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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운현 시조정가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운현
-명인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보유자 김경배 선생
고 두 석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7월 하순의 날씨는 무더웠다. 김경배 선생과 인터뷰 약속이 되어 있어서 아침 일찍부터 무더위를 무릅쓰고 서둘렀다. 내가 사는 분당에서 대구까지 멀게만 느꼈더니 생각보다 먼 거리는 아니었다. 고속버스로 정확히 3시간 20분 걸려서 동대구 터미널에 도착하여, 미리 약속해둔 경주 시조명인이며 한학자이기도 한 김주호 선생의 안내로 김경배 선생의 아파트에 들어서니 선생과 사모님 양주분이 함께 나와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리의 전통복장인 하얀 세모시 차림의 정갈한 모습의 선생을 첫 대면하면서 정가를 하시는 분의 복장으로 썩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눈에도 다정다감하고 좋은 인상에 내 마음도 푸근해짐을 느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선생을 모시고 나와 가까운 곳으로 안내되어 갔는데, 식기와 찬그릇이 요즘 보기 드문 놋그릇 일색이어서 특이했다. 아마 김 선생께서 단골로 다니는 식당인 듯 한데 여기서도 우리 전통양식의 고풍스러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오가는 길에 선생을 곁에서 뵈오니 발걸음 하나까지도 서두르지 않는 여유가 몸에 밴듯하다. 마치 평생을 정가처럼 정도만 걷고 살아오신 듯하다. 선생 댁은 20층 아파트로 대구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전망이 원대하고 시원스러웠다. 아담하게 꾸민 거실의 가구 하나 까지도 주인을 닮아 품위가 있어 보였다. 선생의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가니 방안엔 거문고와 장구를 비롯한 낯익은 전통악기와 그리고 많은 국악서적들이 방안을 빼꼭히 채우고 있어서 풍류와 선비의 풍도가 감돌고 있었다. 사모님께서 내오신 다과상엔 포도 대추 곶감 은행 등이 소담스럽게 담겨져 있었다. 도를 넘지 않은 간소하면서도 정성이 가득한 다과상 곁엔 선생께서 평소 즐기신다는 중국산 보이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을 통해 집안 곳곳에서 예와 풍류가 풍겨 나옴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의 성장배경부터 질문을 했다.
선생께선 일찍이 서울에서 태어나셨다 한다. 당시는 고양군이었지만 지금은 서울 은평구 구산동이다. 그래서 지금의 은평초등학교를 다니시었다 한다.
“노래 부르기를 무척 좋아해서 형제 동료들과 어울려 합창도 하고 또 혼자서 북한산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지요. 그렇게 노래하면 산울림이 울리고 산울림 만큼 찡한 감동이 스스로를 울리곤 했어요. 지금도 즐겨 불렀던 노래로 “울밑에 귀뚜라미..”가 생각납니다. 그러다가 내 노래에 스스로 도취되어 반할 정도였답니다.”
아마 그때부터 음악의 길로 들어설 것을 예견하셨던 것 같다. 가을이면 멍석을 펴놓고 달을 쳐다보며 가을노래를 불렀고 북한산으로 날아가는 철새를 바라보며 찡한 감정에 휩싸일 때도 노래로 마음을 달래기도 하셨단다. 이렇듯 정서적으로 감성을 키우며 성장해온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후일 유명한 가객이 될 수 있는 정서적 바탕과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에 입학했었지요.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전승기관 역할을 했던 이왕직 아악양성소가 그 전신입니다. 당시 남학생만 뽑았는데 3대1의 관문을 뚫고 입학했었습니다.”
못 살던 시절인지라 그 학교는 전원 국비장학생으로 수업료가 무료였기에 학생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국악사 양성소가 1956년에 설립했으니 선생은 1기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명칭만 이왕직에서 국립국악원으로 바뀌었을 뿐, 커리큐럼도 이왕직 아악부 양성소와 똑같았어요. 예를 들어 남학생들만 다니는 학교인데도 무용과목이 필수과목이었으니... 게다가 두봉 이병성 선생과 소남 이주환 선생 등 쟁쟁한 교사진에다가 교사들의 열의도 대단했답니다. 1학년 때 종묘제례악, 문묘제례악, 편경 편종을 배웠으며 2학년 올라가서 전공 선택하였는데 나는 거문고 전공을 한 까닭에 그 유명한 성경린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었지요. 정가는 전공과목에 들어있지 않았으므로 기악을 일단 전공으로 택해야 했기에 거문고를 선택한 것입니다. 원리원칙을 강조하시던 성 선생님이신지라 학생들은 모두들 무서워했지요.”
전공은 아니지만 성악에 취미와 소질이 있던 선생은 늘 정가연습을 많이 했던 관계로 많은 학생들 중에 뽑혀서 5학년 때 정동방송국에 가서 남창가곡 “소용이”를 불렀던 것이 방송 출연의 시초였다 한다.
“이로 인해 갑자기 학교에서 스타가 되었지요.” 선생님은 약간 쑥스러운 듯 웃으시었다. 또한 당시 운니동(비원 앞)에 있는 정가강습소에서 두봉 선생이 가사 지도를 하고 가곡은 소남 선생이 지도를 했었는데, 학교수업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가서 열심히 정가를 배웠다 한다. 그러다가 두봉 선생은 폐가 안 좋아 그만 두시고 소남 선생이 계속 지도하시는 동안에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가서 열심히 배웠다 한다.
“국립국악원 일소당 무대에선 한 달에 한 번씩 국악감상회가 열리곤 했었는데 당시 쟁쟁한 국악인들 - 이를테면 신쾌동, 한갑득, 임방울, 묵계월 등이 출연해서 정악뿐만 아니라 민속악도 공연을 했었는데, 이 무대에서 나는 홍주의에 복두 쓰고 언락 편락 등, 가곡을 자주 부르곤 했는데, 이 때 목 좋다는 칭찬도 많이 받게 되었지요.”
이로 인해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가객의 길로 들어섰는데 드디어 61년도에 국악양성소를 졸업하고 국립국악원에 몸담게 되었다 한다.
“당시 원로는 국악사라 불렀는데 저 같은 신입은 연구원이라고 했지요. 함께 졸업했던 동창들의 절반 정도는 서울대 국악과 진학했는데 나는 진학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이 생각되어 곧장 국립국악원 연구원이라는 전문가의 길로 나서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생활도 잠시 일뿐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해를 넘기고 다음해인 1962년에 서울대 국악과 입학했는데, 그땐 성악 전공이 없어서 대학에서도 거문고 전공을 했었지요. 때마침 그 해 공보부 주최 5.16기념 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성악부 1등을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뿌듯합니다. 당시 성악부와 기악부로 나뉘어 경연했는데 성악부는 민요 판소리 정가 등 정악 민속악 가릴 것 없이 출연해서 겨루는 대회였기에 1등 한다는 게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었지요. 1등 축하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었지요. 그 중에서도 양모 되시는 김월하 선생께서 인사동 기와집 마루에 한 상을 걸게 차려주신 생각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후로 군대 다녀와서 다시 대학에 복학을 해 다니면서도 소남 선생에게서 사사 받으며(1965년부터) 방송 출연도 수도 없이 많이 하게 되었다 한다. 소남 선생에게서 목 쓰는 법을 많이 배웠던 때였으며, 여창에서 선율을 여창 식으로 불러야 함을 월하선생에게서 터득했고, 또한 시창을 배우기도 했다 한다. 그 후 월하선생의 시조창보를 선생께서 직접 만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월하문화재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침이 되고 있다 한다.
“정가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꼭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한 말씀 해주십시오.”
“요즘 젊은 사람들 목 좋다고 노력 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빨리 이름만 얻으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노래를 제멋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멋대로 하다 보니 안 좋은 자기만의 조가 생기게 되지요. 악보대로 공부하되 반드시 선생 앞에서 똑바로 익혀야 합니다. 악보에서 나타나는 앞에 나오는 음만 하다 보니 이면적인 선율은 엉터리가 많습니다.”
말씀하시는 동안 가사 중에서 황계사를 예를 들어 “한 곳을” 이란 대목을 짚어 부르시면서 이때 “한-” 을 돌려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음에 안타까워 하시었다.
“대학교수, 인간문화재 등 화려한 경력과 이에 걸 맞는 실력을 인정받기 까지의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이주환 선생은 71년도에 인간문화재가 되셨고 74년도에 김월하 선생께서 여창가곡으로, 76년에 홍원기 선생이 지정 받으셨지요. 많이 망설이다가 홍원기 선생 전수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졸업후 장사훈 선생 자문 받아 교편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우선 생활이 되어야하니까 어쩔 수 없었지요. 그러다가 오디션 (정가)을 봐서 국립국악원에 다시 들어가기도 했으며 또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는 등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답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정가 곁을 떠나본 적은 없었지요. 그러다가 경북대학교 교수로 채용되어 마지막 정년까지 보냈지요. 아마 교육대학원 졸업하고, 레코드판 26곡 전곡 취입하고, 제1회 KBS국악대상 받고, 가곡독창회 가졌던 것 등의 경력이 참작되어 교수로 채용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살아오시는 동안 좌우명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좌우명이라면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을 대할 땐 언제나 부드럽게 대하고, 일단 어떤 일이든 일을 할 적에는 강한 마음으로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가를 할 때만은 걱정도 잊고 괴로움도 잊고, 인생을 사는데 즐거움을 느끼며 산다고 하신다. 오로지 정가를 위해 태어난 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려운 정가를 하시면서 힘든 경우도 많으셨을텐데, 혹시 더 쉽게 갈 수 있는 노하우라도 있습니까? ”
“노하우는 없는 것이 노하우입니다. 본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어요. 요령 피우면 안 되지요.”
“선생님께서는 지금도 연습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는데, 평생을 해오신 분이 아직도 연습하실 부분이 있으신지요?”
“네. 지금도 꾸준히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연습량이 적으면 유연성이 떨어지고 빡빡하니까 계속 갈고 닦고 해야지요.”
겸손하게 말씀하시면서도 강한 의지가 내비춰 보였다.
“요즈음 근황을 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여전히 바쁩니다. 명예교수로 경북대 출강, 부산대, 단국대 출강, 전수생들 지도, 월하문화재단 연습실에서 한 달 한 번 모여 지도하고 있으며, 매월 한 번씩 또 월하재단 식구들끼리 모두 모여 연습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우리 집에서도 가르치고 내가 자주 가는 가산에서도 가르치지요.”
선생은 지금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가산 마을에 조용한 집 한 채를 마련해서 가끔 기거하시면서 좋아하는 개도 기르고 정가 연습도 하고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전원생활을 하고 계신다.
나는 정가에 대한 좀 더 많은 내용을 알고 싶어서 좀 더 깊이 있는 질문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턴 일상적인 답변과 달라서 선생님의 답변을 간추려 적는다.
“우리가 정가라고 하면 바를 정(正)자, 노래 가(歌)자, 바른 노래라고 일컫는데, 그렇다면 정가는 다른 전통음악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전통음악은 상층음악(정악)과 대중음악(민속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정가는 상층음악, 즉 순수음악에 속하며 대중들 사이에서 향유되던 통속적인 음악과 차별성을 갖는다. 상층음악이 내면성을 중시하며 지성적인 반면, 민초들의 대중음악은 감정표출이 자유스러워 역동적인 면을 띈다. 결국 두 장르의 음악은 수레바퀴와 같아서 서로 공존하며 발전하는데 한쪽으로 경도된다면 전통음악의 균형은 깨어져 버리게 됨으로써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 그렇다면 정가(가곡 가사 시조) 상호간의 차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정가는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향유하던 음악으로 중인계층 이상에서 즐겨 부르던 음악이다. 인간 내면의 덕목을 우선시하며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철학적인 면을 갖는다. 장르별로 보면
<시조는>
-장단은 3점5박과 5점8박의 혼합박자형이며
-음계는 3음계 중심의 계면조이며
-노랫말은 정형시를 얹어 부르고
-반주는 장고 하나 혹은 관악기를 곁들일 수 있으며, 장고없이 무릎장단으로만으로도 노래 를 부를 수 있다.
<가사는>
-장단은 6박이주가 되나 5박자(상사별곡, 처사가 등)도 있으며
-대부분 유장한 느린 속도에 세련된 발성법을 쓰고 가성을 많이 쓰며
-노랫말은 장형시를 얹어 부른다.
<가곡은>
-장단은 16박 장단과 10박(편장단)으로 구분되며
-음계는 5음 음계의 평조와 3음 음계의 계면조로 구분되며
-노랫말은 시조와 마찬가지로 정형시를 얹어 부르며
-노래 반주는 관현악 반주(거문고 가야금 피리 대금 해금 장고)가 따르고
-남창과 여창으로 나누어지며 남창 26곡, 여창 15곡이 있으며
-유연하고 정대한 정음악의 발성법을 쓰며 템포는 느린 곡부터(1분 25박) 빠른 박(1분 80박) 등 다양하다.”
“우조 평조 계면조의 조의 특징을 들어 개념 정리를 좀 해주십시오.”
“가곡에서 우조 혹은 평조로 명칭되는 의미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조는 곡의 중심을 나타내며 평조는 선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정확하게는 평조를 부르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양금신보(광해군 2년 양덕수 저)의 4조에 잘 나타나 있다. 결론적으로 평조와 계면조로 구분되는데, 평조는 5음 음계 중심으로 되어있고, 계면조는 3음 음계 중심으로 되어 있다고 본다.”
“선가 하규일 선생과 임기준 선생에 대한 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하규일 선생은 가곡과 가사를 부르지만 특히 가곡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목이 그리 좋지 않아 피나는 노력 끝에 대성한 선가로서 오늘날 전승되는 가곡은 모두 하규일 선생 전창의 가곡이라 하겠다. 임기준 선생은 정가 중에서도 가사와 시조를 잘 불렀으며 현재 전하고 있는 가사는 하규일 선생이 전한 8가사 외에 수양산가, 처사가, 양양가, 매화가 등 4곡을 임기준 선생이 전하고 있다. 시조는 사설지름시조와 수잡가 등 30여곡. 이로 미루어보아 임기준 선생은 가사와 더불어 특히 시조의 명인이라 하겠다.”
“끝으로 후학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대가가 되려는 건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일류가 되려고만 하지 말고 차분하게 노력을 해나갔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 진지하고 자상하게 답변에 응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선생 댁을 급히 나왔다. 실은 출발할 때 왕복표를 끊었는데 올라갈 고속버스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택시로 동대구 터미널에 달려와 보니 출발 1분전이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늘 억세게 운이 좋은 날이구나 하고 혼자 웃었다. 대구를 출발하면서 버스 안에서 김경배 선생의 대한 인물 시조 한 수를 지어보았다.
그 졸시(拙詩) 단시조 한 수를 남기면서 끝을 맺고자 한다.
정가처럼 바른 삶을 가산에 심고 있는
학처럼 고운 자태 만인이 우러르니
세모시 정갈한 모습으로 길이길이 남으리.
<김경배 선생 약력>
1955-61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
1962-69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1986-89 성균관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1961-62 국립국악원 연구원
1982. 제1회 KBS국악대상 수상
1987.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준 문화재 지정
1989-92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 학과장
1995-현재 재단법인 월하문화재단 이사장
1995 ’95 KBS국악대상 수상
1998.8.1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예능보유자(가곡) 지정
1999 김경배 가곡발표회
2006- 현재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명예교수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 강사
단국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강사
<歌樂選><時調唱譜><歌曲譜><歌辭譜> 등 저서 및 논문 다수.
주소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3동 청구1차 아파트 102동 2006호
전화 : 053)355-2864 / 011-9370-5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