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16~23)
오늘 본문은 신앙의 초보적 수준,
외형적인 것이나 율법주의적인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 이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이 담겨 있다.
바울은
'장래일의 그림자들을 의지하지 말고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붙들라.' 말한다.
이는 당시 골로새 교회 안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의 준수를 요구하는 율법주의자들을 향해서 한 말이었다.
음식법과 절기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건을 예시하는 장래 일의 그림자일 뿐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그 속죄를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며,
그 엄청난 사랑의 행위로 인해 받게 되는 구체적 선물, 즉 복음에 있다.
음식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어찌 그 복음과 사랑이라는 실체와 비교가 될까?
상품에 '물건'이 없는데 '포장지'만 강조하는 일처럼
본질을 전혀 고려하지 않거나 무시하면서 '형식'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된다.
사랑 없는 예배,
진정으로 약자(고아와 과부로 표현되는)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구제,
타자의 깊은 마음의 상태와 실제적 상황을 통찰하거나 공감하지 않은 조언이나 위로,
현실 또는 실존적인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 중립이나 양비론적 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형식에 담는다.'라는 말이 있다.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처럼 형식이 중요해지는 것은 본질이 살아 있을 때이다.
먼저 '본질'이 있는가, 또는 본질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를
살핀 후, 그 다음 형식을 살펴야 한다.
상품(본질)이 정확하게 살아 있을 때
비로소 포장(형식)은 중요한 기능이 된다.
바울은 또,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으셨고
그를 믿는 신앙으로 우리가 함께 죽었음을 선포하는데도
여전히
그 초등학문을 붙드는 사람들을 지적한다.
바울은 육체의 정결을 위해 '붙잡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가르치는
금욕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21절)
외형은 매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결단과 단오함을 보이는 것 같지만
때로는 더러운 것을 붙잡거나 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일 경우가
현실/실존적 삶에서 존재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런 외형적 태도가
천국을 보장하는 거의 절대적인 부분, 불문율로 여겨
신앙행위의 대부분을 그런 것에 집중하는데 있다.
그 외의 신앙활동의 여지를 두지 않고
오히려 다른 신앙활동을 정죄하는 죄를 범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려는 분투라 함은,
결코 알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 알 수 있는-
가장 옳은 지점을 향해
복잡하고 유혹 많은 세상의 관성을 뿌리치고
흔들리는 내 자침을 끊임 없는 맞추려는 과정으로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