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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복회 강원 영동북부연합지회 원문보기 글쓴이: 근중
서기 1911년 신해(辛亥)
1월 1일 안악사건(安岳事件), 105인사건(105人事件), 신민회사건(新民會事件), 조작
4월 17일 토지수용령(土地收用令) 공포 시행.
6월 3일 사찰령(寺刹令) 공포.
12월 19일 이상설(李相卨)등 블라디보스록 신한촌(新韓村)에서 권업회(勸業會) 조직.
※ 권업회(勸業會) : 시베리아에서 개발과 계몽운동 단체로 이종덕(李鐘德)이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받아 볼 라디보스록의 신한촌(新韓村)에서 조직하였으며 연추(烟秋), 쌍성(雙城), 소성(蘇城),
영안(永安), 평도(平 刀), 비하(比河), 합발포(哈發浦)등에 지부를 두고 개발 사업을 장려하는
한편 해조신문(海朝新聞)을 발간 하여 계몽운동에 힘썼다.
이 해 의병활동 : 충돌 41회 272명, 사상 36명, 일인사상 16명.
서기 1912년 임자(壬子)
3월 18일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 조선부동산등기령(朝鮮不動産登記
令),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 조선감옥령(朝鮮監獄令), 공포시행.
5월 31일 총독부, 전관이(全官吏)에 무관복장착용(武官服裝着用) 지시.
8월 손정도(孫貞道), 조성환(曺成煥), 계 태랑(桂 太郞) 암살혐의로 대연(大連)에서 피체.
10월 28일 안재홍(安在鴻)등, 동경(東京)에서 「유학생학우회(留學生學友會)」 창립.
11월 8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 설립〔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의 지 방 총회 대표자 참가〕.
※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 민족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재미교포의 자치단체로 1910년
이승만(李承 晩), 안창호(安昌浩) 등의 노력으로 미국 센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되었다. 각지에
지방총회, 지방회를 설치 예속 부서로서 경찰도 두었다. 1919년에는 안창호가 회장, 다음해에는
윤병구(尹炳求)가 회장이 되어 회원 4천명이며 의무적으로 의연금을 내고 그 돈으로 운영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로 매년 2~3천 달러씩을 보 내었으며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2월 25일 비
상토의를 위한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독립운동 사무를 전임하기 위한 임시위원회를 설치하였는
데 위원장 이승만(李承晩), 부위원장 정한경(鄭翰景), 등은 윌슨(Wilson)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여 세계 각국의 한국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이 노력으로 동년 9월 미국 상원에서
한국독립 문제를 제출하게 되었고 전 재미교포가 애국성금 30만 달러를 모아 상해임시정부수
립 자금으로 제공하였다.
11월 서간도(西間島)의 「경학사(耕學社)」 「부민단(扶民團)」 조직.
※ 부민단(扶民團) : 항일운동 단체로 경학사(耕學社)가 해산된 후 만주 요령성 류하현(滿洲 遼寧省
柳河縣)에서 이상용(李相龍), 허 혁(許 赫) 등이 조직하여 초대 단장은 허 혁(許 赫), 2대 단장은
이상용(李相龍) 이었으며 중앙(中央), 지방(地方), 구(區), 패(牌),의 4단계로 조직하여 교포의
자치와 교육에 힘썼으며 1919년에 이르기까지 사업에 성공하여 만주 각지에 이주한 동포 수십
만을 망라 포섭하였고 양성한 학생 수가 800여명에 달했으며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 본영으로
1919년 5월 군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됨을 계기로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고
해체되었다.
이 해 임병찬(林炳瓚),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조직 〔1914 봄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편제 완비〕.
서기 1913년 계축(癸丑)
4월 2일 전 평리원(前 平理院) 수반판사 김재순(首班判事 金在珣), 독립운동 계획 위해 도일〔독립
의군부 (獨立義軍府) 사건〕.
5월 13일 안창호(安昌浩) 등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 조직.
※ 흥사단(興士團) : 독립운동과 민족혁명의 수양단체로 미국에서 신민회(新民會)의 후신으로 안
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하여 로스엔젤레스에 본부를 두고 이사장에 민찬호(閔瓚鎬), 의장에 한
승곤(韓承坤)이 되었으며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자 안창호(安昌浩)는 내무총장으로 있으
면서 상해에서 흥사단운동을 계속하여 극동임시위원부를 설치하였는데 위원으로 손정도(孫貞
道), 차이석(車利錫), 주요한(朱耀翰), 이규서(李圭瑞), 이광수(李光洙) 등이 엇고 로스엔젤레스
에서 「흥사단보(興士團報)」를 발행하여 단(團) 내외의 소식과 일반교포의 계몽에 힘썼다.
11월 8일 경신학교학생(儆新學校學生), 학감 배척 동맹휴학(學監 排斥 同盟休學).
이 해 채기중(蔡基中) 등 13명 비밀결사(秘密結社)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조직〔뒤에 박상진
(朴尙 鎭) 등 일파(一派)와 합류, 광복회(光復會)로 개칭, 1916년에 광복단(光復團)으로 발전〕.
※ 광복단(光復團) : 독립군단체로 채기중(蔡祺中), 유창순(庾昌淳), 류장열(柳璋烈), 한 훈(韓 焄),
강병수(姜炳洙), 김병연(金炳然), 정만교(鄭萬敎), 김상옥(金相玉) 등이 경상북도 풍기(慶尙北道
豊基)에서 비밀결사 (秘密結社)인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힘쓰던 중
대구(大邱)의 박상진(朴尙鎭), 양제안(梁濟安), 우재용(禹在龍) 등과 합하여 광복회(光復會)라
개칭하였으며 1916년에 노백인(盧伯麟), 김좌진(金佐鎭), 신현대(申鉉大), 윤홍중(尹洪重),
신두현(申斗鉉) 등이 참가하여 광복단(光復團)이라 하였고 단원이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선언문을 발표하는 한편 국내 외로 크게 활동을 전개하고 3·1독립운동 후에는 김상옥
(金相玉), 한 훈(韓 焄), 김동순(金東淳) 등 20여명의 암살단원을 국내에 파견하여 총독(總督)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서기 1914년 갑인(甲寅)
4월 2일 동경유학생학우회(東京留學生學友會) 「학지광(學之光)」 창간.
※ 학지광(學之光) : 현상윤(玄相允)이 발행한 잡지로 국어 보급 및 언문일치(言文一致)운동에 이바
지하였다.
6월 10일 박용만(朴容萬), 하와이에서 국민군단(國民軍團) 조직.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第1次 世界大戰) 발발.
서기 1915년 을유(乙酉)
1월 15일 윤상태(尹相泰), 서상일(徐相日) 등, 비밀결사(秘密結社)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烣
復團)」조직.
1월 이용우(李用雨) 등 비밀결사(秘密結社)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 조직.
3월 신규식(申圭植), 이상설(李相卨) 등, 상해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조직.
11월 10일 동경유학생 이광수(李光洙), 신익희(申翼熙), 장덕수(張德秀) 등 「조선학회(朝鮮學
會)」 설립.
이 해 방주익(方周翼) 등 비밀결사(秘密結社) 「자립단(自立團)」 조직.
서기 1916년 병진(丙辰)
5월 23일 의병장 임병찬(義兵長 任炳瓚) 거문도(巨文島) 유배지에서 자결.
이 해 일본육군, 조선상주 2개 사단 편성(日本陸軍, 朝鮮常駐 2個師團 編成)〔라남(羅南)에 제19사,
용산(龍山)에 제20사〕.
서기 1917년 정사(丁巳)
1월 23일 이기동(李起東) 등 동경노동동지회(東京勞動同志會) 조직.
3월 5일 경성고보 교원양성소내 비밀결사(京城高普 敎員養成所內 秘密結社) 「조선산직장려계)
(朝鮮産織獎 勵契)」 발각.
3월 23일 장일환(張日煥) 등 평양(平壤)에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조직.
8월 신규식(申圭植) 등 상해(上海)에서 「조선사회당(朝鮮社會黨)」 결성〔스톡홀름 만국사회당
대회(萬國 社會黨大會)에 독립요구서(獨立要求書) 제출〕.
9월 박용만(朴容萬), 뉴우요크 세계약소민족회의(世界弱少民族會議)에 참석.
10월 광복단(光復團) 사건 발생.
12월 「전로 한민족회 중앙총회(全露 韓民族會 中央總會)」 창립.
서기 1918년 무오(戊午)
6월 26일 이동휘(李東輝) 등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조직, 뒤에 고려공산
당(高麗共産黨)으로 개칭〔상해파(上海派)〕.
8월 22일 미주(美洲)의 각종 부인단체(婦人團體)「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으로 통합.
※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 미주에서 조직된 한국여성교포의 애국운동단체로 후진성을
면하지 못한 한국여성을 일깨워 조국광복과 생활개선을 위하여 활약하였으며 그들의 3대 목표
는
1, 심신을 달련하여 조국광복의 초석이 될 것.
2, 봉사와 과학의 정신으로 생활개선에 노력할 것.
3, 민주적인 협동사회를 건설하여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것. 등이다.
혁명 후 포고 제6호에 의하여 해체 되었다.
8월 여운형(呂運亨), 장덕수(張德秀) 등 상해(上海)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조직.
※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 상해의 영국조계(英國租界)에서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상해에
있었던 독립운동 단체 중에서 역사가 가장 깊으며 세계 각국에 특사를 파견하고 기관지 「신한
청년보(新韓靑年報)」를 발간 활약하였으며 창립 당시의 진영은 이사장에 서병호(徐丙浩),
이사에 여운형(呂運亨), 김 구 (金 九), 이광수(李光洙), 선우 혁(鮮于 赫), 안정근(安定根) 등
이었다.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 종료(第1次 世界大戰 終了).
11월 20일 미주 교포단체(美洲 僑胞團體) 윌슨에게 독립요망 진정서(獨立要望 陳情書) 제출.
12월 15일 손동희(孫東熙) 등 천도교인사(天道敎人士), 상춘원(常春園)에서 독립운동 모의(獨立
運動 謀議)
이 해 만주(滿洲)의 중광단(重光團) 인사 39인, 대한독립선언서 채택(大韓獨立宣言書 採擇)〔무오
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
※ 중광단(重光團) :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만주에서 조직된 단체로 만주에 망명 중이던 서 일
(徐 一) 등이 두만강을 건너오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직하였으며 무기는 없으나 정신훈련과
군사훈련을 시행하고 3·1독립운동 후에 정의단(正義團)으로 개편 청년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
였다.
서기 1919년 기미(己未)〔대한민국 원년(大韓民國 元年)〕
1월 6일 동경유학생학우회(東京留學生學友會), 신전구(神田區) 조선기독교청년회관(朝鮮基督敎
靑年會館)에서 독립선언실행방침 모의(獨立宣言實行方針 謀議).
1월 최 인(崔 麟),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 최남선(崔南善) 등 중앙학교(中央學校)에서
회합 〔독립선언 모의(獨立宣言 謀議)〕.
2월 1일 상해(上海)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김규식(金圭植)을 파리, 장덕수(張德秀)를 일본
(日本), 김 철(金 澈), 서병호(徐丙浩)를 국내(國內), 여운형(呂運亨)을 로령(露領)에 파견.
2월 8일 일본동경유학생(日本東京留學生) 600여명, 조선기독교청년회관(朝鮮基督敎靑年會館)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발표〔2.8독립선언서(二.八獨立宣言書)〕.
2월 16일 재미 이승만(李承晩)등 한국의 위임통치청원서(委任統治請願書)를 「월슨」에게 전달.
2월 28일 재경민족대표(在京民族代表) 25명 손병희(孫秉熙)댁에 회집(會集) 〔3.1독립선언서(三
·一獨立宣言 書)에 서명.
3월 1일 3·1독립만세운동 발생(三·一獨立萬歲運動 發生).
※ 3·1독립만세운동(三·一獨立萬歲運動) : 한국이 1910년에 군국주의(軍國主義) 일본의 침략을
받아 강제로 합병당한 이후 그들의 무서운 식민정책과 헌병, 경찰의 무단통치 밑에서 고통, 신
음하다가 제1차세계대전 (1914년 〜 1918년)이 끝나고 1919년 1월 프랑스의 파리에서 강화
회의(講和會議)가 열려 세계개조(世界改造)의 큰 기운이 떠들게 되자 민족대표 33인의 영도아
래 이 해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세계만방에 반포하고 전국의 남
녀노소가 일제관헌 총칼 앞에 맨주먹으로 총궐기하여 행진하면서 우렁찬 “대한독립만세” 소리
와 자주독립을 부르짖은 독립만세운동이었다.
3월 3일 고종 국장 거행(高宗 國葬 擧行).
3월 17일 로령(露領)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독립선언서 발표(獨立宣言書 發表),
정부수립선언 (政府樹立宣言)〔로령임시정부(露領臨時政府)〕.
※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 제1차세계대전 때 로국군(露國軍)에 참전하였던 교포 청년들이
조국애(祖國愛)를 굳게 하였고 쌍성(雙城)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합발포(哈發浦)에 노병회(勞
兵會)를 조직하여 회장 김기용(金起龍)으로 하고 이동휘(李東輝)는 김 립(金 立), 전 일(全 一)
등과 협력하여 본회를 육성 발전하였으며 그 후 로령(露領)의 노병회 중앙총회(勞兵會 中央總
會)를 개칭하여 대한국민의회라 하고 대표 윤 해(尹 海), 고창일(高昌一)을 불란서 파리의 강화
회의(講和會議)에 보내어 한국의 자주독립을 외쳤다.
3월 24일 김규식(金奎植), 파리에 한국공보관(韓國公報館) 설립.
3월 28일 김윤식(金允植), 이용직(李容稙) 등 구귀족원로(舊貴族元老), 총독부(總督府)에 독립승인
최고장(獨立承認 催告狀) 제출.
3월 29일 류관순(柳寬順), 천안(天安)에서 피검.
3월 ★ 곽종석(郭鐘錫), 김창숙(金昌淑) 등 유림대표(儒林代表) 17인 파리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
書) 송부 〔(파리장서(長書)〕.
★ 현 순(玄 楯), 이광수(李光洙) 등 상해(上海)에 독립임시사무소(獨立臨時事務所)를 설치.
★ 만주(滿洲)의 전 의병세력(前 義兵勢力) 박장호(朴長浩) 등「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조직.
※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 독립혁명단체로 한일합병 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곤란하게 되자
애국동지 들이 만주로 건너가 류인석(柳麟錫)이 보약사(保約社)를 백삼규(白三圭), 조병준(趙
秉準), 전덕원(全德元) 등이 농무계(農務契)와 향약계(鄕約契)를 이진용(李鎭龍), 조맹선(趙孟
善), 홍범도(洪範圖) 등이 포수단(砲手團)을 각각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활약하다가 3·1독립운
동 뒤 만주에 건너 오는 수십만의 동지를 맞이하여 각 단체가 통합하여 이해 남만주에서 조직
하였다. 그 후 1920년 12월 한족회(韓族會), 청년단연합회 (靑年團聯合會)와 함께 상해임시정
부 직할인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로 통합되었다.
★ 최시흥(崔時興), 「천마산대(天摩山隊)」 조직.
※ 천마산대(天摩山隊) :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산(平安北道 義州郡 古寧朔面 天摩山)에서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조직하여 최시흥(崔時興)이 대장이 되었으며 대원은 구한국 군인들이었
고 무기는 낡은 화승총(火繩銃)뿐 이었으므로 희생이 많았고 국내 게릴라전으로 공로가 많았다.
★ 서 일(徐 一), 등 「정의단(正義團)」 조직.
★ 간도 대한민회(間島 大韓民會), 혼춘 대한민회(琿春 大韓民會),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로 통합〔회장 구춘선(會長 具春先)〕.
※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 이해 간도에서 조직된 교포의 자치기관으로 3·1독립만세운동 이후
많은 교포들이 간도에 이주하면서 연길(延吉), 화룡(和龍), 왕청(汪淸), 등 3현(縣)의 대표들이
자치기관의 필요를 느껴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를 조직하였다. 3현(縣)은 5구회(區會)로 나누
고 그 밑에 52지회(支會)를 두어 임시정부에 협력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 후 혼춘
(琿春) 대한국민회의(大韓國民會議) 회원 3천 명을 포섭하고 지회(支會)를 80개로 확장시켰다. 8월 말에 홍범도(洪範圖)가 지휘하는 200여명의 군대를 국민회 직활인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으
로 편입하고 다시 도독부군(都督府軍) 300여명을 포섭하여 대군단(大軍團)을 조직하였다.
국민회는 계속해서 군비확장에 힘써 1920년까지 많은 군대를 육성하여 일본군 에 큰 타격을
주었다.
4월 11일 상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樹立)」 수립.
※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上海 大韓民國臨時政府) : 4월 10일과 11일에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
인 김신부 로(金神父路)에서 제1회 의정원 회의(議政院 會議)를 개최하여 국호(國號)를 대한민
국(大韓民國)으로 할 것과 년호(年號), 관제(官制), 임시헌장 10조(臨時憲章 十條) 및 헌장선포
문(憲章宣布文)을 채택할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의안을 통과시켰다.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정식으로 선포하고 파리 주재 김규식(金奎植)에게 외무
총장 겸 전권대사의 신임장 발송하였으며 김 구(金 九) 등 10여명 상해에 도착.
4월 15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제정 공포.
4월 23일 국내 13도 대표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수립.
※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 국내 각 방면의 대표자들이 인천 만국공원(仁川 萬國公園)으로
집합하여 비밀회의를 갖고 임시정부의 조직과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파견 및 국민대회를 열어
정부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는 등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4월 이회영(李會榮) 등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조직.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 독립혁명단체로 한족회(韓族會)와 함께 조직된 군정부(軍政部)가 상
해임시정부 의 지배하에 있을 때부터 불러진 이름이며 독판 이상용(李相龍), 부독판 여 준(呂
準), 정무청장 이 탁(李 鐸), 국정청장 양규열(梁圭烈), 참모장 김동삼(金東三), 교관 지청천(池
靑天), 신팔균(申八均) 등이었으며 군사훈련과 동지 양성에 노력하다가 1923년 육군주만참의
부(陸軍駐滿參議部)에 가입하였다.
5월 3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개교.
※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 애국청년을 양성하기 위하여 만주 류하현(滿洲 柳河縣)에 설립한
무관학교 로 1910년에 이시영(李始榮), 이동령(李東寧), 윤기섭(尹琦燮) 등이 신흥강습소를 창
설하여 뒤에 신흥중학교, 1919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였는데 교장 이시영(李始榮), 교성
대장 지청천(池靑天), 교관 오광선 (吳光鮮), 신팔균(申八均), 이범석(李範奭), 김경천(金警天)
등이었으며 1920년 8월까지 2000여명의 졸업 생을 배출하였다.
※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 :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신흥학교 졸업생과 재학생으로 조직된 강력한
혁명청년 결사로 민주 독립운동 초기의 핵심조직이 엇고 「신흥학우보(新興學友報)」를 간행
하였으며 그들의 6대 강령은
① 혁명운동에 참가.
② 학술연구, 실력향상.
③ 각종 간행물을 통하여 혁명이론 선전, 독립사상 고취.
④ 농촌에 소학교 설립, 아동교육 담당.
⑤ 강습소를 열어 농촌청년에게 군사훈련, 계몽교육을 실시.
⑥ 민중의 자위체, 적구(敵狗) 침입방지 등이다.
5월 4일 상해 대한민국청년단(大韓民國靑年團) 조직.
※ 대한민국청년단(大韓民國靑年團) : 상해에 있었던 한국의 청년운동 단체로 조직되었으며 단장
여운형(呂運亨), 부단장 류경환(柳景煥), 총무 임재호(任在鎬), 재무 민제호(閔濟鎬), 출판 주요
한(朱耀翰), 서무 김석 황(金錫璜) 등 이였다.
※ 청년단연합회(靑年團聯合會) : 3·1독립만세운동후 신의주(新義州)에서 안병찬(安秉瓚), 김찬성
(金贊聖), 김승만(金承萬) 등이 중심이 되어 산만한 청년운동을 통일 남만주 안동현(安東縣)에서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청년단체 연합회를 조직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후 1920년 안병
찬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김승만이 단독으로 주관하더니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한족회(韓
族會)의 일부와 합작으로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로 통합하였다.
5월 25일 안창호(安昌浩) 상해 도착 임시정부 강화 착수.
6월 17일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사료조사편찬부(史料調査編纂部) 설립.
6월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 조직.
※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 : 기독교 신자인 연병호(延秉昊), 승려인 송세호(宋世浩), 등이 상해에
서 귀국한 이병철(李秉徹)과 함께 독립정신의 고무, 임시정부의 육성, 세계만방에 대한 동정외
교, 일본정부에 대한독립요구, 등의 실천을 위해 조직한 단체로 본부를 서울에 두고 안재홍(安
在鴻)을 총무로 임명하였다. 그 후 배달청년당(倍達靑年黨)으로 개칭하려다 발각되어 동년 11
월에 해산되었다.
7월 10일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연통제(聯通制)」 공포 시행.
※ 연통제(聯通制) : 상해임시정부에서 실시한 교통 연락 방법으로 임시정부 국무원령 1호로 당시
의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가 고안하였으며 국외에 있는 각 단체와 국내의 각 도(道)에는 총판
(總辦)을 군(郡)에는 군감(郡監)을 면(面)에는 면감(面監)을 두어 임시정부의 명령과 사무를
관장케 하였다.
7월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조직.
※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 간도(間島)의 안도현(安圖縣)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3·1운동 뒤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불가능하게 되자 망명한 의병(義兵)과 구한
국군대(舊韓國軍隊)가 이 규(李 圭)를 총재로 조직하여 각지에 흩어져 일본헌병대와 경찰서를
습격하며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여 교육과 민족정신앙양에 힘썼다. 1920년 8월 일본군의 대 습
격을 받고 김좌진(金佐鎭) 부대와 합류하여 대한 의용군(大韓義勇軍)을 조직하였다.
8월 7일 서 일(徐 一), 김좌진(金佐鎭), 등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조직.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독립 혁명단체로 동만주에서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였고 1919년 이를 확대하여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으며 다시 김좌진(金佐鎭)을 맞
아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위한 조직을 가졌으며 제1차세계대전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던 체
코스로바키아군대의 후의로 무기를 다량 구입하여 무장을 갖추고 군사훈련에 힘쓰는 한편 왕
청현(旺淸縣)에 사관양성소를 설립하여 많은 애국청년들을 양성하였다.
8월 21일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독립신문(獨立新聞)」 발간.
※ 독립신문(獨立新聞) :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로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안창호(安昌浩), 김석황
(金錫璜), 최명우(崔明宇), 홍이관(洪利寬), 이유필(李裕弼), 조동우(趙東佑) 등의 노력으로 창
간되었는데 1920년에 확장하였다가 1921년 프랑스 공무국으로부터 정간처분을 받았다.
8월 25일 이승만(李承晩), 워싱턴에 임시정부 한국위원회(臨時政府韓國委員會) 조직〔9월 구미위
원부(歐美委 員部)로개칭〕.
9월 2일 강우규(姜宇奎), 일본 신임총독 제등 실(齊藤 實)에 투탄(投彈).
9월 11일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헌법개정(憲法改正) 공포〔대통령제(大統領制) 채택(임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전문 7장 58조의 임시헌법 제정 공포, 한성임
시정부(漢城臨時政府),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로령임시정부(露領臨時政府), 상해임시정
부로 통합〕.
10월 15일 상해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 조직.
※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 : 한국의 교육운동 단체로 상해에서 조직하였으며 회장 박은식(朴殷植),
편집 이광수(李光洙), 이한근(李漢根), 최창식(崔昌植), 김두봉(金枓奉), 서무 김정목(金鼎穆),
옥관빈(玉觀彬), 김태연(金泰淵) 등 이였다.
10월 31일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여운형(呂運亨), 안봉근(安奉根), 한형권(韓馨權)을 소련
에 파견 레닌 정부의 원조를 요청.
11월 9일 의친왕(義親王) 〔이 강(李 堈)〕, 상해(上海)로 탈출〔11월 11일 국내로 압송〕.
※ 대동단(大同團) : 일진호(一進會)에 적을 두었으며 전 협(全 協), 최익환(崔益煥) 등이 항일독립
운동 단체로 조직하였으며 총무는 전 협〔부평군수(富平郡守)로 지냈음〕으로 단원이 수만에
이르고 인쇄기를 구입하여 영업을 하면서 대동신문(大同新聞)을 몰래 발간하였으며 상해임시
정부와도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의친왕(義親王)〔이 강(李 堈)〕도 이에 가담하여
고문 김가진(金嘉鎭) 등과 함께 대동단 대표 30여명이 민족정신을 앙양하고 열국에 호소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그것을 몰래 인쇄하여 김가진 (金嘉鎭)이 먼저 상해로 출발하고 의친왕은
이어 상복으로 변장하여 만주 안동현(滿州 安東縣)까지 갔다가 발각되어 경성(京城)으로 호송
되었고 그 외의 간부도 전원 체포되었으며 이일은 일본인도 의외였으며 사회적으로도 크게 물
의를 일으켰다.
11월 9일 김원봉(金元鳳) 등 길림성(吉林省)에서 의열단(義烈團) 조직.
※ 의열단(義烈團) : 만주 길림성(滿洲 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 이성우(李成宇), 곽재기(郭在
稘), 강세우 (姜世宇), 이종암(李鐘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
(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등 13명으로 항일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그
후 확장하여 총독부 습격사건, 밀양경찰서 습격사건, 황옥경부사건, 종로경찰서 습격사건, 황포
탄사건, 동양척식회사사건, 일본 이중교(二重橋)사건, 등 많은 거사를 하였다.
11월 28일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사건 발생.
※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 한영신(韓永信)이 동지를 규합하여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를 조직하였고 한편 박승일(朴昇一), 이성실(李誠實), 손진실(孫眞實), 최신덕(崔信德) 등도 같
은 단체를 조직 상해임시정부의 원조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11월에 2개 부인회가 합동하
여 대한애국부인회라 개칭 본부를 평양(平壤)에 지부(支部)를 각지에 두었다. 자금 2.400원을
모금하여 2차에 걸쳐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는데 사실이 발각되어 간부가 모두 체포되고 자연
해체되었다.
〔당시의 연합회 본부회장 안정석(安貞錫), 부회장 한영신(韓永信), 총무 오신도(吳信道),〕.
11월 28일 여운형(呂運亨) 일본정부 요청으로 도일 독립취의(獨立趣意) 설명.
11월 안희제(安熙濟)등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 조직.
11월 상해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 조직.
이 해 한민회(韓民會) 조직.
※ 한민회(韓民會) : 평안남도 대동군(平安南道 大同郡)에서 조직되었으며 상해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하고 친일파(親日派)를 암살할 목적으로 임종영(林鐘英), 정정협(鄭正協),
이창민(李昌敏), 박면하(朴冕河), 김인화(金仁華), 이승두(李承斗), 김경두(金京斗) 등이며 1920
년에 비밀이 발각되어 간부들이 체포당하여 해체되었다.
※ 흥업단(興業團) : 이 해에 만주 무송현(撫松縣)에서 독립운동단체로 김 호(金 虎), 윤세복(尹世
復), 이원일 (李源一), 오제동(吳濟東), 이현익(李顯翼), 김 혁(金 赫), 등이 조직 활약하다가
1920년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많은 피해를 입은 뒤 광정단(匡正團)에 통합되었다.
※ 한교공회(韓僑公會) : 손극장(孫克章), 독고욱(獨孤旭), 이천민(李天民) 등이 만주 항인현(恒仁
縣)에서 조직한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각지에 지부를 두고 일본의 기관을 파괴와 주구토벌(走
狗討伐)에 활약하였으며 1923년 육군 주만 참의부(陸軍 駐滿 參議府)에 참가하였다.
서기 1920년 경신(庚申) 대한민국 2년
1월 4일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의 임국정(林國楨) 등 5명 일본은행 현금수송차 습격(日本銀行 現
金輸送車 襲擊).
※ 철혈광복단 단원들인 임국정(林國楨), 윤준희(尹俊熙), 한상호(韓相浩), 최사붕(崔似鵬, 최봉설),
김 준(金 俊), 박웅세(樸雄世) 등이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고 독립사상을 선전하는
기관지의 발행과 무기 구입을 목적으로 간도 룡정촌 동량어구(東良於口)에서 일본은행권 15만
원을 탈취한 사건이다.
2월 5일 민원식(閔元植) 등의 「국민협회(國民協會)」, 일본 중의원 의장(衆議院 議長)에게 한인의
참정권 (參政權) 청원서 제출.
3월 1일 서울, 평양(平壤), 선천(宣川), 황주(黃州), 등지와 만주(滿洲), 상해(上海) 등지에서 만세
시위.
3월 5일 조선일보(朝鮮日報) 창간.
※ 조선일보(朝鮮日報) : 3·1독립만세운동이 있은 후 일제가 무단정치를 지양하고 문화정치를 실
시하기에 처음으로 민간신문을 허가 할 때에 창간하였으며 발행인은 송석길(宋錫吉)이며 여러
번의 정간처분을 받았으며 발행 운영면에 있어서도 파란이 적지 않아 예종석(芮宗錫), 최 강
(崔 岡), 권병하(權丙夏), 김용희(金容熙), 신석우(申錫雨), 이상재(李商在), 안재홍(安在鴻),
조만식(曺晩植), 방응모(方應謨) 등 다수 인사를 거치게 되었으며 이상협(李商協), 김동성(金東
成), 조병옥(趙炳玉), 주요한(朱耀翰), 이광수(李光洙), 서 춘(徐 椿) 등이 신문을 도와 활약하고
부대사업으로 학생미술전람회, 음악콩크르대회, 도시대항축구대회, 기타 문화면을 통하여 민족
정기를 앙양하기에 힘썼다. 1940년에 강압에 의하여 폐간 되었다.
4월 1일 동아일보(東亞日報) 창간.
※ 동아일보(東亞日報) : 전국 애국지사의 발기에 의하여 주식회사를 조직하여 일간신문으로 발행
하였으며 청년신문(靑年新聞)으로 허가되었으며〔조선민중의 표현기관이고, 민주주의지지,
문화주의 제창〕등 세 조목을 사시(社是)로 하며 3·1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책에 힘입어
민중계몽과 독립정신 앙양에 힘썼으며 그동안 수많은 횟수의 발매금지와 5회의 무기정간, 강제
폐간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그 당시의 임원은 사장 박영효(朴泳孝), 편집 감독에 류 근(柳 瑾),
양기탁(梁起鐸), 편집 영업에 이상협(李相協), 이 운 (李 雲) 등 이었다.
4월 1일 시사신문(時事新聞) 창간.
※ 시사신문(時事新聞) : 민원식(閔元植)에 의하여 친일적 신일본주의를 표방하여 창간된 국민협회
(國民協會) 기관지로서 참정권운동에 열중하였으나 민원식의 피살로 1921년에 폐간되었다.
4월 11일 박중화(朴重華)「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창립.
4월 20일 「공명단(共鳴團)」 최양옥(崔養玉) 등 서울 교외 망우리(忘憂里)에서 우편자동차 습격.
※ 공명단(共鳴團) : 최양옥(崔養玉), 김정연(金正連),을 중심으로 서울에 근거를 두고 자금모집을
주목적으로 한 독립운동 단체이었으며 일본정부의 우편자동차를 권총으로 정차시키고 미리 약
속한 평안북도 도지사(道知事)의 자동차 운전수 이선구(李善九)와 함께 비밀장치한 중요한 우편
물을 전부 소각하였다.
6월 7일 홍범도(洪範圖) 휘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만주 왕청현 봉오동(滿洲 汪淸縣 鳳梧洞)에
서 일본군 연대병력 격파〔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 봉오동전투는 6월 4일부터 시작되었으며 강양동습격전투, 삼툰자(三屯子)전투, 후안산(后安山)
전투, 고려 툰전투와 봉오동 매복전투를 통털어 가리킨다.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
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을 내었으며, 한편 독립군 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 이었
다. 기록으로는 차이가 있으나 일제 침략군과 싸운 첫 번째 전투로서 3·1독립만세운동이후 독
립군의 무장투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이 승리로 국내외에 있는 모든 동포들에게 독립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 항일독립군 단체로
1)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 소속의 군대이며 왕청현 봉오동(旺淸縣 鳳梧洞)을 근거로 의병대장
홍범도 (義兵隊長 洪範圖)가 총사령이 되어 지휘하였고 군인 200명으로 조직되었다. 1919년 8
월 두만강을 건너 갑산(甲山), 혜산(惠山) 등지의 일본 군영(軍營)을 습격하고 이어 만포진(滿浦
鎭)을 함락시키고 자성(慈城)에서 일본군과 3일간 교전끝에 대승하였다. 뒤에 최진동(崔振東),
이태범(李泰範)이 거느리는 도독부군(都督府軍) 300여명을 합쳐 대부대를 편성 1920년 무산
(武山), 온성(穩城), 종성(鐘城) 등을 습격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고 동년 일본군의 소위 소탕작전
을 반격하여 크게 이겼다.
2) 청산리(靑山里) 싸움 후 러시아령에서 조직된 군단체로 지청천(池靑天), 홍범도(洪範圖), 김좌진
(金佐鎭) 등의 각 군대가 합류하여 편성하였는데 총재는 서 일(徐 一), 부총재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 조성환(曺成煥), 총사령 김규식(金奎植), 참모총장 이장령(李章寧), 여단장
지청천(池靑天), 등으로 요직을 분담하였다. 소련의 차타정부와 협약하여 혁명정부의 원조로
고려군관학교를 설립하여 청년양성에 힘썼는데 일본의 항의와 내분 등의 원인으로 흑하사변(黑
河事變)을 격은 뒤 자연 해산되고 말았다.
6월 오동진(吳東振) 등 유하현(柳河縣)에서 「광복군 총영(光復軍 總營)」 조직.
※ 광복군 총영(光復軍 總營) : 남만주에서 항일독립혁명을 목적으로 조직된 무장군이였으며 광복
군사령부가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분열될 때 제2영장(第二營長)으로 있었던 오동진(吳東振)
이 소속부대를 인솔하고 관전현(寬甸縣)에 주둔하면서 개칭하여 자신이 총영장(總營長)이 되고
국내에 있는 천마산대(天摩山隊)를 천마별영(天摩別營)이라 하고 벽동(碧潼) 파저강(波猪江) 연
안에 있는 무장단체를 벽파별영(碧波別營)이라 하여 만주 각 지에서 적기관(敵機關)의 파괴에
힘써 오다가 광복단(光復團)외의 여러 단체와 함께 통군부(統軍部)를 이루었다.
8월 3일 상해의용단(上海義勇團)의 문일민(文一民) 등, 평남도청(平南道廳)에 투탄.
8월 24일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 9명 및 가족 38명 일행 입경(入京)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만세시위(萬 歲示威) 발생〕.
8월 광복단(光復團) 사건 발생.
※ 광복단(光復團) : 무장 독립운동 단체로 김성극(金星極), 홍두식(洪斗植) 등이 만주 안도현(滿洲
安圖縣) 에서 조직하였다.
9월 12일 일본군, 중국인 마적(馬賊)을 매수 길림성 혼춘성(吉林省 琿春城) 습격〔제1차 혼춘사건
(第1次 琿 春事件)〕.
9월 14일 의열단원(義烈團員) 박재혁(朴載赫), 부산경찰서(釜山警察署)에 투탄.
10월 2일 중국마적(中國馬賊), 길림성 혼춘(吉林省 琿春) 일본영사관(日本領事館)을 습격〔제2차
혼춘사건 (第二次 琿春事件)〕.
※ 혼춘사건(琿春事件) : 혼춘(琿春)은 만주 길림성(滿洲 吉林省) 동부의 도시이며 두만강의 지류
홍기하(紅旗河)의 서안에 있으며 토명(土名)은 대팔둔(大八屯)이라 하며 독립단이 간도(間島)
부근의 혼춘을 습격한 사건으로 독립단원 약 400명은 혼춘을 습격하여 일본영사관 분관 총독
부 파견의 경찰대, 함경북도 경찰 파견대 등 50여명과 싸웠고 잠시 점령한 후 후퇴하였으며
일본군은 라남(羅南)의 19사단을 동원하여 혼춘 부근을 탐색시켰고 사도구(四道溝)에 있는 혁
명단체 간부 300여명을 검거한 후 전 부락을 소탕하였다.
10월 5일 일본군(日本軍), 북간도일대(北間島一帶) 교포 대학살을 시작〔10월 5일 ~ 12월 20일〕.
※ 경신년 참변(庚申年 慘變) :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하고 청산리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제침략군
은 그 분풀이로 무고한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방화 약탈 간음을 일삼았으며 조선인부
락 구석구석까지 습격하였다.
10월 20일 김좌진(金佐鎭), 이범석(李範奭) 등의 북로군정성부대(北路軍政省部隊) 화룡현 청산리
(和龍縣 靑山里)에서 일본군 연대 병력을 격파〔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
※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
회 국민군 등 연합군이 화룡현 이도구 청산리 백운평과 이도구의 완루구(完樓溝), 천수평 어랑
촌(漁郞村), 봉밀구(蜂蜜溝), 고동하(古洞河) 등지에서 일제의 토벌군과 대전하여 대첩을 이룩
한 전투이다. 김좌진(金佐鎭), 라중소(羅仲昭), 이범석(李範奭) 등이 거느린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제19, 20사단을 청산리(靑山里), 갑산(甲山) 등지에서 반격하여 대승한 싸
움으로 독립군 사상자는 약 150여명이며 일본군 사상자는 약 1200여명에 달하였다.
이 싸움은 항일독립투쟁사상 크게 빛나는 전투로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 시켰으며 일본은 이 패
전의 보복으로 일본에 있는 한교농민(韓僑農民) 3만명을 학살하였다.
10월 대한부인청년단(大韓婦人靑年團) 사건 발생.
※ 대한부인청년단(大韓婦人靑年團) : 독립운동가를 원조하기 위하여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평안
남도 평원군(平安南道 平原郡)에서 이재은(李載恩), 조재생(趙載生), 채시현(蔡視鉉), 최봉은
(崔奉恩), 등이 주동되어 군자금(軍資金) 모집활동을 하다가 강서경찰서(江西警察署)에 의하여
전원 체포되었다.
11월 11일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 장덕준(記者 張德俊) 혼춘사건(琿春事件) 취재 중 일본경찰에
피살.
11월 12일 조선징발령(朝鮮徵發令) 공포.
※ 징발령(徵發令) : 점령자(占領者)가 적지의 개인 또는 시(市), 도(道), 군(郡), 면(面), 동(洞), 리
(里)에서 군사적으로 필요한 물품을 징수하는 것으로 점령국의 일반적 수요에서가 아니고 점령
군의 수요를 충족하는 것에 국한하고 지방의 자력에 응하는 것임을 요한다.
11월 동북만주(東北滿洲)의 독립군 부대들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조직.
12월 1일 장덕수(張德秀), 오상근(吳祥根) 등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서울기독교
청년회관 에서 창립총회 개최〕 조직.
12월 27일 의열단(義烈團) 최수봉(崔壽鳳), 밀양경찰서(密陽警察署)에 투탄.
12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 3개 단체,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로 통합.
※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 : 남만주에서 조직한 독립혁명군이었으며 대한의용군사의회(大韓
義勇軍事議會), 한족회(韓族會),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 청년단연합
회(靑年團聯合會) 등이 통합하여 결성되었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 보고를 받고 남북만주
교민통치기관(南北滿洲 僑民統治機關)을 광복군 참리부(光復軍 參理部)라하여 임시정부의
내무부 직속에 두고 군사기관은 광복군사령부라 하여 군무부(軍務部) 직활로 하였다.
※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 이 해 시베리아에서 장도정(張道定), 김하밀,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
한 사회주의 정당으로 시베리아 교포들은 표면상 공산주의에 접근해야만 독립운동이 가능할
것을 예측하고 볼라디보스록(Vladivostok)에서 조직하여 사회주의에 의한 신국가 건설과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하고 임원으로 회장 장도정(會長 張道定), 부회장 김하밀, 의사장 김 진
(議事長 金 震), 농무부장 조장원(農務部長 趙璋元), 선전부장 김 일(宣傳部長 金 一) 등을 선출
하여 항일투쟁을 벌였다.
이 해 노동파업 81건 4.591명. 소작쟁의 15건 4.04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