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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인(李崇仁)은 자가 자안(子安)으로 경산부(京山府)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에 제수되었으며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장흥고사(長興庫使)가 되어 진덕박사(進德博士)를 겸하였다. 본국에서 문사(文士)를 선발하여 〈명(明)의〉 경사(京師)에서 치러지는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는데 이숭인이 1등으로 선발되었으나 나이가 25세가 되지 않았다고 하여 보내지 않았다. 예의산랑 예문응교 문하사인(禮儀散郞 藝文應敎 門下舍人)을 역임하였으며 우왕 때는 전리총랑(典吏摠郞)에 제수되었다. 〈이숭인은〉 김구용(金九容)·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물리칠 것을 청하였다가 연좌되어 유배되고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얼마 후 풀려나 성균사성(成均司成)으로 제수되었고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관직을 옮겼는데, 동료들과 함께 상소를 올리기를, “간언을 따르는 것은 인군(人君)의 미덕이므로,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재목(材木)이 먹줄을 따르면 올곧게 되고 임금이 간언을 따르면 성군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혈기왕성하시고[春秋鼎盛] 나라에 변고가 많으니 바로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다스림을 구해야할 때입니다. 최근에 헌사(憲司)가 서연(書筵)을 시작할 것을 청하니 곧 윤허함을 내리시어 군신들이 기뻐하였으며 성학(聖學)도 날로 진일보(進一步)하십니다. 오늘날에는 노성(老成)한 대신들과 다스리는 방법[治道]을 강론하시면서 시종일관 한결같아서 태만히 하거나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선왕께서 하늘의 경계[天戒]를 지극히 삼가시어 감히 여유롭고 편안함[遑寧]을 찾지 않으셨던 까닭에 『시경(詩經)』에서 말하기를, ‘하늘의 노여움에 감히 유희를 즐기지 말 것이며, 하늘의 변화에 감히 제멋대로 행동하지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높디높은 자리에 있다고 말하지 말 것이니, 해가 지금 여기에 내려다보고 있노라.’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듣건대, 최근에 서운관(書雲觀)에서 아뢰기를 하늘[乾文]에 변고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늘이 전하를 사랑하여 견책과 경고를 보낸 것입니다. 마땅히 음식을 줄이고 음악을 그만두며 두려워하며 마음을 닦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하늘의 사랑하는 마음에 답하고 아래로는 군신들이 크게 우러르는 마음을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수령은 민의 생사(生死)를 책임지는 관리여서 진실로 사람됨이 안 되면 민이 그 해를 입게 됩니다. 민의 초췌(憔悴)함이 이 때보다 심한 적이 없으니, 양부(兩府)와 대간(臺諫), 육조(六曹)로 하여금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고 천거한 사람이 올바른 이가 아니라면 죄는 거주(擧主)가 입도록 해야 합니다. 근래에 관직을 옮겨가는 것이 너무 빠르니 비록 인재를 얻더라도 그 효과를 볼 수 없었습니다. 모름지기 삼재고적법(三載考績法)을 본받아 만 3년이 되어야만 관직을 옮기는 것을 허락하소서. 〈그리고〉 안렴사(按廉使)가 전최(殿最)하여 보고하는 것에 치적(治積)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자가 있으면 차례를 따지지 말고 탁용(擢用)하소서. 군사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게 되면 반드시 폐단이 생기기 때문에 장수를 보내어 마땅히 절제(節制)해야 합니다. 나라에 이미 각 도(道)에 세 원수(元帥)를 두었으니, 하나의 도의 일은 마땅히 세 원수에게 전권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근래에 한 곳에 보잘 것 없는 도적이 있으면 세 원수 외에 따로 여러 원수와 병마사(兵馬使)를 파견하는데 임무를 맡기면서 전권을 부여하지 않으니 〈원수들은〉 결국 공을 세우지도 못하고 〈그들이〉 오고가는 길에 민이 고통만 받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본도(本道)의 임무는 세 원수에게 오로지 맡길 것이며 성패에 따라 상벌을 명확히 하소서. 그래서 청컨대 각 도의 원수는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의 군목에 의거하여 본도의 군관을 통솔하게 하고 〈군관은〉 탈점하여 소란스럽게 하지 않게 하소서. 관직을 설치하고 직분을 나누는 것은 각각 마땅한 바가 있기 때문으로 선왕께서는 내시부(內侍府)를 설치하시고 중관(中官)을 두었습니다. 이는 법령으로 한 것이니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이 관직을 다시 두고 장차 중관(中官)으로서 조심하고 근신하는 자는 품계에 따라 다른 관직으로 옮겨주시되 조관(朝官)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소서.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선왕의 제도인 까닭에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근래에 바다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경기(京畿)에까지 침략하는데도 중외(中外)의 성곽이 무너져도 고치지 않아서, 민이 근거로 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녀도 금하지 못하므로 도적은 더욱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청컨대 안으로는 도성으로부터 밖으로는 연안의 주군(州郡)에까지 각각 유사(有司)로 하여금 때에 따라 〈성곽을〉 수축하고 힘써 견고하게 하여 민이 생업에 편안히 하도록 하소서. 또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면 사람들이 반드시 서로 권면(勸勉)할 것이나, 공이 없어도 상을 주면 사람들은 필시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에 토지를 내려주는 것은 본래 공이 있는 자들을 우대하려는 것인데, 근래에 함부로 사패(賜牌)를 무릅쓰고 전지(田地)를 너무 많이 점유하는 자가 있습니다. 청컨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근본을 궁구하여 추쇄하도록 하고 남행(南幸), 흥왕사(興王寺), 계묘년(1363)의 공신에 3등의 공이 없는 자들은 전지를 거두어들이소서. 비록 3등의 예(例)에 있더라도 점유한 것이 그 수를 넘은 자는 남은 숫자를 거두어들이고 군수(軍需)에 충당하도록 하소서. 공신의 호칭은 유공자(有功者)를 제외하고는 마땅히 중시하고 아껴야 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왜적이 여러 도를 침략한 것으로 인하여 공부(貢賦)의 태반이 납부되지 않아 백관의 녹봉이 해마다 줄고 있습니다. 숭경부(崇敬府)·상서시(尙瑞寺) 및 흥복도감(興福都監)·숭복도감(崇福都監)·전보도감(典寶都監)의 세 도감은 이미 직분이 없으며 단지 녹봉만 소비하고 있으니 청컨대 모두 혁파하소서. 근래에 관작(官爵)에 진관(眞官)과 첨관(添官)이 서로 섞여서 직첩(職牒)에 단지 당후관(堂後官)의 서명만 있고 인신(印信)이 없으니 후일에 반드시 가짜가 넘쳐날 것이 두렵습니다. 청컨대 동반(東班)은 전리사(典理司)에서, 서반(西班)은 군부사(軍簿司)에서 인신을 서명하여 〈직첩을〉 발급하게 하소서.”하였다.
이숭인(李崇仁)은〉 얼마 뒤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제수되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찬하였는데, 이숭인과 정몽주가 권문(權門)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열고 술을 마시고 〈실록〉 편찬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자 당시의 여론[時議]이 비난하였다. 〈이숭인은〉 관직을 옮겨 동지사사(同知司事)가 되었는데 이인임(李仁任)의 인척이라 하여 장(杖)을 맞고 통주(通州)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소환되었다. 이색(李穡)·김사안(金士安)과 함께 〈명(明)의〉 경사(京師)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고 돌아와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창왕 때 〈이숭인은〉 박천상(朴天祥)·하륜(河崙) 등과 함께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진위를 판별하였는데 무고에 연좌되어 헌사(憲司)가 〈이숭인을〉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이숭인이 도망하자 옥졸(獄卒)이 이숭인의 아들 이차약(李次若)을 묶고 〈이숭인을〉 찾으러 다녔다. 채찍을 〈이차약의〉 등에 때리니 피가 흘렀는데 이현(梨峴)을 지나다가 우리 태조〈이성계(李成桂)〉를 만났다. 옥졸이 이차약을 길옆의 집에 숨기니, 이차약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원컨대 영공(令公)은 나를 살려주시오!”라고 하였다. 태조가 놀라서 이를 물으며 옥졸에게 말하기를, “어찌 아들을 욕보여 아비를 찾을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즉시 풀어주게 하고, 종자(從者) 한 사람을 시켜 이차약을 집으로 돌려보내었다. 이에 〈이성계가〉 시중(侍中) 이림(李琳)과 함께 창왕에게 말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관대하고 인자한 정치를 베푸시어 박천상 등을 용서해주시기를 청하옵니다. 또한 이숭인은 서연(書筵)을 시강(侍講)하여 충성을 바친 것이 여러 날이 되니 청컨대 관직을 맡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박천상 등을 먼 곳에 유배 보내고, 이숭인을 서연에 나오게 하였다. 〈그러자〉 헌사(憲司)가 탄핵하여 이숭인을 사직시키고자 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간관(諫官) 구성우(具成佑)·오사충(吳思忠)·남재(南在)·심인봉(沈仁鳳)·이당(李堂) 등이 상소를 올려 이숭인을 탄핵하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남의 신하[人臣]가 되어서는 〈왕을〉 지극하게 공경해야 하며, 사람의 아들[人子]이 되어서는, 〈부모를〉 지극히 공경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천하고금의 떳떳한 법[常典]이니 진실로 신하와 아들이 되어서 불효와 불충하면 이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신(臣)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숭인은 성품이 간사하며 탐욕이 있어 언행이 사특하고 아첨을 잘 합니다. 재능은 나라를 경영할 수가 없고 생각은 먼 데까지 미치지 못하는데도 단지 문필(文筆)하는 변변치 않은 재주로 벼슬을 하여 명예를 훔쳤으며, 오랫동안 요직에 머물렀습니다. 지난번에 이인임이 정권을 잡았을 때, 〈그의〉 무리가 되었으며, 임견미(林堅味)가 나라를 훔치자 또한 〈그의〉 심복이 되어 위세와 복덕을 펼쳐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을 채우지 않으면 과거시험을 주관할 수 없도록 한 것은 나라의 법도입니다. 그러나 이숭인이 산기상시(散騎常侍)였을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도 감시(監試)의 시관(試官)이 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서 조복(朝服)을 입고 시험을 관장할 수 없기 때문에 산기상시라는 높은 관직을 낮추어 상호군(上護軍)이 되기를 구하여 감시를 주관하였습니다. 또한 모친이 죽은 지 겨우 100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고기를 먹고 태연자약하여 사람으로서의 기강을 훼손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불효입니다. 최근에는 상국의 흉악한 무리들이 재물을 탐하여 우리나라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흉악한 무리들이 복주(伏誅)되고 전하께서 중흥하시면서 시중 이색이 천하의 명망을 얻고 있으므로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입조(入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숭인은 〈이색을〉 따라가서도 본심을 고치지 않고 몸소 물건을 매매하려고 상인들과 동행한 적이 있어 우리 시중의 일행을 더럽혔으며,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삼한(三韓) 사대부(士大夫)의 얼굴에 침을 뱉게 하였습니다. 비록 〈그가〉 시를 일곱 걸음 만에 짓고 입으로 요순(堯舜)의 말을 암송하지만 일찍이 개·돼지만도 못하니 진실로 이른바 소인(小人)의 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가히 시독(侍讀)으로 삼아 〈전하의〉 좌우에 둘 수 있겠습니까?
최근 들어서는 〈이숭인이〉 간사한 꾀를 내어 종친을 모함하고 부자와 형제·부부의 큰 인륜을 훼손하였으나 정황이 드러나서 변명이 궁해지자 어명을 어기고 몸을 숨겼습니다. 전하께서 〈이숭인을〉 시독(侍讀)으로 삼고자 하신 까닭에 사면을 명하시면서 〈저희들에게〉 묻지 말도록 하셨으며 교서(敎書)를 내려 예로써 우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숭인은 천지(天地)가 포용하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 열흘이나 지체하였으며 즉시 나가 사례하지 않았으니 임금을 무시하고 예를 훼손하는 마음이 심합니다. 그가 불경한 것이 누가 이보다 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상도(常道)를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히니 제왕(帝王)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헌사(憲司)로 하여금 죄를 상고하게 하여 통렬하게 다스리게 해야 할 것이며, 먼 변방으로 쫓아내어 불효하고 불경한 죄를 징계하여, 대저 나라를 욕보인 죄와 함께 인륜을 바로 세워 선비의 절개[士節]를 권면하소서.”라고 하였다.
창왕이 이 상소를 헌사에 내려 추궁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날 밤에 헌사가 대졸(臺卒)을 시켜 이숭인의 집을 지키게 하였더니 이숭인이 담장에 구멍을 뚫고 도망하였으나 붙잡혔다. 상소를 올려 〈이숭인을〉 탄핵하자 경산부(京山府)에 유배하였다. 또 전 비서감(秘書監) 박돈지(朴敦之)가 일찍이 장모와 간음을 하였으며 이제는 이색이 입조하는 것을 따라가서 친히 물건을 매매하니, 모두 먼 곳으로 유배 보내었다. 박돈지는 즉 박계양(朴啓陽)인데, 이숭인과 평소에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권근(權近)이 상소를 올려 이숭인(李崇仁)을 구원하고자 논하였는데 〈그 상소에〉 말하기를, “최근에 대성(臺省)이 이숭인의 죄상을 논하였으나 전하께서는 관용을 베푸시어 작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자〉 논자(論者)들은 더욱 견고하게 〈이숭인의〉 불충과 불효를 지적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거듭 대간(臺諫)과 헌관(憲官)의 뜻을 거슬러 이숭인을 내치려는 것을 물리친 것은 지극히 공정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와 같이 명석한 군주가 있다면, 이숭인과 같은 어진 신하도 있을 것이나, 도리어 대악(大惡)이라 하여 죄를 얻고 말았으니 성명(聖明)에 누를 끼치고 말았으므로 심히 애석하여 논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이숭인을 불효한 자라고 한 것은, 모친이 죽은 지 3년 안에 시관(試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그의 부친 이원구(李元具)가 이미 늙고 병들어 목숨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었기에, 〈이숭인이〉 근심하여 생전에 아들이 과거를 관장하는 영예를 보고자 한 것입니다. 나라에서 이숭인의 재능을 중히 여기고 이원구의 뜻을 불쌍히 여겨 감시(監試)를 관장하게 해 주었습니다. 만약 이숭인이 진실로 사양한다면 이는 모친이 죽은 것만 알고 부친이 살아있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사후[身後]의 비방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친의 당시 뜻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숭인은〉 비록 속으로는 스스로 편안하지 않으면서도 힘써 직책에 나아간 것입니다. 이는 비록 과오가 있기는 하지만 공자(孔子)께서도 이른바, ‘과오를 보면 어진 것을 알 수 있다.’하신 것과 같이, 진실로 효자가 불행을 만난 것이므로 불효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벼슬하는 자들은 혹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지 삼년 내에 입으로 거짓말을 하고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있으며, 혹은 사치하고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사람을 죽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나 이러한 사람들은 부모가 모두 죽었으니 〈높은 관직에 오른 것은〉 누구를 위한 영예라고 하겠습니까? 〈모두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부친을 위하여 차마 모친에게는 불효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자기를 위하여 부모를 잊는 자들이 진정한 효를 얻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나라 사람들로 능히 삼년상을 행하는 자가 만 명 중에 혹 하나 있으나, 나라가 또한 기복(起復)하는 법을 만들어 그러한 정을 빼앗고 있습니다. 만약 이숭인을 죄 주려면 반드시 삼년상을 행할 수 있는 자를 구하여 등용해야 할 것이며, 이는 즉 만(萬)을 버리고 하나를 얻는 것이니, 신은 전하께서 능히 인재를 얻지 못하고 그와 같은 사람만 쓰게 되실까 두렵습니다. 이숭인의 부친을 사랑하는 정을 살피지 못하여 〈그가〉 불효하다는 이름만 얻고 있으니 어찌 심히 애석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이숭인이 불충(不忠)하다고 하는 자들은 오직 영흥군(永興君)의 진위의 일로 미루어 〈그의 충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이미 전하께서 내리신 명을 받아 마땅히 즉시 〈대궐에〉 나갔어야 하는데 미루며 나가지 않아서 숨어서 피하는데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숭인은 대신(大臣)으로 영흥군의 진위를 분별하는 일에서 언어(言語)에 자그마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나라의 구법(舊法)으로 이를 처리한다면, 한 편의 공문서[公緘]를 보내어 물어볼 뿐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하물며 전일(前日)에 헌사가 글을 올려 대신이 법을 범했다고 여기더라도, 옥리(獄吏)가 〈그에게〉 능욕을 가하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전하께서도 옳다고 여기시어 정하여 판격(判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숭인이 나라의 구법에 의지하여 전하의 판지(判旨)를 믿고, 즉시 나가서 변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헌사가 노하여 추궁함에 이른 다음에야 구법은 믿기에 부족하고 판지도 믿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사세가 궁해지고 일이 급박하게 되어 〈이숭인이〉 몸을 피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는 비록 비겁하고 도리를 잃은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지만, 그로 하여금 놀라고 두려워하게 한 것이니, 이는 이숭인이 마음속으로 불충한 것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며, 감히 주상전하의 명을 거역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영흥군 진위 사건에 간여하게 된 것은 대저 천성이 자상하여 벗을 독실(篤實)하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박가흥(朴可興)의 무리와 이웃으로 친하게 지내다가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 이숭인이 망령되어 이와 같은 말을 이끌어낸 것은 아닙니다. 작위가 회복되자 즉시 〈전하께〉 나아가 사례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헌사가 두려워서 그런 것이지 전하의 명을 공경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하의 명을 받들고 중국에 사행을 가서 몸소 물건을 사고 판 일 같은 것은 비방을 받게 된 데에 이유가 있습니다. 지휘(指揮)로서 진씨(陳氏) 성을 가진 자는 그 처가 이숭인의 처가 사람으로, 그 집에 가려면 저자 거리를 지나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숭인이〉 길가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며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이숭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가 이 말로 인하여 무고한 것이며, 〈이 말을〉 들었던 자들이 살펴보지도 않고 진실이라 여긴 것입니다. 만약에 〈이숭인이〉 과연 물건을 매매하여 나라를 욕보였다면 신이 명을 받아 사행을 한 것은 이숭인이 중국으로 사행한 이후이니 당연히 들었을 것입니다. 신이 중국에 있으면서 일찍이 이숭인이 물건을 매매하여 전하의 명을 욕보인 일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숭인의 죄를〉 주장하는 자들은 그 다리로 일찍이 중국의 국경을 넘어가보지도 못했으면서 그 귀로 이와 같은 일을 어떻게 들었겠습니까? 비방하는 자들이 과연 이숭인보다 어진 사람들입니까? 오직 비방하는 자들의 말만 믿고 이숭인의 행동은 믿지 않으시니 〈이〉 또한 어찌 편벽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우리나라는 신하로 대명(大明)에 사대(事大)한 이래로 표전(表箋)과 사명(詞命)이 이숭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습니다. 공민왕이 시호를 받고 상왕이 왕위를 이어받은 것도 모두 이숭인의 문장의 힘이었습니다. 세공(歲貢)과 금은, 마포(麻布)를 면제받았던 것도 또한 이숭인의 힘이었습니다. 황제께서 여러 차례 문장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시며 우리나라에 인물이 있다고 이르신 것도 또한 이숭인의 공이었습니다. 이숭인의 문장은 간결하며 고상하고 예스러우며, 세상에서 가장 빼어나니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인재로서, 나라의 사명은 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숭인의 죄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와 같은 것을 살피지도 않고 도리어 소인배들이 음훼(陰毁)하는 말만 믿고 감히 대악(大惡)죄를 가하려 한 것이니 어찌 심히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친친(親親)과 존현(尊賢) 두 가지는 천하와 국가의 큰 도리입니다. 전하는 몸소 종실을 중히 여기시고 치욕(恥辱)을 설욕하기 위해 유사(有司)에 특별한 명을 내리시어 영흥군의 진위를 명확하게 하셨기 때문에 친친의 도는 얻었다고 할 만합니다. 이숭인은 오랫동안 시강(侍講)을 맡았던 관리로 전하께서 가르침을 받은 신하입니다. 조그마한 의심과 비방이 있다는 것 때문에 사리를 분별하지 않으시고 즉시 명령을 내려 쫓아내시는 것은 존현의 도에 이르지 못한 것이며, 신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해 합니다. 또한 마땅히 특별한 명을 받은 관청이 그와 같은 비방이 나오게 된 연유를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비방하는 자가 과연 중국에서 털끝 하나라도 물건을 사지 않았겠습니까? 이숭인이 물건을 옮기는 데 반드시 신(神)이 옮기고 귀신(鬼神)이 날라다 줄 수는 없었을 것이며, 수레를 이용하다면 몇 량인지 말이 몇 필인지, 〈그리고〉 그 수레에 실린 물건이 과연 모두 이숭인의 물건인지, 그 말이 과연 다른 사람의 예에 배가 되는지, 일일이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비방하는 자들이 진실로 털끝 하나라도 산 것이 없고, 그 수레가 모두 이숭인의 물건이며, 그 말이 다른 사람의 예보다 배가 된 연후에 이숭인의 죄를 밝게 바로잡는다면, 이숭인이 자복하고 만세토록 전하의 공정함을 칭송할 것입니다. 만약 비방하는 자들도 사고판 물건이 있고, 그 수레가 전부 이숭인의 물건이 아니며, 그 말이 다른 사람의 예에 곱절이 되지 않는다면 비방하는 자들은 군자(君子)를 모함한 소인(小人)일 것입니다. 마땅히 비방하는 자들이 모함하는 죄를 바로잡고, 어진 신하가 굴욕을 받은 것을 설욕하신다면, 존현의 도 또한 얻었다 할 것이며 사람들이 만세토록 모두 전하의 현명함을 칭송할 것입니다.
〈이숭인의 죄를〉 주장하는 자들은 또한 ‘이숭인이 글을 읽고 이치에 통달하여 평소에 이름을 얻었으니 다른 무지한 사람과 같을 수 없다. 죄를 지은 것이 비록 작으나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 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의리를 모르고 나라를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 죄를 범한 것이 있으면 즉 〈죄를〉 헤아리기에 부족하여도 항상 용서하고 〈몸을〉 보전하게 합니다. 〈그런데〉 문장에 능통하여 나라에 이익이 되는 자에게 조그마한 의심이라도 있을 때 〈그들을〉 사면하지 않고 반드시 추궁하고 모함한다면, 후진(後進) 선비들이 모두 구차하게 면하려고만 하는 염치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마음을 쓰고 힘을 다하여 경전(經典)을 궁구하고 이치에 통달하는 것을 기꺼이 하려 하겠으며, 헛된 이름이나 얻어 실질적인 화를 얻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사람의 심술(心術)을 훼손하고 선비의 기풍을 떨어뜨려 후학들을 심히 그르치는 것입니다. 자고로 현명함과 능력, 공적을 논의하는 법이 있으니 현명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은 혹 실수가 있어도 현명함과 능력을 따져 〈그에〉 따라 〈죄를〉 조금 감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현명함과 능력을 키우는데 힘쓰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이숭인의 죄를〉 주장하는 자들은 도리어 현명함과 능력 있는 이에게 더욱 중한 죄를 주려고 하니 이는 후학들이 선(善)을 위하려는 마음을 막는 것입니다. 설령 이숭인에게 진실로 죄가 있다고 해도 문장으로 이룬 공을 감안하여 특별히 사면을 얻을 수 있다면 후진 선비들이 모두 학문에 힘쓸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이숭인의 죄가 신이 말씀드린 바와 같다면 모두 〈다시〉 의논할 만하지 않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글을 도평의사(都評議使)와 문하부사(門下府使), 헌사(憲司)에 내려 헐뜯고 비방하는 자를 추궁하고 곡직(曲直)을 명확하게 밝히시어, 치욕을 씻어주고 현명함을 포상하시며, 스승이 되는 선비를 존중하시어 후학들에게 권면하시면 공도(公道)에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옛날에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는 모두 대성(大聖)이지만 주공은 과오가 있는 것을 면할 수 없었고, 공자도 헐뜯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맹자(孟子)께서 변명해주시지 않았다면 광장(匡章)은 불효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며,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불의(不疑)는 금을 도둑질했다는 것을 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옛 성현들도 불행하게도 비방을 받는 것이 역시 많았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비방을 당했다고 해서 이숭인을 가볍게 여기지 마소서.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씀이 옳다고 여기신다면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시고, 옳지 않다 여기신다면 마땅히 유사(有司)에 내려 신이 〈이숭인과〉 붕당[朋比]을 지어 상(上)을 속인 죄를 바로잡아 주소서. 신이 차라리 이숭인과 함께 무거운 죄를 입는다면 비록 죽어도 여한은 없겠습니다. 이숭인이 무고로 죄를 얻는 것을 좌시하여 지위를 탐내고 위세가 두려워 구차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이 이 때 기복(起復)하였기 때문에 ‘부모가 돌아가신지 3년 내에 높은 관직에 앉을 수 없다’는 등의 말이 자기 때문에 드러난 것이라고 하여 〈권근에게〉 원한을 깊이 품었다. 이숭인은 비록 재능이 있었으나 행동하는 것이 규칙에 맞지 않았고 실수한 것도 많았으며, 권근이 구원해줄 것을 논한 것도 지극히 공정하다고 할 수 없었다. 권근(權近)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색(李穡)이 입조할 때 김사안(金士安)의 시종인 상인(商人) 백거마(白巨麻)가 금은을 많이 들고 가자 이숭인(李崇仁)이 그 수를 줄이게 하였는데, 백거마가 원한을 품고 허구를 꾸민 것이다.”라고 하였다. 창왕이 권근의 글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내려 논의하게 하니 도평의사사가 문하부(門下府)에 옮겼으며, 문하부는 헌부(憲府)로 이첩하였다. 이숭인을 따라 갔던 통사(通事) 송희정(宋希正)에게 물었더니, 송희정이 말하기를, “이숭인이 백금과 저마포를 갖고 가서 저자에서 채색 비단 16필과 견(絹) 20여필, 목면 5필, 색실 5~6근을 샀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노비 백인(白仁)이라는 자를 국문하니 송희정이 한 말과 같았다. 간관이 상소하여 권근〈의 죄를〉 논하기를 “신(臣) 등이 상소하여 이숭인의 죄를 논하니 전하께서 헌사에 명을 내려 국문하게 하였으나 이숭인은 도망하였습니다. 첨서밀직(簽書密直) 권근의 상소는 이숭인이 죄가 없다는 것을 힘써 논한 것으로 이숭인의 현명함을 드러내어 그를 논죄한 자를 국문하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신 등이 논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살펴보아 주소서. 오직 우리 선왕께서는 위로는 삼대(三代)를 본받아 상제(喪制)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변고가 많았기 때문에 임시로 당송(唐宋)의 제도를 따라 기복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기복하는 것이 매우 엄격하여 반드시 예부(禮部)가 왕지(王旨)를 받들어 중서성(中書省)에 이첩하고 중서성은 헌사(憲司)에 이첩하고 헌사는 다시 예부(禮部)로 이첩하여 기복할 수 있는지 조사해야만 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름 있는 대신과 큰 선비를 진실로 부득이하여 기복시키는 것은 대개 인재를 쓰는 것이 급하기 때문이지 그 사람을 영예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묘대향(宗廟大享)과 정월, 동지, 임금의 생일과 저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와 모든 조회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나라에서 이루어놓은 법입니다. 비록 완악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길례(吉禮)에 이르게 되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부모의 삼년상 전에는 감히 참여할 수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관대를 띠고 나라의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숭인은 글을 읽은 급제자이나 한 세상에 헛된 명예[盜名]를 탐냈으며 상복을 입은 중에도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에 아첨하여 상시(常侍)의 벼슬을 구하여 고관[華省]에 올랐으며 과거시험을 주관하였습니다. 대저 상시(常侍)는 간관이므로 공공연하게 예(禮)를 훼손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군(上護軍)으로 내려서 감시의 시관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도〉 길복(吉服)을 입고 문선왕(文宣王)의 사당에 들어가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 태연하게 고기를 먹었으며 의기양양하게 다른 사람에게 영예를 자랑하였으니, 〈이는〉 금수(禽獸)의 행동으로 삼한(三韓)의 후학들을 이끌려고 한 것입니다. 신 등은 바르지 않은 학문으로 전하의 유신(維新)의 정치에 누를 끼칠까 진실로 두려운 까닭에 미루어 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권근은 도리어 그가 과거시험을 주관한 것이 아비에 대한 효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전하를 속이고 인륜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권근은 이숭인이 법을 어기고 예법을 훼손한 것이 유죄(有罪)가 되며 신 등이 탄핵을 논한 것에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사사로이 좋아하는 바에 아첨하여 글이 될 수 없는 것을 꾸며내어 상(上)의 총명함을 가려 해당 관청에 해를 끼치려 한 것일 뿐입니다. 또한 이숭인은 종친을 모함하다가 속인 것이 궁색해져 옥사가 이루어지자 도망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그를〉 시독(侍讀)으로 삼으시려는 까닭에 사면을 명하셨습니다. 신 등이 그의 죄를 재론하자 다시 도망하였으니 그 불경함이 누가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그런데도 권근은 도리어 〈그를〉 현명하다 이르니 신 등이 군자를 모함한다고 하여 추궁하고 국문을 가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는 간관으로 하여금 입을 닫아걸어 전하께서 간언을 멀리하도록 젖어들게 하려는 것이니 이른바 말 한마디로 나라를 잃는다는 것입니다. 그 물건을 매매한 일은 일행인 송희정과 백인 등이 명백하게 실토하였으며 권근이 이숭인의 무리가 되려고 해당 관청을 해하고자 감히 요망한 말을 하여 상(上)의 총명함을 속인 것이니 죄가 매우 심합니다. 청컨대 헌사에 내리시어 〈이숭인의〉 직첩을 거두어들이고 송희정, 백인 등과 대질하여 국문하시어 그 죄를 바로잡으소서.”라고 하니, 〈왕은〉 도평의사사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낭사(郎舍)가 다시 상소를 올리기를, “이숭인이 종친을 모함하여 사람의 대륜(大倫)을 훼손한 것이 첫 번째 죄입니다. 모친상 3년 이내에 길복을 입고 과거시험을 관장하며 고기를 씹으면서도 태연하여 풍속을 훼손한 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상국에 사신으로 가서 몸소 물건을 매매하고 저자의 사람들과 이익을 다투어 사신의 절도를 잃은 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담당 법관이 왕명을 받들어 종친의 진위를 분별하는데 명을 거스르고 도망하여 숨은 것이 네 번째 죄입니다. 소관 관청이 탄핵을 주청하였으나 전하께서 사면하시고 〈다시〉 묻지 말라 하시면서 선마(宣麻)를 내리고 예로써 대우하셨는데도 즉시 나가서 사례하지 않은 것이 다섯 번째 죄입니다. 이숭인의 죄가 이와 같은데도 권근은 절친하게 지낸다 하여 말을 꾸미고 속이면서 허물을 덮고자 소관 관청을 해할 것을 꾀하였느니, 그의 죄는 이숭인보다 심합니다. 진실로 사면시킬 수 없으니 상부(相府)에 부쳐 다시 논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한 죄상을 조사하고 법을 정하는 것은 재상의 일이 아니니 청컨대 헌사에 내려 직첩을 거두어들이고 그의 죄를 명백하게 바로잡으소서.”라고 하였다. 창왕이 〈권근을〉 국문하지 말 것을 명하고 고신(告身)만 빼앗아 우봉현(牛峯縣)에 유배하였다. 기거사인(起居舍人) 맹사성(孟思誠)이 일찍이 권근에게서 수업을 받았는데 상소에 서명하지 않았다. 공양왕(恭讓王) 때 간관(諫官)이 논하기를, “이숭인과 하륜(河崙)은 이전에 이인임(李仁任)의 심복이 되었다가 후에 이색(李穡)의 간계를 따라 창왕을 재촉하여 〈명(明)에〉 조회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우왕을 〈다시〉 세워 왕씨(王氏)의 제사를 끊으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숭인을〉 다른 군에 옮겨서 유배하였다.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청주(淸州)에 갇혔으며 수재(水災)로 풀려났다. 얼마 되지 않아 〈이숭인의〉 종편(從便)이 허락되었다. 〈이숭인은〉 소환되어 고신을 받고는 지밀직사사 동지춘추관사(知密直司事 同知春秋館事)에 제수되었다. 또한 정몽주의 무리라고 하여 관직이 삭탈되고 멀리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죽었다. 이숭인은 천성과 자질이 영리하고 문장은 우아하였으니, 이색(李穡)이 매양 감탄하면서 칭찬하기를, “이 자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해보아도 세간에서는 얻기 힘들 것이다.” 하였으며, 〈명(明) 태조〉 고황제(高皇帝)도 일찍이 이숭인이 지은 표문을 보고는 칭찬하면서, “표문의 말이 참으로 간절하다!” 하였다.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의 저술을 보고는 역시 탄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도은집(陶隱集)』이 세상에 전한다. 아들은 이차점(李次點), 이차약(李次若), 이차건(李次騫), 이차참(李次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