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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William Shakespeare(윌리암 세익스피어 1564-1616)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극작가로,
희비극, 시극 등 37편의 희곡과 소네트집들을 남겼다.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은
그를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고,
동시대의 극작가 벤 존슨은
셰익스피어 사후 이런 헌시까지 바쳤다.
"장하도다 나의 영국이여!그대 영국이 탄생시킨 인물이도다!
그에게 유럽의 모든 땅이 경의를 표한다.
그는 특정 시대가 아니라모든 세대에 속하게 되리니"
셰익스피어는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가이자,
가장 유명한 인물들을 탄생시킨 작가이다.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스,
리어 왕,
클레오파트라,
로잘린드,
이아고,
샤일록 등 그
가 창조한 인물들은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이 인간의 성격을 표현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고,
그의 작품은
모두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세계 예술사에 떨친 위상과 달리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심지어는
한 사람이 아니라는 설,
셰익스피어로 알려진 인물이
실제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배후의 다른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 중 몇몇 작품은
셰익스피어가 진짜 썼는지조차 논쟁에 휘말려 있기도 하다.
영문학사에서
그 어떤 준비 기간도 없이 갑자기 등장하여
이후 연극과 문학 작품의 흐름을 뒤바꾼 작가는 셰익스피어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작품 외에 없다는 점은,
아마 그의 교육 수준이 높지 않다는 데 기인할 것이다.
그 이전에 등장한 작가들은
대체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는데,
그의 실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은 여기에 연유하기도 한다.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셰익스피어의 생애에 대해 정리해 보자면,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
영국 중부의 시골 마을인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4월 26일에 세례를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아버지는 상인이자 토지 관리인으로,
셰익스피어는 중산 계급의 비교적 안락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고향에서 초등, 중등교육을 받았으며,
문법과 라틴어, 기본 고전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
이웃 마을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다.
런던으로 올라와서
극단 일을 시작한 것은
대략 158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며,
1590년대 초반에는
배우 겸 극작가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다.
1594년에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극단인 체임벌린 경 극단의
주주 중 한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유년 시절에
런던에서 발흥해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과 서민 가릴 것 없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끄는 오락으로
자리매김했다.
셰익스피어가 12세였던 1576년,
제임스 버비지가 런던에 최초로 극장을 설립했고,
1590년대 전후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문화 예술이 발달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셰익스피어가 런던에 올라온 때는
바로 이런 시기였다.
셰익스피어는 1590년대 초반
〈헨리 6세〉,
〈리처드 3세〉,
〈리처드 2세〉,
〈베로나의 두 신사〉, 〈한 여름 밤의 꿈〉,
〈말괄량이 길들이기〉,
〈로미오와 줄리엣〉 등
사극, 희극, 비극을 막론하고 다양한 작품을 썼고,
이 작품들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신사 계급의 지위를 얻고
가문의 문장(紋章)을 공인받았으며,
1597년경에는
스트랫퍼드에서 손꼽히던 대저택 뉴플레이스의 그레이트 하우스를 사들였다.
1599년에는
템스 강 남쪽에 글로브 극장을 지었으며,
이 극장에서
〈십이야(夜)〉,
〈헨리 4세〉,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꼽히는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 등을 공연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네트도 활발히 집필했다.
이 작품들은 1609년 《소네트 선집》으로 출간되면서
영시 최고의 작품집으로 꼽힌다.
또한 셰익스피어는 1594년 설립된 궁내성 극단의 주요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궁내성 극단은 1603년 제임스 1세의 후원을 받으면서
'왕립 극단'으로 임명된다.
1613년 6월 19일,
〈헨리 8세〉를 공연하던 도중
글로브 극장에 큰 화재가 났다.
극장은 한 시간 만에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으며,
이듬해 봄 극단 관계자들이 기금을 모아 극장을 재건축했으나
셰익스피어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일설에 따르면
창작력이 쇠퇴하여 괴로워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이후 고향에서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다가
1616년 4월 23일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셰익스피어는 25년 정도 활동하면서
약 37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영국 역사를 중심으로 한 사극과
낭만성이 강한 희극을 많이 썼으며,
후반부로 갈수록
대표작으로 불리는 비극을 썼다.
만년에는
다시 낭만적인 희극으로 회귀하기도 했다.
또한 소네트에서도 괄목할 만한 경지를 이루었는데,
소네트집만으로도
형식과 내용에서 모두 영어권 최고의 작가라 할 만하다고 평가된다.
초기 셰익스피어에게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게 해 준 작품들은
대개 낭만적인 로맨스 희극들이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로나의 두 신사〉,
〈사랑의 헛수고〉,
〈한여름 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헛소동〉,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 등은
사랑과 결혼을 소재로 한 익살과 해학이 넘치는 작품으로,
로맨스 희극의 정석을 보여 준다.
내용과 구성 등에 있어서
중세부터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발전한 이탈리아 희극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데,
셰익스피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에서 연유한 재담과 풍자,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보다 보편적인 이야기와 인물을 그려 냈다.
사극에 있어서는,
초기에는
주로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을 썼다.
주제 및 시기에 따라
〈리처드 2세〉,
〈헨리 4세〉 1, 2 및 〈헨리 5세〉까지를 4부작으로,
〈헨리 6세〉 1, 2, 3부와 〈리처드 3세〉를 4부작으로 묶기도 한다.
작가로서의 완숙기에 넘어선 이후에는
로마 사극도 집필했다.
그중 〈줄리우스 시저〉는
등장인물의 구도 및 작품 전체의 분위기에 있어
〈햄릿〉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의 대표작이자 세계 문학의 금자탑으로 여겨지는 작품들은
뭐니 뭐니 해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다.
북유럽 민화를
당시 유행하던 복수 비극으로 재탄생시킨 〈햄릿〉,
사랑과 질투, 인간 내면의 나약함을 묘사한 〈오셀로〉,
스코틀랜드 역사극에서 모티프를 따와 공포와 절망, 인간의 내적 갈등과 고독,
죄의식을 섬세하게 묘사한 〈맥베스〉,
영국의 전설적인 국왕 리어와 세 딸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배은과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비극을 보여 주는 〈리어 왕〉이 그것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
극작가로서의 숙련된 필치가 더해진 시점,
즉 작가로서의 완숙기에 그는 이 작품들을 비롯해 많은 비극들을 썼다.
셰익스피어가 사후 수백 년이 지나도록
연극, 문학 작품, 여타의 예술 장르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괴테는
위대한 희곡은 장르를 넘어선다면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극으로 보기보다는
글로 읽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고
오늘날까지 사랑받은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창조해 낸 인물들의 생명력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한 작품에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는데,
각각의 인물들은 (제아무리 단역일지라도)
누구 하나 다른 인물들과 그 특성이 겹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실제 인간인 듯
각자의 방식대로 보고, 느끼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행동하는데,
유형적이거나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만큼 셰익스피어는 인간 그 자체를 창조하는 데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영국의 한 비평가는
이런 연유로
"나이가 들기 전까지는 아무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셰익스피어는
같은 유형의 성격을 두 번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피상적으로 볼 때는
유사한 유형의 인물이라고 여겨져도
면면을 살펴보면
행위의 동기나 내면 등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인물을 그려 냈다.
즉 사랑에 빠진 인간,
질투하는 인간 등
유형화될 수 있는 인물에게도
각각의 성격과 성장 환경,
현재의 상황에 따라 근본적인 성격 요인을 모두 다르게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도
인생과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보편적인 특질을 창조함으로써
셰익스피어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는 불후의 작가가 되었다.
38. William Cuthbert Faulkner(윌리엄 포크너 1897-1962)
미국적 민속 전통의 기반 위에
유럽의 실험주의를 절묘하게 배합하여
미국 모더니즘 소설의 형성에 기여했다.
194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대 미국 소설에
강력하고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여를 한'
공로로
1949년 노벨 문학상 위원회는 윌리엄 포크너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포크너는 현대 미국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시와 소설을 쓰고 때로 그림도 그렸으나,
그를 오늘날 미국 문학의 한 봉우리가 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은
그의 장편소설들이다.
포크너의 작품들은
미국 남부 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방언과 미국적 민속 전통의 기반 위에
모더니즘 및 상징주의 기법,
유럽의 실험주의를 절묘하게 배합하여
미국 모더니즘 소설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그리 대접받지 못했으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후에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윌리엄 커스버트 포크너는
1897년 9월 25일
미시시피 주의 뉴 앨버니에서 태어났다.
남부의 유서 깊은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 머리 포크너는
증조부 때부터 시작한 철도 사업을 이어받았다.
그의 이름은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할아버지 윌리엄 클라크와
아버지 모드 커스버트의 이름에서 하나씩 따왔다.
원래 가문의 성은 'Falkner'였으나
후일 영국 공군에 입대하면서 'Faulkner'로 쓰기 시작했다.
5세가 될 무렵
가족이 미시시피 지역 옥스퍼드로 이주했으며,
이곳에서 성장하고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어린 시절
흑인 유모 매미와 외할머니로부터
가문의 이야기 및 남북전쟁의 영웅담들을 들으며 자랐다.
어린 포크너는
남북전쟁의 영웅이자 정치가, 철도 사업가, 소설가이기도 했던
증조부 윌리엄 클라크 포크너를 우상으로 여겼으며,
이 이야기들은
그가 자란 남부의 생활 방식 및 사회 변화와 함께 작품 근간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포크너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광이었으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는
모든 과목에서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바른 모범생이었으나
실제로는 문학과 그림, 자기 자신 외의 주변에는 관심이 없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런 불일치는 그를 힘들게 했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퍼스트 내셔널 은행에 들어가 회계사로 일했다.
이 무렵부터 영국의 시인 앨저넌 스윈번과
에드워드 하우스만의 영향이 느껴지는 시를 쓰기 시작했고,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과 발자크에 몰두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자 육군에 지원했으나
키가 작아 좌절되었고,
잠시 무기 회사에서 회계사로 일하다
뉴욕에서 영국 공군 사관생으로 입대했다.
그러나 훈련을 받던 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제대해 옥스퍼드로 돌아왔다.
이후 몇 년간 서점 직원, 우체국 국장 등으로 일하면서
주로 시를 쓰는 생활을 했다.
최초로 발표한 시는
1919년 〈뉴 리퍼블릭〉 지에 게재된 〈목신의 오후〉인데,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었다.
포크너의 습작 시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경험은
1925년 뉴올리언스에 머물 무렵 작가 셔우드 앤더슨과 사귀면서
다양한 성격의 문인들과 교류한 일이다.
셔우드는 그가 이듬해 첫 소설 《병사의 보수》를 출판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남부 지방을 작품 소재로 활용하라고 조언한 인물이다.
포크너는 꾸준히 《모기》, 《흙속의 깃발(사토리스)》 등의 소설을 발표했으며,
1929년에는
후일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힐 《음향과 분노》를 발표했다.
비연속적인 시간 구조,
복수의 서사 시점,
암시적이고도 복잡한 문체 등
실험적인 서술 기법과 시각적인 언어 사용이 두드러지며,
후일 20세기 현대 문학의 지형을 바꾸었다고 평가되는 작품이다.
그러나 발표 당시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해
그는 첫사랑이었던 에스텔 올덤이 이혼하자
그녀와 결혼하여 옥스퍼드 외곽에 정착했으며,
미시시피 대학 발전소에 취직했다.
1930년에는
〈에밀리에게 바치는 장미〉가 〈포룸〉에 실리면서,
〈아메리칸 머큐리〉,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하퍼스〉 등
유수의 잡지들에도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출판했다.
이듬해에는
포크너를 문제 작가로 주목받게 한 《성역》을 출판했는데,
후일 노벨상을 받기 전까지
그가 유일하게 주목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출판인 해리슨 스미스는
"이걸 출판하면 난 감옥에 갈 거야."라고 말하면서
대폭 수정을 요청한 바 있는데,
그럼에도
여대생을 강간하고 매춘에 이용하는 기본 줄거리를 중심으로,
죄악에 대한 불감증에 빠진 현대 사회를 비판한 이 작품은
'미국 사디즘의 최고의 예'라는 평을 받으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이 주목받고 영화화되면서
포크너는 이후 20여 년간 할리우드에서 영화 시나리오 작가, 각색 작가로 일한다.
그러면서도 장편소설 작업을 계속했고,
《8월의 빛》,
《압살롬 압살롬》,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
《야생 종려나무》,
시집 《어린 가지》 등을 출간했다.
그의 작품들은
앙드레 말로, 사르트르 등
프랑스 비평가들에게는 호평을 받았지만,
자국인 미국 비평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작품 활동을 한 지 약 15년이 지난 후인 1940년경부터였다.
그리고 1946년,
비평가 맬컴 카울리가 서문과 해설을 붙여 낸 《포터블 포크너》 선집이 출간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94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1951년에는 프랑스에서
문인 자격으로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으면서
그의 명성은 절정에 이른다.
1955년에는
《우화》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이듬해 《성역》의 여주인공 템플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이
알베르 카뮈 각색으로
프랑스에서 연극 무대에 오른다.
스놉스 3부작 중 1부로
1940년 출간된 《촌락》과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
《음향과 분노》 등의 작품들도
미국에서 연이어 영화화된다.
1957년부터
포크너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상주 작가로 지내면서 강의를 하고 글을 쓰며 안정적으로 생활했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기보다
소박하고 전원적인 삶을 택해 조용하게 살았다.
1962년 7월 6일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고,
다음 날 세인트 피터스 공동묘지의 포크너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지막 소설인 《약탈》은
출간된 지 이듬해인 196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포크너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미국 남부 사회의 변천사를 연대기적으로 묘사했다.
그가 살던 시대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전
통적인 가치가 급속히 붕괴되던 때로,
전통적인 생활방식 및 관점과 새 시대의 유물들이 혼재하던 때였다.
전형적인 남부 명문가에서 자란 포크너는
양쪽을 모두 경험했으며,
이런 삶 속에서
남부의 정체성을 포착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요크나파토파 군과 제퍼슨 읍이라는 가공의 장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곳들은 그가 자란 미시시피 지역과 옥스퍼드 지역을 소설에 맞춰 변형한 곳이다.
이 가공의 지역을 무대로 1
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과거 몇 세대 동안 서로 연결된 허구의 가족들을 통해
남부 사회의 모순,
즉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이나 상류 사회의 부도덕, 도덕 불감증, 방종과 타락,
계층 갈등과 분열 등을 고발했다.
남부 문학의 전통을 따르며
남부 사회를 이런 방식으로 다룬 작가는 포크너만이 아니지만,
누구도 포크너만큼
서사적이고 신화적인 작품을 창조하지는 못했다.
포크너의 작품은
남부 지역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미국이라는 땅의 역사를 다
양한 민족을 통해
새로이 구성한,
하나의 거대하고 신화적인 서사시라 할 만하다.
그런 한편
"윌리엄 포크너 만큼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문자 언어에 쏟아부은 사람은 없다."
라는 미국 남부 출신 작가
유도라 웰티의 말처럼
포크너는
영어라는 언어 자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고 활용했으며,
연대기적 서사 속에서도
다양한 시점과 비연속적인 시간 구조를 채택함으로써
소설의 내러티브 방식 자체를 실험했다.
이런 그의 시도는
이후 미국 문학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 청아출판사 (이한이 글)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