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8월3일 밤 11시 시모노세키 항.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가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부산항을 향해 출발했다. 그믐을 사흘 앞둔 여름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한 시간이 지나 날이 바뀌자 아스라이 보이던 항구의 불빛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증막 같은 객실에서 사람에 부대끼며 비지땀을 흘리던 삼등실 승객들도 피로에 지쳐 차례로 골아 떨어졌다.
새벽 4시 도쿠주마루가 쓰시마섬 앞바다를 통과할 때, 갑판을 순찰하던 급사가 일등실 객실문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전등으로 안을 비춰보니 승객은 오간 데 없고 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꼭두새벽에 문을 열어놓고 도대체 어디 간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갑판 위에는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급사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객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여행가방 위에 ‘보이에게’로 시작되는 메모지 한 장과 팁 5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주시오.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윤수선.’
급사는 메모지를 움켜쥐고 황급히 조타실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 후 밤새도록 승객들의 숙면을 방해하던 둔탁한 엔진 소음이 멈췄고, 도쿠주마루의 모든 객실에는 불이 들어왔다. 사라진 일등실 승객 두 명을 찾기 위해 승조원들과 승객들은 배 안 구석구석을 뒤졌고, 선장은 뱃머리를 돌려 항로 주변을 수색했다.
도쿠주마루는 예정시간보다 반나절이나 늦게 부산항에 입항했다. 부산항에서 하선한 승객은 시모노세키 항에서 탑승한 승객보다 두 명이 적었다.
의문의 情死
이튿날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는 물론 ‘도쿄아사히심분’까지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한 청춘 남녀의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4일 오전 4시경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명부에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30세),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273번지 윤수선(30세)이라고 씌어 있지만 본명이 아니고,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다. 관부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남녀의 정사’, ‘동아일보’ 1926년 8월5일자)
기사는 김우진과 윤심덕이 ‘서로 껴안고’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고 전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자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객 모두가 잠든 새벽 4시에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으므로 그들이 언제 어느 지점에서 투신했는지, 과연 투신한 것이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윤심덕의 유류품에는 현금 140원과 장신구, 김우진의 유류품에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있을 뿐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윤심덕은 최고의 소프라노로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음악가였고, 김우진은 목포 백만장자 김성규의 장남으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극작가였다. 목격자도 없고 유서도 남기지 않아 두 사람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동반 자살했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지만, 언론은 정사라 단정하고 앞 다투어 추측기사를 쏟아냈다.
도쿠주마루에 몸을 실은 수백 명의 승객들은 제각기 그리운 고향을 꿈꾸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갑판 위에는 다만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서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사납게 출렁거리는 물결을 굽어보며 가끔 길게 한숨을 내쉬어 무엇인지 비상히 한탄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멀리 남실거리는 수평선 저쪽을 바라보며 애조(哀調)에 넘치는 애련(哀戀)한 목소리로 ‘사의 찬미’를 불렀으니 그의 오장에서 끓어 나오는 처량한 노랫소리는 다만 으르렁거리는 모진 파돗소리와 함께 수평선 저쪽으로 멀리멀리 사라져 버릴 뿐이었다. 그 순간 그들은 푸른 바닷물 속에 몸을 날렸다. (‘윤심덕 김우진 정사사건 전말’, ‘신민’ 1926년 9월호)
사고 발생 사흘 후인 8월7일 밤,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은 목포 자택으로 찾아온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계속)
“저는 비보를 듣고 부산까지 갔다가 오늘 낮차로 돌아왔소이다. 형님이 투신한 곳은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 한가운데랍디다. 그런 까닭에 지금껏 시체를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합디다. 형님의 사고에 대해 각 신문에서 단편적인 사실 몇 가지를 부풀려 기사를 실었는데 각 신문에 발표된 내용은 가족의 견해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유서가 발견돼 경찰의 손에 들어갔다 함은 낭설이올시다. 저는 이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여 세상의 오해가 없도록 발표하려 합니다.” (‘김씨 투신과 가족의설움’, ‘조선일보’ 1926년 8월10일자)
 윤심덕(왼쪽)과 동생 윤성덕.
김우진의 가족은 현상금 500원을 걸면서까지 시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두 사람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유서도 없고 시신도 없는 의문의 정사였다.
사고 발생 이틀 후, 윤심덕이 사고 직전 오사카 닛토(日東)레코드에서 27곡을 녹음한 사실이 알려졌다. 원래 계약은 26곡을 녹음하는 것이었지만, 윤심덕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노래 한 곡을 더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윤심덕이 노래하고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로 반주한 그 노래가 바로 ‘사(死)의 찬미’다.
‘사의 찬미’가 포함된 윤심덕의 유고 음반은 사고 발생 일주일 후부터 오사카를 시작으로 일본과 조선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발매됐다. ‘사의 찬미’는 일본에서 발매된 최초의 조선어 노래였다. 정사 사건에 관한 사회적 관심에 힘입어 ‘사의 찬미’는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렸다.
윤심덕이 살아 있다고?
“얼마나 기쁘십니까?”
1930년 12월, 매일신보 김을한 기자가 이화여전 음악과 윤성덕 교수를 찾아가 대뜸 축하인사를 건넸다. 윤성덕은 윤심덕과 오사카에서 함께 지내다 윤심덕이 현해탄에 투신하기 불과 몇 시간 전 요코하마에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에 미국에 도착한 후에야 언니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노스웨스턴대학 음악과를 졸업한 윤성덕은 1928년 귀국해 모교인 이화여전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김을한의 뜬금없는 질문에 윤성덕이 되물었다.
“무엇이 기뻐요?”
“언니 되시는 윤심덕씨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껏 살아계시다니 얼마나 기쁘시냐는 말이에요.”
“글쎄요?”
“아니 글쎄라니요? 김우진씨의 아우님 되는 김익진씨가 총독부에 수색원까지 제출했다는데 그것을 모르십니까?”
“모르긴요. 김우진씨의 두 아우 김익진씨와 김철진씨가 찾아오셔서 언니와 김우진씨가 아직도 이태리에 살아있다는 풍문이 있어 총독부에 수색원을 내겠다고 하기에 좌우간 손해는 없을 것이니까 한번 해보라고 했지요.”
“그러니 좀 기쁜 일입니까. 아직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벌써 5년 전에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새파랗게 살아있다는 말이 있어서 당국에 수색원까지 제출했다고 하니, 누가 듣든지 좋은 일 아닙니까?”
“죽었다던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 하니 좋기야 하지요. 그렇지만 나는 도무지 좋을 것이 없어요.”
“그것은 또 왜 그렇습니까?”
“왜 그러냐고요? 나는 처음부터 언니의 죽음을 절대로 믿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아니, 지금까지도 절대로 죽음을 부인합니다. 처음부터 죽지 않은 사람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고 세상 사람들이 떠든다고 새삼스럽게 무엇이 그리 기쁘겠습니까?”
“처음부터 죽음을 부인하셨다고요? 혹 거기에 대해서 무슨 유력한 증거라도 있나요?”
“글쎄요…. 내가 미국으로 떠날 적에 언니가 나한테 하는 말이 자기는 즉시 이태리로 갈 터이니 어쩌면 좀 오랫동안 소식을 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결단코 궁금하게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저 언니가 살아있을 줄만 알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벌써 5년 전에 그들을 죽은 사람으로 치고 있는데 선생만 그것을 부인하신다는 말씀이에요?”
“나와 가족들은 한 번도 언니가 죽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언니를 죽은 사람으로 만든 것은 항상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이지요.”
“그러면 윤심덕씨와 김우진씨가 목하 이태리 로마에 살고 있다는 말은 사실일까요?”
“그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그들의 죽음만은 절대로 부인합니다.”
“만일 선생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살아있을 터인데 이태리에서나 혹 다른 곳에서 그 동안 무슨 소식이나 있지 않았습니까?”
“설사 무슨 소식이 있었다 한들 그것을 지금 말할 것 같습니까? 그저 처음부터 언니의 죽음을 부인하고 있었다는 말 이외에 다른 것은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거기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말 못하는 벙어리이니까요.”
“지금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라면 윤심덕씨의 죽음에는 무슨 크나큰 비밀이하나 잠재해 있고 그 비밀을 알고 있을 사람은 세상에서 윤성덕씨 단 한 사람밖에 없는 듯한데 어떻습니까?” “비밀이요? 글쎄요. 어쨌든 그렇게만 알아두십시오.”
“그렇게 숨길 것이야 무엇 있습니까? 늦어도 한 40일 후면 이태리에 있는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상세한 회답이 와서 모든 흑막이 판명될 터인데 혹시 그들의 생존설이 사실이라면 아주 지금 발표해 버리는 것이 어떠합니까?”
“아니 그들이 지금 이태리에 살아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꼭 일본영사관 직원에게 발견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더욱이 그들이 이태리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면….” (‘불생불사의 악단 여왕 윤심덕’, ‘삼천리’ 1931년 1월호)
(계속)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가 끝나갈 때 윤성덕은 언니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가 “남이야 살았든지 죽었든지 무슨 걱정이냐, 죽었으면 죽었고 살았으면 살았지. 도대체 조선사회는 왜 이렇게 남을 칭찬하기도 잘하고 욕하기도 잘하는지 모르겠다”고 되묻자, 김을한 기자는 인터뷰에 응해주어 고맙다는 말로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윤심덕이 살아 있다는 윤성덕의 확신만 확인했을 뿐 뚜렷한 증거를 얻지 못한 채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생존설은 두 사람이 정사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두 사람 모두 유서도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가족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생존설을 확대 재생산한 것은 호사가들과 언론이었다. 두 사람의 정사 덕분에 엉뚱한 사람이 돈방석에 앉았으니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만도 했다.
문제의 여성 윤심덕이 현해탄의 사나운 파도 속에 몸을 던져 고기의 밥이 되었다는 소식은 조선사회에 일시 비상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람이 둘만 모이면
“윤심덕이 죽었다지?”
“응 죽었대.”
“왜 죽어버렸을까?”
“그야 알 수 있나!”
“그 쾌활한 윤심덕이 자살을 하다니.”
“그러게 사람 일이란 알 수 없지.”
라는 대화가 오갈 만큼 윤심덕 자살에관한 이야기는 전 사회의 관심을 모았다. 윤심덕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녹음한 ‘사의 찬미’라는 레코드는 수만장이 팔려 음반회사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말만 들어도 전 조선을 풍미하던 비상한 인기를 능히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 윤심덕이 애인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은 한낱 능청스러운 연극에 지나지 않고, 지금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태리 나폴리에 생존해 있다는 풍문이 떠돈다. 그러나 과연 윤심덕이 이태리에 살아 있다 하면 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렀으니 그 동안 한 번이라도 그의 집에 서신이라도 띄웠을 것이련만 그도 없다 하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윤심덕이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든지 아직 안 되었든지 어쨌든 거친 인생의 행로를 걸어온 그의 고달픈 영혼에 안일한 행복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일시 소문 높던 여성의 최근 소식’, ‘조선일보’ 1928년 1월10일자)

윤심덕의 삶과 애정사를 전하는 ‘삼천리’ 1938년 11월호 ‘다한한 윤심덕’ 기사.
동반자살한 이후의 상황도 의문이었지만, 자살 동기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큰 의문이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제각기 아픔과 고민은 있었지만 함께 정사해야 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윤심덕에게 김우진은 여러 남자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김우진 역시 함께 죽어야 할 만큼 윤심덕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왈녀’라 불리던 여인
윤심덕은 1897년 평양 순영리에서 부친 윤석호와 모친 김씨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윤심덕이 태어난 직후 그의 가족은 진남포로 이주했다.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윤석호는 나물장사를 하고 김씨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지만 네 자녀를 모두 훌륭히 교육시켰다. 맏딸 윤심성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으로 출가했고, 막내딸 윤성덕은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심덕의 하나뿐인 남동생 윤기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음악학교와 오하이오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모친 김씨가 윤심덕을 임신했을 때 쌍둥이를 임신한 듯 보일 정도로 배가 불렀다. 윤심덕은 ‘6척(180cm) 장신’이라 불릴 만큼 키가 컸고, 어려서부터 성격이 사내아이같이 활달해 ‘왈녀’라 불렸다. 둘째였지만 4남매의 리더 노릇을 했고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만큼 우애가 남달랐다. 여기까지가 학계에 공인된 윤심덕의 가정환경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기록도 전해진다.
윤심덕씨는 듣건대 원래 평양 어떤 기생의 따님이라고 합니다. 그 기생은 딸을 낳고 생각다 못해 자기 동네에 사는 어떤 큰 부잣집의 후원 소나무 밭에 갓난애를 눈물 머금고 버렸습니다.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집 사람이 쫓아 나와 생후 한 달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거두어 친부모같이 귀애(貴愛)하며 길렀습니다. 친부모같이 주어다가 기른 이가 바로 윤성덕씨의 어머니라 합니다. 그래서 윤성덕씨와 윤심덕씨는 자매가 된 것이라 합니다. (‘가인춘추’, ‘삼천리’ 1932년 7월호)
윤심덕의 집안이 ‘큰 부잣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다. 하지만 서른에 이르도록 윤심덕의 혼사가 번번이 깨어졌고 윤심덕이 가까운 친구들에게 가족들이 자신을 차별한다고 털어놓았음을 미루어볼 때, 윤심덕이 정상적인 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심덕은 살뜰한 동무들과 마주 앉았을 때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또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나의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란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딸 셋 중에 나에게만 제일 박하게 대해. 이런 기막힌 노릇이 있니…”하고 커다란 두 눈에 하염없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지며 목이 메는 듯한 목소리로 가끔 말하는 일도 있었다 한다. (‘김윤 양인이 정사하기까지 4’, ‘동아일보’ 1926년 8월9일자)
(계속)
윤심덕은 열한 살에 진남포 삼숭학교에 입학해 박인덕, 김일엽과 단짝 친구로 지냈다. 공교롭게도 훗날 세 여인 모두 남자 때문에 비극적 삶을 살아야 했다. 박인덕은 청년 부호 김운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조선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했고, 김일엽은 네 차례 결혼에 실패한 뒤 수덕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열네 살 되던 해에 집안이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이사하자 윤심덕은 평양 숭의여학교로 전학했다. 평양에 이주한 이후 모친 김씨는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광혜여의원에서 일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홀 부인은 윤심덕의 후견인이 되었다. 의사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홀 부인의 권고에 따라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숭의여학교는 총독부에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인가받은 학교에서 2년간 더 공부해야 했다. 평양여고보에서 공부하면서 윤심덕은 의사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편입했다.
윤심덕은 사범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니까 훈도라는 명예로운 사령장을 받아가지고 여러 동무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고향으로 부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강원도 원주로 발령이 났다. 낙심했으나 상사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부임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 학기 만에 더 오지인 횡성으로 전근명령이 내려왔다. 심중에는 불만이 쌓였고 가슴 속에 타오르는 명예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해 여름방학 때 윤심덕은 경성여고보 동창회에 참석했다가 내빈으로 초대된 하세카와 교장과 세키야 학무국장을 만났다. 윤심덕은 학무국장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멱살을 붙들고 “나를 무슨 죄로 시골구석으로 쫓아 보냈느냐. 나는 있기 싫어 흥!”하며 억지를 썼다. 좌중은 모두 웃었다. 국장도 교장도 웃고 말았다. 이 모험이 효험이 있어 그의 전근지는 횡성에서 춘천으로 변경되었다. (‘윤심덕의 일생’, ‘신민’ 1926년 9월호)
1915년 윤심덕은 총독부 관비유학생에 선발돼 교사생활을 1년 만에 청산하고 도쿄 유학을 떠났다.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을 거쳐 도쿄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도쿄음악학교는 우에노(上野)공원에 위치해 우에노음악학교라고도 불렸다.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김우진과의 만남

부유한 집안 때문에 불행했던 극작가 김우진. 윤심덕의 애인 가운데 한 사람이긴 했지만, 같이 정사를 결행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
도쿄에서 윤심덕은 유학생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윤심덕은 왈녀라는 별명처럼 성격이 남성적이고 쾌활해서 남학생에게도 내외하는 법 없이 몇 번 만나면 서슴없이 말을 놓았다. 홍난파, 채동선, 김우진 등 숱한 남학생과 염문을 뿌렸지만, 자기가 싫으면 아무리 구애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니혼(日本)대학 문과에 다니던 박정식은 윤심덕에게 반해 약혼하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애편지를 보냈다. 꽃다발과 사랑의 시를 전하면서 전력을 다해 구애했지만, 윤심덕은 냉정하게 뿌리쳤다. 박정식은 실연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생겨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해 몇 년 동안 총독부병원 8호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박정식의 친구들이 윤심덕에게 찾아와 “사람이 그 지경까지 되었는데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자 윤심덕은 짜증을 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것이 왜 내 탓이냐. 아무리 내게 반해 실성했기로 내가 싫은데 어떻게 사랑을 받아주느냐?”
윤심덕은 싫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쌀쌀맞게 대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서슴없이 애정을 표시했다.
윤심덕이 동경에 있을 때 특히 친하게 지내는 청년이 두세 사람 있었다. 그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윤심덕과 그 청년들이 사랑하는 사이라느니 어쩌느니 하고 아주 본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윤심덕의 정숙지 못한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웬만한 사람의 입에는 거의 오르내릴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남들이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하면 할수록 윤심덕은 자기와 가깝게 지내는 청년들에게 더욱더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했다. 그러다 보니 윤심덕을 헐뜯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쳐 다시는 그 같은 말을 입에 담지 않은 일도 흔히 있었다. 다시 말하면 윤심덕은 자기 속만 결백하면 세상에서야 아무렇게 떠들거나 머리털 하나 까딱하지 않는 뱃심이 있었다. (‘석일은 악단의 명성 윤심덕 3’, ‘동아일보’ 1925년 8월4일자)
1921년 윤심덕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김우진, 홍난파, 조명희 등 30명의 청년들과 함께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 단체 동우회의 운영비 모금을 위한 고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때 윤심덕은 김우진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김우진은 목포에 아내와 딸이 있었던 데다 도쿄에서 일본인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선머슴 같은 윤심덕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윤심덕도 동우회 순회공연단에 참여한 다른 청년과 친밀한 관계여서 김우진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동우회 순회공연단은 일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해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 공교롭게도 여관방이 모자라서 윤심덕은 독방에서 자지 못하고 남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윤심덕과 가장 가깝다는 그 청년도 같은 방에서 잤다. 밤이 조금 이슥해서 같이 자던 청년이 윤심덕의 정조의 단물을 한번 맛보고자 윤심덕에게 수상한 행동을 했다. 그때 윤심덕은 갑자기 일어나며 그 남자의 뺨을 치고 “나는 네가 그 같이 더러운 남자인 줄 모르고 가깝게 사귀었더니 이것이 무슨 금수의 행동이냐?”며 준열히 책망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너무도 무안하고 민망해서 당장 백배사과하며 이후 다시는 그 같은 마음을 먹지 않겠다고 애걸복걸했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윤심덕은 여전히 그 남자와 가깝게 지낸다 한다. (‘석일은 악단의명성 윤심덕 3’, ‘동아일보’ 1925년 8월4일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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