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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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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등지고 섬진강을 바라보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용강리, 마을 꼭대기에 들어앉은 남난희(67)씨의 집은 세상 어느 ‘전망 좋은 곳’보다 전망이 좋았다. 멀리 섬진강 끝 광양 백운산(1222m)의 윤곽이 또렷이 보였고,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면 지리산 삼신봉(1289m) 자락에 있는 불일암·불일폭포 자리를 점칠 수 있을 정도로 산 능선이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집 뒤편으론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황장산(947m) 능선이 시작된다. 집을 나서면 어디든지 지리산 품 안이다. 또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유장하게 흐르는 한반도 산줄기, 백두대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지난 3일 이 집 툇마루에 앉아 주인장이 직접 덖은 차를 맛보았다. 뒤꼍이 바로 차밭이다.
집 뒤 차밭에서 바라본 남난희씨의 집. 멀리 지리산 삼신봉 산자락이 보인다. 김영주 기자
그는 집에서 맞은편 불일암까지 왕복 5㎞를 거의 매일 걷는다. 지리산으로 내려온 20여 년 전 찻집을 운영한 후 전통차와 된장 등을 만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매일 아침 집에서 불일암까지 걷기만 한다.
나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됐어요. 지금은 별 하는 일 없이 지내지만, 그래도 일상이 고맙고 매일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걷지요. 걷는 게 일상이 되면서 산속 수행, 삶 속의 수행이 됐어요. 죽을 때까지 이 길을 걷고 싶고, 죽는 날 아침도 걷다가 죽고 싶습니다.
지난 3일 남난희씨가 경남 하동군 쌍계사에서 불일암 가는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매일 아침 이 길을 걷는다. 김영주 기자
그는 스물일곱 살이 되던 1984년 1월 1일 부산에서 출발해 강원도 진부령까지 백두대간(태백산맥) 591㎞를 76일간 홀로 걸었다. 길인지, 구덩이인지 모를 흰 설원 위를 군사지도 한 장과 나침반에 의지해 길을 찾았다.
20대 여성이 홀로 30㎏의 배낭을 메고 도전한 산맥 종주는 당시 한 신문에 연재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백두대간이란 말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도 전이니 그럴 만도 하다. 나중에 ‘하얀 능선에 서면’으로 출간된 이 산행기가 지금 백두대간 종주의 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으로 네팔 강가푸르나(7455m)를 세계 여성 최초로 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연 해외 원정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와 자연학교와 걷기학교 등을 열며 자연 속에서 살았다. 지금은 지리산에서 홀로 지낸다.
삶 속 수행, 불일암 가는 길
쌍계사 불일암 평상에 앉아 있는 남난희씨. 매일 아침 이곳까지 걷고 차 마시고 기도한다. 김영주 기자
그의 집에서 불일암 가는 길은 용강리 마을로 내려가 쌍계1교를 넘어 쌍계사 일주문 오른편으로 이어진다. 30분 정도 오르면 산속 평지, 불일평전이 나타난다. 예전 어느 노인이 이곳에 움막을 짓고 도인처럼 살았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쌍계사에서 간이매점을 할 요량으로 움막을 짓는 중이다. 오래전 불일평전은 도교에서 이상향으로 치는 ‘청학동(靑鶴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방 큰 산으로 둘러싸여 은거하기 좋은 데다 실제 평전에 들면 아늑함이 몸으로 느껴진다.
평전에서 10분 정도 올라가면 불일폭포, 폭포 가기 전 왼편에 불임암이 있다. 남난희씨는 주인 없는 불일암 마당 평상에 앉아 찻병을 꺼냈다. 이번엔 그가 손수 구증구포(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방식)했다는 구기자차다. 맑은 갈빛으로 우러난 차에서 구수한 맛이 진동했다.
“사람들은 가끔 ‘그동안 가본 산 중에 어느 산이 가장 좋냐’고 묻곤 해요. 그런 산이 있을까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곳이 가장 좋은 산이지요. 그만한 것이 없어요. 이 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으니까. 간혹 고민이 있을 때 이 길을 걷다 보면 답이 명료하게 나오곤 합니다. 그래서 땅(집)에선 복잡한 일을 고민하지 않아요. 여기만 올라오면 복잡한 게 정리되고 답이 나오니까. 이렇게 온전하게 산과 있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한한자였던 아버지가 써준 '충서(忠恕)' 글씨가 대문 앞에 걸려 있다. 김영주 기자
경북 울진 산골 마을, 외가와 친가 모두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남난희는 집안 소유의 “송이 산을 지키는” 산골 소녀로 유년을 보냈다고 한다. 송이도둑을 지키느라 집 뒤 야산을 수없이 오르내렸던 게 산악인으로서 기본 바탕이 됐다. 이후 경남여상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1980년, 어쩌다 ‘지리산 화엄사’ 안내 산행 버스를 탄 후 산에 빠졌다. 산을 올라 보니 자신이 산에 늘 다니던 ‘아저씨들’보다 체력이 더 좋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그냥 책 읽고 글쓰기 좋아하던 시골 처녀였지요. 근데 등산이란 걸 해보고 난 후에 나도 뭔가 하고 싶은 게 있고, 승부욕이 있고, 갖고 싶은 게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지요. 산을 알고 인생이 바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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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론 산에 매달렸다. 지리산을 다녀온 후 산악회를 만들어 주말마다 산에 다니고, 1981년 한국등산학교를 졸업한 후엔 바위에 매달렸다. 당시 바위를 잘한다고 알려진 정호진·정승권·윤대표 등 남자 선배를 졸졸 따라다니며 한 번이라도 더 줄을 묶어보려고 애썼다. 그래도 산에 대한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게 산과 산을 이어 한 번에 걸어 보자는 산맥종주였다. 앞서 태백산맥을 종주한 성양수 선배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혼자만의 힘으론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주일마다 능선 길목에 올라와 밥과 식량을 조달해 주던 산악계 후배들이 기억에 남는다.
“한 여자 후배는 서울에서 내가 먹을 밥과 식량을 가득 지고 접선 장소까지 2박3일을 올라오기도 했어요. 무게를 줄이느라 배낭에 옷을 담아올 수가 없으니까 본인이 입고 온 옷을 나에게 벗어주고, 자기는 내가 산에서 1주일간 입었던 땀에 전 옷을 그 자리에서 받아 입고 내려갔지요. 그렇게 헌신적인 후배들 덕분에 가능했어요.”
76일 걷는 동안 수차례 간첩으로 오인받아 단속을 당하기도 수차례였다. 한 번은 식량을 배달하러 온 후배가 하필 운동권 대학생이라 사복경찰 2명을 달고 올라왔다. 운동권 후배는 산에 잘 타는 울진 출신이라 어느 순간 사복경찰을 따돌리고 사라져버렸는데, 졸지에 조난할 처지에 놓인 사복경찰에게 남난희가 랜턴을 챙겨주고 하산 길을 인도해 줬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보람도 있었다. 종주가 끝난 후 고향인 울진에 내려가자 지역 유지들이 용돈을 챙겨줄 정도로 유명인이 돼 있었다. 등산 인구가 소수에 불과한 당시를 떠올리면 무리도 아니다. 특히 여성 혼자 해냈다는 점에서 매스컴이 대대적으로 다뤘다. 이후 남난희는 700㎞ 백두대간을 다섯 번 더 완주했다. 세 번째로 걸었던 2009년엔 당시 열여섯 살 아들과 함께했다.
“매일 감사하고, 매일 기도하며 걷는다”
남난희씨가 집 툇마루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다. 매일 아침 차를 한잔 하고, 불일암까지 산행에 나선다. 김영주 기자
유난히 자립심이 강했던 남난희는 1986년 강가푸르나 등정 후 여성 산악인만으로 에베레스트(8848m) 등정을 꿈꿨다. 곧바로 팀을 꾸리고 훈련에 돌입했지만 역시 혼자 힘으론 힘들었다. 특히 남성 위주의 한국 산악계는 젊은 여성 산악인의 이런 행보를 탐탁지 않아 했다. 지현옥(1999년 안나푸르나에서 작고) 등 3명의 여성 산악인이 정상에 오른 1993년 여성 에베레스트(8848m) 원정대도 출발 전까지 남난희가 훈련을 맡았지만, 정작 자신은 이 원정대에 승선하지 못했다.
이후 삶도 순탄치 살았다. 산악계와 멀어지고 난 후 “하지 말았어야 할 결혼”을 했으나 남편은 지리산에 내려온 몇 년 후 절로 출가했다. 이후 아들과 함께 지금의 집에서 알콩달콩 살고 있었지만, 10여 년 전 아들마저도 먼저 떠나보냈다. 이후 모든 삶이 바뀌었다. 당시 유명했던 ‘남난희표 된장’도 이때 막을 내렸다. 엄선한 강원도 정선 콩으로 메주를 쒀 당시 ‘알 만한 사람들’만 알음알음으로 주문하던 된장이었다. 지금은 마당에 빈 항아리와 그때 사둔 30㎏짜리 소금 90포대만이 창고에 남아 흔적을 대신하고 있다. 지리산 자락에서 15년간 간수가 빠진 채로.
남난희씨 집 창고에 소금 자루가 쌓여 있다. 한때 '남난희표 된장'을 만들 때 사둔 소금이 아직 남아 있다. 김영주 기자
“아이 생각은 매일 나지만 이젠 슬프지는 않아요. 지금은 아이가 떠났다고 말을 할 정도가 됐으니까. 한 몇 년은 말도 안 하고 사람도 안 만나고 그랬는데, 말하기 시작한 지 5~6년 된 것 같아요. 근데 생각은 매일 나요, 그거야 뭐 나 죽을 때까지 (생각이) 났다 안 났다 하겠지요.”
그는 스님 없는 불일암에 매일 들러 보통 한 시간, 어떨 땐 서너 시간 동안 불공을 드리기도 한다. 매일 일상에 감사하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 아마 아들을 위한 기도가 첫 번째가 아닐까.
그의 기도 중의 하나는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온전한 백두대간을 잇는 데 일조하겠다는 것이다. 1984년 당시 죽을 힘을 다해 진부령까지 간 후 철조망으로 막힌 길을 보며 “지금은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꼭 다시 와서 산줄기를 이어 완전한 백두대간을 걷겠다”고 맹세했다.
김경진 기자
“남북 백두대간 잇는 데 일조하고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지금 백두대간 길은 북한으로 이어질 여지는커녕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700㎞ 구간도 100여㎞가 막혀 있는 상태다. 산림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 지자체 등이 안전·관리 등의 이유를 들어 길을 막고 있어서다. 설악산 구간은 한계령에서 마등령 구간 외에 다 막혀 있으며, 오대산은 동대산부터 막혀 있다. 또 속리산 정상 바위 구간인 문장대도 안전상의 이유로 막았다. 그러나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이들은 금지 구간을 몰래 넘어다니는 중이다. 막아서 더 위험한 길이 된 것이다.
“세계 3대 트레일이라는 미국의 PCT(퍼스픽크레스트트레일·4300㎞, 캐나다의 WCT(웨스트크레스트트레일·77㎞)도 걸어봤는데, 그런 길은 다 인공적으로 이어 놓은 길이에요. 백두대간처럼 산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조성된 길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이걸 전 세계인에게 알리고 찾아오게 하고 싶은데, (관리 주체가) 한 라인이 아니다 보니 한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요. 외국의 유명한 트레일은 자원봉사자와 지역민, 산악인이 만든 민간 협회가 관리하고 통제합니다. 우리도 민과 관이 손잡고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걷기 좋은 길이 될 텐데, 우리도 아직 요원하네요.”
남난희는 2019년부터 매년 한 달씩 5년에 걸쳐 PCT를 걸었다. 산불방지 기간 통제된 몇몇 구간을 빼고 약 4000㎞ 빼곡히 걸었다. 특히 올해는 트레일 운영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교육 과정을 참관하기도 했다. 백두대간이 더 활성화되면 PCT의 운영 노하우를 백두대간에 접목하기 위해서다.
산악인 남난희(왼쪽 둘째)가 스위스 베른에 있는 스위스 알프스 박물관에서 '2022 알베르 마운틴 어워드' 시상식에서 수상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알베르 1세 기념재단
남난희의 백두대간 길을 트기 위한 노력은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지난해 유럽에서 권위 있는 산악상인 ‘알베르 마운틴 어워드’를 수상한 것이다. 벨기에 국왕이자 산악인이었던 알베르 1세(1875~1934)를 기리기 위해 만든 이 상은 등반과 자연보호, 이와 관련한 저술활동에서 혁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나 단체에 수여된다. 수년 전 주최 측에서 남난희씨에게 백두대간에 관한 글을 청탁했고, 그는 백두대간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는 물론 남북을 잇는 평화의 상징으로 소개한 게 계기가 됐다.
사실 북한까지 백두대간을 잇겠다는 계획이 쉬운 건 아니지요. 그래도 한 구간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 대가 아니라도 후대에 가서라도 성사되도록 여론을 조성해야 하는데, 지금은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겠지요.
지리산 인근 추천 길, 동의보감 둘레길
동의보감 둘레길. 시작부터 끝까지 고즈넉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김영주 기자
지리산 주변은 지리산둘레길(총 300여㎞)을 포함해 걷기 좋은 길이 많다. 가을 지리산 인근에선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데, 지리산 천왕봉(1915m)을 품은 경남 산청군은 오는 19일까지 산청세계전통의약항노화엑스포(산청엑스포)를 연다. 산청군이 조성한 108만㎡(약 33만 평) 규모의 한방 테마마을 동의보감촌이 주 무대로 이곳을 감싸고 있는 동의보감 둘레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산청엑스포와 걷기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길은 동의보감촌을 내려다보는 왕산(923m)과 필봉(856m)을 연결해 한 바퀴 라운드할 수 있도록 이어져 있다. 동의보감촌에서 두 봉우리를 올려다보면 오른편 왕산은 풍채가 너른 산 모양새를 하고 있으며, 반면에 필봉은 붓끝처럼 뾰족하고 솟아 있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동의보감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출발점을 풍차카페로 잡는 게 좋다. 풍차는 동의보감촌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이라 찾아가기도 쉽다. 라운드는 이곳에서 시계 반대 방향이 좋다.
둘레길은 3코스로 구분돼 있으며, 총 17.8㎞다. 1코스는 풍차전망대에서 구형왕릉과 약수터 삼거리 등을 지나는 6km, 2코스는 쌍재에서 향양마을 입구까지 4.3㎞, 3코스는 향양마을에서 동의보감촌으로 되돌아오는 7.5㎞ 구간이다. 본래 임도였던 곳으로 평지 길과 다름없는 데다 길이 호젓하고 한적해 한나절 트레킹 코스로 딱 좋다. 곳곳에 맨발로 걸어도 좋을 마사토 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다만 드문드문 시멘트 포장이 돼 있어 아쉽다. 중간에 쌍재·향양마을 등으로 탈출할 수 있으나 내려와서 대중교통 이용은 까다로운 편이다.
기자는 지난 4일과 지난달 4일, 두 번에 걸쳐 이 길을 걸었다. 특히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던 지난달엔 이 길에서 뛰노는 너구리 한 쌍을 볼 수 있었다. 어찌나 몸놀림이 빠르던지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지만, 트레킹 길에서 야생동물을 본 건 근래 들어 처음이었다. 그만큼 인공적이지 않은, 천연의 걷기 길이라는 방증이다. 녹음이 무성한 때보단 단풍이 드는 가을이 더 좋은 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경진 기자
1코스는 고즈넉한 숲길로 시작한다. 소나무와 참나무, 전나무 등이 양쪽 길에서 서늘한 그늘을 제공한다. 1코스의 볼거리는 단연 구형왕릉이다. 둘레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지만, 지나치기엔 아깝다.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488~557년)은 김유신(595~673년)의 증조부로 신라의 침공을 받아 가락국을 신라에 양도했다. 이후 이곳에 들어와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구형왕릉은 구형왕의 무덤으로 알려졌지만, 사료가 부족해 ‘전(傳) 구형왕릉’이라 부른다.
구형왕릉. 사진 산청군청
경사진 산비탈을 이용해 삼태기 모양으로 조성돼 있으며, 왕릉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다. 거대한 돌무더기는 일반적인 봉토 무덤과는 다른 형태로 서쪽에서 층과 단을 이루고 있다. 돌엔 이끼나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구형왕릉 갈림길에서 10분 정도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산 정상 방향으로 300m 올라가면 약수터가 나오는데, 계곡 옆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이 신비롭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예전부터 이 물을 길어 마셨다고 한다.
2코스는 유서 깊은 쌍재를 오르는 길이다. 걸어왔던 길이 평지라 이곳을 통과할 땐 약간 숨이 찰 수 있다. 쌍재는 왕산과 지리산 남쪽을 잇는 길로 옛사람들이 걷던 곳이다. 또 이 길은 지리산둘레길 5코스(동강~수철마을)와 겹치는 곳이기도 하다. 잡목 무성한 숲 사이로 난 고즈넉한 길이 이어진다.
쌍재에서 내려오는 3코스는 내리막길로 발걸음이 다소 가볍다. 또 이곳을 지날 땐 오른편으로 산청읍과 평야가 훤히 보이는데, 곳곳에 ‘전망대’가 있어 사진촬영 장소를 하기에도 좋다. 향양마을을 지날 때 길에서 한 무리의 흑염소 떼를 만나기도 했다. 산 아래 향양마을에서 키우는 염소들이 나들이를 온 것이다. 그만큼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이다. 단, 이 지점에서 이정표가 헛갈리게 표시돼 있어 살펴보고 가야 한다.
산청세계전통의약항노화엑스포는 볼거리가 다양하다. 행사장 내 산청혜민서에선 경남 지역 한의사의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으며, 온열체험관에선 족욕과 반신욕 등을 할 수 있다. 또 풍차카페 바로 아래에 있는 편백나무미로공원은 맨발 걷기를 하기에 좋다. 편백미로 길을 따라 인체 오장육부에 대한 설명이 차례차례 나온다. 천천히 걷게 되면 약 30분 정도 소요되는 여유로운 산책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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