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5 오후.
무료한 시간에 울린 전화 한 통,
양양 손수자 선생이었습니다.
"여긴 어제도 눈이 내렸는데 눈 보러 안 오실래요?
"그래? 여긴 목련이 피었는데. 지금도 눈이야?"
저는 일산 한 선생에게 바로 전화했지요.
" 이번 겨울 마지막 눈 밟으러 가자. "
이렇게 2박 3일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둘이는 강릉터미널에 1시쯤 도착하여
손선생을 만났지요.
초당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경포대를 향했습니다.
처음 계획은
바깥 선생님이 출타중인 동안 산골에 혼자 있을
손선생의 동무를 해주면서
눈 속에 파묻혀 있자던 것이었는데,
막상 만나니 그렇게 되지 않더군요.
먼저 경포호를 들러 양양 낙산사로 가기로 했지요.
경포호는 잔잔했고,
청동오리들이 간간이 떠 있었습니다.
낙산사를 향해 가는 해안에는
갈매기들이 초등학교 입학생들처럼
나란히 모래톱에 앉아있기도 하고
하얀 꽃처럼 물위에 떠있기도 했습니다.
일시에 화들짝 날아오르기도 하더군요.
고왔습니다.
주문진항에는 작은 배들이 쉬고있었는데,
문득 빈배를 타고 흘러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직도 철들려면 먼 ~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ㅎㅎ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의상대입니다.
월요일이어서 인적이 뜸해 좋았어요.
의상대에서 본 홍련암입니다.
자세히 보니 난간에 있는 친구는
일행인 한선생이네요.
어느새 거기까지...
한달음에 내려갔더니,
뒤 따라온 손선생이 셔터를 눌렀네요.
저 암자 바닥에는
바위사이로 출렁이는 파도가 보입니다.
들여다 보고 일어서니 부처님과 눈이 딱 마주치더군요.
그분께 공손히 절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혹 예수님 믿는 사람이 부처님께 절을 했다고 나무라실건가요?
저는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절을해도 모자랄 지경이니
봐주시지요.
앞서 다녀간 문우가 꼭 보고오라던
홍련암 앞바다입니다.
1968년 처음 이곳과 마주친 후
늘 제 마음에 담겨 있던 곳이기도 하지요.
햇빛이 비칠때면 더 좋은데...
저녁 시간이라 국수공양은 못했답니다.
낙산사 해수관음상입니다.
경내엔 복수초가 노랗게 꽃을 피우고
저를 반겨 줍니다.
긴 겨울을 잘 지냈느냐며.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태어난 원통보전과 석탑입니다.
원통보전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입니다.
사천왕문 안에 친구가 서 있는 것이 보이네요.
새롭다는 것이 좋은 것인데도
마음이 좀 아팠습니다.
문화재는 옛것이어야 더 정이 가기 때문일겁니다.
어두워서야 손 선생댁에 도착했어요.
(사진은 다음 날 아침에 찍은 것)
종일 외로웠던 진돌이와 복돌이가
컹컹 짖으며 반기더군요.
거실엔 그녀가 농사 지은 잘 생긴 호박이
이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군요.
해산하는 딸이 있으면 삶아 먹이고 싶었습니다.
새벽 5시에 남창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밤엔 가로등이 없는 북창쪽으로
별들이 어찌 초롱거리는지 잠들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곳에만 오면 늘 잠을 설칩니다.
달빛에 반해서 못자고
바람소리가 아파서 설치고,
계곡물소리가 정다워서 새웁니다. 참 병이지요.
드디어 봄눈을 밟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눈체험을 와 있었는데,
정말 잘 어울리는 그림이었어요.
아이들과 함께 온 숲해설가님이
기념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손선생은 등산로가 녹았나 보러가고,
한선생님 함께 오다가
전망대에서 눈에 취해 앉아 있습니다.
저 혼자 산책로를 걷자니
지난 해 이 길을 함께 걷던 님들이
불현듯 그리웠습니다.
얼마 전에는 맷돼지도 나왔다는데...
오후에 안태희 선생님을 뵈러
미시령을 향해 가는데
해가 울산바위로 천천히 지고 있었습니다.
저물녁의 울산바위
다음날 햇살속의 울산바위
인제에 사시는
창작수필 안태희 선생님댁입니다.
노란 창문을 잘 보셔요.
그 노란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입니다.
빼어난 봉우리와 초승달!
저 봉우리는 아래서보면 상당히 높습니다.
선생님은 저런 절경을 바라보며,
정갈하게 살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수필도 잘 쓰시나 봅니다.
다락방에도 올라가 보았습니다.
아래층의 작은 방과 이곳을 서재로 쓰시는 것 같았어요.
기념사진도 찍었지요.
아래층에 예쁜 공간이 많은데,
바깥 선생님께 얌전하게 보이려고
우리끼리 있을 때 찍었습니다.
사실 제가 문제지 다른분들은 원래 얌전합니다요.
<만해마을 입구에서>
밤에는 안선생님의 배려로
만해마을의 따끈한 온돌방에서 잤습니다.
선생님은 다음날 다문화가정 주부에게 하실
한글강의 준비를 하셔야 해서 함께 계시다가 댁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곤 아침 강의 가시기 전에 다시 만해마을에 오셔서
한 사람씩 따뜻한 포옹을 해주고 떠나셨지요.
<우리가 묵었던 방의 창밖 풍경>
글을 통해 전화로만 대화를 하고, 뵙는 것은 처음인데,
어찌그리 편안하고 다정히 대해주시던지요.
맛있는 저녁을 사주시고, 간식도 싸주셨지요.
살빼기 운동하라며 짧은 달리기 시범도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선생님 뒤를 따라 콩콩콩 뛰었습니다. ㅎㅎ~
참, 행복했어요
안태희 선생님 고맙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이 만해 기념관이고
오른 쪽이 행사 동
첫번 사진의 왼쪽이 숙소동입니다.
만해 기념관 내부
만해 선사의 작품집을 들여다봅니다.
우리는 만해선사의 시처럼
다시 올 것을 믿으며
동판에 새긴 시들을 읽으며 만해마을을 떠났습니다.
여행의 마지막으로 들른 곳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에 위치한
'金綱山 禾巖寺'입니다.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첫번째로 손꼽히는 화암사(禾巖寺)는
전통사찰 제27호로 신라 혜공왕 5년(769) 진표율사(眞表律使)가
비구니 도량으로 창건했는데 다섯차례나 화재를 당했다합니다.
대웅전과 석탑
화암사라는 사찰이름의 유래가 되는 수바위 입니다.
모습이 빼어나서 秀바위,
바위 위에 늘 물이 고여있어서 水바위라고도 합니다.
맨위 왕관모양의 바위 한 곳에 지팡이를 넣고,
세번 흔들면 두사람이 먹을 쌀이 나와,
수도승들이 참선을 하기 좋았다는데,
어느 해 객승이 여섯번 흔들면 네사람 분의 쌀이 나올까하여
여섯번을 흔들자
쌀 대신 피가 흘러 나온 후로 쌀이 나오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하여, 쌀(禾)이 나오는 바위(巖)가 있는 절이라하여
화암사라고 부른답니다.
우리는 수바위 아래 찻집에서
바위를 바라보며,
살짝 구운 절편과 노오란 송화차를 마셨습니다.
함께 하고 싶은 분에게 문자도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우리는 다시 강릉터미널에서
일산과 대전, 양양의 세 갈래 길로 헤어졌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첫댓글 아~~! 다녀오셨네요. 낙산사 보타전 뒷편에 노란꽃들이 바로 복수초였군요. 저는 민들레도 아닌 것 같고 해서 잠시 보다가 무심코 지나쳤습니다. 동해 일출 제일 의상대와 홍련암을 다녀오셨다니 제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세 분이 홍련암 가는 길에서 내려다보신 바닷가에서 너울거리는 바위 파란 해초에서 봄이 파도처럼 내 가슴에서 울렁거림을 느꼈을 겁니다. 저도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만해마을을 지나왔습니다. 눈얼음으로 덮힌 백담사 가는 길은 2킬로 정도 걸어들어갔다가 얼음덮힌 백담계곡을 보면서 되돌아왔습니다. 근데 화암사 수바위, 왜 제가 놓쳤을까요. 며칠 사이로 성급했던 엄지가 스스로 답답안타깝네요.
엄지님 발자국을 더듬어 눈에 푹푹 빠지며 등산로에 올랐다가 중간 쯤에서 포기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날 얼마나 힘드셨을까? 실감하면서...그러고보니 낙산사로, 만해마을로 그 뒤를 밟았네요. 그런데, 수바위와 감칠맛 나는 송화차는 들미소와 함께가 아니라면 보고 맛 볼수 없는 것이랍니다.ㅋㅋ.
28일 아침 저희도 백담사에 들어가려다가 차량 통제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길이 얼어 붙어서 셔틀버스도 운행하지 않더군요.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란걸,
더구나 좋은 사람과의 여행은 더 행복한 것이란 걸 다시 실감했습니다.
짧은 여정, 긴 만남으로 기억되겠어요. 2박 3일 동안 알찬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기록물로 남겨주시니 참 좋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부르면 한 달음에 달려와 주시는 봄비님과 한별님. 고맙습니다. 설경보다는 깊은 산속에 혼자 지낼 들미소가 염려되어서 달려 오신 줄 잘 알고 있답니다. 다음에도 그러실거죠?^*^
우리는 늘 짧은 만남, 긴 여정을 하지요.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무엇이든 잊어버리는 나이가 되었네요. 그래서 잊지 않으려...
그대가 그곳에 있어서 제 정신세계가 늘 풍요롭습니다.
감사, 댕큐, 아리가도우 고자이마스!
앗 들미소 사진을 안 올렸네. 위에서 내려다 본 들미소 사진 첨부합니다.
피~~~~~~~~~~~~약올라~~~~~~~~~~~~~~~~~~요.^^
에이, 무슨 소리를... 고양이님은 여권이 신장된 참 좋은 세상에 사는거랍니다.
우리도 그대 나이에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가족의 장래를 위하여 눈코 뜰 새 없었다우.
부러우면 빨리 나이 먹구려. ㅎㅎ~
덕분에 구경 잘 했습니다. 훌쩍 그렇게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만날 수 있는 님이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만날수 있는 님이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입니다. 그것도 마음이 딱 맞는... 저는 인덕이 많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능력으로 살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인덕으로 산다했지요.
제 힘으로는 거기까지 못가는데 들미소 덕분에 제가 행복을 누립니다.
선생님의 '벚나무 아래 봄비' 기대하고 있답니다. 댓글 주셔서 감사드려요.
세 분의 다정한 모습 좋은데, 어느 머슴아가 가운데 하나쯤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머슴아가 내였다면 더욱 좋고.낙산사 해수관음보살은 내 친구 원철이 고생하며 세웠는데 불교 법난으로 그만 열반의 나라로 부처님에게 갔습니다. 봄이면서 겨울인척 하는 어성전의 눈은 우리집에 가득 담아 아침저녁으로 보고 있답니다. 주문집 , 속초 , 대진, 마차진, 화진포 등, 동해 쪽은 내 청춘을 보낸 정들인 곳이기에 남다른 정감이 새로워 집니다. 구경 한 번 잘 했소다. 부지런한 봄비님 쉬엄쉬엄 합시다.
'봄이면서 겨울인척하는 어성전' 맞는 말씀입니다. 어제도 눈이 많이 왔다고합니다.
선생님 친구분이 해수관음상을 세우셨다구요? 자세히 볼걸...열반하셨군요. 나무관세음보살!
부처님께 가신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셨을지도... 어성전 눈은 저희집에도 가득합니다. 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