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수암 둘러보기
▲ 대웅보전 뜨락에 세워진 6면3층석탑 |
운수암
경내로 들어서면 대방과 3층석탑을 시작으로 광음선원과 대웅보전 등이 차례대로 마중
을 한다.
대웅전 뜨락 중앙에 자리한 3층석탑은 1990년대 후반에 마련한 것이다. 1990년대면 지금과도
꽤
가까운 시절인데, 벌써부터 기록이 누락되거나 기억이 상실되어 막연히 1990년대 말에 세
웠다고 그런다.
수려하고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이 탑은 특이하게 6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래서 6면3층석탑
이라 부른다. 그가 있기 전에는 절에서 그 흔한 탑도 하나 없었는데, 탑을 아주 우람하게 세
워 그 허전함을 크게 달랠 수 있게 되었다.
탑의 구조는 밑에서부터 2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 상륜(相輪)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아직은 어린 탑이라 피부가 매우 하얗고 반질반질하다. 윗층 탑신에는 6마리의 석사자
를 배치해 탑신을 받쳐들며, 그 안에는 사천왕(四天王)과 관세음보살을 두었다. |
▲ 6면3층석탑 윗층 기단의 사자석과 사천왕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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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방과 마주보는 광음선원(光音禪院)
1996년에 지어진 것으로 요사(寮舍) 및 선방
(禪房)으로 살아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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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수암 대웅보전(大雄寶殿)
북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
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2년에 짓기 시작
하여 1986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가 세워짐으
로써 기존의 대웅전은 비로전으로 현판을 갈았
다. |
▲ 운수암 석가여래좌상과 닫집 |
대웅보전 불단(佛壇)에는 석가여래상을 봉안했고, 그 뒷쪽에 삼신후불탱을 두었다. 그들 위에
는 붉은 피부의 닫집이 있는데, 1층은 적멸궁(寂滅宮), 2층은 법왕궁(法王宮), 3층은 내원궁(
內院宮)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극락조(極樂鳥)와 구름 등 갖은 조각을 두어 장엄함을 더했
다.
불단 좌우에는 11면관세음보살입상과 목조지장보살입상을 봉안했는데, 이들은 2001년에 조성
된 것으로 그 주변에는 삼장탱(三藏幀)과 신중탱(神衆幀)이 자리하고 있다. |
▲ 운수암 대방(大房) |
대웅보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대방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양반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
다.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지어진 26칸 규모로 위에서 보면 'H' 모양이며, 예전에
는 법당의 역할도 겸했다. 대방은 보통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숙식/예불 편의를 위해
지어진
것으로 왕실의 지원을 받던 서울 근교 사찰의 필수 건물이었다. 이곳도 흥선대원군과 인연이
깊어 이렇게 대방을 마련했는데, 절이 서울과 멀어서 상류층 손님의 왕래가 적었다. 하여
평
시에는 운수암 승려와 신도들도 예불/숙식 장소로 사용했다.
비로전이 생기면서 법당의 짐은 덜게 되었으며, 지금은 요사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
할을 하고 있다. 종무소는 건물 앞부분에 있는데, 신발을 벗고 툇마루를 거쳐 안으로 들어가
는 구조이며, 공양간은 서측에, 요사는 북측에 자리한다. 근래에 북측에 지붕을 덧붙여 내부
가 좀 넓어졌다.
정면 어칸에는 흥선대원군이 내린 '운수암' 현판이 있어 그와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며, 가
로
184cm, 세로 52cm 크기로 하얀 바탕에 푸른색으로 글씨를 썼다. 글씨체는 예서(隸書)로 3
개의
낙관이 뚜렷하다. |
▲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대방 (정면에 보이는 문이 공양간임)
▲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방의 뒷모습
▲ 흥선대원군이 쓴 푸른색 운수암 현판의 위엄
'庵'자가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
생기가 감돈다.
▲ 비로전(왼쪽)과 삼성각(윗쪽)
▲ 운수암 비로전(毘盧殿) |
대웅보전 옆구리에는 비로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2번째로 늙은 건물인데, 건축 양식과 내부에 있었던 칠성탱과 산신탱이 1870년에 조성된 것으
로 보아 19세기 후반(1870년 또는 그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대웅전의 역할을 했으며, 1980년대에 불단에 봉안된 석불(비로자나불)이 마모가 심
하고 깨진 부분이 많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이후 1986년에 대웅보전이 신축되자 땅속에 파묻
은
석불을 다시 꺼내 이곳에 봉안하고 건물 이름을 비로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이는데, 1986년
이면 40년도
채 되지 않는 지척의 시절임에도 이곳은 기록을 너무 남기지 않아 혼돈을 유발한
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뒤에는 아미타회상도(아미타후
불탱)이 있으나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고 그 모조품이 대신 한다. 그 외에 현왕탱
과 신중탱이 걸려있고, 절을 세운 장씨 보살의 진영(眞影)이 걸려 있다. |
▲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
비로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 때 석불(石佛)로 왜정 말기에 다른 곳에서 가져왔다
고
전한다.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자 옛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높이 107cm, 어깨 폭 82cm인데, 파
손된 부분이 많아서 1980년대에 땅속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6년에 다시 꺼내 비
로전의 주인으로 삼았으며, 불상의 피부와 옷이 온통 하얀 것은 땅속에 묻힌 흔적과 이전에
파손된 부분을 커버하고자 백분을 발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이나 좀 고색의 때가 감돌지
나머지는 고색의 기운도 거의 잠들었다.
그는 1986년 안성시(당시는 안성군) 향토유적 16호의 지위를 얻었으나 2006년 경기도 지방유
형문화재로
지위가 높아졌으며, 연꽃과 구름 무늬가 새겨진 화강암 대좌(臺座)까지 갖추고 있
다.
불상의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백분과 검
은색이 뒤섞여 고단해 보이는 얼굴은 통통한데, 눈과 코, 입, 귀가 선명하며, 귀는 목까지 늘
어져 중생의 소리를 경청한다. 목은 두껍고 삼도(三道)가 있었으나 훼손되었으며, 몸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섬세히 표현되었다.
두 손은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으며, 다리는 오른쪽 발을 올
려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는데, 정강이 부분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수리한 부분이 많지만
조각솜씨는 괜찮은 편이며, 다소 경직되고 도식화된 형태를 통해 고려 때 불상으로 여겨진다.
석불 뒤에는 아미타후불탱이 걸려 있는데,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제작된 것이다. 허
나
이 그림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으며, 그림 화기(畵記)에는 왕과
왕비의 만수세(萬壽歲)를 기원하는 글과 대원군 일가, 명성황후(明成皇后) 일가의 시주자 명
단이 있어 운수암도 왕실 원찰(願刹)의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화기에는 '高聖山 雲峀庵'이라 쓰여있어 이름은 같지만 지금과 한자(漢字)가 1글자씩 달랐음
을 보여주며,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大明 崇禎紀元後 五癸酉閏六月二十八日(대명 숭정기원후
오계유윤육월이십팔일) ~~'이라 쓰여 있어 오래전에 망한 명나라에 대한 쓸데없는 사대주의와
그리움이 여전했음을 보여주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
▲ 현왕탱(現王幀)과 창건주 장씨 보살의 진영(오른쪽) |
비로전 불단 옆에는 명부(冥府, 저승)의 왕인 현왕(現王)을 담은 현왕탱과 창건주 장씨 보살
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창건주의 진영은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전하지 않으며, 그림 상단
측면에 '伽藍刱建大化主 淸信女 般若明 張氏 眞影(가람창건대화주 청신녀 반야명 장씨 진영)'
이라 쓰여 있고, 그
앞에 단을 마련해 창건주를 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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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전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 |
▲ 삼성각 산신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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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각 칠성탱 |
▲ 삼성각 독성탱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198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삼성각이 있기 전에는 비로전에 얹혀 살았
는데, 이곳에 있던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은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
로 진품은 모두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있고, 복제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서 그림이 꽤
선명도가 진하고 세월의 주름이 전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