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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기복신앙과 성경적 복(福)개념
김의환 목사
글을 싣는 순서
Ⅰ. 한국적 복(福)개념
Ⅱ. 왜곡된 축복개념
Ⅲ. 성경적 축복개념
Ⅳ. 병고치는 문제
Ⅴ. 성경적 물질관
Ⅵ. 참 축복의 재발견(再發見)
Ⅰ. 한국적 복개념
성경이 가르치는 복 관념을 살피기 전에 한국에서 통용되는 복 관념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새해만 되면 복주머니, 복조리 등이 잘 팔리고 또 토정비결(土亭秘訣)이 베스트셀러가 되어지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 국민의 복 관념의 일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통속적 현세적 복 관념은 중국의 복 관념에서 영향을 입은 바 적지 않다. 고래로 오복(五福)을 말할 때, ① 훌륭한 아내를 맞는 것, ② 부유해지는 것, ③ 평안을 누리는 삶, ④ 덕을 쌓는 일, ⑤ 죽을 때 뜻을 이루는 일 등 다섯 가지 복을 말해왔다.
복(福)자의 글자 풀이를 하는 사람 가운데 ‘옷 依’ 字 옆에 ‘입 口’ 字, 그리고 ‘밭 田’ 字, 맨 위의 ‘한 一’ 字로서 한 인생의 행복이란 겨우 옷 한 벌 입고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전답(田畓)이나 있으면 하는 지극히 소박하며 현시적인 것이라 하는 이도 있다. 이러한 현세적 복 관념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구조를 분석하여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이나, 윤리적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다. 막연한 인간 운명의 대명사로서 인간에게 화와 복을 내리시는 ‘보이지 않는 힘’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빈다’는 표현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비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의 유익만을 비는 자기중심적인 기도이다. 그러므로 “天” 思想도 무신론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운명론에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운명론적 신관은 샤마니즘적 신앙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였다.
샤마니즘은 비록 조직이나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자란 것은 아니나 한국인의 신앙심리의 사고방식에 깊이 뿌리박은 채 오랫동안 민족적인 신앙기반을 이룩하였다. 한국에 불교와 유교가 전래된 후에도 샤마니즘은 오히려 외래종교의 물결 속에서 민속신앙(民俗信仰)으로서의 기반을 잃지 않은 채 오히려 그것들 속에 침투하여 동화현상(同化現象)을 빚어왔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4세기 경의 일이지만 처음부터 샤마니즘과 동화되질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샤마니즘을 멀리했으나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거기에 신화(神話)를 덧붙이려하여 샤마니즘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그후 불교는 점차 미신적인 요소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점차 절간의 입구에 장승이 세워지고 절간 안에 산신(山神閣)이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 무당들이 착용하고 있는 고깔, 옷, 경쇠(磬金) 등은 불교에서 온 것이며 무당들이 부르는 무가(巫歌)도 거의 불교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것들이다.
유교만 하더라도 원래 종교라기보다 하나의 생활철학이었다. 주역(周易)은 원래 동양 철학의 극(極)으로서의 경전의 으뜸이요, 경륜입명(經綸立命)의 책이지만 우리나라에 와서는 샤마니즘의 영향으로 점치는 책으로 변해 버렸다. 오행설(五行說)은 원래 중국에서 천문, 의학, 시간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시작했으나 한국에 와서는 관상(觀相), 풍수(風水), 사주(四柱) 등의 샤마니즘의 도구화가 되고 말았다.
유교의 조상숭배 사상은 샤마니즘의 가신(家神) 숭배사상과 결합하여 제사망국(祭祀亡國)의 현상을 빚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불교나 유교는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적 정신토양의 특성인 샤마니즘의 영향으로 재앙을 피하고 복을 비는 미신적인 생활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처럼 한국인의 종교관은 영적인 차원의 구원 개념보다 현실적 구복사상(求福思想)으로 기울어져 왔다. 이러한 한국인의 신앙적 의식구조 속에 깔린 샤마니즘의 암반이 순수한 복음의 씨가 뿌리를 내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기복적(祈福的) 신앙이 일반화됨에 따라 구속(救贖)의 복음을 전하는 성경 강해보다는 돈벌고 병낫고 축복받았다는 신비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체험 간증이 더 환영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돈벌고, 병낫고, 잘되는 현실적 축복은 아무에게나 고루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이 어려울 때 보다 밝은 미래를 희원(希願)하는 것은 인간상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원이 샤마니즘과 결부될 때 요행주의적(僥倖主義的) 심리작용이 생긴다.
“땅을 정복하라”(창1:28),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살후3:10)는 성경의 가르침이 외면되는 곳에 소극적 요행주의 심리가 싹트기 마련이다. 이런 요행을 바라는 마음엔 어떤 행운을 약속하는 예언이 솔깃하게 되고 예언에 관심을 갖는 민심(民心)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예언서(豫言書)가 나오기 마련이다.
도참가 토정(土亭)이 생년월일을 가지고 숫자적으로 그 해의 신수를 보는 토정비결을 이 세상에 내놓아 크게 호응을 받은 것도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요행주의적 심리 때문이다. 토정비결은 원래 중국의 술서(術書)를 인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닥쳐올 미래사를 수(數)라는 개념으로 신비 속에 끌어넣어 소원을 풀어 보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년월일이나 태어나는 시간이 다른 사람과 똑같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미끼로 각각 사람 따라 인생예언(人生豫言)을 하여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장난기어린 미신적인 예언서이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운명이라는 것을 감수(甘受)하도록 유도하는 노름이다.
토정비결보다 말세성(末世性)을 가미하여 한때 널리 받아진 책이 있다. 그것이 정감록(鄭鑑錄)이다.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을 앞세워 고려의 쇠망과 이조(李朝)의 흥망과 정(鄭)씨 왕조의 계룡산으로 모이라는 혹세적(惑世的) 예언서이다. 한때는 이 예언을 믿어 계룡산 일대에 모여든 군상이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한때 기독교 부흥목사를 지낸 자칭 재림주(再臨主)에 의하여 세워진 일가공회(一家公會) 그룹도 있다.
오늘날 100년도 못되는 짧은 한국기독교 역사 속에 새 예수 황국주(黃國柱), 감람나무 박태선(朴泰善), 재림주 문선명(文鮮明) 등 수 없는 자칭 ‘말세의 주인공’ 들이 나타나며 부흥의 때마다 제멋대로 하는 말세론(末世論) 해석이 환영을 받는 일들이나 예언기도를 한다는 ‘예수 점쟁이들’이 들끓는 것도 바로 이런 요행주의적 축복개념이 지배하는 민속신앙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Ⅱ. 왜곡(歪曲)된 축복개념
히브리서 저자는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모르는”(히5:12)자들이 있음을 경고했다. 교회 안에서 영적 무지에서 오는 왜곡된 신앙, 그것은 교회 밖에서 오는 박해의 세력보다도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다. 한국 교회가 오늘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왜곡된 축복신앙 가운데 그릇된 축복관은 한국 교회를 순수한 사도적 교회에서 크게 변질되게 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 왜곡된 축복관에 근거하여 가르치고 있는 문제들은 무엇인가?
1. 첫째로, 축복받기 위한 헌금
헌금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마음과 몸을 바치는 뜻에서 드리는 제사이다. 이런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헌금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돈이 없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헌금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삼림(森林)의 짐승들과 천산(千山)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내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시50:10-14)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먼저 바치는 자의 마음의 제사, 곧 감사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참된 헌금은 헌금 자체의 액수보다 헌금자의 정성과 진심이다. 그래서 과부의 엽전 두 푼을 주님이 칭찬하셨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그 많은 재산 헌금을 베드로는 책망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헌금 경향은 축복을 받았음으로 감사한 마음에서 바치기보다 축복을 받기 위해 바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친 헌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바친 자의 이름을 강단에서 또 주보에서 알리고 심하면 액수까지 알리고 있는 교회도 있다. 이것은 사람 체면을 세우게 하는데 도움을 줄런지 모르나 반드시 고쳐야할 일이다.
체면 위주로 헌금하면 반드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교회 재정을 위해 십일조 헌금을 강조하고 특별 헌금을 위해 부흥회를 열되 돈을 많이 거두는데 정평있는 부흥사, 축복을 많이 약속하는 물권(物權)있는 부흥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하여 헌금이 많이 나오면 성공한 부흥회라고 한다. 이것은 부흥회(復興會)가 아니라 富興會(Fund Raising Campaign)이다. 이런 식의 부흥회는 기업적 사업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지 복음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강단에서 거액의 봉투는 이름 불러 박수치며 칭찬하고 소액의 헌금은 봉투를 찢으며 이런 헌금이 어디 있느냐고 저주하는 일부의 부흥사들이 있다. 바로 그 적은 돈이 과부의 엽전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리고 그 바친 자의 마음에 입힌 상처를 누가 싸매어 줄 것인가? 이런 배금주의(拜金主義)의 난무아래 교회는 병들고 일부 부흥사들은 치부(致富)하고 있다.
너무나 부자가 되어 사회문제화(社會問題化)되어 가고 있다. 헌금의 종류도 한국 교회만큼 많은 교회도 드물 것이다. 별미헌금, 소원헌금, 특별감사헌금 등등... 소원헌금 때는 반드시 소원을 적고 소원의 크기에 따라 헌금을 많이 적으라고 한다. 그리고 그 소원을 성취시키기 위해 기도한 주의 종에게 그 소원헌금은 바쳐진다. 이것은 다분히 불교적 잔재임이 틀림없다. 이조 말 중들이 배고플 때 절간에서 행해지던 버릇같기도 하다.
성경이 가르치는 헌금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칠 것 뿐만 아니라 은밀하게 바칠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마6:20)는 헌금 교훈을 주실 때 주님은 바로 앞서 여러 번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만 상대하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가르쳤다. 사실 마태복음 6장 전장(全章) 교훈이 1절 말씀 곧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한마디로 요약되어 있다.
한국 교회가 계속 헌금자의 이름을 밝혀 은밀한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면 천국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주님이 약속한 상급을 받지 못하게 될 그 날에 그 비극의 책임을 먼저 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성직자들이 져야 할 것이다. 사실상 지상 교회 가운데 오직 한국 교회만 공개헌금이 널리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서양문화는 죄의식 문화(guilt culture)요, 동양문화는 체면문화(體面文化)라고 하지만 하필이면 그 체면(體面) 철학이 교회에서까지 판을 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될 것이다.
김의환 목사
미국 Calvin 신학교를 졸업(B.D.), Westminster 신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하였으며(Th.M),
Temple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그 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교수로 재직해 오면서 ‘도전받는 보수 신학’ ‘복음과 역사’, ‘기독교회사’ ‘성경적 축복관’ ‘현대신학개설’, ‘복음주의 선교 신학 동향’ 등 많은 저서를 펴냈다.
미국 나성한인교회 담임목사와 총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고 칼빈대학 총장역임. 지금은 소천 하셨음.
십일조 헌금도 마찬가지이다. 십일조는 구약의 제도이니 신약시대는 반드시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 십일조 드리는 자의 정신 자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셨을 뿐 십일조를 금하시질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하라고 명하셨다(마23:23).
그러면 바라새인들의 십일조 헌금 태도의 잘못은 무엇인가? 십일조의 양적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지극히 드믄 약용식물(藥用食物)인 박하와 회향과 근채까지 무게를 따져 십일조를 드렸다. 그러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Justice, mercy and faithfulness)을 버렸다고 했다. 외적 종교 활동에는 분주하면서 내적 영적 생활에 등한시 하는 오늘의 바리새인에게도 하신 말씀이다. 정확한 십일조의 구별에 앞서 자신이 주를 위한 성별(聖別)이 있어야 한다.
바로 십일조 교훈을 주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소경된 자로서의 바리새성을 책망하셨다. 십일조만 바치고 나머지는 내 것이므로 나머지 십의 아홉은 마음대로 쓴다는 생각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만큼 잘못이다. 지나친 십일조 강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나 십일조를 바치는 많은 사람들이 (십)의 (일)에는 의무감을 가지나 나머지 (십)의 (구)는 해방감을 가짐으로 청지기 개념에서 오는 즐거운 헌금을 드리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나의 생 전부가 다 주님의 것이라는 바른 소유관의 결여에서 나온 것이다.
개혁자 워크립((Wycliff)은 ‘우리에게 소유물을 하나님께 맡기신 것은 먼저 바르게 살기 위함이며 바르게 살지 못한 자는 소유의 자격도 없다’고 한 바 있다. 내 생 전부와 물질 전부가 주의 것으로 알고 주를 위한 삶을 누릴 때 우리의 물질관리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1/10 바치는 것은 물론 9/10을 사용하는데 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다. 십일조를 의무감으로 생각하고 그것의 물량적(物量的) 정확성만 따지고 그 다음에 형제 사랑, 가족 화목, 말씀 연구, 기도 생활에 등한히 하는 사람은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 먹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분주히 밖으로 돌아다니고 자신의 영혼과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십일조 교훈을 주신 다음 즉시 “소경된 바라새인인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23:26)고 하셨다. 겉으로 바치는 십일조보다 먼저 안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오늘날 십일조만 바치면 복받는다는 것을 지나치게 내세우면 십일조의 기본 정신을 저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자기 번영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헌금에 대하여 가르칠 때 십일조를 바치게 함과 동시에 건전한 청지기 교훈 및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함께 가르쳐야 한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의 표로서 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란 올바른 소유관 인식의 표로서 아낌없이 즐거움으로 바치게 하여야 한다.
십일조 교훈과 관계되어 몇 가지 잘못된 개념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 십일조는 교역자만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
구약시대의 십일조가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위해 바쳐졌으므로(느10:35-39) 오늘날에도 성도가 바치는 십일조는 모조리 교역자에게만 드려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에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아 창고에 넣는 일을 한 것은 십일조 관리자로서 한 것뿐이요 그들만이 십일조를 전용(專用)한 것이 아님은 본문 전체의 문맥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바쳐진 십일조는 레위인들에게 맡겨지고 그들에 의해서 ‘필요에 따라 분배’ 되어졌다(느13:13).
또 레위인은 바쳐진 십일조를 가지고 바친 자의 가족과 노비와 함께 나누어 먹으며 즐거워하도록 되었다(신12:18). “십일조를 성읍에 저축하여.... 레위인과 네 성 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14:29).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이어서 약속하셨다.
십일조 헌납의 주요 목적은 분깃이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분깃으로 삼게 하는 것임은 틀림없으나(민18:28), 그 목적 이외는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나. 십일조를 복받기 위해 바친다는 생각
물질 축복을 받으려면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상리적(商利的)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서 용납되고 있다. 흔히들 말라기 3장 10절에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아니하나 보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복을 받기 위한 십일조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부분만 인용하여 인과법칙(因果法則)적인 적용을 하려할 때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신앙에 혼란이 오게 됨은 당연하다.
최근 플로리다주에서 교회 청년이 십일조를 강조한 목사를 고소 제기한 사건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십일조를 바쳤으나 물질의 축복이 내리질 않았기 때문에 그 동안의 헌금을 다 돌려 달라는 반환소송이었다. 우리는 이런 소식을 접할 때 그런 믿음이 없는 청년을 탓하는데만 그칠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가 상리적 축복공식(商利的 祝福公式)으로 십일조 헌금을 강조하여 잘못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말라기의 십일조 교훈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타락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교훈 다음에 주어진 부수 교훈이다. 그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물으매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에 강조점은 곧 두 가지인데 이스라엘의 불의(不義)에 대한 회개와 어려운 사람을 학대하여 물질관리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는 표로서 십일조를 바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신앙과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가 없는 어떠한 십일조 헌납도 무의미한 것이며 그런 십일조 헌금자에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지 않는다. 더 크신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3장 10절에 시작되어 17절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라”고 하신 말씀 속에 성취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친백성’(벧전2:10)이 되었고 ‘아들처럼 아껴 주신다’는 약속이 있는데 십일조에 대한 보상관념을 가지고 하나님께 따지는 심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어느 목사는 십일조를 수도꼭지에 비교하여 ‘십일조를 드릴 때는 수도 파이프가 수원지(水源池)에 연결되었고 수도꼭지도 활짝 열렸으므로 이제부터 축복이 콸콸 쏟아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시원한 보상적 축복관의 묘사인가?
바른 십일조는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유가 주의 것인줄 알고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건 없이 주께 드리는 것이다. 바로 그런 성도는 주의 소유된 백성이므로 이미 수도꼭지 정도에 비교할 수 없는 수원지 이상의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십일조의 참 뜻을 깨달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일조 이상 물질을 바치며 주님을 섬겼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 8:2)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다.“(고후8:2).
초대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십일조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십일조에 얽매이기보다 자유를 얻은 크리스챤은 주님 사업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바칠 각오를 하고 필요할 때는 재산의 가치있는 부분을 즐거웁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바쳐야 한다고 했다.
오리겐(Origen)도 크리스챤을 구약시대 유대인보다 헌금에 있어서 앞서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일조를 복받기 위해서 바치지도 않았고 그것으로 헌금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2. 축복받기 원한 기도 문제
기도는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갖는 귀한 특권 중의 하나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기도할 것도 성도에게 강조한다. 그러나 오늘도 이런 특권이 남용되어 있거나 오용(誤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기도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이방인과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를 축복을 달라고 올리는 ‘리스트’ 제출로만 보기 때문이다.
가. 잘못된 기도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리고 바른 교제는 항상 상호관계를 가질 때 성립된다.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때 바른 교제는 지속될 수 없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구원받은 성도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라 나의 마음 문을 열어 아뢰는 것이 바른 기도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우리는 먼지 묻지 않고 내 뜻만 아뢰는 기도는 잘못된 기도이다. 그것도 내 뜻이 주를 위한 봉사와 헌신과 관련되는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축복만하여 달라는 기도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 이런 잘못된 기도 때문에 그 많은 ‘산상기도’나 ‘철야기도’나 ‘금식기도’나 ‘새벽기도’가 말만 많이 하면 되는 줄 알고 드린 이방인들의 중언부언의 기도로 그칠 때가 많다. ‘주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예수께 나아와 두 아들의 장래에 관하여 기도한 세베대의 아내에게 예수님은 바른 기도를 하지 못함을 책망하셨다(마20:20-22).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고 탄식하신 주님의 그 탄식이 한국교회 제단 아래서 들리는 듯하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바른 기도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이다.
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로 알아야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전체적 교리와 교훈을 알고 거기에 비추어 주의 다스림을 찾으면서 나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성령이 기도’(유1:20)하는 것이다.
우리가 빌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여 주심(롬8:26-27)은 칼빈이 해석한대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친히 하시기보다 성경을 깨닫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탄식케 하여 바른 기도를 하도록 도와주신다.
교회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하나님의 뜻’을 (The whole counsel of God) (행20:27) 다 알게 할 때 성경 단일 구절만을 뽑아 전체적 교리를 어지럽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된다. 이단들이 범하는 실수의 특색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그가 3년이나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성경을 강해할 때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한 것을 상기시키고 장차 ‘흉악한 이리’(이단)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행20:30)을 할 것을 미리 경계했다.
그 ‘어그러진 말’이란 바로 전체 교리를 무시하고 ‘자기들을 좇게 하기 위해’ 일부의 성구만 내세워 가르치는 이단설이다. 오늘날 성경이 잘못 인용되거나 해석되어 바른 기도 생활에 혼란을 가져오는 일이 많다. 그 대표적 성구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 잘못 해석되는 성구들
가. 신명기 28:1-6
번영신학(The Doctrine of Prosperity)을 가르치는 자들은 이 본문을 인용하여 형통과 부유가 축복의 증거이며 신약시대 성도들이 마땅히 구할 바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는 축복은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창12:3)에 근거한 것이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은 아브라함의 씨에서 장차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救贖)의 축복을 의미함이다(갈3:14).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받은 형통과 물질 축복은 구속의 언약 관계(言約關係)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되었다(마5:17, 27:28; 히8:7-13).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예표적 축복은 오늘날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 차원에서도 그것도 가시적(可視的)으로 적용하려함은 잘못이다. 이제 신약시대에 예수를 믿는 자는 구약에 약속된 모든 축복을 이미 받은 자이다. ‘머리가 된다’는 축복은 반드시 출세하여 남의 위에 올라간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너희 중에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6-27) 하신 주님을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높은 자리‘만을 축복으로 보지 않고 ’섬기는 종‘의 삶을 더욱 더 축복으로 보는 것이다.
‘물질적 부유’ 그것을 찾은 것만을 복으로 보지 않고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행20:35)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른다. 이 사실과 관련해서 오늘날 구속사(救贖史)를 역행(逆行)하는 선민사상(選民思想)도 경계하고 넘어가야 한다. 민족 단위의 선택은 이스라엘 밖에 없다. 오순절 이후엔 이방인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개인적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해방 후 이북성도들의 대거 남하(大擧南下)와 6.25사변을 통한 회개운동 이후 비교적 이웃 아세아 다른 나라보다 복음화운동이 크게 촉진되었고, 군복음화 및 맘모스 여의도 집회들이 성공으로 교회 성장에 괄목한만한 성과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한국 민족을 선민(選民)으로 삼게 한 증거가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옛날 ‘단’지파가 ‘단’군(檀君)이 되어 한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주장은 성경신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억설이다. 민족주의(民族主義)는 또 하나의 유대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민족 제단’(民族祭壇)이라는 표현도 유대 선민주의의 잔재(殘滓)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축복은 반드시 구원 역사의 빛 속에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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