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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아마샤왕의 교훈”입니다.
‘아마츄어와 프로의 차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프로는 불을 피우고 아마추어는 불을 쬔다. 프로는 기회가 오면 우선 잡고 보지만 아마추어는 생각만하다 기회를 놓친다. 프로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지만 아마추어는 두드리고도 안 건넌다. 프로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아마추어는 자기 이야기만 한다. 프로는 강자에게 강하고 아마추어는 약자에게 강하다. 프로는 사람을 소중히 하고 아마추어는 돈을 소중히 한다. 프로는 시간을 관리하고 아마추어는 시간에 끌려 다닌다. 프로는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마추어는 이기는 것도 걱정한다...“ 여러분은 프로인가요, 아마추어인가요? 아마도 아마샤 왕도 아마추어였던 것 같습니다. 이기고도 문제가 된 왕이니까요.
아마샤는 남 유다의 9번째 왕입니다. 웃시야 왕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 29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아마샤가 어떤 사람인지 본문 앞 2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는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는 하였으나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드리지는 아니하였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드리기는 하였으나 목사님이 깨어 기도하라고 강권하니까 했다면 온전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십일조를 드리기는 하였으나 의와 인과 신은 버리고 드렸다면 온전한 십일조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전도를 하기는 하였으나 영혼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기 위한 전도가 아니라 전도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했다면 온전한 전도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라도 하면 다행이라고 하는 분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온전함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의 온전함을 보십니다. 마음의 온전함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의식하여 보이기 위해 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을 보십니다. 눈도장만 찍고 가는 것은 싫어하십니다. 잠 24:12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다니엘서에 보시면 하나님은 바벨론의 벨사살 왕의 악한 행위를 보시고 벽에 글을 쓰셨는데 다니엘이 그 글을 읽고 해석했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왕이여, 왕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나라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달아보십니다.
아마샤 왕이 나라의 기강을 잡고 나서 에돔을 치려고 전쟁을 준비합니다. 5절에 “아마샤가 유다 사람들을 모으고 그 여러 족속을 따라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을 세우되 유다와 베냐민을 함께 그리하고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여 창과 방패를 잡고 능히 전장에 나갈 만한 자 삼십만 명을 얻고 또 은 백 달란트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큰 용사 십만 명을 고용하였더니”라고 합니다. 전쟁을 위해 백성 중에 지휘관을 세우고 이십 세 이상을 징집하여 삼십 만 명을 군사로 모았습니다. 그 숫자도 부족하다 싶었는지 은 백 달란트를 들여 북이스라엘의 큰 용사 십만 명을 고용했습니다. 최초의 용병이 여기에 나옵니다. 용병의 원조는 IS가 아니라 아마샤 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아마샤 왕이 용병까지 동원하여 전쟁을 준비한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말씀을 전합니다. 7절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이스라엘 군대를 왕과 함께 가게 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곧 온 에브라임 자손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나니 8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 하나님이 왕을 적군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하니” 여기서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선지자이지만 특별히 이름이 알려진 선지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는 선지자를 통해서도 일하시고, 무명인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전달했습니다. ‘왕이여, 그들과 함께 전쟁하지 마십시오. 용병들과 함께 싸우러 가면 왕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적군이 왕 앞에서 엎드러질 것이라고 하지 않고 왕이 적군 앞에 엎드러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이기게도 하시고 패하게도 하는 분이십니다. 이길 때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패할 때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잘 될 때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안 될 때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개업할 때만 아니라 파업할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개업예배는 드리자고 하는데 파업예배 드리자는 분을 아직 못 봤습니다. 전7:14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한 것이 아니라 곤고한 날에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마샤 왕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9,10절에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백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할까 하나님의 사람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하니라 10 아마샤가 이에 에브라임에서 자기에게 온 군대를 나누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니 그 무리가 유다 사람에게 심히 노하여 분연히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은 백 달란트를 미리 지불하고 십만 명의 군사를 데려왔는데, 선지자가 돌려보내라고 하니 고민입니다. 보통 고민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물건 값이든, 품삯이든 돈을 먼저 주는 것이 아니라 제일 나중에, 일 다 끝난 뒤에, 물건 받은 뒤에 지불해야 합니다. 돈부터 먼저 주면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아마샤 왕이 지불한 돈 때문에 고민하자 하나님은 그 값을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은 백 달란트를 아까워하지 말고 손해보더라도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보다 많은 것을 능히 왕에게 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능히 이기게도 하시고 패하게도 하실 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주시기도 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비록 들어간 돈이 있어 손해를 보더라도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더 많은 것을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들어간 돈이 아까워 내려놓지 못하면 더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길을 잘못 들어서면 빨리 유턴해야 덜 돌아 나오는데 계속 가면 결국 갔던 만큼 더 멀리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길이 그렇지 않습니까. 손해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나중에 더 큰 이익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면 결국엔 더 큰 손해가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행히 아마샤는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큰 돈을 손해보면서도 포기해버립니다. 참 잘 한 것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싸우지도 않고 돈만 받고 돌아가는데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모를 일입니다. 일하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돈을 먼저 주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와서 일을 못하게 되자 받은 돈 가지고 그냥 집에 가라고 하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일 안 했다고 돈을 안 주고 돌아가라면 모를까, 돈을 주고 돌아가라니 잘 된 것 아닙니까. 이들은 싸우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싸우지 않고 돌아가라니 그랬을까요. 공짜 돈을 싫어해서 그랬을까요? 전쟁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인데 안 하고 가면서도 심히 노하여 분연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니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13절을 보시면 이들은 돌아가면서 범죄합니다. “아마샤가 자기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돌려보낸 군사들이 사마리아에서부터 벧호론까지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고 사람 삼천 명을 죽이고 물건을 많이 노략하였더라” 처음부터 질이 안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의 말에 순종한 아마샤왕은 큰 승리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함께 하심으로 에돔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큰 손해를 보면서도 선지자의 말대로 순종하니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14절에 보시면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이기고 돌아오면서 왜 또 우상을 가져왔을까요.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지 왜 패한 나라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서 경배할까요. 전쟁을 이기고 나서 교만하여 타락한 것입니다. 그사이 마음이 빼앗긴 것입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예를 찾을 수 있습니까. 겸손했던 사울은 왕이 된 후에 교만해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고 일천번제를 드려 하나님께 지혜를 얻은 솔로몬도 이후에 교만하여 타락했고 삼손도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블레셋을 이기고 승승장구하고 나서 타락했습니다. 아마샤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때문에 도리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많은 재능을 주었더니 그것 때문에 주일을 못 지키고, 좋은 직장 달라고 해서 주었더니 하나님의 일을 등한히 하고, 좋은 배우자 만나 결혼하게 했더니 하나님은 뒷전이 됩니다. 자녀를 주었더니, 재물, 명예, 건강, 높은 직위 등등을 주었더니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마샤 왕에게 큰 승리를 주었는데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의 우상을 가지고 와서 섬깁니다. 타락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합니다. 15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시니 그가 이르되 저 백성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며”
저 백성의 신들이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경배하고 기도합니까. 만일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기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에 패했다면, 그래서 이제 우리도 이방신을 섬기고 따르겠다고 하면 변명이라도 되겠지만 자신들에게 패배당한 신들인데 경배 드리니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이 정도 책망을 받았으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아마샤의 다음 행동을 보십시오. 16절입니다. “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하니 선지자가 그치며 이르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
왕은 선지자에게 ‘우리가 당신을 언제 참모로 세우기라도 했는가, 당신이 뭔데 우리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선지자는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니 하나님이 당신을 멸하고 버리시려는 것인가 보다.’라고 대답하고 멈춥니다.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아마샤 왕의 태도가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순종했는데, 그래서 승리를 얻었는데 이후에는 책망을 듣지 않고 도리어 대적했습니다. 왜 그랬는지19절에 답이 있습니다. “네가 에돔 사람을 쳤다고 네 마음이 교만하고 자긍하는도다” 에돔을 이겼다고 교만해진 것입니다. 이후에 아마샤 왕은 대적들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27절에 “아마샤가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반역이 일어난 것입니다.
참 미련하고 간사하고 연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늘 처음의 순종, 처음의 믿음과 사랑, 처음의 결심을 한결같이 지켜간다면 얼마나 복된 인생이겠습니까마는 이랬다저랬다 수시로 변하고 한 순간 교만함으로 넘어지고 마는 인생입니다. 감사도, 믿음도, 신앙도, 의리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26:3,4에서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우리는 영원히 주님을 신뢰하고 섬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 앞에 설 때까지 겸손함과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따라 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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