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 바울은 항상 '육신'을 '영'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여 죄와 대항하기에 무기력한 인성과 그에 근거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낸다. '육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육신'을 통해서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육신'은 '죽을 몸'이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인간'에 대해서 '육신'이라고 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알지만 율법에 종 노릇하며 죄에 거하는 자들에게도 이 말을 적용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신분상으로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에 속한 자 같이 행동하는 것은 그일을 행하는 사람 자신 뿐 아니라 그를 불러 의인되게 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본절에서 육신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 즉, 그리스도와 무관(無關)한 삶을 살던 때의 신분을 가리킨다. 죄의 정욕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파데마타 톤 하마르티온'은 죄악의 성격을 갖는 정욕을 의미하는데, 혹자는 '색욕, 분노, 증오, 악한 뜻, 투기, 시기, 터무니없는 두려움'등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서, '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바울은 7절과 8절에서 '죄의 정욕' 중 '탐심'을 대표적인 것으로 언급한다. 한편 바울은 '죄의 정욕'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고 진술하고 있다.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 여기서 '지체'는 '육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죄가 지체를 통해서 실제화되기 때문에 '역사하다'란 말과 어울리는 '지체'란 용어를 사용했다.
즉 사람의 '지체'는 죄에 붙잡혀 사용되면 '불의의 병기'이며 하나님께 붙잡혀 사용되면 '의의 병기'로 역사하게 된다.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 이 말은 6:13에서와 같이 사람의 지체가 '불의의 병기'로 사용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는 것과 반대로 죄와 연합하여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에 빠진 사람은 사망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있다. 이러한 상태가 그의 열매이며, 최종적으로는 영원한 사망의 열매로 이어진다.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 여기서 두 문장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진술은 율법에서 벗어난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호 카테이코메다' 가운데 관계 대명사 '호'는 '율법'을 선행사로 갖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관계대명사 '호'는 여격이고, '투 노무'는 소유격이어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이는 '호'의 전치사 '엔)이 여격을, '투 노무'의 전치사 '아포'가 소유격을 수반하므로 차이가 날 뿐이다. 그러므로 '얽매였던 것'은 '율법'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율법은 사람을 얽매는 것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사람의 정욕과 율법이 조화를 이루면 이처럼 과격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율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표로 죽으신 것이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 바울은 '영'이란 용어를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영'을 '성령'으로 해석하지만 그 한 단어로 '영'이란 용어가 지닌 의미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
바울이 '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용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8장에서 '영'은 '육신'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영'이 죄에 대해서 전혀 배타적임을 가리킴과 동시에 율법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2) '영'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갖게 된 '새생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때에는 '영'이 '성령'과 동일시될 수 있다. (3) 본절에서와 같이 '영'은 '의문'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즉 '의문'이 옛 시대의 지배 원리였던 것과는 반대로 '영'은 새시대의 지배 원리이다. 물론 새시대의 지배 원리는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지만 새시대의 지배 원리 자체와 성령은 동일시될 수 없다. 새시대의 지배 원리에 속한 것으로는 '영'과 '복음'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성령과 사람의 영이 8장에서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으며,
고전 6:17에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볼 때 바울이 '영'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에, 어떤 곳에서는 새 생명을 주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시대의 지배 원리에 대해 적용하기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것'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새시대의 지배 원리를 따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 이 표현은 '그런즉 어찌하리요'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앞에서 설명한 바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하든지 아니면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면서 또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한 바울의 상투적인 문장 전개 방법이다. 율법이 죄냐 - 바울이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했으므로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율법이 죄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사실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한 것은 율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사람이 육신의 지배를 받을 때는 율법이 도리어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 이 말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 죄는 율법 때문에 생성되는 것도 아니며 율법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다.
다만 율법은 그 죄를 죄로 규정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율법으로 말미암지'란 말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는 데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 바울은 율법 중 탐심을 경계하는 구절을 대표적으로 언급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탐심은 인간의 심성 속에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실제적인 범법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로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의 심성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악한 동기도 죄라고 가르쳐 줌으로써 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인간 사회에서는 '탐심'으로는 죄가 성립되는게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악한 동기조차 죄로 규정된다. (2)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표현될 수 있듯이 타락한 인간의 죄는 탐욕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또한 우상 숭배와 같다.0바울이 '탐욕'을 우상 숭배와 같이 취급한 이유는 둘다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