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없는 수박
수박을 가르는 일은 여름의 작은 의식이다. 전시에 방탄조끼를 옆에 두고 지내듯 복 중에는 더위와 싸우느라 시원한 수박을 집안에 쟁여두고 지낸다. 올해는 이른 봄 육묘장에서 씨 없는 수박을 댓 포기 사다 심었다. 수박 싹을 박에 접붙여서인지 줄기가 쭉 쭉 뻗어나간다. 주먹만 하던 열매가 하지가 지나자, 몸집이 부쩍 커졌다. 초복 날 달항아리만 한 수박을 따왔다. 예전엔 칼끝이 푸른 껍질을 가르고 붉은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 사람들은 먼저 까만 씨를 찾았다. 그러나 요즘은 씨를 찾을 필요가 없다. 씨 없는 수박은 먹는 즐거움만 남겨두고 번거로움은 지워 버려서다. 편리함은 달콤함과 함께 여름 식탁의 미덕이 되었다.
수박 한 조각을 베어 입에 무니 문득 씨 없는 수박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예전 같으면 씨를 뱉느라 잠시 입을 멈췄을 텐데, 이제는 그런 수고조차 없다. 편리함을 음미하던 순간, 이상하게도 사람 사는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요즘은 주변에서 혼자 사는 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혼기가 지나도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 젊은이들이 있고, 갑년을 넘긴 지인 가운데도 끝내 혼자의 삶을 선택한 이도 있다. 누군가는 자유를, 누군가는 자신 삶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불현듯 우리는 삶에서도 '씨앗'을 조금씩 지워 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오늘날 혼인은 더 이상 출산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사랑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부부도 있고, 아이를 원하지만 끝내 품지 못하는 부부도 있다. 처음부터 아이를 낳지 않기로 선택하는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s) 부부도 있으며, 결혼보다 홀로의 삶을 더 소중히 여기는 비혼자도 적지 않다. 시대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허락했고, 그 선택은 누구도 쉽게 재단할 수 없는 개인의 몫이 되었다.
그렇다고 어느 삶이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선택의 모습은 달라도 저마다의 삶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씨 없는 수박도 수박이다. 여름의 갈증을 식혀주는 맛은 씨 있는 수박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씨 있는 수박의 존재가 고루하거나 낡은 건 아니다. 작은 씨 하나하나에 다음 계절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씨앗은 눈에 거슬리는 이물질이 아니다. 달콤한 과육 속에 숨은 미래다. 지금은 뱉어 내야 할 불편처럼 보일지라도, 그 작은 검은 점 하나가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한다.
생명은 늘 불편을 품은 채 이어져 왔다.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아도 그런 것 같다. 서로의 몸이 고단하여도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는 삶이 있고, 둘만의 행복으로 생을 채우는 삶도 있으며, 혼인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자신의 길을 걷는 삶도 있다. 어느 삶도 함부로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 다만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일수록 더 안온할 듯하다.
그러함에도 마음 한편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물음표 하나가 남아 있다. 씨 없는 수박은 스스로 씨를 남기지 못한다. 그 달콤함은 씨를 품은 다른 생명의 도움 위에서만 이어진다. 자연은 편리함만으로 순환하지 않는다. 이어짐이 있어야 계절도, 생명도, 공동체도…. 계속되지 않을지.
우리는 편리함을 향해 쉼 없이 달려왔다. 불편을 하나씩 밀어내고 편리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삶에서 사라진 것이 단지 불편함만이었는지 가끔 돌아보게 된다. 아이 울음소리가 줄어든 동네 골목, 어린이가 사라져서 폐교가 되어버린 초라한 학교, 노을만 길게 드리운 마을을 지날 때면, 보이지 않는 씨앗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큰 미래였는지 뒤늦게 깨닫는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 모여 사회의 모습이 된다면, 우리는 공동체의 내일을 어떻게 이어 갈 것인지도 함께 궁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와서다. 불현듯 식탁 위의 씨 없는 수박이 말을 건넨다. 달콤함은 지금의 행복을 채워 주지만, 씨앗은 내일의 시간을 품는다며 슬며시 귀띔이다.
씨 없는 수박을 베어 물며, 달콤함과 이어짐은 때로 다른 가치일 수 있다는 생각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첫댓글 유병덕 수필 <씨 없는 수박> 잘 읽었습니다.
수필 창작을 통해 삶을 구현하시는 모습이 참 아름 답습니다.
김영훈 카페에 자주 와 주셔서 감사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