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배우 나문희를 말하다.
올해 '제 2의 전성기' 를 누리며 전국민을 울리고 웃기는 배우 나문희. 이 배우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 먹으면서 가장 곤란했던 것은 자료의 부족이었다. 변변한 인터뷰 자료도, 홈페이지도 없는 이 배우의 인생을 어떻게 써야할까......결국 이 글은 나문희의 배우 인생을 완벽하게 말하지도, 그려내지도 못한 채 내가 아는 것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로서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나름대로 진지하게 쓴 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읽혀졌으면 한다는 것, 그리고 나문희라는 배우를 조금이나마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슴 한 켠 기억되는 글로 남아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성우 나문희' 에서 '배우 나문희' 로.
나문희가 1961년 MBC 라디오 공채 성우로 연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올해로 연기경력 47년에 이르는 나문희의 연기 경력에서 라디오 성우 생활은 10년에 다다를 정도로 꽤 오랜기간을 차지하고 있다. 60년부터 70년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TV 드라마 붐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문희는 라디오 성우로 자리를 굳히는데 몰두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녀가 본격적으로 TV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70년대에 들어서부터다. 72년 <여로> 같은 TV 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가 한풀 꺾이고 'TV 드라마시대' 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배우 김무생 선생도 라디오 성우 출신인 점을 감안할 때 나문희의 행보도 김무생과 거의 비슷하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나문희의 TV 정착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성우 출신답게 정확한 발음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72년 김수현의 출세작 <새엄마> 에 출연하면서 김수현 드라마의 단골 배우로 자리를 굳혔고 종래는 TV 드라마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도 김수현이 선호하는 배우상이 "풍부한 표정연기와 정확한 발음을 가진 배우" 임을 감안할 때, 나문희가 김수현 드라마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 나문희씨를 보면 두장면이 항상 떠오릅니다. 방송 담당 기자를 처음 할때 방송사를 들러 취재하려고 화장실 앞을 지나는데 대사 연습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나문희씨가 화장실 가는 순간에도 대본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문희씨가 있어 드라마가 풍성해지고 영화가 완성도가 높아지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문화 평론가 배국남)
<바람은 불어도> 와 나문희.
TV 드라마로 진출한 이래 나문희는 여러 작품에서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하며 많은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줬다. 7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새엄마><여고동창생><엄마, 아빠 좋아><아버지><사랑과 진실><사랑하니까><부모님전 상서> 등 김수현 드라마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활약한 나문희는 95년 문영남의 <바람은 불어도> 를 통해서 배우 인생의 정점을 맞이한다.
최수종, 유호정 등 당대 최고의 톱스타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바람은 불어도> 는 문영남의 대표적인 흥행작이자 KBS 일일 드라마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수작 중의 수작. 별 다른 자극적인 소재 없이 세밀한 터치로 훈훈한 감동을 전해줬던 이 작품은 작가와 연출, 배우의 삼박자가 시원하게 맞아 떨어진 썩 괜찮은 작품이었다.
그 중에서도 할머니 역할을 능청스럽게 연기한 나문희의 연기는 그야말로 전국적인 화젯거리였다. '<바람은 불어도> 의 진정한 주인공' 이라는 우스갯 소리를 들을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던 나문희는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도드라지는 연기력으로 극의 전반을 휘어잡았고 결국 95년 KBS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그 명성을 만방에 떨쳐보였다.
지금도 꾸부정한 허리에 지팡이를 집고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 나문희만 생각하면서 웃음이 나올 정도니 이만하면 말 다한 것 아닐까. 한진희, 윤미라와 찰떡 궁합을 이루어 극에 넘칠듯한 생명력과 웃음을 불어 넣어주었던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조연도 연기대상을 수상할 수 있다." 는 희망을 갖게 해 준 기록적인 결과물이었다.
"나문희 선생님은 어떠한 역할을 갖다 줘도 100% 아니, 200% 표현해 낼 수 있는 배우다. 나는 그런 나문희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한 평생 한 분야에서 그 정도의 '신기' 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나문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었다." (드라마 작가 문영남)
노희경을 만나다.
95년 <바람은 불어도> 로 연기인생의 정점을 맞았던 그 때, 나문희는 또 다른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바로 작가 노희경과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95년 <세라와 수지> 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데뷔한 노희경을 1년 후인 96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에서 대면했던 것이다. 나문희에게도 상당한 '기회' 였겠지만 노희경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광영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파 배우와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가 만들어 낸 이 드라마는 그 자체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 이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엄마라는 쓰라림과 찌릿함을 전해주는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은 나문희의 열연으로 오롯이 빛을 발하며 제 값을 다한 작품 중 하나였다. 아마 이 역할을 나문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연기했다면 이 정도 감동을 전해주지는 못했으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 후, 나문희는 노희경의 작품에 자주 이름을 내걸며 인연을 지속한다. 97년 <내가 사는 이유>, 99년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2006년 <굿바이 솔로>에 출연해 열연했을 뿐 아니라 표민수 pd 를 노희경에게 소개함으로써 여러 좋은 작품을 탄생시키는데 상당한 공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는 말처럼 '이 시대의 천재' 나문희와 노희경은 그렇게 서로를 알아봤다.
"이 드라마에서 남편과 자식들은 아내와 어머니를 보내게 되지만 그녀가 평생 보여주며 살았던 모습은 그들의 남은 인생에 깊은 전환점으로 남게 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머니란 존재는 묵묵히 그들을 걱정해 주고 보살펴 줄 것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들에게 또 하나 인생의 깨달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었던 거죠. 계몽적인 이야기겠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꼭 있게될 그 '이별'을 위해서라도 후회가 없도록 준비해야 되지 않을까요? 지금부터라도 말이죠. 생각해 보면 지금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할 때이기도 하네요."
2005년, 나문희의 재발견.
이렇듯 47년동안 한결같이 연기해 오고 있는 나문희에게 2005년은 상당히 뜻 깊은 해였다. 우선 영화 <주먹이 운다><너는 내 운명> 을 통해 충무로에서 그 입지를 확실히 굳힌데다가 드라마 <부모님전 상서><내 이름은 김삼순><장밋빛 인생> 이 모두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60 이 넘은 중견배우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젊은 배우들 못지 않게 활발하게 연기했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2005년은 배우 나문희를 재발견한 해였다. 그녀는 터질듯한 폭발력으로, 가공할만한 파괴력으로 극 전반을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줬으며 각기 다른 작품에서 각기 다른 매력을 유려하게 펼쳐내는데 성공했다. 이는 경험에서 나오는 세월의 겹이 아니면 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더욱 그녀의 존재가 각별해진다.
<너는 내 운명> 에서 아들로 출연했던 배우 황정민은 나문희에게 "나이 들어서도 연기하고 싶게 해 준 나문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는 말을 전했다. 이는 또한 많은 여배우들에게 "나이 들어서도 연기할 수 있다" 는 희망을 심어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이것만으로도 '나문희' 의 연기가 지니고 있는 그 위대하고 고결한 가치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위대한 '연기' 가 2006년 <굿바이 솔로><열혈남아><소문난 칠공주>, 2007년 <거침없이 하이킥> 등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그 연기를 보는 우리는 축복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연기론의 대가였던 스타니슬라브스키는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어떤 배우들은 물고기가 물을 사랑하듯 무대와 예술을 사랑한다. 그들은 예술의 분위기 속에서 소생한다. 또 어떤 배우들은 예술이 아니라 배우의 경력과 성공을 사랑한다. 그들은 무대 뒤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난다. 첫 번째 배우들은 아름답지만 두 번째 배우들은 혐오스럽다.’
혐오스러운 연기자와 가수가 범람하는 요즘 연기를 사랑하는 나문희씨가 오랫동안 시청자와 관객의 곁을 지켜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후배들이 나이들어도 배우를 하고 싶어하는 희망을 불어 넣어주십시요. 황정민에게처럼요." (문화평론가 배국남)
세상을 울리고 웃기는 배우.
뛰어난 연기력으로 한 평생 대중을 울리고 웃겼던 나문희는 존재 자체로 작품의 무게를 달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배우다. 올해 67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넘치는 감수성으로 카랑카랑한 노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는 그녀가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변함없는 위치에서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덧 연기 생활을 시작한 지 40년이나 됐지만 요즘도 대본을 받으면 50번 이상 읽어요. 충분히 연습하지 못했을 때는 방송을 보며 아쉬움이 많이 남거든요.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연기에도 왕도가 없답니다." (배우 나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