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영이재공(문덕)
휘 문덕(文德, 1704~1784)의 자(字)는 의여(懿汝), 호(號)는 영이재 또는 춘곡(春谷)이다. 아버지 삼족당(三足堂) 휘 세보(世寶), 어머니 영광 김씨의 외아들로 1740년(庚申)에 진사에 합격했다. 공은 문중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첫째, 문중 조직인 문회(門會)를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일가 중심의 작은 모임만 있었다. 문회를 발족시키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 만들어 진 것이다. 둘째, 충렬공 묘소를 찾아 1741년부터 묘전에서 시제를 지냈다. 그리고 묘전에 비석을 건수했다. 셋째, 1759년에 위씨 최초의 족보인 기묘보(己卯譜)를 장천재에서 발행했다. 당시에는 족보의 유무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크게 차이가 있었다. 그는 후손으로 하여금 행세를 하게 만들었다.
36) 존재공(백규)
휘 백규(伯珪, 1727~1798)는 장악원정(掌樂院正) 휘 정열(諱 廷烈)의 현손(玄孫)이며, 춘곡(春谷, 또는 詠而齋公) 휘 문덕(諱 文德)의 장자(長子)로 총명(聰明)함이 절인(絶人)했다. 처음에는 경학(經學)에 주력하다가 문사(文辭)의 학문이 마음에 들지 않자 천문(天文), 지리(地理), 율력(律曆), 복서(卜筮), 병도(兵韜), 산수(算數)를 비롯해서 백공기예(百工技藝)에 이르기까지 통달치 않은 것이 없었다.
1765년(乙酉)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지도(地圖)와 지지(地誌) 역사(歷史) 및 제도(制度) 산업문물(産業文物) 그리고 서양제도(西洋 諸道) 지지(地誌)를 기술(記述)한 환영지(寰瀛誌)와 해도지(海島誌)는 물론 고금서(古琴書)를 저술하고 조선 8도의 산천, 산물, 인구, 농지 등과 시폐(時弊)와 이를 구제할 구폐(救弊) 민속(民俗) 및 원근(遠近)의 험이(險易)를 다룬 정현신보(政絃新譜)를 30세에 저술했다.
복시(覆試)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3벽(三僻)의 한계를 넘지 못해 출사(出仕)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사강회(社講會)를 조직, 향촌계도활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사성록(思成錄) 전후편(前後篇)과 자회가(自悔歌), 농가구장(農家九章), 고금예설(古今禮說), 경서조대독사차록(經書條對讀史剳錄), 시소전기서설(詩疏傳記序說) 및 잡저(雜著) 등을 저술하여 무려 90여권을 남겼으나 60여권은 현존하지 않는다.
1794년 정조 말엽 공이 68세 되던 해 서남해안의 강풍피해를 확인하기 위해 내려 온 위유사(慰諭使)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로 사용(司勇)에 제수(除授)된 후 다시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소명(召命)이 거듭됨에 따라 1796년 3월 8일 입궐, 만언상소(萬言上疏)를 올리고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허락되지 아니한 채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제수 받아 부임했다.
그러나 현정에 대한 누대의 적폐를 혁신 등으로 최하의 고과와 노병(老病)으로 사퇴(辭退)할 것을 청했지만 정조(正祖)는 그때마다 경직(京職)인 장원서별제(掌苑署別堤)와 경기전령(慶基殿令)을 내렸다. 그러나 공의 신병은 더욱 심해져 나아가지 못하고 72세로 졸하니 관산(冠山) 죽천사(竹川祠), 다산사(茶山祠), 옥과(玉果) 영귀서원(詠蘬書院), 합천(陜川) 옥계서원(玉溪書院) 등에 배향(配享)됐다.
공의 학문은 1960년대부터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후학 가운데 문학, 경학, 경세학 분야 등의 연구로 2명이 박사학위를 받았고, 9명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한편 전주대학 고전학연구소는 2010년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존재집』을 국역(전질 6권)해 출판을 완료한 바 있다.
37) 만암공(광조)
휘 광조(諱 光肇, 관북32世 1747~1820)는 참의공(參議公) 휘 창조(諱 昌祖)의 차자로 영조정묘(丁卯: 1747)에 태어나 일찍이 박학굉사(博學宏詞)로서 문명을 날렸다. 영조 51년(甲午)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정조을묘(乙卯: 1795)에 문과(文科)에 등제하여 형조좌랑(刑曹佐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유곡(幽谷), 금교(今郊) 등지의 현감(縣監)을 거쳐 동지사 배표(冬至使拜表)로 천거되어 입시했다.
그때 시월 조정사천관(朝廷使千官) 배표시(拜表時) "국약군신치(國弱君臣耻) 천한우설수(天寒雨雪垂) 산하미소왕(山河迷所往) 정절욕하지(旌節欲何之) 영능송백수(寧陵松柏樹) 향북불생지(向北不生枝)"라며 약소국 왕의 처지의 부끄러움 등을 내용으로 시음을 읊으니 왕이 크게 격려하기를 "조선문장(朝鮮文章)이 많지만 위광조(魏光肇) 한 사람만 못하다"라고 칭찬할 정도였다고 한다.
공은 초휘를 광조(光肇)라 했는데 왕이 조자(肇字)와 석여(錫汝)라는 자(字)를 하사했다. 만년에 관직을 물러나 사호(沙湖)에 살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만암집(萬庵集)이 있고, 보의설(譜疑設) 등으로 유명하니 세칭(世稱) 남유계항(南有桂巷)이요 북유만암(北有萬庵)이라 했다. 공이 남긴 유고가 다수 있을 것이다. 국토의 분단으로 살펴 볼 수 없어 참으로 아쉽다. 순조(庚辰: 1820)에 졸했다.
38) 절충장군공(계충)
휘 啓忠(1853~1931)은 장흥 위씨 가운데 조선 말기에 관직을 역임한 주인공이다. 자(字)는 도선(道善) 호는 운수(雲水)이다. 공은 증통정부호군(贈通政副護軍) 행계공(휘 樟)과 숙부인 인동 張氏 사이에서 4형제 중 3남이다. 188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888년 월선천(越宣薦)하고 1889년 효력부위수문장(効力副尉守門將), 1891년 어모장군순무영별군관(禦侮將軍巡撫營別軍官), 1892년 선략장군행용양위부사과(宣略將軍行龍驤衛副司果), 1895년 절충장군행친군별군직(折衝將軍行親軍別軍職)을 역임했다.
公의 관직 재임 시기가 조선말기인 관계로 족보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다행히 후손(성현)이 보관하고 있는 교지에 의거해 확인된 것이다. 절충장군은 정3품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다. 용양위친군영별군직(龍驤衛親軍營別軍職)은 조선시대 오위에 속한 용양위 내 군영(軍營) 군관(軍官)을 칭하며, 임금의 시위(侍衛)와 간신을 잡아내는 사무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아 행수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배(配)는 淑夫人 장흥馬氏, 淑夫人 해남 尹氏이며, 묘소는 행원 牛岩山帽岩內艮座이다.
주무세요
존재공 영이재공 만암공 절충장군공께서 나오시는군요~~,
휼륭하신 문중조상 할아버지들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