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저희 집 써버가 갑자기 다운되서 많이 늦었습니다.;;;;
언론 19992757 염창선
제 1장 놀이도구로서의 미디어
미디어가 놀이도구로써 발전하여 왔다는 저자의 주장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저자는 놀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놀이란 ‘당연하다고 간주되고 있던 미디어와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깨뜨리며, 변화를 주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사건이나 시도를 말한다.’
미디어의 발전이 ‘인류의 오랜 투쟁과 사회, 문화▪과학적 연구의 소산’이 아닌 놀이를 통해 이루어 졌다니 이 무슨 회괴한 소리인가. 저자는 계속한다. 놀이란 단순한 생활 문화의 부분적 영역이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창조적 발전을 가져오는 동인이다.
비디오 게임의 등장이 일렉트로닉 기술의 발전을 통한 것이 아닌, 해커와 마이아들의 유희와 도전으로 이루어 낸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미디어의 기술 결정론’에 사로 잡혀 있던 숱한 독자들의 뒤통수를 통쾌히 후려치기에 충분하다.
미즈코시 신은 20세기 초의 무선이 라디오로 전화해 가는 과정을 통한 인간상의 변화를 꼬집고 있다. 무선에서 라디오로의 기술 전환 과정에서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대상이 점점 바뀌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결국에는 라디오 미디어라는 새로운 형태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탄생 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양방향적인 무선 미디어의 놀이 기능이 일방적 방송 미디어의 오락성으로 말미암아 급속히 쇠퇴해 갔다는 것은 일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디지털 놀이 도구의 이화 작용과 소비 사회에서의 상품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계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일생 생활 속에 파고들어 기존 질서를 뒤 흔들고,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경험과 의문을 품게 된다. 또, 미디어는 새로움과 오래됨, 타인과의 동질성과 차이성을 만들어내는 기호 매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에는 필자의 경우를 들어 저자인 미스코시 신의 주장을 뒷받침 해 본다. OS에서 모든 사용자 환경을 통제하며 마우스 하나의 클릭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현재의 PC 환경과는 달리 과거 ‘16bit 286’ 시대에는 컴퓨터 활용 능력 자체가 일종의 기술이었다. 그 시절에는 PC 상에서 게임 하나를 실행시키기 위해서도 숱한 도전과 연구가 기다리고 있었고 사용자는 컴퓨터 환경을 각각의 게임에 맞게 최적화 시켜야만 했다. 마치 에테르와 무선 소년의 이야기에서와 같이 말이다.
케텔과 나우누리 같은 PC 통신은 전혀 새로운 놀이 문화의 공간이 되었다. 인터넷은 또 어떠한가.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와 같은 온라인 게임이 인터넷 망의 보급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최근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싸이월드와 같은 블로그 들도 일종의 놀이 도구 들이다.
놀이 도구로서의 미디어와 인간의 미디어 리터러시는 커뮤니케이션의 다양성을 실현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 면에서 놀이 문화가 미디어의 발전을 이루어 냈다는 저자의 주장이 점점 설득력을 얻어 간다. 바로 이것은 미디어의 성격을 기술내재적인 것이 아닌 인간 관계성을 통해 발견해 나간 저자의 연구 성과일 것이다.
제 3장 새로운 미디어 표현자들과 저널리즘
필자는 3장에서 새로운 저널리즘의 등장과 이로 인한 파급 효과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기존의 기업화된 매스미디어가 지배 하던 시대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단순한 수신자에 지나지 않았다.
비디오 저널리즘과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뉴미디어 저널리즘의 등장은 기성 매스미디어의 통념을 깨뜨린다. 이러한 현상은 어찌 보면 다 채널화와, 디지털 정보화의 진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기성 매스 미디어만으로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드넓은 표현의 장이며 참여와 쌍방향이라는 새로운 저널리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먼 훗날의 상상 속 풍경이 아닌 현실의 일이 되었다.
VJ물과 같은 프로그램들은 1인 저널리즘의 전형이다. 인터넷 상에서는 ‘댓글’이라는 형식으로 활발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오마이 뉴스 등과 같은 인터넷 매체들의 경우 ‘시민 기자’가 많은 양의 기사를 담당해 내고 있다. 필자의 경우에도 (비록 학부 과정의 일환에서 이루어지긴 했지만) 학생 각자가 서로의 뉴스 아이템을 만들어 제작하는 ‘한림 뉴스’라는 프로젝트에서 이미 대안 저널리즘으로써의 가능성과 자신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 앞으로의 블로그는 정지 화상에서 동영상 서비스로 점차 전환되어 사용자 개개인 모두가 자신만의 미디어를 갖게 될 것이다.
저널리즘은 더 이상 거대 언론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미디어 리터러시로 무장하여 자신의 사상과 의견을 표현하거나나 자기실현을 꾀한다면 모두가 저널리스트가 된다. 저널리즘은 지금 보다 훨씬 다양한 양식으로 존재하여야 하며, 각 계층이 거미줄처럼 상관관계를 맺으며 얽혀가는 것이 국가나 자본의 논리로부터 상대적으로 자립한 공공권을 형성하기 쉽다’는 필자의 논지로 볼 때 이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뉴미디어 저널리즘의 미래가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직도 곳곳에는 구 미디어의 잔재가 남아 있어, 새로운 온라인 저널리스트가 발붙일 만한 곳을 쉽게 찾기 힘들다. 또한 강력한 사회비판 기능을 지닌 저널리즘 본연의 역할을 얼마나 수행해 낼 수 있는가의 여부와 뉴스 정보원의 신뢰성과 미디어의 공공성 확보 문제 등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뉴미디어의 미래를 가장 어둡게 하는 것은 ‘온라인 저널리즘이 거대 미디어 자본의 콘텐트 비즈니스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가설이다. 이렇게 될 경우 저널리즘의 계몽적 문화와 정치적 공동체 유지 기능이 뿌리째 흔들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와 함께 뉴 저널리즘은 숱한 도전 과제도 함께 지니고 있다. 새로운 영상 표현 양식이 매스 미디어로서의 TV 제작 논리에서 아예 배제 될 수 있다는 점과 경제적 합리성만을 추구한 나머지 저널리즘 자체가 싸구려 뉴스 소재화해 버릴 수 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해서는 않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