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었던 전쟁인 1차 세계대전(1914-18)으로 시작된20세기는전쟁의 승리자였던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는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의 손실을 입었으나, 미국에게는 전후 경제적 부흥을 얻은 시기였다. 그러나 그 부흥은 1929년 증권시장의 붕괴로 이어져 대공황을 맞게 된다.
1차대전과 2차 대전의 사이에 국가간의 긴장이 계속해서 고조되고 있던 유럽에서 오스트로-항가리 제국은 독립국가인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거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로 분열되었고 대부분의 국가들은 권위주의에 맞선 민주화의 길을 택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1917년 급진적 마르크스 혁명주의자들인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고 독제를시작했다.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일당이 1922년 이탈리아 정부를 장악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와 나치가가 바이마르 공화국(1918-33)의 수상 자리를 얻게 된다. 스페인에서는 프랑코의 전체주의가 스페인을 통치하게 된다.
이런 사건들은 국경을 맞 대고 있는 나라들 사이에 적대적 관계를 갖게 만든다. 오스트리아로 부터 독일이 그리고 헝거리가 오스트리아와 주변의 슬라브 국가로 부터, 또 러시아가 유럽 전역으로 부터 소외, 고립된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와 독일어 사용 국가가 거리를 두게 되면서 음악적 발전 또한 달라졌다.
음악적 혁신(1914-30)
1907년 쇤베르크(1874-51)는 조성 즉, 한 음에 대해 음계의 여러 다른 음이 갖는 관계의 체계, 즉 장조-단조의 체계를 포기한다. 이는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화성적 진행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지난 200년 이상 유지해온 음 진행의 연속성과 형식적 유기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무소르그스키와 드비시는 화음을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는 벽돌과 같은 단위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생각은 자연히 딸림화음-으뜸화음이라는 긴장 관계를 포기하고 화음을 수직적인 하나의 색채로 보게 만든다. 주제와 발전이라는 바로크 이후의 음악적 사고의 견고성에 의문을 던지게 되어, 화음의 연결, 음높이의 집합, 음색의 대조 등 음 구성의 방법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비서구 음악과 민요
비서구음악과 동유럽의 민속음악은 작곡가들에게 고정된 박자, 음 관계에 대한 지금까지의 억압을 벗어나 자유롭게 그 재료들을 다룰 수 있게 해 주었다. 유럽음악의 음조직에서는 필수적인 반음으로 올라가 주음에 도달하는 이끔음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 오음계(pentationic scale)나 온음음계(Wholetone scale)와 같은 음조직은 멜로디와 화음의 연속성을 전과는 다르게 변화시킨다. 복합 박자는 새로운 리듬의 불규칙성을 도입하게 되며 분명하게 시작과 끝을 갖지않는 동양의 개방된 형식을 작곡가들이 모방하기 시작한다.
대중을 위한 음악
새 음악과 청중들 사이의 넓어진 간극를 극복하며 평범한 대중들에게 가깝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학생 그룹이나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사용하기 위한 실용음악(Gebrauchsmusik)이 독일에서 장려되었다. 같은 프로젝트가 소련 연방에서 프롤레타리안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곳에서 시행된다. 헝거리에서는 코다이가 대중들에게 봉사하는 음악을 만들었고, 민요에 기초한 교육적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930-50
1930년대 초, 러시아와 독일의 독제 정권은 새로운 음악으로 부터 대중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새 음악은 부르조아적 퇴페주의로 비난 받는다. 폴란드에서는 나치의 점령이 1939부터 45년 사이의 모든 예술 활동을 지하로 숨어들게 하였다. 폴란드의 음악적 르네상스는 1949년 부터 1956년 사이의 스탈린의 유화 정책 시기에 이데올로기적 방향을 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겨우 시작된다.
1950-1960년대
1950년 이후 음악회 청중은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의 작품를 더욱 견디기 어려워 하면서 그 사이의 간극은 회복 할 수 없을 만큼 심해진다. 작곡가들이 음높이, 음길이를 정해주지 않고 우연에 또는 연주자의 선택에 맡겨버리는 우연성 음악(Aleatoric music)은 거의 모든 청중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반면, 지적인 수준에서 고도로 조직화된 음열 음악은 청취의 평면에서 보자면 무질서적인 혼돈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고, 몇 안되는 미식가들의 담론을 위한 음악이 된다.
1970-1980년대
1970년 부터 급진적 운동의 선봉에 섰던 바로 그 작곡가들이 온건한 길로 바뀌어 갔으며, 대중 음악과 접촉을 가졌던 젊은 작곡가들은 이들의 선택은 비교적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된다. 소위 크로스오버(cross over)의 경향이 대두된 것이다.
과학기술적 요인은 20세기 음악 문화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음반, 라디오, 텔레비전 등은 유래 없던 방대한 청중을 동원했다. 이런 기술 발전은 비발디에서 프로코피에프에 이르기 까지의 음악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킨다. 그 확산은 진지한 음악 뿐 아니라 아득한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라비아 사막의 민요에서 16세기 인도 궁중의 음악까지의 모든 음악을 누구나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대중 음악의 상업적 위력과 함께 자연적인 또는 인위적인 소비 창출을 촉진하고 그에 따른 방대한 생산를 가져오게 하였다.
2. 여러 경향들
20세기의 유럽의 음악에는동시에 여러 경향이 관찰된다. 각 민족의 민요를 사용하는 음악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으며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를 포함하는 많은 음악적 양식이 20세기 초반에 혁신을 계속해 왔다. 바그너로 대표되는 독일적인 어법은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으로 발전되고 베르크(Alban Berg, 1885-1935)와 베버른(Anton Webern. 1883-1945)은 분해된 선율, 불협화적 소음, 급작스러운 변화와 대조 등으로 극단적인 표현주의의 성향을 보였다.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나 메시앙(Olivier Messian, b. 1908)같은 작곡가들은 이런 경향을 건너질러 그와는 무관한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또 다른 작곡가들은 전혀 다른 길을 찾기도 한다. 한편 존 케이지(John Cage, b. 1912)와 사상적인 맥락을 같이하는 작곡가들은 우리가 듣는 음악에서 모든 기대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음악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음의 흐름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으로서의 음의 무시간적으로 흩어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선(禪)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음에 대한 새로운 바라봄은 결국 삶의 근원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1980년 이후의 음악적 사고는 다른 예술 쟝르와 마찬가지로 역시 포스트모던적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17세기 이후 세계를 지배해 온 가장 큰 사고의 틀인 모더니즘의 사상은 우리의 삶을 지식, 예술, 도덕의 세 부분으로 구별하는 세계관의 확립에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설정한 이러한 경계을 의도적으로 일탈하려는 노력이다. 설치 미술이 그 상징적인 예이다. 설치 미술은 고정된 틀 안에 갖혀있는 캔버스내의 그림을 만드는 대신, 전시하고 나면 없어지는 일시적 설치이며 생활 공간과 그림이 담겨져 있는 화폭의 공간 사이의 경계선을 없앤 것이다. 즉 지금가지 그림이 지닌 시간적 보존성과 공간적 제한을 없애는 일이다. 음악의 거의 모든 것을 연주자의 선택에 맡기는 우연성 음악이나 생활 세계의 음향을 녹음하여 편집 재생하는 구체 음악등은 설치 미술과 그 사상적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유럽의 음악이 연대기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유는 전쟁과 정치적 이유로 광범위한 지역의 연관성을 논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가지 움직임인 표현주의, 신고전주의, 12음 기법, 민요에 기초한 음악등은 그러한 한계를 넘어선 공통의 경향이었다. 이들 경향에 대한 첫번째 논의는 역시 전통적인 음악, 즉 민요에 기초한 운동이고 다음이, 프랑스에 서 특히 강조되어 나타나는 반낭만주의적 경향의 신고전주의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유럽 전역에 끼친 스트라빈스키의 영향과 1950년대 이후의 미국에 끼친 영향, 그후 유럽과 미국에 끼친 쇤베르크의 영향이 중요하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20세기 초에 급진적 경향의 시작이며 2차세계 대전 이후 외부의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그후 잠시 베버른의 음악적 경향이 많은 작곡가들의 모델이 되었고 1980년대를 넘어서면 전자음악, 컴퓨터를 이용한 음악등의 전위적 음악의 경향이 새로이 추가된다.
민족적 경향
중부와 동부 유럽의 민족적 음악의 성격은 20세기 전반의 작곡가들에게 중요한 음악적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녹음기술과 신속한 통신 수단 덕분에 각 민족의 전통의 차이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녹음은 전과는 달리 민속 음악을 보다 완전하게 기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전의 연구자들은 오선에 기보함으로서 그 자료를 보존하였으나 이제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디스크나 테이프에 자료로서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작곡가들은 전 같으면 민요의 멜로디가 갖는 불규칙성을 부드럽게 완하시켜 과거의 관습에 맞게 기보한 다음 그것을 작곡의 재료로 사용하였으나 이제는 민요 자체의 불규칙성을 있는 그대로 볼수 있게 되었고 오히려 그 불규칙성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보게 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새로운 음악의 양식적 특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소련의 음악적 경향
소련의 음악은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음악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민족주의적 음악을 발전시키려는 것은 정부의 의도였고 이런 의도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몇몇 지도적 작곡가들은 국제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프로코피에프(Sergey Prokofoev, 1891-1953)의 관현악을 위한 Scythian Suite(1916)과 칸타타인 Alexander Nevsky(1938, 원래는 영화 음악임)와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75)의 Lady Macbeth(1934)는 러시아의 소재로 만든 작품이지만 두 사람을 민족주의 작곡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영국의 경향
산업혁명 이후 영국은 자신의 민족적 어버에 기초한 음악을 만들기 보다는 유럽대률의 음악가들이 방문해서 음악을 연주해주는 쪽을 더 선호했다. 영국의 이러한 관습으로 인해 18세기 초의 헨델 이후 영국 태생의 작곡가를 배출하는 데에 인색했다는 비판을 듣는다. 19세기말 민족주의적 경향은 음악적 전통이 비교적 약했던 국가에서 일어났으나 예외적으로 영국은 민족주의적 음악의 운동에 힘입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0세기 전반의 가장 유명한 영국의 작곡가는 본 윌리암스(Vaughan Wlliams, 1872-1958)일 것이다. 그는 9개의 교향곡을 포함해서 오페라, 노래 관현악과 합창곡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영국 문학, 민요, 찬송가, 퍼셀(Henry Purcel, 1659-95)과 탈리스(Thomas Tallis, 1505-85)등의 옛 영국의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근거를 두어 만든 것이 많다.
본 윌리암스와 친분이 깊었던 홀스트(Gustav Holst, 1874-1934)는 영국의 민요와 옛 음악 뿐 아니라, 힌두교의 신비주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Choral Hymus from the Rig-Veda(1912)가 그 좋은 예다. 그의 곡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관현악 조곡인 The Planet(1916)의 마지막 악장인 Neptune(혜왕성)일 것이다.
양 대전간 시기에 독일은 가장 극열한 민족주의에 힙싸여 있었으나 오랜 기간 동안 음악 발전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성향은 음악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나치는 민족의 순수성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이 정책은 마침내 창조적인 힘을 와해시키기에 이른다. 유태인이건 아니건 가장 우수한 음악가들이 외국으로 피하게 된다.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는 작곡가로서 또한 저술가로서 활동을 했다. 그의 The Craft of Composition은 작곡과 분석의 새로운 방식을 예시한다. 힌데미트는 자신을 실제적인 음악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독주와 합주의 수준으로 다룰 줄 있었으며, 그외의 악기들도 배워 관현악단 단원 수준의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쇤베르크, 바르톡, 스트라빈스키보다 어린 세대로서 그들이 걸었던 로맨티시즘이나 인상주의의 길을 거부하고 1920년대의 혼란스러운 음악로 직접 뛰어 들었다. 그후 25년이 지난 다음, 조성과 화성에 대한 변화된 개념을 뒷받침으로 이미 작곡했던 세개의 중요 작품을 수정해서 내 놓았다.극 작품들은 Das Marienleben(마리아의 생애, 1923)과 표현주의적 비극 오페라인 Cardillac(1926), 희극 오페라 Neues vom Tage(오늘의 뉴스, 1929)이다. 네개의 현악 사중주와 많은 실내악곡들도 이 시기의 곡 들이다.
라틴 아메리카
남미 음악의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작곡가는 브라질의 빌라-로보스(Heitor Villa-Lobos, 1887-1959)와 멕시코의 레뷰엘타스(Silvestre Revueltas, 1898-1940)와 샤베즈(los Ch?ez, 1899-1978)이다. 빌-로보스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브라질 작곡가로서 남미적이고 유머가 넘치는 묘사와 음색, 리듬, 조성의 대비 등, 매우 자유로운 화성으로 여러 악기를 다양하게 사용한다. 그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을 쇼로스(choros) 시리즈로서 이 곡은 브라질의 리듬과 음색을 사용한 성악과 여러 악기를 다양하게 조합하여 만든 일련의 작품들이다. 샤베즈의 중요작품으로 Sinfonia India(1936)와 피아노 협주곡(1940)를 들 수 있다. 그후 중요성이 인정되는 남미의 작곡가로는 아르제틴의 기나스테라(Alberto Ginastera, 1916-1983)를 들수 있다. 그의 오페라 Bomarzo는 1967년 초연 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은 그 명명이 조금 잘못된 감이 없지 않다. 이 운동에 참여한 자곡가들인 클래식 장르나, 양식, 형식프로코피에프의 classical Symphony등으로 회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바로크와 르네상스 시기의 음악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프로코피에프의 Classical Symphony(1918)는 하이든 교향곡을 패로디한 것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neo-classic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Dumbarton Oaks 협주곡(1938)은 비발디의 합주협주곡을 모델로 했다는 점에서 neo-baroque로 볼수 있고 그의 Symphony in C(1939-40)와 Symphony in three Movements(1942-45)는 고전시대의 교향곡을 모델로 한 것이다. 쇤베르그의 Piano Suite, Op.25은 1720년대의 건반악기 조곡의 순서와 그 춤 리듬을 모방한 것이다. 프랑스의 세 명의 작곡가인 오네거, 미요, 풀랑과 스트라빈스키는 과거의 음악을 모델로하여 작품을 구성하는 방식을 제각각 보여준다.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는 그의긴 생애를 통해 20세기 전반의 음악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여향을 미쳤다. 1882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22년 파리에 왔으며, 1914년 스위스로 이주하였다가 1920년 다시 파리로 왔다. 1940년 이후 칼리포니아에서, 그후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뉴욕에 거주한다. 그의 초기의 중요작품은 러시아 발레단의 창설자이고 감독이었던 디아길레프(Sergei Diagihilev, 1872-1929)으로 부터 위촉받은 세개의 발레 음악이다. 러시아 발레단은 1909년 부터 1929년 까지 파리 발레계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스트라빈스키는 파리의 관중을 위해 불새(Fire Bird, 1910), 페트루슈카( Petrushka, 1911),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을 작곡했다.
3. 무조, 음열, 최근의 경향
쇤베르그(Arnold Schoenberg, 1874-1951)에 의해 시작된 12음 기법의 음악은 독일의 로맨티시즘에 그 발판을 두고 있다. 그의 초기 박품인 정화된 밤은(verklaerte Nacht, 1899)는 바그너의 트리스탄의 반음게적 기법에서 자라난 것이다. 한편 쇤베르그의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상드(1903)은 말러와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음악에서 발전한 것이다. Gurrelied(1911)는 바그너, 말러 스트라우스의 영향이 뚜렷이 보인다. 바그너로 부터 음악적 내용, 말러와 스트라우스에게서는 복잡한 관현악법을 이어 받았다.
이후 쇤베르그의 제2기의 음악은 새로운 방향으로 바뀐다. 첫 두 현악사중주(D단조와 F#단조, 1905와 1908), 15개의 악기를 위한 Kammersymphony(1906)와 Five Pieces for Orchestra, Op. 16 등을 거쳐 무조성음악에 이른다. 1905년 부너 1912년 사이에 그는 조성에 기초한 반음계 양식에서 부터 무조성으로 변화해 간다. 무조(atonal)는 말 그대로 <조성이 없음(not tonal)>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무조음악은 그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서적 중심음을 들을 수 없게끔 계획적으로 조성의 성립을 피해가는 음악이다. 무조성(atona)이라는 부정적인 용어가 쇤베르크 자신이 원한 전조성(pantona, 모든 조성을 포함한다는 뜻)이란 말 대신에 쓰이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무조는 음악 용어로 영원히 쓰일 것 같으므로, 불협화음처럼 이것도 상대적인 용어이며 그 정확한 의미는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용해야할 것이다.
특히 독일의 후기 낭만파 음악은 무의식중에 무조성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바그너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반음계선율과 화음의 진행은 결국 아무런 중심 조성도 알아볼 수 없었던 악절로 끝났었다. 그러나 이러한 악절들은 예외적인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짧았으며 늘 한 조성 안에 들어 있었다. 쇤베르크는 구레의 노래와 펠리아스에서 조성의 한계내에서 반음계주의의 극단의 가능 성을 점검했다. 그 이후, 전체를 한 조성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고, 몇몇 음들을 반음계로 바꾼 전음계의 음들로 간주하는 대신 한 옥타아브의 12음 모두를 동등한 자격의 음으로 취급한 것은 자연적인 변화이었다. 또 하나의 단계는―이미 드뷔시의 비기능적화음에 의해 그 징후를 보인―이같은 변화의 필연적 결과였다. 쇤베르크는 이것을 "불협화음의 해방"이라고 불렀고, 해결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수직화음으로서 어떠한 음의 결합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한다. 극단의 반음계주의로 인하여 모호해진 조성으로 터 자유로운 불협화음을 가진 무조성에로의 변화는 쇤베르크에 의해서 점차로 진행되었다. 작품 11의 피아노곡들은 과도기 양식의 작품들이며, 제 2현악 4중주곡의 끝 악장(단 F#의 최종 종지를 제외하고)과 작품19의 피아노곡들은 보다 더 무조에 가까운 것들이다.
쇤베르크에 있어서 전쟁전 시기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달에 홀린광대」(Pierrot Lunaire; 1912)는 독일어로 번역된 다소 퇴폐적인 초현실주의자의 프랑스어 시들에 의한 21곡으로 된 연가곡이다. 무조의 인상을 강하게 하는 달에 홀린 광대의 한 가지 특징은 말하는 목소리(Sprechstimme)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고정된 음고로 노래하는 음대신, 말하는 소리는 단지 음고만을 제시하고 곧 그 음고에서부터도 벗어난다. 이러한 양식화 된 음악적 낭독은 대사와 노래의 양쪽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리듬은 엄격하에 표시되어 있는 반면, 음고는 머리를 x로 표시한 음표로서 기보한다.
표현주의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 베르그(Alban Berg)는 표현주의라고 부르는 운동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인상주의처럼 이 용어도 처음에는 회화에 관련되어 쓰였다. 인상주의가 순간적으로 감각된 외적세계의 사물을 표현하려 했던 반면에, 표현주의는 목적에 가장 적절한 것 같아 보이는 어떠한 방법이든 사용하여 내적 경험을 표현하려 하였다. 표현주의는 그리려고 하는 내적 경험의 종류와 그 그리는 방법에서 낭만주의와 구별된다. 표현주의의 주제는 현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이며, 20세기 심리학에 의해서 묘사되고 있는 바의 인간이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손아귀 속에서 소외되어 있고 도움을 받을 곳이 없으며 내적 갈등, 긴장, 불안, 두려움, 그리고 잠재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본질적으로 불합리한 충동, 그리고 기존 질서와 용인된 형식에 대항하여 성난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표현주의 예술은 감정의 절망적 강도와 어두운 혁명적 방식의 두 양식으로 특징지워진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쇤베르크의 <기다림>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격정적이며, 불협화음, 리듬적인 원자주의, 단편적인 선율, 기묘한 관현악 편성, 주선율이 없는 음악적 특색을 갖고 만들어졌다. <기다림>, <행운의 손>, <달에 홀린 광대> 등은 모두 표현주의적 작품들이다. 이들은 마지막 세부에 이르기까지 아름답게 혹은 현실감이 나게 쓰여지지는 않았지만 쇤베르크가 표현하려 했던 특별히 복합된 생각과 감정을 전달한다. 오페라에서 음악은 물론 주제, 대본, 무대장치, 조명이 전부 유별나다. 그러난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감동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12음기법
한 곡도 출판하지 않고 6년을 보낸 후, 1923년에 쇤베르크는 "단지 서로 연관된 12개의 음으로 작곡하는 기법"을 공식화하였다. 이 12음 (dodecaphonic) 기법의 이론에서 근본적인 사항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작품의 바탕은 작곡가가 결정하는 어떤 질서로 정리된 한 옥타아브의 12개 음으로 구성되는 열(row) 혹은 음열(series)이다. 이 음열의 음들은 어느 옥타브에서나 또 어느 리듬으로나(멜로디처럼) 잇달아 혹은(화음이나 대위법처럼) 동시에 사용된다. 열 역시 전위, 역 또는 전위의 역에서, 그리고, 네 가지 형태가 어떤 위치에서부터도 사용될 수 있다.
실제에 있어서도 모든 종류의 수정, 순화, 복잡화, 절충 등을 하였다. 나쁘게 말하면 이 이론은 기계로 음악을 만들어 내기 위한 방법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기계적으로 적용할 경우 작품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만일 이 기법이 완전히 습득되어 있는 경우 조성 푸가의 작곡 규칙들이 그러한 것처럼, 작곡가의 자의성을 반드시 억제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전 작품에 동일한 음열을 사용하는 것은 조성 양식의 작곡에서 하나의 중심조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통일성을 얻는 수단이다. 이 기법은 리듬의 다양성 성부 짜임새, 다이나믹과 음색 등을 허용하고 동시에 필요로 한다. 어떤 점에서는, 이 기법을 사용한 작품은 기본 음열의 끊임없는 변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쇤베르크가 전적으로 음열을 사용하였던 처음 작품들은 다섯 개의 <피아노곡 작품 23>(1923)이다. 이중에서 단지 마지막 것에만 12음으로 된 완전한 음열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 몇 해에 걸쳐 이 기법은 가끔 신고전적이라고 불리는 몇몇 작품들(세레나데 작품 24, 피아노 모음 곡 작품 25, 관악 5중주곡 작품 26)에서 완성되었고, 12음 기법은 「현악 4중주곡 제3번」(1926)과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Variations for Orchestra; 1928)에서 완전히 발전되어 나타난다. 또한 쇤베르크가 1933년 미국에 간 이후에 만든 대부분의 작품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1936)과 「현악 4중주곡 제4번」(1937)에도 쓰였다.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1934)은 "옛 〔그리고 조성적인〕양식"으로 썼다. 「나폴레온 찬가」(Ode to Napoleon)와「피아노 협주곡」(두 곡 모두 1942년)에서는 전통적인 조성양식의몇가지 요소를 가지고 자신의 체계를 종합하여 갔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현악 3중주곡」(1946)과「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Fantasy for Violin and Piano; 1949)보다는 그 특징이 덜하다.
음열주의
1950년 직전에 시작된 첫 번째 진전의 하나는 "전 음열주의"(total serialism)다. 이는 쇤베르크의 음열의 원칙을 음의 고저 외의 다른 음악의 요소들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쇤베르크가 했던 것처럼 반음계의 12음을 음열화시킬 수 있다면, 길이, 강도, 음색, 구성, 침묵등의 요소들도 음열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이러한 모든 요소들―특히 멜로디, 리듬, 화음을 포함한 것들―이 전통적으로 상호 의존했었음(어떤 인정된 방법으로 결합된)에 반해, 이제는 모든 것들이 간단하게 교체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음고의 열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음고가 아닌 요소의 음열과 결합될 수 있음을 보였다
새음질
새로운 음악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사용하기로 작졍한 새로운 음향이다. 새로운 음향의 초기의 예는 피아노의 "음괴"다. 이는 미국인 헨리 코웰(1897-1965)에 의해 1920년대에 소개되었고, 1940년대 존 케이지(1912년 생)의 "조작을 가한 피아노"(prepared piano)에서 소개되었다. 다른 예로서는 지금까지 개발되지 않은 대단히 많은 전통악기의 사용법이다. 예를 들면, 새로운 배음들, 풀루트 연주에서 혀를 떠는(fluttering) 기교, 관악기들의 다른 특수한 효과, 글리산도, 현악기나 음성으로 된 밀접한 반음계의 음괴들 혹은 소리의 띠(band) 등은 그리이스의 작곡가 크세나키스(Yannis Xenakis, 1922- ), 폴란드인 펜데르키(Krzysztof Penderecki, 1933- )와 이탈리아인 노노(Luigi Nono, 1924- )가 빈번히 사용했다. 성악 작품에서 말하여지고 속삭여지는 소리들(낱말, 음절, 글자, 음소화 될 수 없는 목소리)이다. 기악 연주에도 가끔 사용되는 이 소리는 인도의 드루파드의 서주인 아랍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비브라폰과 Ondes Martenot같은 새로운 악기들이 관현악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시대 전체를 통해 특별히 주목받는 그 가치가 막강하게 확대된(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가져왔거나 비슷하게 만든 악기들을 포함한) 타악기 그룹이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앙상블에서 타악기 소리가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http://usoc.snu.ac.kr/lecture/ch-13/13-99m.htm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광대'(Schoenberg : Pierrot Lunaire )
https://www.youtube.com/watch?v=KsIATAaR-X0
https://www.youtube.com/watch?v=veUJxETj7-c
아래, 동영상으로 '2011- Vienna, New Year's concert' 구경하세요.
첫댓글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문화생활(특히 음악)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즐긴다는 그들이 부럽습니다.
문화생활이라는 것은 꼭 돈으로만 살 수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쾌한 희망의 신년음악 잘 듣고 갑니다. _()_
멋진 전통의 나라 맞죠? 그래서 유럽에서도 가장 콧대가 높다고 해요.ㅎ
돈 하나 안들이고 이렇게 편리하게 중계 동영상을 안방에 앉아서 보며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우리도 멋져여~~ 좋은 세상이지요. ^&^
70년 전통의 비에나 필하모니 '신년음악회'를 보니 역시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귀에 익숙한 곡들이라 친근감도 나고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명순선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음악은 물론,, 음악당 건물 부터 지휘자, 청중.. 모두 우아하고 아름답네요, ~~
희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신년음악회 감동입니다. 대문에 올려졌으면 합니다.매년 그곳에 가는 분이 근처에 계시는데 그분께 연락해드려야겠어요. 그분도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신 피아니스트이신데 혹시 그분이 그곳에 있는지 관중속을 훑어 봤습니다. 좋은 곳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Classic 음악의 고향 Vienna에서 신년음악회를 비엔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에의한 연주라는것이 너무나 뜻이 깊군요! 김명순님!
스트라우스 일가의 아름다운 곡들을 젊은 Franz Welser- Most의 세련된 지휘에 맞추어, 우아하고 품위있게 발레하는 모습도 함께, 2011년 신년음악회를 푸짐히 보았습니다. 무척 아름답네요. 선배님 덕분에 음악귀가 조금씩 열리는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곡과 춤에 매료되어 황홀합니다. 새해의 큰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동문님!
역시 대문의 힘! ㅎㅎㅎ
아침에 카페를 열어보고 여기 많은 답글에 Pleasant Surprise 야요 ^&^
홍지복님, 이전구 선배님, 김정희님, 김수영선배님,, 덕담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