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부가 동호회에서 베트남, 캄보디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우리 부부도 함께 가자고 한다. '수양회'라고 1960년대 대구 지역 남녀 고등학교 학생 대표들이 모여 도산 안창호 선생의 뜻을 받들고자 만든 모임인데, 이번에 회원인 베트남 대사의 초청으로 선후배들 만남의 행사를 대사관저에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의 잔치에 끼어 자칫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될까 봐 망설여졌지만,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분들과의 동행이라니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우리를 인솔해 가는 여행사 대표는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손에 작은 태극기를 들고 나타나 첫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누님이 '수양회'의 창립 회원으로 초창기 모임을 그 집의 큰방에서 했다던데,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런 분위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회원이 아니면서 가장 회원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30여 년간 500회에 가까운 헌혈을 하여 적십자 명예 홍보대사가 된 그는 링컨의 리더십을 강연하는 유명 강사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 그의 누님과 여동생이 함께했는데, 누님이 나이 탓인지 건망증이 심한데다 행동이 산만해 몇 차례나 민폐를 끼치며 애를 먹였다. 그런데도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고 괜찮다고 누님을 두둔하고 나서는 그 사람이야말로 일행 중 문자 그대로 제일 수양이 된 큰사람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좋은 사람의 함정'에 빠졌거나 '명예의 덫'에 걸린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피 한 방울에도 겁이 나서 벌벌 떠는 나로서는 기록을 경신해 가는 그의 헌혈 행위가 그저 놀라울 뿐이며, 칭찬할만한 존경스러운 일이라기보다 기행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지만 내게는 위인전 속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링컨만큼이나 현실감이 없고 낯설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만난 가이드도 만만치 않은 독특한 사람이었다. SBS 공채 개그맨 출신이라는 전력도 특이하지만, 가이드로서는 드물게 영국에 유학한 석사이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으며, 요청이 있을 때 특별한 손님만 안내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베트남 역사에 해박한 그의 현란한 말솜씨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겸손함을 겸비하면 금상첨화이겠는데, 때로 자기 자랑이 지나쳐 듣기 거북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대사관저에 도착하니 명단에 있는 사람들만 만찬에 참석하게 되어 있어 가이드 자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대사를 만난 '수양회' 회원들은 옛날 추억을 더듬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정신이 팔려 식사에 초대받지 못한 그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장소가 협소한 탓에 비회원은 대사 부인과 따로 식사하게 되었는데, 나도 왠지 홀대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좀 언짢았다. 예정보다 시간이 늦어지자 총무가 가이드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가 약속과 틀리지 않느냐고 볼멘소리했는지 통화 중에 언성이 높아졌다. 보다 못해 내가 살짝 귀띔하자 그제야 그가 그때까지 식사도 못 한 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모두 미안해서 그에게 돌아가며 사과했다. 그는 말로는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하노이에서 할롱 베이까지 3시간을 가는 동안 자존심이 상해 뿌루퉁한 얼굴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보기 민망해 꼭 벌서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그는 베트남의 국부이며 죽을 때까지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만을 위해 살았던 호찌민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는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왕 같은 고객에게는 신하로서, 개 같은 고객에게는 조련사로서 대할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을 때 멋모르고 깔깔대었는데, 이러다 졸지에 우리가 개가 되는 게 아닌가 해서 은근히 마음이 켕겼다. 그래서 그가 이끄는 쇼핑센터마다 왕의 면모를 보이려고 나도 본의 아니게 과다출혈을 했다. 밥 한 끼 굶고 그 정도 챙겼으면 괜찮은 비즈니스였다고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고매한 인격을 수양해 온 분들이 어쩌다 그런 실수를 해서 젊은 가이드의 눈치를 보게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웃음이 난다.
캄보디아 공항에서 우리를 마중 나온 가이드는 캐주얼한 복장에 분위기가 젊어 보여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는데, 사실은 오십 대 중반을 넘었다고 하여 깜짝 놀랐다. 그 나이에 외국에서 혼자 가이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사연 많은 삶을 살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자기 말처럼 눈이 쪽 째지고 비썩 마른 사람이 약간 혀 짧은소리로 버릇없이 말을 툭툭 내뱉어 첫인상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하게 그에게 정이 가며 믿음이 갔다. 연륜에서 오는 노련미이겠거니 했는데, 첫날 호텔방을 배정한 후 방마다 찾아다니며 시설물의 사용법을 일러주던 세심한 배려를 보면서 그의 진정성이 사람을 끄는 매력임을 알았다. 말끝마다 부모처럼 특별히 모시겠다던 베트남 가이드의 깍듯함이 왠지 부담스러웠는데, 돈 쓰면서 무지 고생 좀 해보라며 캄보디아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고 격의 없는 농담을 던지는 그 늙은 가이드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그가 원래 캄보디아에 온 것은 사업에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앙코르와트나 보고 자살을 할까 해서였다는 것이다. 그의 띠동갑인 아내는 21살의 어린 나이에 그에게 반해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고 하는데, 그런 아내에게 남편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무리한 욕심을 내었던 게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가난에 찌들어 살면서도 전혀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한 캄보디아인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고, 6개월 후에는 자신이 가이드가 되어 있더라고 고백한다. 그 얘기를 들고 있자니 같은 처지에 있던 오빠를 살리려고 애태우던 지난날이 떠올라 그가 더욱 안쓰러웠다. 처음 보는 그에게 친근감을 느낀 것은 아마 그에게서 오빠를 보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런 내 마음을 느꼈던지 우리 부부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이틀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공항에서 그와의 이별이 가슴 아팠던 까닭이다. 가족에게 돌아가기에 너무 늦은 나이며, 마흔이 넘었을 그의 아내가 더는 그를 그리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마음을 슬프게 했다. 그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제 한국의 날씨에 적응할 자신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있는 건 아닐까.
삶의 방식에 정석이 있으랴. 우리는 함께 여행길에 나선 동시대의 사람이지만, 저마다 자기의 길을 가고 있는 것뿐이며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자기가 머문 자리가 행복하고 불행한 건 자신의 선택에 달린 것이리라. 그의 얼굴이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캄보디아인들처럼 평화로워 보여 돌아서는 내 마음에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첫댓글 삶의 방식에 정석이 있으랴. ----- 빙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