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우리는 길 떠나는 인생
文 熙 鳳
언제 떠날지는 몰라도 살아가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애절한 사연 서로 나누기도 한다. 기쁜 일, 슬픈 일, 안타까운 일 등 많은 일들과 접하면서 아등바등 살아간다. 그러다가 갈랫길에 들어서면 그때는 어차피 헤어질 사람들이라는 걸 깨닫는다. 인생을 정말로 잘 살다 누군가가 먼저 가는 날 눈물보다 투명한 빗방울들이 삽시간에 하늘의 절반을 적신다. 하늘도 그 사람을 부르긴 했어도 ‘너무 일찍 불렀구나.’ 후회하면서 흘리는 눈물이겠다.
마지막으로 세상과 작별 인사하면서 ‘더 사랑 해줄 걸’ 하고 후회할 것을 왜 그리 못난 자존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며 티격태격 싸우면서 살아왔는지 자책이 든다. 사랑하며 살아도 너무 짧은 시간 베풀고 또 베풀어도 괜찮았으련만 웬 욕심으로 무거운 짐만 지고 가는 고달픈 나그네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그래서 인간을 ‘우매하다’ 했는지도 모르겠다. 구겨진 마음보다 구겨진 옷이 아름다운 법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왔으니.
정성들여 탑을 쌓듯이 엄청난 사랑을 받고도 조그만 사랑밖에 주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래서 인생살이의 절반은 뉘우침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면 다 벗고 갈 인생이 아니던가. 화려한 옷도, 빛나는 명예도, 그 많은 재산도 모두 무용지물이다. ‘자랑스런 고운 모습도 더 그리워하며, 더 만나보고 싶고, 더 주고 싶고, 또 보고 또 보고 따뜻이 위로하며 살아야 하는데.’ 하는 자책으로 잠 못 이룬다. 살아생전 허물과 죄악을 자신의 몸속에 슬몃 밀어넣고 베옷 한 벌로 가리고 가겠지. 마지막 잡은 손에 전류처럼 흐르는 삶의 무게가 하도 가벼워 중량감조차도 느끼지 못하겠지. 짐이라 짊어지면 어깨가 늘어진다. 낙이라 생각하면 몸까지 가볍다는 걸 왜 그 때는 몰랐는지.
산다는 건 열차의 좌석을 배정받는 것처럼 운명 혹은 우연일지 모른다. 우린 결국 앉았던 자리를 뒷사람에게 양보한다. 깨끗이 사용하고 미련없이 내주는 것 역시 앞선 사람의 성숙한 의무가 아닐는지.
우리네 인생은 잠시 빌려쓰다 두고 가는 것이 아니던가. 과욕은 힘든 인생을 더욱 힘들게 한다. 서로 나누어 쓰고, 함께 보듬고, 서로 손잡고 ‘산토끼’ 합창하면서 들로 산으로 바다로 그렁저렁 살다 가는 삶을 최고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 갖고 있는 사고다.
이제 와 생각하니 왜 그리 마음의 문 닫아걸고 더 많은 사랑을 베풀지 못했는지 후회막급이다. 떠났지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사람은 살아생전 솔바람이 되고 싶어 했고, 장작불이 되고 싶어 했던 사람일 터이다. 오십을 살면 어떻고, 백을 살면 어떠리오? ‘좀더 모닥불 가까이 오세요. 몸을 녹여야 갈 수 있어요.’ 왜 이런 베풂을 실천하지 못하고 살았을까?
사랑한 만큼 사랑받고, 도와준 만큼 도움 받는데, 심지도 않고 거두려만 몸부림쳤던 부끄러운 나날들이 후회로 다가온다. 서로 아끼고 사랑해도 허망한 세월들인 것을, 어차피 저 인생의 언덕만 넘으면 헤어질 것을 미워하고 싸움만 했으니 무엇으로 보상 받는단 말인가? ‘이제 남아 있는 시간만이라도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함께 하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하고 다짐해본다.
살아보면 느끼게 된다. 돈이 많은 사람보다, 잘난 사람보다, 많이 배운 사람보다 마음이 편한 사람이 훨씬 좋다는 것을. 나로 인해 가슴 아팠을 모든 이에게 지금이라도 내 뜨거운 가슴을 바친다.
너나 나나 우리는 다 떠날 나그네다. 서로 이해하고 아껴주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날에는 개나리, 진달래에게도 눈물 흘리게 하자. 자신의 심장에 플러그를 꽂아보면 안다. 가슴이 얼마나 요동치는지.
상형문자처럼 황홀한 노을을 가슴속에 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줍고 싶은 산밤 하나 다람쥐 위해 남겨두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고 등불로 남아 있는 당신이 그립다. 뽕나무 오디는 빨간 것이 설익은 거다. 검을수록 잘 익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