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91권,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11월 28일(정묘)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한 안순(安純)이 졸(卒)하였다.
순(純)의 자(字)는 현지(顯之)요, 안경공(安景恭)의 아들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 좌습유(司諫院左拾遺)에 등용되고, 무인년 가을에 사헌 잡단(司憲雜端)에 배수되었다. 이때에 조박(趙璞)이 대사헌이 되었는데, 어느날 궁녀가 죄가 있어 임금이 직접 조박에게 명하여 죽이게 하니, 조박이 안순에게 고하였다. 안순이 말하기를, ‘헌부(憲府)는 법을 잡고 있는 사(司)이요, 사람을 형벌하는 관청은 아닙니다. 또 그 죄를 밝히지 않고 죽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조박이 말하기를, ‘성상의 어명이오’ 하매, 안순이 말하기를, ‘인명(人命)은 지극히 중한 것이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알지 못하고 극형에 두는 것은 의(義)에 있어 어떻겠습니까. 마땅히 유사(攸司)에 회부하여 그 죄를 밝히십시오.’ 하니, 조박이 노하여 안순의 말을 가지고 아뢰었으나, 임금도 옳게 여겨 형조에 내려 추국(推鞫)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번 중외(中外)의 관직을 거쳐, 특별히 승정원의 우부대언(右副代言)에 배수되었다가 예에 따라 우대언(右代言)에 옮겼고, 이조 우참의(吏曹右參議)에 제수되었다. 기축년 가을에 동지총제(同知摠制)에 승진되고, 가을에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로 나가게 되었다. 신묘년에 동지총제에 배수되고 기해년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발탁되었고, 계묘년에 아버지의 상[父憂]을 만났었다. 이때에 함길도에 굶주린 백성이 많이 떠돌아다니었으므로, 기복 출사(起復出仕)시켜 본도의 관찰사가 되었다가, 들어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갑진년에 호조 판서로 옮겼다가 경술년 겨울에 특별히 숭정(崇政)을 더하고 본직(本職)에 그대로 있었다. 임자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승진되고 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하였다.
을묘년에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로 옮기고, 병진년 여름에 임기가 차서 하직하니 판중추원사로 옮겼다. 이 해에 충청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어 죽게 되자, 특별히 명하여 안순을 도순문 진휼사(都巡問賑恤使)로 삼았는데, 다방면으로 잘 수습하여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그대로 본직에 두었다.
안순은 참찬(參贊)으로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모두 판호조사를 겸하였고, 전곡(錢穀)을 관장하였으며, 의금부 제조(提調)로 전후하여 8년이나 있었다. 일찍이 자손에게 말하기를,
“대저 사람이 죽으면 일이 많은데, 나의 죽음으로 산 사람을 근심시키지는 않겠다. 그러니 선영(先塋)의 근처에 나아가 죽음으로서 상사(喪事)의 폐단을 덜고자 한다.”
하고, 드디어 금천(衿川)의 별서(別墅 별장)로 이사하였다. 병이 걸렸을 때부터 임금이 연달아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세를 묻게 하고, 음식물과 의약(醫藥)의 하사가 답지(遝至)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70이었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이를 슬퍼하여 2일간 조회를 정지하게 하고, 치조(致弔)와 치부(致賻)하며, 시호(諡號)를 정숙(靖肅)이라 하니, 몸을 공순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이 정(靖)이요, 마음을 잡아 결단함이 숙(肅)이다. 예(禮)로써 장사를 지냈다.
안순은 사람의 기한(飢寒)과 질병(疾病)·상사(喪事)를 보게 되면 반드시 주급(周急:급박한 상태에 놓인 사람을 구하여 줌)하여 주고, 관부(官府)에 처할 때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들로는 안숭직(安崇直)·안숭선(安崇善)·안숭신(安崇信)·안숭효(安崇孝)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