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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래 '23,11,05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사도행전 4장이라는 말씀, 천하 인간의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참조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의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4:12). 요즘 번역에는 조금 다르게 번역했지만, 내용은 같은 겁니다. 유일한 이름. 유일한 이름. 왜 하필이면 예수라야 되냐. 유일한 이름이기 때문에. 유일한 이름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도 좋은 분 많잖아. 훌륭한 분들 많잖아. 왜 하필이면 예수냐. 여기에 대한 대답이 이겁니다.
근데 이 내용을 모르면 우리가 대답할 말이 옹색해집니다. 이건 기독교인들의 독선이다. 이렇게 그냥 밀어붙이는 겁니다잉. 근데 우리는 어떤 이유로 꼭 이 사람이어야 되는가 하는 겁니다. 또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으면 누구나 죽는 건 당연하잖아요. 근데 하필 뭐 십자가에 죽은 거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뭐 있냐. 너무나 평범한 일을 가지고 이렇게 질문한 사람들 때문에 ‘내려오지 못한’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그렇기도 그렇겠죠. 아니 누구나 다 죽는 걸 가지고, 뭐 새삼스럽게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꼭 얘기 해야하느냐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꼭 이렇게 얘기해야 되는 겁니다. 꼭 왜 말을 꼭 넣어야 되냐라고 생각하는 사람 때문에, 이 말을 꼭 해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음과 같은 것이 아니고 유일한 죽음이기 때문에. 이를 묻는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다, 진리를 묻는 제자들에게 바로 내가 곧 진리다, 생명을 묻는 제자들에게 내가 바로 그 생명이다.
이렇게 대답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도 유일한 일이죠. 예수는 우리에게 유일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아니란 말이 아니고, 사람인데 유일하단 말입니다. 왜냐면 능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도 되고, 하늘로부터 왔다 해도 되고, 다 되는데 문제는 우리가 그걸 모른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늘로부터 왔는지, 어째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지, 그걸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도 유일한 말입니다. 모든 말이 다 유일한 말입니다. 그것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사람이 아니어서가 아니고, 사람인데 유일한 사람이어서 그 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옛날에는 그래서 그걸 그렇게 여러분 앞에 해서 그랬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이다. 자기 모든 걸 내놓고도 이 말은 하기 어려운 거다. 근데 예수께서 이 말을 했다. 그래서 얘기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나하고 멀어져 버린 거예요. 그렇잖아요. 우리는 그런 말을 못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너무 멀어져 버렸어.
요번에는 그렇게 들렸어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는데, 하나님이 대답이 없어. 대답이 없었어요. 대답 없는 의미를 요번에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분명하게 구별되기 위해서. 사람은 무엇을 해도 사람,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말에서도 사람,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에서도 역시 영이요 생명인,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 그런데 이 둘이 딱 갈라져야 우주 질서가 온전해진 겁니다. 남자는 딱 남자여야 되고, 여자는 딱 여자여야 됩니다. 남자 같은 여자, 여자 같은 남자는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습니다.
흙과 씨는 완전히 구별돼야 합니다. 그러니까 씨에게는 그게 없으면 절대로 안 되고, 흙은 씨가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이 연합의 비밀입니다. 자, 이것이 없으면 예수와 내가 연합할 방법이 없어요. 예수와 내가 연합할 방법이 없으면, 옆에 사람과도 연합할 방법이 없어요. 그 너무너무 중요한 말이고, 이것도 유일한 말입니다.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의 이름을 주신 적 없다. 베도르가 한 말인데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같지 않았던 사람이 사람으로 보였으니까요? 지금도 종교에서는 예수를 사람이라 하면 고개를 흔듭니다. ‘그럴 수 있냐, 하나님도 되고 사람도 된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수백 년 동안을 유지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러면 나하고는 다른 사람이잖아요. 나는 단지 사람이지, 사람도 되고 신도 되고 그럴 경지가 못 되거든요. 예수 혼자 그러면 뭐합니까? 우리는 그냥 밑에 엎드려서 절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누군가 내가 연합할 방법이 없어요.
참 좋은 이름 같은데,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이름이 된다고요.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 마태복음은 그랬고, 누가복음에서는 그 이름은 원자라는 이름이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 하시며 이렇습니다. 근데 이 중요한 말을 우리가 정확하게 모르면 우리의 믿음이 정확할 수 없는 거잖아요. 우리의 생각이 정확할 수 없어요.
근본이 정확하지 못하니까, 이것 때문에 진보와 보수가 갈라졌던 일입니다. ‘처녀가 어떻게 잉태를 하겠냐, 그건 신화일 뿐이다.’ 이렇게 한 사람들이 진보가 되고, ‘성경에 있으니까 절대적으로 믿어야 된다.’ 그런 사람들이 보수가 됐습니다. 이것도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사건입니다.
아직도 그게 다 해결된 게 아닙니다. 여전히 그대로 있으면서 교파가 갈라져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점 1획이라도 바꿔버리면 다른 말이 되거든요. 보통 말은 좀 바꿔도 괜찮아요. 이건 바꿀 수 없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바꿀 수 없는 말씀. 나도 이 문제로 많이 고민해 봤어요. 대책이 없습니다. 이걸 부인하면 자유주의자가 되고, 인정하면 보수주의자주의자가 되고, 이러니 저러니 못 하잖아요.
요번에 새로운 걸 발견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떠난 아담에게 “너는 내가 먹지 말란 걸 왜 먹었냐” 물으니까. “당신이 내게 지어준 여자가 먹으라 해서 먹었습니다.” 자기는 아무 죄가 없다는 걸 아주 명백하게 표현했어요. 그러면 우리 인간 같으면 그래 너는 죄가 없다 그럴 건데, 그게 아니고 넌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살 것이다. 종신토록 수고하여 먹고살 것이다. 그리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내려졌습니다.
흙으로 돌아간단 말만 없으면 완전 저주입니다. 근데 그래도 거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복음입니다. 하와에게 가서 “너는 왜 먹었냐”고 그러니까, “뱀이 와서 먹으라” 해서 먹었습니다. 그럼 모든 죄가 하와에게 다 있잖아요. 그런데 하와에게는 벌을 주지 않고 이랬어요. “뱀은 너의 발꿈치를 상했지만, 너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다.” 이렇게 축복을 했습니다. 반대로. 이것도 참 유일한 일이죠. 이런 일이.
근데 오늘 우리에게 발견된 것은, 그렇구나,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는구나. 우리는 다 여자의 후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 뱀에게 발꿈치를 물렸던 사람들입니다. 발꿈치 물리니까 별로 아닌 줄 알죠. 와 요번에 OOO 고모님이 와서 이렇게 내 아픈 데를 만지는데요. 발꿈치처럼 아픈 데가 없어요. 손을 대니까, 그러니까 자지러지게 아파요. 견딜 수 없도록 아파요. 발꿈치를 누르니까. 이 발꿈치가 아무렇지 않게 되면 내가 걸어서 뚜벅뚜벅 교회로 들어갈 겁니다.
그러니까 감춰진 거에 많지요. 우리가 다 뱀에 물렸던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내뱉는 간증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나온 간증이 사탄의 머리를 상한다고요. 그냥 간증을 아무 때나 하면 안 되는 거죠. 꼭 자기 간증을 해야 되지. 남의 간증 갖다 해도 안 되고, 거기다 다른 사족을 붙여도 안 되고. 그래서 우리의 지체가 온전하게 되고 하나님을 만족해 하려면 싹 뽑아서 우리의 간증만 해야 됩니다.
요번에 서울서 온 자매, 간증하는데 화답하는 사람들이 너무 깨끗하게 화답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자매가 뭐라 했든지 간에 화답은 너무너무 깨끗했어. 옛날에 최병화가 처음 간증했을 때 그거 별말도 아니었어요. 자기는 지금 아직도 헤매고 있다고 이랬는데, 그 간증이 너무너무 온전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두 합해가지고 하나의 간증을 만들어 내더라고요.
나는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 큰 희망이 있다는 걸 봤습니다. 아니 그런 상황에서 말이지, “왜 넌 그것도 못 믿어.”, “왜 나 그것도 아직도 몰라.” 이럴 수도 있는데, 간증은 최고로 좋은 간증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간증은 각자 간증한 같지만은 하나의 간증을 만드는 거다. 이걸 알게 됐습니다. 그니까 우리가 자기 간증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의 간증을 우리가 만드는 겁니다. 다 같이.
그래서 제물은 한 개만 드리지, 여러 마리를 드린 거 없어요. 딱 한 마리. 그 제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제물은 모든 동물들의 대표자지요. 하나만 있으면 돼요. 하나만 유일하게. 예수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유일한 사람.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여러 가지 좋은 면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런 면을 다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어 보면요, 이 사람이 사람인가 신인가 모르겠다. 이렇게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안에 포함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렇게 된 겁니다. 나 같은 사람 죽으면요, 몇 사람 포함되겠죠. 근데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될 수 없어요. 그래서 내 이름을 빼란 말을 일부러 한 겁니다. 나는 몇 사람 포함 못 해요. 그리고 포함한다 해도 온전하게 포함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누구든지, 그를 인정하는 누구든지 다 포함할 수 있는 분입니다.
죽은 후에도 어디로 갔다 했습니까? 옥에 있는 영들에까지 갔다 했습니다. 옥에 있는 영들, 그러면 이건 아주 구제불능의 영들이라는 뜻이잖아요. 거기까지 내려갔단 말이 사람들까지도 다 포함할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그냥 만만하게 생각해도 안 되고,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해도 안 되고, 그래서 우리는 꼭 자기 간증만 해야 됩니다. 그건 잘하든지 못하든지 흠이 없어요. 근데 그걸 가지고 뭘 딴 걸 만들라고 그러면 어떻게 만들어도 흠이 생깁니다. 어떻게 만들어도. 유일한 거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늘 말한 것이 간증만 해라, 간증만 해라, 간증만 해라, 한 말이 그 말입니다.
나도 정말 내 간증만 얘기 나오면 하고 싶어요. 부득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 귀한 시간에. 왜냐하면 우리들의 간증을 위해서, 순수한 간증을 위해서... 유일한 이름, 이거 보통 이름하고 다른 이름입니다. 사람이 아니어도 다른 게 아니고 사람은 사람인데 만유를 포함하는 이름이기 때문에 보통 이름과 다른 거지요. 똑같은 사람이에요. 사람은 똑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둘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딱 한 사람 만들어 놨습니다.
바울은 말했어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은즉 그와 함께 살리라. 똑같은 모양으로 죽었으니 똑같은 모양으로 살리라. 또 다른 얘기를 합니다. 죄는 아담으로부터 왔고 의는 예수로부터 왔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죄가 세상에 오고, 예수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의가 세상에 왔다고 그럽니다. 그럼 아담이 가져온 죄는 뭐냐? 불의지요. 불의. 의롭지 못한 것. 의라는 건 관계입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형제와 형제 간의 관계, 모든 관계가 바로 의냐 불의냐 이겁니다.
나하고는 관계가 나뻐. 그런데 다른 사람하고는 또 관계가 좋은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한편에서는 불의하고 한편에서는 의롭고. 그런데 우리는 다 결함이 있기 때문에 내가 남에게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내가 또 남을 비난할 수도 있어요. 모르니까. 자기를 잘 모르니까.
근데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가 아무리 잘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고요. 제물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가져왔어요. 이것은 아담이 얼굴 보일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얼굴 대신에 제물을 가지고 왔던 겁니다.
그래서 이걸 대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가인는 곡식을 가져왔기 때문에 받지 않고 아벨은 양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받았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물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드리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과부의 엽전 두푼을 귀하게 여긴다는 말은 그 사람을 본다는 말이잖아요. 엽전 두푼이 돈 얼마 되겠어요. 그런데 돈이 많고 적은 걸 보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의 마음을 본다 이 말이거든요.
자, 그러니까 이런 분은 세상에 유일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에 이르는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왜 그러면 그분은 만유를 포함할 수가 있는가? 여러분 지금 예수 십자가에 죽어서 누워있는 걸 함 봐보세요.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잖아요. 내려오라 하는데 못 내려오니까 제자들까지도 가버렸어요. 아무도 쓸모없어요. 근데 이 사람이 왜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 되는가? 우리 눈에 보기에는 쓸모가 없어도 하나님 볼 때는 쓸모가 있기 때문에. 왜? 그 안에 만유를 포함하기 때문에.
천사는 죽지 않습니다. 능력도 하나님과 거의 비슷합니다. 근데 왜 천사는 아들이 아니고 이 쓸모없어 보이는 무능한 이 사람이 아들이 되는가? 히브리서의 1장은 “내가 어느 때 누굴 가르켜서 내 아들이 한 적 있냐 천사라도 나는 내 아들이 한 적이 없다. 천사는 단지 부리는 영에 불과하다.” 2장에 가면 바꿔져가지고, “육신으로 인해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지만 그날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의 갈 자다.” 이건 사람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 하나님의 관심은 위대한 것도 아니고 안 죽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다 그걸 바라잖아요. 안 죽을 수만 있다면, 위대할 수 있다면 이걸 바라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걸 바라는 게 아니고, 지금 육체 때문에 비난받고 육체 때문에 멸시받는 그 인간은 어느 날인가 내 보좌 우편에 앉을 것이다. 그렇게 대답하였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어디 속해 있는가? 천사에 속하면 멸망입니다. 그렇게 바라던 천사에 속하면 멸망이고, 한 번 쓸모없게 된 사람 안에 속하면 우리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이거 정말 역설이죠. 세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다 안 되는 사람. 안 되는 일이고요. 우리의 구원은 세상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구원입니다. 저런 사람이 뭐, 저런 사람이 뭐 다 그렇잖아요.
여러분 우리 교회 MZ세대를 봐 보세요. 뭐 유명한 사람 있습니까? 세상에서도 유명치 못하고 교회에서도 유명치 못한 사람들이, 근데 새 판에 오니까 이 사람들이 아주 팔팔하게 살아있잖아요. 팔팔하게. 옛날 판에서는 이름도 못 낼 사람들이에요. 교회에서도 뭐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선행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낄 자리가 없어요. 사실.
그래서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 판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 돼 있다니까요? 나는 이런 역전이 너무 좋아 왜냐하면, 나도 그러니까. 나도 그러니까. 내가 왜 MZ세대를 좋아하냐? 나도 그런 사람이니까. 여러분이 나를 볼 때는 “아이고 목사님 우리하고 다르지.”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조금 잘못하면 완전히 실망해버린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못 됩니다. 좋은 점만 있는 게 아니고 안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걸 알고 나를 심판해버리면 난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근데 나도 판이 바꿔졌단 말입니다. 판이 바꿔졌어. 그래서 여러분 앞에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거고. 판이 바꿔져서 지금 대구에 살고 있는 겁니다. 소위 말하는 세상에서 말하는 정상적인 판에는 내가 있을 곳이 없어요. 다 밀려 남았습니다. 밀리고 밀려서 대구까지 밀려왔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또 밀렸습니다. 내가 대구로 올 때 좋은 데로 온 줄 알지요. 아닙니다. 내가 가길 원했던 곳은 청주였어요. 근데 어떤 약은 사람이 차고 들어와 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대구로 밀려나온 겁니다.
그런데 대구로 밀려나왔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과 함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만일 내 원한 대로 됐더라면 대구에 평생 올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 뜻대로 온 게 아니고 밀려서 왔다니까요? 그리고 CCC에서 또 밀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냥 거기다 뼈를 묻을 사람입니다. 갈 데가 없기 때문에. 근데 밀어내니까 안 나올 수 있습니까? 그래서 밀려 나왔는데 특별한 사람들 만나가지고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세상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어. 천하인간의 구원을 주신 이름이 없다. 오직 예수밖에 없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입니다. “OO하면 박수라도 좀 치지. 너무 긴장하고 있구만. 아이고 나는 쫌 억울해. 대구교회에 오기는 내가 안 맞는데 여기 와가지고 저런 사람들하고 같이 끼기는 좀 억울해. 나도 자세히 알면요, 아이고 좋은 목사 많고, 훌륭한 목사 많고, 학벌 좋고 모든 게 갖춘 사람이 많은데 왜 하필 사람을 한테 온단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 안 하겠어요.
그래서 모두 사람들이 자기 교회 목사는 제일로 훌륭한 분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나를 잘 알면 아주 훌륭한 분이라고 자랑할 꺼리가 없어요. 이거 진짜입니다잉. 그냥 내가 겸손해서 한 말이 아니고 진짜 그렇습니다. 나는 아예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어요. 안 하고 싶은 건 되는데 하고 싶은 건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나는 거기서 내 의지가 형편이었구나.” 이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병들어 가지고 OO할 때 질병검사를 갔어요. 군의관이 병 정도밖에 고장을 찍고 나서 내가 돌아서 나오니까, “장가나 가야 할 텐데.” 이러더라고요. “장가나 가야 할 텐데.” 그 얘기를, 어휴 다른 한의사한테 또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양방 한방 다 보고 “장가나 가야 할 텐데...” 이랬던 사람입니다.
근데 내가 장가를 갔으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감격한 일입니까? 그래서 첫 애를 낳으 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이름을 은혜라고 지었습니다. 내 아무리 봐도 내가 그럴 사람이 못 됐어요. 묻는 말 외에는 대답 잘 안합니다. 근데 요즘엔 말입니다. 와, 어디서 저렇게 됐나 싶어요. 어떻게 저렇게 됐나? 내가 뭐 말을 많이 한 거 아닙니다. 이 복음을 얘기한 것도 아닙니다. 옆에서가 날 지켜볼 뿐이었어요. 아니 그런데 내가 모르는 내 딸이 생겼다니까요? 내가 모르는 딸이에요. 내가 모르는 딸.
마지막 딸을 낳고 나서, 그때 내가 한참 교회에서 실제라는 말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딸이 나왔잖아요. 실제라고 하기가 어려워서 진실이라고 이름을 지은 겁니다. 요즘에 간증한 거 들으면요 딱 할 말만 해요. 자기 자신을 깊이 깊이 간증한단 말이야. 내 딸이 맞는가? 이렇게 생각이 될 정도야. 내 딸이 맞는가?
아들의 이름은 화평이라고 지었습니다. 왜냐면, 우리 집안은 누군지 항렬자를 안 쓴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근데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이름을 꼭 이렇게 지어야 되겠다. 그래서 화평이라고 지었어요. 절대로 누구하고 싸우지 마라. 다투지 마라. 싸우는 데는 절대로 하나님이 안 계신다. 잘했든지 못 했든지 싸우는데는 안 계신다. 내가 경험하고 한 말입니다. 지금도 누구하고 절대로 싸우지는 않아요. 절대로 싸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화평케해요. 주변 사람들. 직장에서도요 사람들한테 전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잘 안 나오지만 그러고 있습니다. OOOOO 교회로 나오리라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요. 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지나갑니다. 여러분도 다 이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유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자세히 생각해보세요. 여기 안 오면 안 될 사람만 남았습니다. 딴 데도 갈 수 있는 사람은 이번에 다 흩어져 가버렸어요. 여기 아니면 안 되는 사람만 왔어요. 여기 아니면 안 되는 사람. 그래 나는 여러분이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고맙습니다.
야, 여기서 말이요. 잘난 사람은 있기가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렇죠. 뭐가 좀 있는 사람은 외롭습니다. 없는 사람이 아주 편하거든요. 아주 편해. 신기한 세상이죠. 그렇다고 여러분보고 가난해지란 말이 아니고요. 돈이 있고 없는 문제가 아니에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그거 인간의 가난함이 있는 사람, 이 복음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 그 사람만 남아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된다.
뭐 넉넉하고 여유 있는 사람 있으면 시끄러워. 자기도 그러고 싶지 않고 우리도 그걸 보고 싶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놀랍습니다. 어떻게 죽은 예수를 가지고 만유를 구원하는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서 2000년 동안 버려진 예수입니다. 유명한 신학자들이 전혀 가치가 없어서 그래서 버린 사람입니다.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건 그냥 꿈에서라도 다 가져가 버렸어요. 근데 아무도 쓸모가 없으니까 다 버리고 간 거 있잖아요. 하나님께 버림받았단 말이 이런 말이. 하나님께까지도 버림받았단 말이 이런 말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버림받은 거하고 다른 겁니다. 잘못해 죽은 거 아니잖아요.
내가 세상에서 버림받았다. 이건 가능하죠. 왜냐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세상이 나를 무시하고 버리고 그럴 수 있어요. 그렇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당연히 무시받는 게 당연하잖아요. 많이 배운 사람이 적게 배운 사람 앞에 가서 무시하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무시 안 하면 좋을 거 같은데, 무시 안 한 것도 좋은 게 아니에요. 무시할 사람 무시하고, 무시받을 사람 무시받고 그래야 됩니다. 그게 정상적이에요.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무시받는 것도 이유가 있어서 무시받는 거고. 무시하는 것도 이유가 있어서 무시하는 거 아니겠어요.
내가 그런 일을 직접 겪어봤습니다. 나보고 몰라서 그렇대요. 당연히 그러겠죠. 나보다 몇 배나 많이 배우고, 그래 많이 알고, 그러니까 나를 보면 아직은 몰라서 그러는구나. 애들을 보면 사람 무식해서 그렇다. 지금 그렇게 본 사람 많습니다. 좀 무식해서 그렇다. 자기가 언제 천하를 다 돌아다니면 세상에 훌륭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유일하게 예수만 얘기한다는 건 저건 멍청한 짓이고 무식한 짓이다.
똑같애요. 내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얘기잖아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의 열매로서 예수를 말하고 있으니까, “아니 그 사람이 뭔데 저런 소리를 하냐?” 안 하겠어요. 내가 박사 위에 박사고 박사 위에 박사 같다고 하면, 그러면 내가 거짓말해도 무시하지 못해요. 그런데 이건 아주 나 같은 사람이 할 말이 못 된단 말입니다. 이건 전 우주적인 사건인데 이런 말을 감히 나 같은 사람이 취급할 자격이 있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가서 이 복음을 전해보면, “저게 뭐한다고 저러노.” 이런 말 듣기 십상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걸 말이지 와가지고 저러노.” 이런 말 듣기가 십상이예요. 그러니까 무시를 받아도 세상이나 지식이나 이런 것으로 무시받으면 당연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당연하게. 아니 못 배웠으니까 못 배우는 걸 무시당해야죠. “그럴 줄 알았으면 공부를 좀 많이 하지 왜 못해가지고...” 안 그렇습니까? 돈이 없어서 못 했지만은 그래도 그것도 지 팔자지 어짜겠어요.
근데 이것이 다 구원받을 자리가 있단 말입니다. 잘 배우나 못 배우나, 넉넉하나 못 넉넉하나, 한 가지로 똑같이로, 아무 자격이 차별이 없이 한자리에서 만날 수가 있어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앞서 간 자도 있고 뒷서 간 자도 있습니다. 동쪽 문으로 온 사람도 있고 서쪽 문으로 온 사람도 있어요. 근데 여기 문 안에 들어오면 다 똑같습니다. 다 평등해져 버려요. 아는 것도 없었고 모르는 것도 없었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지금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지금 보고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알고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 말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이 말을 숨겨놓고 있을 수가 있습니까? 다 못해도 이 말은 해야죠. 그래야 내가 사는 거 아니겠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를 찾은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내가 살기 위해 찾았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그러니까 결국 마지막 여기까지 왔죠. 내가 살기 위해서. 이거 들으면 다 환영하고 “와, 천재 났다.” 이럴 줄 알았는데 안 그렇잖아요. 나를 따라온 사람 있어. 또 멍해 갖고 있어. 저게 무슨 소린고. 너무 어이없는 소리니까, 너무 어이없는 소리.
천사보다 나은 인간의 위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다른 거 아니에요. 세상의 우열은 천사 앞에 가면 아무 소용 없어요. 천사 앞에 가면 한 말로 끝나. “너 죽잖아. 넌 죽잖아.” 그러면 인간 누구를 막론하고 할 말이 없어요. “넌 죽잖아. 너 인간이잖아.” 그래뿌면 끝나는 거예요. “아니 나는 박사입니다. 나는 뭡니다.” 천사 앞에 가면 아무 소용없어. 아무 소용없어. 아무 소용 없어. 영 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앞에 가면, “야, 그 사람이 나네. 남이 아니고 나네. 원래 그 사람이었구나. 내가 원래 그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 자리를 이탈해 가지고 이 모양이 됐네.” 이 모양이 되었단 말이 망했단 말이 아니고요. 뭐 좀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됐단 말입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뭐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됐어. 그러면 없던 사람이 있으면 너무 감사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안 됩니다. 사람은. 없다가 있으면 교만해져 버려. 이상하죠. 왜냐면 없다가 있으니까, 갑자기 횡재 만났잖아요. 횡재 만나면 감사해야 될 일 아닙니까? 복권보다 감사한 일이라고요.
근데 감사하면 되잖아요. 근데 내가 언제 그랬냐 싶더만.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답니다. 남을 보면 무시가 되는 거예요. 자기는 고생 고생해 갖고 지금 성공을 했는데, 게을러 빠져 가지고 재주가 없어가지고 점원이나 하고 있구나. 이건 무시가 안 될 수가 없답니다. 그렇다고 못나면 되냐? 못나면 세상에서 버림받잖아요. 그런데 잘났나 못 나나 다 빵점인 세계가 또 있단 말입니다. 그게 신기하잖아요.
판이 다르니까. 판이 다르니까. 물고기 앞에 가서 수영을 한다고 “나, 수영선수야. 세계적인 수영선수야.” 자랑한다고 점수 나오겠습니까? 물고기 앞에 가서 점수 나오겠냐고요. 수영 잘하는 사람이나 마지막 죽는 사람이나 물고기 앞에 가면 똑같은 점수. 다 똑같은 점수. 우리가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어요. 잘난 사람 따로 있고 못난 사람 따로 있고 그런 게 아니에요. OO해서 그런 거지. 하나님 앞에 가면은 잘나고 못난 게 없단 말이에요. 따로 없어요.
그러니까 다 영 점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영 점에서.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다 영 점에서부터 시작하잖아. 근데 그것이 지금 과학의 발전에 꼭 필요한 숫자라네요. 숫자가. 자연수만 가지고는 이 과학을 계산할 수 없어. 무리수라든가 뭐 그것이 없으면 과학이 안 돼. 과학이 안 돼. 그러니까 쓸 데가 따로 있어요. 따로 있어요. 천국에 꼭 쓸데있는 사람도 있고 쓸데없는 사람도 있고,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도 있고 세상에서 필요치 않은 사람도 있고,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그럼 다 좋지요.
세상에서 나를 환영하고 하나님도 나를 환영하고 이게 요즘 기독교인들의 소원이잖아요. 세상은 세상대로 잘 살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 대로 잘 살고 이것이 지금 기독교인들의 소원입니다. 당연히 안 그렇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기왕이면 세상에 잘 살고 하나님 앞에선 또 더 잘 살고 이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근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이 모양이 된 거지요. 마음대로 안 되니까. 그래도 결국 영점이니까. 여기 와서 밖에는 위로받을 데가 없어요. OO 얻을 데가 없어요. 다시 날 데가 없다고요. 새 인생을 살 데가 없어요. 여기 오지 않으면 새로운 건 불가능해요. 세상도 이미 정해졌고요. 다 정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이러한 길을 밟아서 성공한다. 딱 정해져 있습니다. 요행으로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성공 못 할 사람은 성공 못 합니다. 그중에 성공한 사람은 정말 1000만 분의 하나. 1000만 분의 하나.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도전하고 세상을 살겠어요? 나는 그게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데는 도전하고 싶어도 도전할 수가 없어요. 장가나 가야 할 텐데 이런 사람이 어디다 도전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이 안 주시면 어떻게 내가 도전하겠어. 집사람 하고 내가 결혼한 것도요, 내가 결혼하자 한 게 아닙니다. 자기가 와서 하나님 뜻이라고 하자고 하니까 내가 한 것입니다. 어쩌면 어쩔 수 없이 한 거예요. 나도. 그냥 그런 사람이 없었으니까. 내 보기에 좋은 사람 많았죠. 근데 하나님 뜻이라고 기도하고 왔다는데 내가 할 말이 없더라니까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내가 이거 거역하면 큰일 나겠네.” 이 생각만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분수대로 사는 것이 편한 일입니다. 자기 분수대로 자기 생긴 대로. 발이 하나밖에 없으면 하나로 살아야 되고, 손이 하나밖에 없으면 하나로 살아야 돼. 그 분수대로 내가 하나님께 쓰이면 됩니다. 어찌 됐든지 간에 최종적으로는 내가 하나님께 쓰이냐 못 쓰냐지, 뭐 팔이 세 개라고 사람이 날아가겠습니까? 팔도 없고 손도 없는 사람 내가 봤어요. 팔도 없고 발도 없어요. 몽굴이. 몽굴이. 그래도 5키로 끌려다니며 살더라고요. 안 죽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어쩔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살아야지.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뭐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면 고생만 하지. 욕만 얻어먹고. 그래서 나는 편하게 삽니다. 편하게. 내 분수대로 살아서 편합니다. 뭘 좋은 게 많아서 편한 게 아니고요. 내 분수대로.
자 오늘 하고 싶은 말은 끝이 없습니다. 끝이 없어요. 우리 이런 얘기 해도 재밌잖아요. 그렇죠? 아니 박수 한번 쳐봐요. 재미있으면 박수치고 재미없으면 치지 말고. 예, 일부러 박수 칠 것도 없어. 그냥 재미있으면 치고, 재미없으면 안 치고 이게 맞는 거죠. 과거 어떻더라도 그것도 묻지 마세요. 안 잘못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잘못 해본 사람이죠. 한 번도 잘못 안 해본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근데 그것이 오히려 약이 돼가지고 자기 인생을 알게 된 날이고, 하나님을 만난 날이 오잖아요. 그러면 그것도 감사한 일이에요. 내가 잘못한 거 되가지고 하나님 만날 기회를 만났다. 그러면 감사한 일 아닙니까? 나는 내 약함으로 인해서 또 내 잘못한 걸 인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더욱 깊어진 것에 대해서 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한 사람도 낙심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이러든지 저러든지 하나님이 쓰신다니까요? 결국은 들어서요. 이삭도 들어서고 야곱도 들어서고 요셉도 들어서고 다 쓰니까 다른 사람이 돼 버리잖아요. 아무리 잘생겼어도요 하나님이 안 쓰면 헛 일이라니까요? 자기 혼자 미인이면 뭐합니까? 아무도 싫다는데, 자기 혼자 미인이면 뭐합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도 많은 사람이 좋아하면 그게 더 좋은 거 아니겠어요.
우리 그래서 우리 생긴 대로 삽시다. 생긴 대로. 뭐 잘난 체할 것도 없고 뭐 특별히 OO할 것도 없고 다 은혜잖아요. 아는 것도 은혜, 모르는 것도 은혜. 다 은혜라니까요? 모르는 것도요 모르면 겸손해지잖아요. 모르니까 겸손해져요. 겸손할라고 해서 겸손한 게 아닙니다. 겸손해져버려요. 모르니까요. 근데 모르면서 겸손한 체 할라면 그건 정말 어려운 겁니다. 정말로. 그럼 계속 거짓말해. 참말 못 해 그러면. 그런데 모르는걸 모른다면 참말이잖아요.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잉. 그러니까 몰라도 참 되고 알아도 참 되면 돼. 참되지 않는 건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겁니다. 돌아서면 후회가 되고 그렇게 된다고요.
근데 참된 것은 감사해요. 합력하여 선을 이르느니라. 야, 난 요번에도 그런 걸 경험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르는구나. 평신도 교회. 나 이거 전에 생각한 일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갈 길이 그거밖에 없더라고요. 신학이 있으면 갈라지는구나. 너도 봤고 나도 봤지. 그러고 나니까 남는 게 뭡니까? 평신도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순간 평신도교로 이런 말이 나왔다니까요? 미리 계획한 거 아닙니다. 미리 계획했으면 많이 연구해야겠죠. 그런 면에서. 근데 한 번도 연구해 본 적도 없고, 내가 관심 가져본 적도 없어요. 또 해도 안 됩니다. 되는 게 아닙니다. 해볼려고 한 사람도 있는데요. 안 됩니다. 무교주의자들은 다 그렇게 해볼려고 하는데 안 됩니다.
우리도 몰라요.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그것도 난 잘 모릅니다. 진실하게만 가면 하나님께 이렇게 쓸 수도 있고 저렇게도 쓸 수 있지 않겠어요. 모르면 모른다고 할 말만 한다. 얼마나 쉽고 편합니까? 모르면 모른다 할 수 있는, 이것처럼 편한 게 없습니다. 아 편안하더라니까요? 몰라서 그렇다는데. 야, 아무 거리낌이 없어. 당연히 그렇지 뭐. 당연히 그렇지 뭐. 당연히 그렇지.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거짓말한 게 부끄러운 거지. 모르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무식한 게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유식한 체 한 게 부끄러운 거지. 안 그렇습니까? 내 말이 틀립니까? 아니 부끄러워 할 때는 안 부끄러워, 안 부끄러울 건 부끄러워요. 그러면서 사람이 거꾸로 산다고. 거꾸로.
내가 딱 한 시간 했네. 더 이상 할라 해도 약속을 지켜야 되기 땜에 할 수가 없구먼.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어줄 사람들이 또 누가 있겠어요. 여러분 아니면 들어줄 사람이 없어. 아니면 할 사람도 없지만, 여러분 아니면 들어줄 사람도 없어. 천생연분이요. 여러분과 나는 어쩔 수 없는 관계 같습니다. 혹시 내가 말에 실수가 있었다면 이해해 주세요. 말이란 게 참 어려워요. 똑같은 말인데 한 사람은 좌로 듣고 한 사람은 우로 들어 버리니까 참 어렵다고요. 쑥떡같이 하더라도 찰떡처럼 알아먹는 사람만 있다면 얼마나 좋아요. 나보다 여러분이 더 편안하길 원합니다. 내가 편안하듯이 여러분도 편안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자유롭듯이 여러분도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