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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송재학
절벽은 제 아랫도리를 본 적 없다
직벽이다
진달래 피어 몸이 가렵기는 했지만
한 번도 누군가를 안아본 적 없다
움켜쥘 수 없다
손 문드러진 천형 직벽이기 때문이다
솔기 흔적만 본다면
한때 절벽도 반듯한 이목구비가 있었겠다
옆구리 흉터에 똬리 튼 직립폭포는
직벽을 프린트해서 빙폭을 세웠다
구름의 풍경을 달았던 휴식은 잠깐,
움직일 수도 없다
건너편 절벽 때문이다
더 가파른 직벽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탈
박무웅
나무를 통과하지 않는 계절은 없다
얼어붙은 계곡물들은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들의 몸속에
얼지 않는 물씨를 맡겨놓는다
한겨울 얼지 않는 곳은
겨울나무들의 木理뿐이다
내게 붙어있는 해묵은 옹이들
아직도 붙어있는 바스락거리는 이름들을
나뭇가지에 얹힌 늦가을 바람 털어 내듯
스스로 흔들려 스스로 떼어 내듯
모두 떨구고 겨울을 맞았으면 좋겠다
수런거렸던 올해의 말들은 다 버리고
돌아올 파란 말들도 생각 안 하고
폭설의 학기를 듣는 나무들
푸른 한때를 지나온 겨울 풍경들
돋는 이파리들은 순간을 보여주지 않지만
떨어지는 것들은 그 순간을 열어 보여준다
육탈로 보여주는 나무들의 말씀이다
업적
유안진
산으로 갔는데 강이었고
바다로 떠났는데 사막에 와 있었다
내가 가장 나다워질 수 있는 훗날 거기 찾아
거꾸로 로꾸거로 갈팡질팡 반세기
매미의, 귀뚜라미의, 알프래드 드 뮈세의
평생업적이 울음이었다 해서
헤매임도 업적이 되나요?
계란을 생각하며
유안진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뜨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뜨리면 병아리가 되지
換骨奪胎는 그런 거겠지
오만과 편견
유안진
불빛 한 점이 마주 오고 있다
충돌위험에 경고신호를 보내도 막무가내이다
무전을 쳤다 “10도 우향하라”
응답이 왔다 “10도 좌향하라”
함장은 다시 쳤다 “나는 대령이다 명령에 따르라”
응답이 또 왔다 “나는 일병이다 지시에 따르라”
기가 찬 함장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여긴 군함이다 명령 무시하면 박살난다”
응답이 다시 왔다
“여긴 고장 난 등대다 지시 무시하면 박살난다”
멱감으로 갔지
유안진
냇가 버드나무 등걸에 매미허물 걸려있고
나무 아래 풀밭에는 배미 허물 널려있어
둘이서 알몸둥이로 어딜 가서 뭘 하지?
노랑말로 말한다
유안진
신문이 빈 벤치에 앉아 자꾸 손짓한다
가 앉아 펼쳐드니 은행잎들이 떨어져 가린다
읽을 건 계절과 자연이지
시대나 세상이 아니라면서
곧
이시영
양들이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를 건너 귀가하고 있습니다
곧, 저녁입니다
대지의 잠
이시영
어제 내린 눈 위에 오늘 내린 눈이 가만히 닿았습니다 “춥지않니?”“아니, ”“어덯게 왔어?”“그냥 바람에 떠돌다가 날려서”“그래, 그럼 내 위에 누워보렴”둘은 서로의 시린 가슴을 안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호랑나비
이시영
검은점호랑나비 한 마리가 산나리꽃 위에 앉아
자울자울 조을고 계시다
자세히 보니 바람에 날개가 많이 찢기었다
나목
이시영
나무들이 잎새들을 남김없이 벗고
다가올 겨울 하늘과 늠름히 맞서다
첫눈
이시영
이 아침에도 다람쥐들은 재빨리 능선을 넘고 있겠구나
방배동 두레마을
이시영
빨랫줄엔 빨래가 없고 빨래집게 두 개가
외로운 참새처럼 허공을 한뼘씩 물고 잠들어 있다
태백산맥
이시영
머언 산맥이 파도처럼 누워있다
그러나 끝내 물결치지 않는다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봄비
안도현
봄비는
왕벛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 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여울가에서
안도현
송사리떼에게 거슬러 오르는 일을 가르치려고
시냇물은 스스로 저의 폭을 좁히고
자갈을 깔아 여울을 만들었네
송사리 송사리들 귀를 밝게 하려고
여울목에 세찬 물소리도 걸어놓았네
시냇물의 힘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송사리는 송사리는 거슬러 오르고
그때
시냇물이 감추어 둔 손가락지 하나가
물속에서 반짝, 하고 빛나네
대숲이 푸른 이유
안도현
대숲의 푸른 머리카락을 빗질하려고
바람이 대숲으로 들어가네
댓잎들이 배때기를 일제히 뒤집은 채
바람을 밀어내려고 버티네
이것 좀 봐 화가 잔뜩 난 바람이
한 손으로 대숲의 머리채 휘어잡고
한 손으로 대숲의 종아리 후려치네
대 숲이 왜 저렇게 푸르냐 하면
아으, 한 평생 서서 매맞은 탓이라네
세상의 모든 2절
이화은
동백아가씨도
연분홍 치마도 2절이 좋더라
1절에서 겨우 목정 푼 슬픔이
2절에 가서야 시리게 늑골로 스며들지요
산길 가다보면 가슴에 이름표 매단 나무들
이름 밑에 간단한 약력도 곁들였는데요
‘국수나무’가 1절이라면
‘장미과’이름보다 조금 낮은 2절이지요
1절의 그늘에 살짝이 숨어 하고 싶은 말 다하는 게 2절이지요
속치마 바람에 맨발이 부끄러운 백목련 꽃말 같은 거지요
사랑도 2절이 좋다는 말에 반짝 이슬 같은 당신은
2절의 사랑까지 아프게 다녀온 사람이지요
당신은 분명 장미과예요
개, 양귀비
이화은
개복숭아보다 슬픈 개양귀비
개살구보다 슬픈 개양귀비
개를 끌고 가는 예쁜 여자보다 슬픈 개양귀비
양귀비보다 개보다 슬픈 개양귀비
한 방울의 독이 없어
이름이 되지 못한 당신이여 나여
흔해 빠진 연애여
꽃이 피었던 자리에 비석을 세우진 말자
꽃의 심장에 아무것도 기록하지 말자
다만
개양귀비보다 더 어여쁜,
이름이 되지 못한 이름 하나가
잠시 다녀간 계절이 있었다고
독이 없어
지독히 슬픈 개양귀비
사근사근 첫눈이
이화은
눈이 온다 서울 여자처럼
사근사근사근사근
큰오빠를 홀린 서울 여자를
집안 어른들은 여시라고 했다
티마 속에 꼬리를 감추었다고 했다
발자국이 없을 거라고 했다
사근사근사근사근
서울말은 우리들 눈썹에 머리칼에
선들에 닿자마자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우리는 침을 흘리며
그녀의 입만 쳐다보았다
그녀가 울며 떠나간 날도 눈이 내렸다
면사무소 국기 게양대처럼 꿋꿋하던 큰오빠가
시든 열무 잎처럼 변한 것도
그 여시 때문이라고
눈이 온다
흰 속치마 속에 아홉 개의 꼬리를 감추고
무덤덤 담벼락에 전봇대에
오래 눈을 감고 있는 늦은 골목에
발자국도 없이
사근사근사근사근
황소
박민수
황소 한 마리 풀잎 씹으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어-흠하고 기침소리를 내어도 주저앉은 자리 그대로
씹던 풀잎 되씹으며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큰 눈 마주보니 오호라 그 속에
먼 산 그림자 달려와 무릎 꿇고 앉아 있고
어-흠하는 내 모습 메뚜기처럼 작아져
허리를 조아리고 있다
나비가 되어
박민수
햇볕 따가운 여름날
무명 옷자락의 한 마리 나비가 되네
날개 저으며 치악산 아랫마을
장다리꽃 가득 핀 들길을 날아가네
뒤따라오는 나비떼 앞장서 구름처럼 찰랑찰랑
장다리꽃 무밭을 지나 개울물 건너네
개울물 은회색 물고기 몇 마리 돌 틈새 꼬리 흔들어
유혹의 몸짓 보내네
무슨 사랑 같은 것 가슴에 담아두고 한 짓이랴만
그 눈빛 가득 물기 서려
그냥 가기 마음 아파 얼른 좌우로 날개 흔들어
물위에 그림자 던지니
고기떼 저들끼리 화들짝 놀라 웃는 소리
꺄르륵 물위까지 넘치네
애월 혹은
서안나
涯月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팽나무 아래서 당신과 백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쪽을 보는 당신의 먼 눈 울음이라는 것 느리게 걸어 보는 것 나는 썩은 귀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월에서 사랑은 비루해진다
애월이라 처음 소리내어 부른 사람, 물가에 달을 끌어와 젖은 달빛 건져 올리고 소매가 젖었을 것이다 그가 빛나는 이마를 대던 게절은 높고 환했으라 달빛과 달빛이 겹쳐지는 어금니같이 아려오는 검은 문장, 애월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처럼 달의 문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캥거루 복서의 연역
장수철
저는 캥거루입니다
캥거루이기 전의 우울한 복서입니다
복서이기 전의
질병분류코드 목록에도 없는 상세불명의 적의입니다
모형 샷건의 조준경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 속에 잠입하는
증오와 적개심의 은유입니다
6온스 글러브를 낀 선량한 유대류의 육아낭 속에
잠자던 분노의 진균들이 발아할 때
턱 밑 악하선까지 치밀어오는 동종혐오
혹은
나와 같은 존재가 지상에 둘일 수 없다는
도플갱어적 적의입니다
링을 둘러사고 환호하는 갤러리들 앞에서
지상에 오직 나 홀로임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유대류의 오랜 비가입니다
그러나 매번 여기에 만장하신 갤러리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마는
연역의 대전제입니다
질병분류코드 목록에도 없는 혼돈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언제나 인간이고
저는 늘 캥거루입니다
가출
안용태
아내가 집을 나갔다
아이가 집을 나갔다
나도 집을 나왔다
이윽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
혼자 집을 지키던 집마저
더는 외로워 못살겠다고 집을 나오자
머물 곳 잃은 해가 눈을 감아버렸다
온 세상이 깜깜해졌다
나, 그 사람 잘 몰라
이화은
친한,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잘! 모른다고 했단다
나는 아는데,
그 사람을 알 것 같은데,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내 아이가 친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나를 모른다고 딱 잡아떼면 어쩌나
등나무가 동백나무가
애기똥풀이 클로바가 구절초가 다 나를 모른다고
모르겠다고,
두통이 죽음이 외면하면 어쩌나
늙은 은사시 나무처럼 잔걱정이 많은
오늘이 며칠이었지?
무슨 날이었던 것 같은데
친하다고 생각했던 오늘이
단 하루도 모른 척 지나친 적 없던
꼬박꼬박 오늘이 나를 모른다고 한다
이제 나만 나를 부인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나도 저들과 한 통속이 될 수 있다
나를 모르는, 모르겠다는 세상과 완벽하게
친해질 수 있겠다
滿開
이나명
동 안거 막 끝내고 나오신 스님 얼굴빛 참 맑으시다
산은 산이라 깨치시고 물은 물이라 깨치셨는가?
겨우 내 무쇠 같은 검은 나무둥치를 두드려 깨고 나와
처음 햇빛 환히 머금은 흰 하늘빛으로
만개한 매화나무 아래 한참 붙들려
저 향기 그윽한 하늘 법문을 한 모금 한 모금씩 들여 마시다
완장
황상순
완장은 초등학교 때
주번완장 차 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어서
흘러내리는 완장 고쳐 올리며
못내 어색하기만 한데
임종도 못 지킨 불효 죄스러워
팔에 두른 완장이 돌확처럼 무거운데
국장님도 과장님도 완장에 기죽어
엎드려 큰절들을 하고 가네
정족리 돼지엄마 육천삼백 원
삼천동 김숙희 만 오천 원
비뚤비뚤 침 묻혀 쓴 외상장부로
자식들 공부농사 다 지은 후
빈 곳간에 알곡 들일 일만 남았는데
까만 줄 선명한 완장
마지막 선물로 주시고, 어머니
미소만 짓고 계시네
삼베완장 무거워 자꾸 흘러내리네
무녀리
이명수
삼순이가 새끼 네 마리 낳았다
두이레에 눈 뜨고 삼칠일에 귀 열리고
한 달 만에 뒤뚱뒤뚱 걷는다
강아지 사 남매, 일보리, 이보리, 삼보리, 사보리,
달포 지나 날 풀리면 남의 집에 보내야 한다
한밤중 삼순이가 새끼 한 마리 물고 내 방으로 온다
다른 놈들에 치여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일보리 무녀리,
내 곁에서 젖 먹여 재운다
惻隱之心이 菩提心이 별거냐,
그래, 삼순아,
일보리 무녀리는 네 품에 남겨두마
육남매 상머리에 언제나 1번이었던
무녀리 나,
그때 내 어미도 나를 그렇게 거두었지
표절
오세영
그믐밤 하늘엔
반짝반짝 빛나는 수천 수만 별들의
대군중집회
은하댐 건설 반대!
같은 날 밤 지상엔
손에 손에 등불을 밝혀 든 수만 인파의
야간 촛불 대시위,
사대강 사업 반대!
이별 후 2
오세영
엷은 눈꺼풀 살포시 치켜뜨고
어제는 온종일 하늘만 우르러더니
이 아침, 눈동자엔 눈물이 그렁그렁,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애처로워라
별빛 스러진 풀밭의
모란 한 송이
그림자
오세영
누가 나를 하드웨어에서 꺼내
이 풍진세상과 맞서게 했나
모니터의 커서처럼
이리저리 마우스 따라 끄을려 다니는 그림자,
편드는 반 토막,
주식은 폭락,
밤새 그녀에게 쓴 메시지는
수신 거부,
메일함은 스팸들로 가득찼다
오늘도 다시 해는 뜬다
모니터가 서서히 밝아 온다
삭막한 우주의 한구석에
오도카니 서서
한 그림자가 삶을 지고 있다
편자의 시간
임동윤
저 팔뚝에 물결치는 것은 구릿빛 파도다
불편한 길은 쉽게 평정해야 한다는 듯
사내의 구릿빛 팔뚝이 바람을 가른다
쇠망치가 허공을 후려칠 때마다
갈기를 늘어뜨린 말들이 화들짝, 깨어난다
금세 신발을 갈아 신고 달려 나갈 듯
이마에 돋는 땀방울이 차갑게 화덕을 달군다
거칠게 달려온 갈기를, 발톱 아픈 날들을
구부리고 두드렸다가 다시 펴는 망치질
저 사내의 동작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어쩌면 빠른 속도라 스스로에게 필요한 듯
발 아픈 말들이 씽씽 달릴 수 있게
힝힝대던 무쇠를 얌전한 수제화로 다듬고 있다
징이 없어서 자주 떨어져나갔던 발굽들
그래, 달리지 못한 세월은 얼마나 많았던가
잘 부리려면 제대로 손을 봐야 하는 법
울퉁불퉁한 길도 잘 달릴 수 있게, 편자는
말의 신발, 불편한 구두의 말들에게
편자를 대주는 일은 길을 잘 닦는 일이다
검게 그을린 땀범벅의 근육이
불꽃 너울대는 화덕에 시우쇠를 녹이면
망치질 손등마다 시퍼런 힘줄이 불끈 솟는다
발굽의 두께를 다스리기 위해
몇 번이고 두드리고 다시 펴는 시간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달아오른 열기가 여름 장제소를 달구고 있다
그림자놀이
임동윤
목마른 바람으로 저녁은 늘 흔들린다
하늘 흐르다가 허공으로 곤두박이는 새들
젖은 날개의 사람들이 골목으로 들어선다
어둡고도 처연한, 도무지 선명하지 않은
그림자들이 돌아오는 담벼락은 뒤숭숭하다
흩어지는 꽃잎들, 펄펄 날리는 전신주의 전단지들
대문간은 어둠으로 가득 찬다
흐느적거리는 발걸음들이 현관에 쓰러진다
아침에 본 그 얼굴이 아니다, 잔주름이다
외등 언저리는 적막이 똬리를 틀었다
가슴에 품은 꽃들이 밤이면 소멸하고
아침이면 다시 이슬에 젖는 골목
사랑한다는 말조차 거품으로 떠돌아야 한다
그리워하는 일조차 호사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다
저녁이 되어 어둡게 돌아오는 골목
보아라, 벽에 비치는 얼굴들을
선명하게 관통당하는 시간의 잔해들을
떠돌다 죽은 어둠이 골목에 즐비하다
소광리에서
임동윤
겨울하는 멱살이 붙잡혔다
침엽의 손 시퍼렇게 펼쳐든 무사들
간밤의 눈을 떡시루처럼 받쳐 들었다
몸은,
갑옷으로 붉게 무장을 했다
거친 눈보라에도
위풍당당한 저 직립을 보라
오금이 저려온다
오래 구부러진 길
구겨진 몸이 부끄럽다
마음을 내려놓는다
위선과 과체중의 몸이
저 꼬장꼬장한 물살에 씻기면서
아득히 허공에 내걸린다
소광리: 울진군 서면 금강소나무 서식지역
바람유적지
임동윤
텅 빈 외양간으로 바람만 드나든다
햇살 속을 팔팔 날아다니는 먼지들
낮게 떠돌다가 여물통에 내려앉는다
누구든 출입을 허락한다는 듯
화들짝, 열려있는 문
주인 잃은 코뚜레와
워낭이 문설주에 걸려있다
입술과 혀, 잇몸과 코
발굽과 발굽 사이 물집 잡혔던 구제역
그날, 산채로 트럭에 실려갔던
부사리의 울믐이 그림자로 남아있다
먹이 하나 없이 먼지만 자욱한 구유 속
핏자국과 짓뭉개진 배설물이
지리부도에도 없는 그림을 그려놓고 있다
아득히 울음소리만 떠도는 외양간
반쯤 기운 출입문과 부러진 말뚝 사이
연둣빛 봄볕이 발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자주 펄럭이는 천막 틈새로
초록 산이 내려와 채양을 만들면
봄볕에 젖은 날개를 터는 새들
텅 빈 외양간을 바람소리로 채우고 있다
어디선가 달려오는 소 울음 소리
손이 닿기만 해도 꽃이 필 것만 같은
외양간을 봄 햇살이 가득 채우고 있다
눈 오시는 날 1
임동윤
손바닥마당에 내리는 것들을
종일 바라보기만 하기
여리고 가는 붉은 발의 새들이 처음 밟도록
바라보기만 하기
잣나무 둘레가 바닥까지 휘어져서 찢겨져도
그냥 바라보기만 하기
찢겨져서 허옇게 뼈를 드러내며 내지르는 소리도
그윽하게 듣기만 하기
물푸레나무가 뿌리로부터 길어 올린 푸른 물들을
제 몸에 쟁이는 것을 듣기만 하기
자작나무와 박달나무가 제 몸 비워내는 소리를
절간의 풍경소리로 듣기만 하기
모든 생각이 다른 한 생각을 지우고
푸른 무늬로 일어섬을 생각하기만 하기
흰 것 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안 보이는 것이 더 잘 보이는 것이라고
뒤집어 생각하기만 하기
마당귀 무너지도록 종일 쌓여도
무심히 눈여겨 바라만 보기
팽이
오세영
문밖
매섭게 겨울바람 쓸리는 소리,
휘이익
내리치는 채찍에
온 산이 운다
누가 지구를 팽이 치는 것일까,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드디어 겨울,
회전이 느슨해질 때마다 사정 없이
오싹
서릿발 갈기는 그 회초리,
강추위로 부는 바람
하늘은 항상
미끄러운 빙판길이다
降雪 3
오세영
산간 오두막집,
굴뚝으로 한줄기 연기를 피워 올리자
지체 없이 투입되는 병력,
하늘엔 일사분란하게 하강하는 낙하산들로 온통
가득 찼다
지상에 내린 하얀 스키복의 공수대원들에게
재빨리 접수되는 겨울 산
이곳저곳 간단없이 출몰하던
멧돼지, 고라니들이 자취를 감췄다
한순간에 제압된
숲속 게릴라들의 준동
간첩
오세영
겨울 숲,
비트에 몸을 숨긴 딱따구리 한 마리
銳意
주위를 경계하며 다다 따따따 다다
난수표에 따라
비밀 암호를 타전한다
“거점 확보, 오바”
산 너머 대기 중인 봄이
예하 부대에 긴급히 내리는 명령,
진군이다
행동개시!
飛行雲
오세영
한낮
雷雨를 동반한 천둥번개로
하늘 한 모서리가 조금
찢어진 모양,
대기 중 산소가 샐라
제트기 한 대가 긴급발진
천을 덧대 바늘로 정교히 박음질 한다
노을에 비껴
하얀 실밥이 더 선명해 보이는
한줄기 긴,
飛行雲
마사히 마라
오세영
하늘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저 무수히 깜박이는 눈,
눈동자들,
지구는 우주의
거대한 사파리일지도 모른다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까
오늘도
流星의 총탄에 맞아 실신한
여린 영혼 하나,
마취된 채
지구 밖으로 끌려 나간다
저항할 틈도 없이.......
첫사랑
오세영
여름 한낮
무더위로 하얗게 굳어가는 햇빛 속에서
정적에 짓눌린 개구리 하나
첨벙,
연못으로 뛰어드는 물소리
화들짝
나른한 午睡에서 깨어나 살포시
눈꺼풀을 치켜뜨고
먼 하늘 바라보는 睡蓮의 파란
눈빛
번개 3
오세영
어둠 속에서
와장창,
하늘을 깨고 뛰어든 자객의
번득이는 칼날,
태양을 넘보는 山頂의
키 큰 路巨樹하나를 향해 날아든다
털썩
자신의 용상에서 쓰러져 나뒹구는
천년왕국
日沒
오세영
온종일 지구를 끌다가
저물녘
지평손에 누워 비로소
안식에 든 산맥
하루의 노역을 마치고
평화롭게
짚 바닥에 쓰러져 홀로 되새김질하는
소 잔등의
처연하게 부드러운 능선이여
푸른스커트의 지퍼
오세영
농부는
대지의 성감대가 어디 있는지를
잘 안다
욕망에 들뜬 열을 가누지 못해
가쁜 숨을 몰아쉬기조차 힘든 어느 봄날,
농부는 과감하게 대지를 쓰러뜨리고
쟁기로
그녀의 푸른 스커트의 지퍼를 연다
아, 눈부시게 드러나는
분홍빛 속살,
삽과 괭이의 그 음탕한 애무, 그리고
벌린 땅속으로 흘리는 몇 알의 씨앗
대지는 잠시 전율한다
맨몸으로 누워있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땀을 닦는 농부의 그 황홀한 노동,
그는 이미
대지가 언제 출산의 기쁨을 가질까를 안다
그의 튼실한 남근이 또
언제 일어설지를 안다
허공에 줄을 긋다
양균원
비가 내린다
때 앉은 눈금 띠를 따라
삼십센티 대나무 자로 세로 줄을 긋는다
한곳에 잠시라도 머물지 않게
다만 지나감의 흔적으로
줄을 긋는다
낮은 처마과 먼 산 계곡 사이
구겨지다 만 하늘
재생 용지에
살 같은 직선이 세세히 그어지면
연필심에 침을 묻혀 내리쓸 것이다
팽팽한 줄 사이 흔들리는 시공에
시를 쓸 것이다
먼 강바람에 기울지 않도록
옆 빗줄에 씻겨 흘러가지 않도록
이번엔 분명한 말씨로
허리 세우고 시선은 앞에 두고
그렇게 너에게 곧바로 가게
마음을 쓸 것이다
비가 내린다
아름다운 遊泳
양균원
누가 공간을 비어 있다 했는가
출입문이 닫히면서
무대는 열리고
어둠에 에워싸인 빛 속으로
부지런히 제 위치를 바꾸는 먼지들
분장 없이 대사 없이
더 분명한 배역으로 움직이는 것들
떼지어 헤엄치고 있다
자리를 지켜 어두워진 것들 앞에서
빛의 간지럼에 너무도 유연하게 몸을 뒤집는다
기억 속의 망각처럼
언제나 자기 안에 숨어 있다가
따라오는 스포트라이트에 몸을 돌려
갈기를 세우는 것들
뒤꿈치 굳은살처럼 발밑에 밟히다가
살아가는 나날의 틈새에 켜켜이 쌓이다가
언제고 홀로 일어나
머무른 자리에 연을 끊고
아무렇게나 떠돌 수 있는 가벼움
저 아름다운 유영
내 방에 돌아와
양균원
콧속으로 몰려드는 것들
먼지인지 열기인지 냄새인지
콧물에 엉겨 바싹 말라붙는 놈들
콧구멍을 파고 귓구멍을 후벼야 할
새벽 한시의 간지럼에서
밖은 아직 싸늘한 초봄
방바닥 구석에 접힌 요를 그대로 폈건만
마침내 누울 자릴 찾았건만
물에 적신 수건 한 장으로
며칠째 말라비틀어진 것들
그 건조함 그 목마름을 축일 순 없었어
살갗을 가르고 일어나는 각질
허공을 껴안게 하는 맨살의 기억
창문을 열 수밖에 없었어
나를 가두는 것은 쉽지 않아
한껏 열어 제친 창문 다시 한 겹의 방충망
그 작은 격자들 틈새로
달궈졌던 공기
수천의 미립자가 일시에 밀려나가더군
낸들 그 바깥 어둠에 코를 박지 않을 수 있나
그렇게 서 있는 한동안 찬 공기에
아랫배가 탈을 예고할 즈음
거기 밤하늘에 날 버린 병신 같은 달이 떠 있었어
누군가의 창문을 닮은 마름모꼴 달빛이
불 꺼진 방바닥에 어느새 누워 있었어
오늘 그 달빛을 베고 감기에 걸릴 것 같아
물속에 가라앉은 꽃무늬치마
유미애
뚱뚱한 치마가 홀쭉한 치마에게 들려주네
식당 부엌에서 여자가 젖은 달을 닦네, 늦도록
꽃의 누수를 막는 치마는 숨이 찼네 커튼 저편의 첼로 소리는 별에 가까웠고 나비의 저녁들은 쟁반 위로 피어올랐지만 그늘에 엎어놓은 달에선 생선냄새가 풍겼네 민무늬 치마에 갇힌 얼룩덜룩한 나비처럼 그녀의 기도는 한결 같았네 거품 속 여자가 마지막 달을 들어 올렸을 때 노랑 치마가 파랑 치마에게 일러주네 암소보다 표범, 백합보다 패랭이로 살아 있을 것
목덜미 푸른 생선 장수가 여자를 업고 다시 계단을 오를 때
뚱뚱한 꽃 홀쭉한 꽃 노랑 꽃 파랑 꽃 밤의 난간으로 몰려와 죄를 펄럭였네 오래된 치마를 찢었네
찾습니다
이영혜
부풀린 어깨에 가끔씩 포효소리 제법 크지만, 낮잠과 하품으로 하루를 때우는, 허세의 갈기 무성한 숫사자 말고
해만 넘어가면 약한 먹잇감 찾아 눈에 쌍심지 돋우는, 뱃속까지 시커먼, 욕망의 윤기 잘잘 흐르는 음흉한 늑대 말고
훔친 것도 좋아, 높은 놈 먹다 버린 것도 좋아, 패거리로 몰려다니길 즐겨하는, 웃음도 비열한 하이에나 말고
수천 권 뜯어먹은 지성인 척 턱수염 도도하게 으스대지만, 강자 앞에선 아첨의 목소리로 선한 초식동물인 척하는, 이중인격 비굴한 염소도 말고
아무데서나 혀 빼고 군침 흘려대며, 할 소리 안 할 소리 쓸데없이 짖어대거나 아무나 물어뜯는, 날카로운 야성의 송곳니는 유전자에서 사라져버린 지 오래인, 시중 잡개는 더욱 말고
높은 하늘 향해
한 자세로 한 몸 꼿꼿이 세운
한 향기 한 품위로 천지를 채운
저 키 큰 금강송 같은
식물성 남자 하나 찾습니다
평생 배필로 삼아
생을 다해 자취도 없이 사라져 그 몸 이룬 탄소원자 소멸해도
내 몸에 새겨진 뿌리의 기억을 놓지 않겠습니다
연락 주시면 후사 하겠습니다
縫縫
이여윈
엄마는 가끔 어둑한 바느질을 했어요
가끔 까무룩, 속셈을 뒤집어 지금까지도
집안 식구들을 꿰메고 있어요
병실에 누워서도 아픈 소리로 여전히 나를 꿰메고 있던 엄마
지금까지 내 몸에 덧입혀지고 있는 바느질의 흔적
잘 닳거나 뜯어질 부위를 빤히 안다는 듯
잔소리를 드르륵 박아대죠
내 방 책갈피 사이 춘서가 흘러나올 적에도
엄마는 바늘을 들고 있었죠
형이상학적인 바느질의 습관은 끊어진 부위를 태연히 지나가죠
집을 옮길 때에도 대못을 들고 엄마는 쫓아다녔죠 그때 나는 작약
같은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어른 말투 흉내를 내며 거울 속을 들락거리며 배시시 웃어줬어요
그러고 보니 초경도 엄마가 꿰매고
엄마 몰래 이어붙인 건 첫 남자뿐이네요
결혼도 엄마가 꿰맸고 솔기가 터지듯 아이들이 빠져나왔죠
엄마의 실로 꿰맨 나는
엄마의 첫 수선이었네요
다 풀어지고 빈 실패 같은 엄마는 여전히 길고 질긴 실타래를 풀어내고 있죠
내쪽으로 감기는 엄마의 실
나는 까무룩, 졸다 깨다 엄마가 뜯겨진 솔기를 꿰매고 있죠
김삿갓 묘에서
정일남
잔디가 허술한 묘는 관절이 아팠다
망초 꽃은 쉰밥으로 마르고
비석의 얼룩이 세월의 얼굴인 듯
나를 유심히 훑어보며 어느 땅에서 온
무슨 계열의 혈족인지를 묻는다
죄라고 생각한 생애가 陽明을 가리고
몸에 밴 노숙은 구름이 앞장서 길을 터주게 했겠다
유랑에서 野笠과 막대가 없었다면 외로웠을 행장
풍자와 골계를 뿌린 연유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홀로 찬밥 대신 더운 컵라면을 먹는다
허기진 산이 여러 겹이다
시간을 재며 흐르는 물이 자유롭기를 바랄 뿐
독대하지 못한 시대를 읽으니 늑골이 결린다
낮달이 머물다 간 숲에 산비둘기 소리 저물고
나비가 저승냄새 피우다 간다
隱居地 2
정일남
우편집배원이
솔부엉이 우표가 붙은 서한을 주고 간다
어느 詩社가 나를 찾아준다
솔부엉이가 용케도 번지를 알고 왔다
야생과 손잡은 일상이 유배인 듯 살아왔으니
원시의 멧새가 날아와
내 귀에다 비색 음을 채운다
내 은둔이 만개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움집으로 왔던 길이 서둘러 비구니 따라 산 속으로 가버렸다
그 길로 인기척은 오지 말거라
흰 수건 두른 낮달만 오거라
칡꽃이 필 때는 거기에 만족하고
시드는 것을 생각지 말자
내가 바라는 피안에도 달이 뜨면 좋겠다
멧새가 무덤을 노래하다 저승 쪽으로 가버렸다
숨어 사는 번지가 세상에 알려질까 두렵다
물북
김선태
아무래도 저수지 속에는
손가락으로 가만 건드리기만 해도
바람의 입술이 살짝 닿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 입을 점점 크게 벌리는
그런 여자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여자가 커다란 물북을 끼고 앉아
한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세게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
느리고 둥근 선율을 피워 올릴 것이다
저수지의 心琴을 온통 울리는
저 정중동의 물북!
네가 처음 내게로 건너왔을 때
둥둥,
내 마음의 심연이 저러했을 것이다
아아,
혼자서 갇혀 울던 유년의 다락방
벙어리 냉가슴이 또 저러했을 것이다
저 절창으로 하여 오늘
고요한 갈대숲 전체가 아스스 수런대고
수면에 비친 햇빛이며 달빛까지도
잘게 흐느끼며 전율하는 것이다
장미와 주먹
김지녀
오늘밤은 길어서 구부리기에 좋다
끝을 잡아 돌리니까 밤은 잘도 돌아 서른 번째 밤은
주먹이 되고 우리를 향해 멈춰 있다
좀 투박하고
비어 있지만 마음에 든다
주먹을 두 손으로 감싸고
체온을 조금 나누어 주었을 때
장미가 피었다 서른한 번째 밤이 되기 전에
장미, 장미, 장미가 피어서 장미의 밤으로
서른한 번째 밤은 아름답고
시들어서 고요해
구부러진 밤,
그 속에 웅크려 도취된 밤,
주먹은 조금 더 커져 있다 오늘밤은 길어서
촛농이 흐르고
목이 마르고
편지를 써야지 죽어가는 것들을 잘 기억하도록
병에 걸린 나무에 기대어
나무의 마지막 숨소리를 들어 주어야지
오늘밤, 장미는 다시 필 거야
무거움을 버리고
차가운 주먹을 펼 거야 우리를 향해, 다시
첫 번째의 밤이 길어지고 있다
홍어
오태환
쐐한 薄荷잎 향기가 쓸쓸했다 썩은 두엄더미와 썩은 볏짚 속에서 삭힌 한 철 내내
비뚜로 구겨진 채 검게 빈 구강, 아직 선득선득한 배지느러미, 방패연같이 납작하고 흐린 몸피, 미늘 같은 가시가 돋친 꼬리, 울금빛 애까지 샅샅이
항구의 그림자처럼 어두워졌겠다 항구의 그림자에 항구의 그림자가 포개진 것처럼 얻워졌겠다
불완전연소의 허기
콧속과 인후를 양잿물에 재 놓은 것 같다
뱃살 한 점에 미나리를 얹고 양념간장을 찍어 입안으로 가져 간다 그러니까 소주잔을 곁들인 무심한 젓가락질은
다만 그것의 쓸쓸함과 내통하거나, 그것우의 어둠에 독하게 부역하는 일
이 숨죽인 식욕을 채우는 저녁나절, 눈발 날리는 항구의 저녁나절
거미집
장현우
이른 아침 매실나무들은
군데군데 커다란 고지처럼
하얀 실타래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슬방울도 방울방울 매달렸습니다
햇살에 방울방울 눈부신 거미집,
환하게 불 밝히는 그 집에 세 들고 싶어
바람도 서성이다
그 집 대문을 두드립니다
산골짝이 일제히 반짝입니다
백로에서 한로까지
정수자
흰 이슬을 찬 이슬로 수식어를 다듬는 건
시간의 기색 위에 소름을 앉히는 일
먼 별의 명도를 재며
백로가 털을 고르듯
몸에 익은 온도의 관형어를 바꾸는 건
기와 색을 탐하는 오래된 습관이다
제 별의 채도를 높이며
가을의 샅을 헤매듯
눈 감은 채
정양
이발소 거울 앞에 앉으면
내 얼굴 민망해서 눈이 감긴다
가위 소리를 눈 감고 듣는다
가위 소리 멎어도 눈 감은 채
가죽 띠에 면도날 슥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망나니 칼춤 같은 게 눈두덩으로 주둥이로
귓바퀴로 목덜미로 스치는 걸 짐작만 한다
얼굴에 찰삭 붙인 화장지 때문에
안마 받을 때는 더구나 눈을 뜰 수가 없다
능숙한 손길에 속속들이 몸을 맡겼다가
머리 감으려면 또 눈을 감아야 한다
길든 짐승처럼 두 손을 무릎에 놓고
검은 비닐보자기 두르고 목을 한껏 늘어뜨리고
익숙하게 눈을 감는다 아무래도 나는
눈 감으러 이발소에 오는 것 같다
목을 치기 전에 머리빡을 이렇게
몇 차례나 시원하게 박박 감겨주는
착하고 솜씨좋은 망나니는 없었을까
오랏줄에 묶인 채 눈 감긴 채
원통한 목이 뎅겅 잘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눈 부릅뜨고 싶었을 머리통들이
여기저기 피범벅으로 뒹구는 게 보인다
박박 감아주는 손길에 머리통을 맡기고
눈 부릅뜨지 못한 일들을 눈 감은 채 헤아린다
손에 대한 예의
정호승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을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을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책을 쓰다듬고
어둠속에서도 노동의 굳은살이 박힌 두 손을 모아
홀로 기도할 것
극치
고영민
개미가 흙을 물어와
하루 종일 둑을 쌓는 것
금낭화가 핀 마당가에 비스듬히 서 보는 것
소가 제 자리의 띠풀을 모두 먹어
길게 몇 번을 우는 것
작은 다락방에 쥐가 끓는 것
늙은 소나무 밑에
마른 솔잎이 총총 녹슨 머리핀처럼
노랗게 쌓여 있는 것
마당에 한 무리 잠자리 떼가 몰려와
어디에 앉지도 않고 빙빙 바지랑대 주위를 도는 것
저녁 논물에 산이 들어와 앉는 것
늙은 어머니가 묵정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것
어스름 녘,
고개 마루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우체부가 밭둑을 질러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는 것
독도
송수권
저기 난바다 고깔모자 하나 떴다
일찍이, 아킬레스건 같은 우리 발뒤꿈치의 섬 이백 리 물길 흘러
대화퇴 어장에서 한밤중에도 불 밝혀
울릉도까지 울릉도 지나 포항까지
또는 묵호항, 삼척, 울진항까지 신바람 나면
아강발 뒤꿈치 상무 끈을 돌리는 섬
고깔모자 하나 떴다 우리 밥줄,
첫새벽 찬란한 햇빛이 오면 난바다 난장질로
밍크고래떼, 귀신고래떼 한 배 가득
오징어떼, 새우떼, 멸치떼 몰아다 퍼붓는
비로소 동해를 동해이게 한 섬
한겨울에도 방한복 외피가 되어
우리 심장에 피를 뛰게 한 섬
아, 어린 잔칫상머리 재롱둥이 같은 섬
저기 고깔모자 하나 떠 있다
백색 어둠
유안진
내 눈은 자주 햇빛으로 캄캄해지곤 한다
내 눈은 자주 어둠으로 밝아지기도 한다
햇빛에는 낯설어 겁먹고 눈멀어도
어둠은 빛깔과 냄새까지 친숙하고 다정해
모든 밝음은 어둠에서 태어나고
어떤 어둠에서도 빛은 있기 마련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이치 그 높이에 기대어
그 안자락에 포근히 안도하고 싶은데
나는 늘 내 두려움이 두렵지
최대치로 치솟아 눈멀어버리는 햇빛 공포도
한밤중에는 가라앉는 밝아지는 눈으로
정오와 자정을, 웃음과 울음을 갈팡질팡
거꾸로 로꺼구로 살다 말다 하느라고,
소금
오세영
왜 굳이
소금을 치는 것일까
인간은 음식에
소금을 쳐서 먹는다
김치나 젓갈에
소금을 듬뿍 치는 것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함인데
그 무엇을 저장할 것이 있어
인간은
자신의 내장을 소금으로
저리는 것일까,
곰이나 늑대
혹은 꽃이나 풀을 보아라
그들은 결코
소금을 먹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인간이여,
네 밥상의 소금을 줄여야 한다
슬픔의 저장은 눈물을 만들고
기쁨의 저장은
상처를 만드는 것
꽃이나 나무의 핏줄에는
그 어디에도 고혈압이
없지 않은가
소금이 온다
김주대
소래 갯골 폐염전에 남아있는 소금은
평생 물을 그리워한 바다의 유언이다
북서풍이 말려놓은 문장 속에는
턱뼈를 꽉 물고
떨리는 손목으로 써내려간 각진 어휘들
천년을 뒤척이다 뭍에 오른
지조 높은 고독의 결정체가 보인다
부패한 시속을 염장하던 폐염전에
서해의 유지를 받든 염부의 가래질과
순장된 햇살들
지금도 북서풍을 가로질러 무너진 토판 위로
유언은 서해에서 하얗게 문장으로 온다
죽어도 못 잊겠다는 그 말
내소사
도종환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백의관음보살좌상 눈동자 속 눈부처로 있었으므로
단청 지운 맨 얼굴을 사랑했으므로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가
깊고 긴 숲 지나
요사채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
능가산 품에 깃들어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했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그의 오래된 內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그가 왜 직소폭포 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곁에 사월 꽃등 행렬 가득했으므로
그이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해 기울면 그의 그리움이
어느 산기슭과 벼랑을 헤매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포包 하나가 채위지지 않은 그의 법당이
몇 백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을 모르면서
까맣다
김선아
꽃 진 자리를 문질러 본다 적막의 뒷모습이 주르륵 밀린다
뜨거운 호흡 지나간 혈관마다 눈물이 가라앉아 까맣다
버림받은 자가 가엾으니까, 떠나간 자가 남겨놓은 체온이 저러할 듯 싶다
손톱 밑에 못 박힐 때 피어나는 빛깔 같은
꽃잎 하나,
적막의 뒷모습에 말라붙어 있다
마저 문질러 본다
눈이 내렸으면
조영수
잎을 모두 내려놓은 겨울나무들이
마르지 않은 새소리를 얼른 집어 들고
수묵화를 그리고 있는 산허리에도
시를 읊고 있는 초당 소나무밭이며
시를 읽어야 할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어둡고 두터운 그림자 숲에도
흙 묻은 발 씻지 못하고 물러서서
가슴만 쥐어뜯다 얼룩져버린
아버지 적 풍경화 구석구석에도
내 울먹임이 시가 되지 못할수록
반가운 물빛으로 맞아주는
잠이 덜 깬 경포 파도끝에도
새
오정국
여전히 불투명한 피의 술잔처럼
국경을 넘어가는 두어 가닥 전선처럼
삼복염천의 태양을 입에 물고 간다
밭고랑을 움켜쥔 옥수수 발톱처럼
전망 좋은 들녘의 낙뢰 맞은 나무처럼
무너지면서 견디는
죽음의 힘으로
저의 족쇄와 사슬을 발목에 걸고 간다
혹한기 훈련의 낙오병들, V자의 비행편대를 이룬 채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의 빗줄기를 기다려
일제히 꽃을 피우는
사막의 선인장처럼
삽시간에 백리를 달리고 천리를 뻗는다
백리와 천리를 한 걸음으로 묶는다
사막의 꽃처럼
천 년 전에도 만 년 전에도 지났던 길을
낙타와 두개골과 양피지를 굴리며 간다
그렇게 날아가서 다시 모이는 곳
지상의 모든 책이 불탄 자리다
한 광주리의 평화
윤향기
베란다에 펑퍼짐하게 앉아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긴다
흐릿한 연애감정처럼 불투명한 오후가 똑! 부러진다
길게 이어진 겉껍질이 사라지기 싫은 기억마냥 또르르 말린다
죽을 것 같은 고통스런 욕망의 속살이 내게도 있었던가
하늘의 제비와 땅위의 꽃뱀을 과장없이 바라보고
눈부신 청춘들을 부러움없이 아름답다 말한 적은 있었던가
며칠이 지나도록 빠지지 않을 진액 물든
손톱은 무엇을 위해 무수히 나를 벗기는가
막연한 감정으로부터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조금은 쓸쓸하고 무시로 외로운 날들이 간다
모든 것 물들이고 많은 것 털어내고 겨울 입구에 들어선 나무야
넌 알몸인 채로 평화 속으로 입적하는구나
떠나거라 진분홍인지 진감청인지 모를 모잘 것 없는 욕망아!
난 한 광주리의 뻣뻣한 평화처럼 12월을 견딜련다
마포 산동네
이재무
늦잠 자던 가로등
투덜대던 눈을 뜨고
건넛집 옥상 위
개운하게 팔다리를 흔들며
옥수수 잎새
낮 동안 이고 있던 햇살을 턴다
놁이에 지친 아이들 잠들고
한강을 건너온 달빛
젖은 얼굴로
불 꺼진 창들만 골라
기웃거린다 안간힘으로 구름을 밀며
바람이 불고
일터에서 돌아오는 남도의 사투리들
거리를 가득 메운다
하나둘 창마다 불이 켜지고
소스라쳐 빨개진 얼굴로
달빛 뒷걸음질친다
비로소 가는 비 맞은 풀잎처럼
생기가 돈다, 마포 산동네
밤에 우는 개구리
이재무
별꽃이 무논에 무리져 피면
개구리 울음 소리는 논두렁을 걸어나와
팽나무 뽕나무 미루나무의 어깨에
주렁주렁 열린다
바람이 불면 울음의 열매들은
아람처럼 무게를 못 이겨
다시 밤 화장 고운
별꽃의 적삼 속으로 파고들고
파고들면서 울음의 폭과 깊이를
더해간다 더러는 집집마다의
늦은 밥상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가
된장국 속에 손을 찌르거나
김칫국 속에 발을 담그기도 하면서
우리가 숟가락으로 울음을
떠먹는 동안 울음을 또
애절한 음향의 날개를 달고
담장 안팎을 곡선으로 넘나들며
마음의 현을 튕기곤 한다
그리하여 울음이 닿는 물건 모두를
축축이 적셔놓는다
잘생겼지요?
맹문재
돛이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마음이 툭 던지는 것이었다
그제야 눈썹이 보였다
먼 길을 항해하는구나
꿈을 달고 가는구나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맹문세
冊이란 한자를 찾다 보니
부수로 경(冂)이 쓰이는 것을 알았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을 邑이라고 했고
읍의 바깥 지역을 郊라고 했고
교의 바깥지역을 野라 했고
야의 바깥지역을 林이라 했고
림의 바깥지역을 冂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책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은
내 시야가 닿기 어려운 거리이다
나는 책을 읽어서는 세상을 볼 수 없다고 믿어왔는데
책의 경계 안에
산도 강도 들도 짐승도
사람도 시장도 지천인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칸트는 평생 동안 백 리 밖을 나가지 않고
서재에서 보냈다고 한다
결혼하지 않고
시계와 같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벌써 백 리 밖을 벗어났고
들쑥날쑥 살아가고 있으므로
나는 책을 읽었다고 말하면 안 되겠다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책이 넓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보이는 데까지만 걸어가야겠다
시인
맹문세
당숙이 나를 한 여자 앞에 앉혔다
소위 큰손이라는 이였다
집을 수십 채 가지고 있기에
이번 일을 잘하면 기회를 잡는다고 했다
당숙은 시인을 모르면서
조카가 대단한 글을 쓴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다가
몇 다리 건너 아는 여자에게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없는 집안에 태어나 집 한 채를 가지지 못했다고
조카를 안쓰럽게 여기다가
마침내 좋아하는 것이다
부동산 전술가인 여자는
정계로 진출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문학박사이고 대학교수인 점을 얹어
자신의 자서전에
집 한 채를 얹겠다고 했다
당숙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시인의 손을 잡았다
별 닦는 나무
공광규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 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되나
당신이라는 별에
아름답게 지고 싶은 나를
운장암
공광규
풀 비린내 푸릇푸릇한 젊은 스님은
법당 문 열어놓고 어디 가셨나
불러도
불러도
기척이 없다
매애
매애
풀언덕에서 염소가
자기가 잡아먹었다며
똥구멍으로 염주알을 내놓고 있다
병산습지
공광규
달뿌리풀이 물별 뜬 강물을 향해
뿌리줄기로 열심히 기어가는 습지입니다
모래 위로 수달이 꼬리를 끌고 가면서
발자국을 꽃잎처럼 찍어놓았네요
화선지에 매화를 친 수묵화 한폭입니다
햇살이 정성껏 그림을 말리고 있는데
검은꼬리제비나비가 꽃나무 가지인 줄 알고
앉았다가는 이내 날아갑니다
가끔 소나기가 버드나무 잎을 밟고 와서는
모래 화선지를 말끔하게 지워놓겠지요
그러면 또 수달네 식구들이 꼬리를 끌고 나와서
발자국 꽃잎을 다시 찍어놓을 것입니다
그런 밤에는 달도 방긋이 웃겠지요
아마 달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날은
보나마나 수달네 개구쟁이 아이들이
매화 꽃잎 위에 똥을 싸놓고서는
그걸 매화 향이라고 우길 때일 것입니다
짧은 시 놀이
공광규
내가 아는 가장 짧은 시는
프랑스 시인 르나르가 쓴
[뱀]
“너무 길다”
내가 아는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배]
“고프다”
다른 노동자는 이렇게 맞장구쳤다
[돈]
“없다”
햇살의 말씀
공광규
세상에 사람과 집이 하도 많아서
하느님께서 모두 들르시기가 어려운지라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거실 깊숙이 햇살을 넣어주시는데
베란다 화초를 반짝만짝 만지시고
난초 앞에 앉아 휘청 몸무게를 재어보시고
기어가는 쌀벌레 옆구리를 간지럼 태워 데굴데굴 구르게 하시고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도 환하게 만지시고
컴퓨터와 펼친 책을 자상하게 훑어보시고는
연필을 쥐고 백지에 사각사각 무슨 말슴을 써보려고 하시는지라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귀를 세우고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햇살도 함께 누워서 볼과 코와 이마를 만져주시는지라
아! 따뜻한 햇살의 체온 때문에
나는 거실에 누운 까닭은 잊고 한참이나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햇살이 쓰시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는지라
“광구야, 따뜻한 사람이 되어라”
명편 名篇
복효근
채석강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마늘촛불
복효근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바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어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손톱을 깎으며
복효근
톱을 활처럼 휘어 놓고
바이올린을 켜듯이 톱을 연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가 톱에 새겨진 나무의 울음을 불러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톱질을 하다보면 듣는다
나무가 운다
나무를 베어내고 나면
제 가던 길을 마저 가려고
잘리우고도 봄이면 다시 안간힘으로 밀어올리는 여린 싹
그 푸른 울음을 기억한다
톱인들 그 울음 기억하지 않겠는가
나무를 자르다가 문득
놓치듯 톱을 놓고 보니
손톱
발톱
애초부터 내 사지가 톱이었음을
내 온몸이 톱이었음을 깨닫는다
얼마나 많은 것들의 길을 나는 잘라왔을까
할퀴고 베어버렸을까
며칠 새 길어난 손톱을 깎는다
날 선 톱날들을 깎아내며
내가 할퀸, 자른, 걷어차버린 인연의
길 잃은 푸른 웃음들을 듣는다
合一
복효근
그 희고 눈부신 소식을 그냥 받을 수 없어서
처음 오는 눈을 제 체온으로 녹여
몸을 씻고,
더운 몸을 식혀
눈의 몸에 온도를 맞춘 다음에야
바위는
온몸으로 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섬’의 동사형
복효근
동사 ‘서다’의 명사형은 ‘섬’이다
그러니까 섬은 서 있는 것이다
큰 나무가 그러하듯이
옳게 서 있는 것의 뿌리,
그 끝 모를 깊이
하물며 해저에 뿌리를 둔 섬이라니
그 아득함이여
그대를 향한 발기도 섰다 이르거늘
곡진하면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그 깊이가 섬과 같지 않으면
어찌 사랑이라 하겠는가
태풍이 훑고 가도
해일이 넘쳐나도 섬은 꿈쩍도 않으니
섬을 생각하자면
내 모든 꼴림의 뿌리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어
그래, 명사‘섬’의 동사형은
‘사랑하다’가 아니겠는가
아침
복효근
새벽비가 늙은 감나무 잎사귀 하나하나를
다 씻어놓으니
감나무는 잎사귀, 잎사귀 제 귀마다에
햇살에 말갛게 행군 첫 꾀꼬리소리를
가득
한가득 쟁여 넣는지
잎사귀 그 둥근 귓바퀴에
무슨 보석 귀걸이인 듯 이슬방울이 찰랑찰랑하다
이제 늙은 감나무는 열예닐곱 청춘처럼
어디 뵈지도 않는 꾀꼬리소리와 머언 먼 태양에게도
푸른 손을 흔들어 뵈는데
저들의 수작에 어쩌자고 나는 끌어들여서
늙은 감나무 잎사귀를 다 채우고도 그대로 남은
저 햇빛 범벅 푸른 우주의 음률을 내 두 귀 가득 채우는가
내 뇌혈관 맑은 실핏줄까지가 아릿하고 또 말갛게 틔어 오는데
그 바람에
여보, 뭐해 찌개가 졸아서 타잖아
어쩌고저쩌고
이른 아침 듣는 아내의 지청구도 꾀꼬리 쇠만 같았다
마침표에 대하여
복효근
문장을 완성하고 마침표를 찍는다
끝이라는 거다
마침표는 씨알을 닮았다
하필이면 네모도 세모도 아니고 둥그런 씨알모양이란 말이냐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뜻이다
누구의 마침표냐
반쯤은 땅에 묻히고 반쯤은 하늘 향해 솟은
오늘 새로 생긴 저 무덤
무엇의 씨알이라는 듯 둥글다
또 하나의 시작이라는 거다
늙은 시인의 초상을 위한 에스키스
이건청
짠 바다였네 누구도 안 보이는 거기 암초가 있고, 그 암초가
그리움을 심해에 쌓고 있는 걸 알지 못했네, 암초 위에 이는 작은
포말이 암초의 마음인 것도 알지 못했네, 부서지는 흰 포말이
무인등대 하나쯤으로 서서 해 뜨고 해 지는 세상 바라보고 싶은
암초의 마음인 걸 아무도 알지 못했네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몰랐네 무인 등대 하나 세우고 해 뜨고 해 지는 세상으로
가고 싶어 하는 암초의 마음인 걸 알지 못했네 암초 하나 짠
바다에 잠겨있었네
혈穴
이건청
아침에 창을 여니 형광살충기기 밑에 죽은 벌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벌레들은 밤새 푸른 형광 속으로 날아들어 감전선에
닿아 죽었다 날개가 있는 것들도 그렇게 죽었다
말향고래를 찾아서
-고래기름
이건청
불이 된 말향고래를 본 적이 있다 심지에서 타고 있었다 네가 밝히는
불빛 속에서 산 하나가 무너졌던가, 할미새를 불렀던가 파도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창가에서 타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향고래를
죽여 기름 저장 탱크에 담았다 고래 기름에 심지를 박았다 북극성을 따라가다
보면 불빛은 흐려지고, 흐려진 세상에 길들은 자꾸 지워지곤 했는데,
불이 된 너를 본 적이 있다 말향고래여, 기름이 된 너를 본 적이 있다
기름이 된 네가 거기 있었다 호야 속에서 타면서 탁자를 밝히고 있었다
민들레꽃이 피었던가 이슈마엘은 집을 떠났던가, 고래잡이 항구 난타게이트에서 녹슨 배를 탔던가, 아직 싸락눈도 비치곤 하는 공장앞, 70미터 굴뚝 위에서
밤을 지새는 ‘사람’들에겐 빛이 아니라 더운 열로 타올라다오 호야 속에서
불로 타서 언 사람들 손이라도 녹여다오
누이의 방
전기철
아내를 따라 백화점에 갔다가
아내가 0이 너무 많이 달린 옷을 집으며 나를 힐끗하기에
어떻게 우리 형편에 그렇게 배짱이 좋으냐고 쏘아붙이고는 휙 나와 찬바람 속을 걷는데
여동생의 얼굴이 몇 십 개의 동그라미로 어른거린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전세금이 올랐는데 빌릴 데가 없다며
0을 모두 말하지 못하고 두 장을 얘기하기에
내가 이천이냐고 물으니
깜짝 놀라며 0을 하나 빼고
다섯장이 올랐는데 어떻게 두 장 안 되겠느냐고 하던 누이
0을 하나 더 빼고 보냈더니
고맙다고 수십 번도 더 한 누이
어머니에게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고 한 누이
이혼하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팔십만 원짜리 간병인으로 살아가는 누이
아내는 저만치
까맣고 조그만 0을 달고
하나짜리 0을 달고 수많은 0들 사이로 뒤따라온다
둘이서 말없이 지하철을 타는데
그날따라 지하철은 왜 그렇게 롤러코스터인지
앞자리에 앉은 까만 0들은 또 얼마나 무참히도 찌그러져 있는지
오빠, 물속에서 누가 오래 참을 수 있는지 내기할래?
백만 원이다!
피튜니아
전기철
외래종 식물이 점령해버린
서울에서는
쉽게 미로에 갇힌다 나는
발기부전에 시달리거나 알코올중독에 빠지다가
포르노에 눈을 박는다
하나님조차 대낮부터 술에 취해 햇빛과 비를 팔러 다니는
과장된 도시
머릿속에서 태어난 애완용 아이들의 은어가 뛰노는
광화문 계곡에서는
온갖 예언과 미신이 떠돌아다니고
유령들의 이념 논쟁이 끊이지 않아
고장 난 시계를 깨워 당직을 서게 한 후
소설 속 인물들이 행불자로 떠도는 물구나무 선 거리에서
나는 위장 전입한 사람처럼
벤치의 명상에 빠지다가
열기를 털어내려고 뒤척이는 바람의 손가락들이 귀찮아
빈혈증이 가득한 골목으로 들어선다
거짓말을 닮은 침묵이
유리 조각 냄새를 풍기는 골목에는
조문객의 얼굴을 한 종소리가 젖은 그림자를 끌고 와
내 텅 빈 눈네 불안을 진열한다
현기증 속으로 애완용 아이들의
은어가 푸드득
망명 정부의 깃발이 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