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이강산님 작
오랫동안 속을 썩였던 김치냉장고를 바꿨다. 야채고 김치고 뭘 넣으면 보관이 되는 게 아니라 걸
핏하면 얼었다. 냉장고 외벽의 가스가 새서 그렇다는데 고치는 값이 몇 십만원이니 고치기도 그
렇고 백 몇 십만원하는 기기를 덜컥 저지르기도 겁나 반 년은 뭉그적거렸다.
주문 다음 날 전화가 왔다. 내일 10시-12시 사이에 배송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그 시간은
집에 없을 시간이라 더 이른 시간이나 더 늦은 시간이 좋겠다고 했더니 시간을 조정해본 다음 연
락을 하겠다고 한다. 당일 아침 전화가 왔다. 오후 4시는 어떤가 물었다. 5시면 좋겠다고 했더니
또 조정을 해보고 전화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의 조정을 거친 끝에 5시 가까운 시간으로 결
정이 났다.
인터넷으로 주문했기 때문에 냉장고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예전 것보
다 용량을 50% 늘렸기 때문에 1/3쯤 불어나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그는 베란다에 있는 화분들
을 치우고, 고정되어 있는 빨래 건조대의 나사를 풀어 그것을 재빠르게 치웠다. 그러더니 냉장고
가 거치고 지날 문들을 모두 뜯어내고서는 동반한 아르바이트생과 함께 헌 냉장고를 들어냈다.
"손님이 구입한 냉장고가 140kg이예요. 저 아래 보이시죠? 부피도 엄청나게 커요."
(300L 냉장고인데도 이렇게 무겁다.)
박스에 담긴 냉장고는 무지하게 커 보였다. 그런데 올리는 건 사다리차가 한다지만 우리 집에 들
어 온 다음 두 사람이서 저걸 어떻게 주방까지 옮길까 걱정이 된다. 두 사람은 벌벌 떨리는 손과
발로 당기고 버팅기며 어렵사리 작업을 진행했다. 이미 두 사람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
다. 곁에서 바라보기 안쓰럽고 민망할 지경이다. 냉장고를 쉽게 설치할 수 있는 집에 살지 못하는
것이 큰 죄처럼 느껴져 안절부절 못했다. 이렇게 냉장고 한 대가 들어와 제자리에 안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0분 남짓. 시간은 이미 5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죄송해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들을 도와줄 일은 없고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시간이 편편치 않아 때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했
다.
"점심은 드셨어요?"
당연히 네, 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엉뚱한 응답이 돌아온다.
"아직 못 먹었습니다."
"아니, 지금 저녁 식사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점심도 안드셨단 말씀이세요?"
"이런 냉장고를 들고 하루 20집 정도를 간답니다. 그런데 제각각 시간이 다르고 다들 바쁘다며 자
신들 시간에 맞춰주길 원하지요. 조금만 빨라도, 혹은 조금만 늦어도 화를 내구요."
하긴, 나부터도 기사님 편한 시간에 오세요, 라고 하지 못했으니.
모든 작업을 마친 그가 명함 한 장을 건네주며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란다. 뭐라도 입을 다시게 하
고 싶었는데 빨리 가봐야 한다고 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고맙습니다. 맨입으로 인사하고 그를
현관밖으로 내보냈는데 순간, 이러면 안되지 싶었다.
기사님!
소리쳐 불러 세워놓고 얼른 2만원을 들고 나가 짜장면이라도 사 드시라며 그에게 내밀었다. 하지
만 그는 손사래를 치며 도망치듯 계단을 달려 내려간다.
엘레베이터 없는 5층에 살다보니 이렇게 미안한 일들은 수시로 벌어진다. 물건을 배달할 때, 택배
가 왔을 때, 때로는 주문한 음식이 왔을 때도 그렇다. 무겁지 않은 짐들은 관리실에 맡겨주세요, 라
고 하여 손수 가져오기도 하고 음식을 먹고 나면 그릇을 씻어, 나가는 길에 식당까지 가져다 주는
것도 내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간혹 얌체같은 택배기사님을 만나기도 한다. 일단 관리
실에 맡겨 놓은 다음 문자를 보내 '전화를 받지 않아 관리실에 맡겨 놨'으니 찾아가라고 한다. 이럴
땐 부르르 성질이 난다. 상습적으로 그러는 기사님이 있어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할까 말까 갈등할
때 택배기사님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고 한 달에 130-150만원을 손에 쥔다고 했다. 그들이 하루에 방문하
는 집은 120-130집 정도. 건당 8백원 남짓한 수당을 받지만 자동차 기름값과 기타 부대비용을 빼고
나면 몇 만 원이 남는다고 했다. 참 피나는 돈을 버는구나 싶었다. 불뚝거리던 마음을 조용히 내려
놓았다.
길가다 우연히 알게 된 이와 오래도록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흥청망청 살아도 될 만큼 여
유롭지는 않아도 그냥저냥 살았었다. 그런데 남편 사업이 기울어 할 수 없이 팔을 걷어 부쳤다. 그
녀는 밤에 식당이나 주점을 돌며 과자를 판다. 그녀가 하룻밤에 걷는 시간은 평균 7, 8시간. 온갖
수모를 겪고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걷지만 손에 쥐어지는 돈은 2, 3만원이 전부다. 다른 일을
해보라고 했더니 아이들 키우는데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 일이라 놓지 못하고 있다며 쓴웃음을 짓
는다.
내가 지고 있는 짐만 무거운 게 아니다. 사는 일이 너무나 힘에 겨워 주저 앉아 울고 싶을 때, 이렇
게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마음 깃 다시 여밀 수 있지 않을까. 나를 에워 싼 사
람이나 환경이 더러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해도 그들이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픔을 헤아린
다면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