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류영모 방에 걸려 있던, 왕양명의 범해(泛海)
밤은 고요한데 바다 파도가 삼만리에 출렁거리는구나
"한번은 선생님 방 앞을 슬쩍 지나다보니 방문이 좀 열렸는데, 벽에다 큰 글씨로, (아마 한자가 손바닥보다도 더 크게) "夜靜海濤 三萬里"라 써 붙인 것이 보였습니다. 선생님이 손수 쓰신 것으로 아는데, 그때는 나도 王陽明을 읽지 못해 그것이 그의 글인 줄도 몰랐지만,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그것을 쓰셨을까 혼자 생각을 해 본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가서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함석헌이 1983년에 류영모 스승을 추억하며, 고교시절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가 스승을 존경하며 교장실을 서성거리는 모습도 인상적이고, 그 무렵 수줍음을 많이 탔던 그가, 대자(大字)로 써서 교장실 벽에 붙인 글씨의 내용을 궁금해 하면서도 감히 묻지도 못하는 모습이 눈 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다.
소년 함석헌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저 시를 속시원히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 시는 왕수인(王守仁, 호는 양명(陽明), 1472~1528)이 쓴 '바다 위에 떠서(泛海, 범해)'라는 작품이다.
險夷原不滯胸中(험이원불체흉중)
何異浮雲過太空(하이부운과태공)
夜靜海濤三萬里(야정해도삼만리)
月明飛錫下天風(월명비석하천풍)
험하고 평탄한 것 따위 원래 가슴에 담아두지 않거늘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밤은 고요한데 바다의 파도는 삼만리에 이르고
달은 환한데 고리 쩔렁거리며 날릴듯한 지팡이는 하늘 바람 아래에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