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십여 종의 영양소들은 크게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 무기질의 5대 영양소로 구분된다. 최근엔 이외에도 식이섬유를 제6영양소라고 부르는 데 이어 제7영양소로 피토케미컬을 꼽으며 주목하고 있다.
식이섬유란 사람의 소화효소가 분해하지 못하는 탄수화물로서, 예전엔 우리 몸에 필요치 않은 물질로 여기기도 했다. 그리스어로 식물을 의미하는 ‘피토(Phyto)’와 화학물질 ‘케미컬 (Chemical)’의 합성어인 피토케미컬(phytochemical)은 말 그대로 ‘식물 속에 함유된 화학물질’이란 뜻으로 식물의 뿌리나 잎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화학물질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다.
이 화학물질이 인체에 들어가면 항산화물질이나 세포 손상을 억제하는 작용을 해 건강을 유지시켜주기도 하는데, 버드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아스피린이나 말라리아 특효약인 퀴닌 등이 대표적이다. 피토케미컬은 비타민과 무기염류가 풍부할 뿐더러 암 예방, 혈중 콜레스테롤 저하, 염증 감소 등의 효과가 읽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매일 통곡물을 먹을 경우 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현저히 감소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 morgueFile free photo
그런데 식이섬유를 비롯해 제7영양소라 불리는 피토케미컬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곡물의 알곡을 싸고 있는 껍질 부위이다. 낟알이라 부르는 식물의 씨는 겨와 배아, 배젖으로 이루어져 있다. 겨는 왕겨와 속겨 같은 껍질을 말하며, 배아는 꽃가루와 합체해 수정하면 싹이 터서 새로운 식물로 자라는 부분이다. 우리가 보통 알곡이라 일컫는 낟알의 속부분인 배젖은 배아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한 조직이다.
왕겨만을 제거해 속껍질과 호분 층이 그대로 남아 있는 현미의 경우 백미에 비해 식이섬유가 9배나 많다. 또한 피토케미컬도 70~80%가 곡물의 알곡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 부위에 몰려 있다. 따라서 겉껍질만 벗겨내 속겨와 배아가 남아 있는 현미, 통밀, 귀리, 보리, 호밀, 메밀 같은 통곡물이 요즘 웰빙 식품계의 아이콘으로 부상하고 있다.
우선 현미에 남아 있는 배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현미 중 배젖이 차지하는 부분이 92%이며 쌀겨는 5%, 그리고 배아가 차지하는 비율은 3%에 불과하다. 하지만 현미 한 톨에 든 전체 영양소의 66%가 배아에 들어있다. 또한 배아에는 회춘 비타민으로 통하는 비타민 E와 탄수화물을 에너지로 바꾸는 데 필수적인 비타민 B군이 풍부하다.
현미와 백미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땅에 심거나 물에 담가보면 된다. 현미의 경우 며칠 뒤 싹이 나오지만 백미를 물에 담가 놓으면 싹이 나기는커녕 얼마 지나지 않아 썩어 버리기 때문이다.
식이섬유, 피토케미컬, 그리고 베타글루칸
통곡물의 속껍질에는 식이섬유와 피토케미컬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슈퍼물질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면역 증강 및 암 예방 등의 효과가 알려지면서 주목 받고 있는 ‘베타글루칸’이 바로 그것. 버섯이 어떻게 항암 효과를 일으키는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세계적으로 각광 받게 된 베타글루칸은 버섯 중에서도 특히 표고버섯, 잎새버섯, 차가버섯 등에 많이 함유되어 있다.
그 후 베타글루칸은 항암 효과뿐만 아니라 면역세포 반응을 활성화시키고 백혈세포 생산을 자극함으로써 면역 기능을 향상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베타글루칸이 버섯뿐만 아니라 통곡물의 겨에도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특히 귀리와 보리에 풍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양에서 주로 아침밥 대용으로 먹는 오트밀은 바로 귀리죽이다. 귀리에는 베타글루칸이 3% 정도 함유돼 있는데, 귀리의 베타글루칸을 매일 3그램씩 섭취하면 콜레스테롤 수치가 줄고 심장질환 위험이 23%가량 낮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베타글루칸 3그램은 오트밀 한 그릇 정도에 해당되는 양이다.
때문에 귀리는 통곡물 중에서 유일하게 미국 언론에서 선정한 10대 건강식품으로 소개된 바 있다. 또한 핀란드와 불가리아, 티베트 등 장수 국가의 100세 이상 노인 식단을 조사한 결과, 가장 많이 등장한 식품이 귀리였다고 한다.
최근 통곡물과 건강의 상관관계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미국과 싱가포르 공동 연구팀이 ‘미국의사협회 내과학회지’에 게재한 그 연구결과에 의하면, 매일 통곡물 28그램을 먹을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총 사망률이 5% 감소하며, 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은 9% 감소했다는 것.
노화로 인한 인지기능 감퇴에도 도움돼
이번 연구는 의사와 약사, 간호사 등 의료관계자 총 1만8085명의 추적조사 데이터를 분석해 조사기간 전 이미 심혈관계 질환 등 주요 만성질환에 걸린 사람들을 제외하고 기타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나이 및 흡연, 체질량지수 등과 같은 요인을 조정해 추려진 여성 7만4천여 명, 남성 4만3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이다.
미국 식품의약청(FDA)에서는 ‘한 번에 약 30그램씩 하루 3번 통곡물을 먹으면 심장병과 당뇨병의 예방에 도움이 된다’며 통곡물의 섭취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또한 FDA는 1999년 7월부터 통곡물이 51% 이상 함유된 제품의 라벨에 ‘암과 심장병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내용의 표시를 허용하고 있다.
통곡물은 노화로 인한 인지기능의 감퇴를 예방하거나 진행속도를 늦추는 데도 도움이 된다. 미국 유타주립대학의 연구팀이 통곡물과 견과류, 콩류 식품을 다량 섭취한 최상위 20% 그룹과 그렇지 않은 최하위 20% 그룹을 비교평가한 결과, 최상위 20% 그룹의 인지기능 검사 점수가 1.19~1.22 포인트 더 높게 나타난 바 있다.
지난해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의 프란시스 휴즈 교수팀은 파운드베리 묘지에서 출토돼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서기 200~400년경에 사망한 영국 성인 303명의 두개골을 조사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오늘날 영국 성인의 15~30%가 치주염에 시달리는 것에 비해 그 두개골의 경우 치주염을 앓았던 이들이 5%에 불과했던 것.
양치질을 하지도 않았던 고대인들이 어떻게 현대인보다 잇몸병이 훨씬 더 적었던 걸까. 그에 대해 연구팀은 현대인이 고대인에 비해 흡연 등의 생활습관과 당뇨병으로 나타나는 나쁜 식습관으로 구강의 건강 상태가 나빠진 탓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런데 고대인의 두개골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치아의 마모가 유난히 심한 것으로 나타난 것. 그 이유는 통곡물을 먹던 당시의 식생활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대인들의 잇몸병이 적었던 이유 중에 혹시 통곡물의 식이섬유가 양치질 역할을 한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