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갯벌에 묻다(埋)
석양이 비끼는 저녁 무렵 거기 가면 언제나 그녀를 볼 수가 있었다. 시화방조제(始華防潮堤)가 쌓이면서 바다가 막히고 더 이상 물이 들어오지 않아 굳어버린 갯벌. 그리하여 이제는 갯벌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늙은 뱃가죽을 드러내고 누워 있는 쓸모없는 땅. 거기 가면 그녀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갯벌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하더라도 오후가 되면 사람들은 곧잘 그곳으로 모여들곤 했다. 물이 차고 빠질 때도 그랬지만 바다가 완전히 막힌 뒤에도 이곳 도시민들에게 나름의 휴식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는 셈이었다. 리아스식 해안을 끼고 발달한 이 도시. 사람들은 하루의 일과를 끝내는 저녁시간이면 곧잘 바닷가에 나와서 낙조와, 밀려들어 찰랑대는 바닷물과, 혹은 물이 빠져나가 광활하게 드러나는 갯벌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곤 하는 것이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바다가 막힌 뒤의 죽어 버린 갯벌이 더한 휴식공간을 제공해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말라 버린 갯벌 위를 마음대로 거닐 수가 있고, 승용차의 트렁크에 자전거 따위를 싣고 와 그것을 굴리며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와 웃음소리들을 쏟아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일까? 그렇고 그런 장사치들도 바다가 완전히 막히기 전보다도 오히려 더 늘어났다. 한적한 해안도로변에는 포장마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밤늦게까지 성업이었고, 갇혀 버린 물 위에 조그만 동력선을 띄우기도 했고, 간이음식점들까지 들어섰다. 어디 그뿐이랴. 넓게 드러난 갯벌에는 이름도 그럴 듯하게 ‘우주항공’이라고 해서 동력장치가 된 행글라이더를 여러 대 갖춰 놓고서 연신 그것을 띄워 올리는 것이었고, 근처에는 그런 저런 각종 놀이시설들까지 들어서 있었다.
어쨌거나 해가 기울 무렵 그 갯벌에 나가면 그녀를 볼 수가 있었다. 일기가 불순한 날이 아닌 이상 단 하루도 거르는 적 없이.
그녀는 언제나 말(馬)과 함께이곤 했다.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해가 비끼기 시작할 무렵이면 마른 갯벌 저편으로부터 말의 잔등에 올라앉은 채 어김없이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갈기가 화려한 백마와 함께 영락없는 한 폭의 그림이었는데, 자못 신비하기조차 했다. 뚜걱거리는 말발굽에 따라 파동 치듯 찰랑대는 긴 머리카락, 말의 양쪽 옆구리로 쭉 뻗어 내린 두 다리. 그리고 아무러한 요동에도 곧게 세워진 목과 잔잔하게 가라앉은 얼굴표정들…… 더군다나 말이 속력을 내기 시작해서 그 긴 머리칼들이 뒤로 날릴 때면 절로 탄성이 새어나오곤 할 정도였다.
그러한 때문일까? 그녀가 그 백마를 타고 나타나면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여 바라보곤 했다. 마른 갯벌 위를 거닐던 사람도, 해안도로변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던 사람도, 행글라이더를 손질하던 사람도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됐다. 백마와 함께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거닐고, 소주를 마시고, 행글라이더를 손질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순전히 그녀를 보기 위해서 갯벌을 찾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주변 포장마차에서 소주가 점차 많이 팔려나간다는 것도 결코 그녀와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면 말없이 지켜보던 사내들은 묘한 탄식과 함께 소주잔을 거푸 비워내곤 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그녀에 대해서 뭔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누구이며 어디에 사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마른 갯벌에 나와 말을 타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를 못했다. 소문과 추측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곧잘 그녀가 지독한 실연을 경험한 여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연의 상처를 달래기 위하여 그처럼 갯벌에 나와 말을 타는 것이라 했다. 그녀가 승마선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승마연습을 하기에 마른 갯벌은 안성맞춤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도 저도 아니고 단순히 승마를 즐기는 것일 뿐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약간 맛이 간 여자라고 일축해 버리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런 소문과 추측 가운데서도 실연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말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맛이 간 여자라고 일축하는 사람들도 한편으로는 그 말을 믿는 눈치였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고 또한 그렇게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타고 그처럼 나타나 그 넓고도 마른 갯벌을 가로지르다가 사라지는 그녀는 상처 없이는 나타낼 수 없는 깊은 우수가 서려 있곤 했으니까. 그리하여 사람들은 안타까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경험했을 실연을 나름대로 머릿속에 그려보곤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 특히나 크고 작은 실연의 상처를 가슴에 안고 있는 사내들을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떨어지는 해와 함께 문득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문득 사라질지도 몰랐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백마를 타고 나타나는 그녀. 마른 갯벌에 말발굽이 찍히고, 그럴 때면 불어오는 바람에 흙먼지를 날리면서 그 넓은 갯벌을 가로지르면서도 좀체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그녀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갯벌 끝의 갇혀진 바닷물 가에서 멈추어 서곤 했다. 그럴 때면 기울던 해는 으레 아득한 저편 바닷물 속으로 잠겨들기 직전이었고, 그녀는 말 잔등에 올라앉은 채 꼼짝 않고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해가 잠기는 것처럼 그녀도 바다 저편으로 잠겨들 것이라고 했다. 적어도 그렇게 사라지기를 그녀는 꿈꾸는 것이라 했다. 어느 날 문득 그녀는 사라지고, 밀려오는 어둠 속에 하얀 말 한 마리만 남아 히이잉, 울부짖는 것 말이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은, 또 내일은 그럴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해가 바다 저편으로 완전히 가라앉도록 움직이지 않던 그녀가 말 머리를 돌려 되돌아 나올 때면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랜 날이 지난 어느 순간 그 안도의 한숨은 묘한 절망으로 바뀌어 사람들, 특히나 사내들의 가슴을 후려쳤다. 해질 무렵이면 나타나곤 하던 그녀가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사내들은 해안도로변의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어스름이 깔리는 빈 갯벌을 바라보며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기다렸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소문이 나돌았다. 그녀가 상처를 잊고 결혼을 했다고도 했고, 또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는 죽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로는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그중이었다. 대부분은 그렇게 믿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당치도 않는 죽음 쪽으로 몰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였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줄어들자 포장마차며 그 밖의 것들도 줄어들었고, 그리하여 그곳은 결국 말 그대로 죽어 버린 갯벌로 남았을 뿐이었다. 단지 그녀를 추억하듯, 혹은 막히기 전의 바다를 추억하듯 그렇게 찾아왔다가는 훌쩍 떠나기만 할 뿐.♧
※묵은 잡지들을 버리면서 거기 실렸던 내 작품들을 뜯어내 따로 보관해두었는데 그것마저 굴러다니다 사라질 것 같아 자판 작업을 했다. 이 작품이 실렸던 잡지를 버린 까닭에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1994~5년쯤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내용을 보니 당시 원고를 청탁 해왔던 곳이 경마 관계지(誌)였는데, 가급적 경마에 관계된 내용을 다뤄 줬으면 좋겠다는 얘기 였지만 내가 경마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므로 그에 대해 쓸 수는 없었고, 하여 거의 억지로 말(馬) 이야기를 끌어들이긴 했는데, 그게 당시 이따금씩 바람을 쐬러 가곤 하던 곳에서 뜻밖에 보게 되었던 말 탄 여자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탄 여자를 본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 - 박지윤, 첫사랑
전남 화순 백아산(白鵝山․810m)에 마당바위와 절터바위를 잇는 ‘하늘다리’,백아산은 6·25전쟁 당시 인민군의 천연요새로 선택됐을 만큼 깊은 골짜기를 품고 있다. 마당바위와 절터바위를 잇는 다리의 이름이 ‘하늘다리’로 정해진 것도 당시 쓰러져간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매년 철쭉 꽃이 필때면 위령제를 올린다
첫댓글
묵은 듯 하나
오래된 작품들 세월뒤엔 이렇게 명작으로요
귀한 작품 함께합니다
검푸른 신록의 백야산
싱그럽습니다
강추드립니다
네 제가 소설을 쓸줄은 정말 모르고
여태것은 습작이었는데 이젠
출판사와의 계약등 프로의 길은
더욱 험난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수많은 독자들의 생각하면
행복감은 이루 말할수가 없답니다요
부디 "양떼"님 아 어느 곳에 계시더라도
정말로 행복하셨으면 하고 기원드릴게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