원은 받는다고 한다.
앞에 앉은 가족이 6병들이 한상자와 식초 3만원짜리를 카드로 사겠다고 한다.
부인은 못마땅해 한다. 나도 솔깃해 사려다가 귀얇은 남자들이 생각나 참다가
만원짜리 하날 주고 한병만 달라고 한다.
12도짜리를 비닐봉에 담으며 6도짜리 한병을 우수로 준다.
밖으로 나와 창고의 함석 벽을 찍어본다.
대한통운 창고라고도 한다.
세월의 흔적에서 난 뭘 느끼는가?
제행무상 뭐 그런거라고 하자며 시동을 걸어 공재고택을 네비에 찍는데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