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를 덮으시고 사용하시는 은혜(롬 8장 1)
성경본문: 로마서 8: 1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은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 아니면 사랑해야 할 인격인가?
문제는 우리에게서 은혜를 거두어 갑니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게 합니다.”
죄의 결과는 결코 덮을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가장 뼈아픈 죄까지도 구속하시고, 그 일을 선하게 쓰신다.
계속되는 ‘은혜 이야기’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 이야기의 가장 명쾌한 핵심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정죄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죄가 결코 가볍게 여겨진다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그 죄의 결박이 풀어지는 것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핵심’이라는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92년 빌 클린턴이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의 일입니다. 클린턴은 타고난 정책 벌레라고 할 만큼 모든 현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거운동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모든 질문에 대하여 자세히 대답했지만, 명쾌한 이미지를 심지 못했기 때문이죠.
당시 그의 정책 고문이었던 제임스 카빌은 유심히 선거 운동을 지켜보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유권자들에게 확실하게 어필한 핵심을 강조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어느 날 카빌은 모든 선거운동원을 모아놓고 토론을 한 후에 화이트보드에 커다랗게 이런 글을 썼습니다.
“경제라니까, 이 멍청아!”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문장이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가장 성공적인 정책 구호가 됐다고 합니다.
포항 기쁨의 교회 박진석 목사의 설교문에 보면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외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정죄함이 없다니까, 이 멍청아!”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거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이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죠.
로마서 5장 20절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닐까요?
이어령 교수가 쓴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라는 책에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 속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사랑과 혁명을 대립의 개념이 아닌 융합 개념으로 보자는 메시지를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보십시오. 왼손의 손바닥이 위로 향한 채 펼쳐져 있고, 오른손은 손등이 보이는데, 쥐려고 하는 손입니다.
가룟 유다를 향해서, 악을 향해 내민 징벌의 손이지요. 펼쳐진 왼손은 죄인까지도 용서하도 받아들이는 손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이 두 손은 팔을 따라 올라가면 예수님의 얼굴에서 만납니다.
사랑과 징벌이 두 손으로, 좌우로 나뉘어 있지만, 예수님의 얼굴에 이르러서는 통합됩니다. 통합된 얼굴 위로 후광처럼 맑은 하늘이 보입니다. 팔을 따라 내려갈수록 어두워지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밝아져요.
이렇게 서로 분리되고 모순되었던 것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이고 피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로 향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혁명이냐 사랑이냐의 이항대립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의 공존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는 늘 죄와 함께 있습니다.
죄 없이 은혜를 이야기할 수 없고, 은혜가 없는 죄는 절망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나누려는 리 스트로벨의 [은혜 은혜 하나님의 은혜]에 등장하는 브래드 미첼 목사의 이야기는 또 다른 깊은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죄를 덮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은혜로 덮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합니다.
참 아픈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소망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이지요.
브래드 미첼 목사는 어느 날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교회의 강단에서 이렇게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저는 간음으로 혼인 서약을 어겼습니다. 하나님과 가족과 여러분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제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용서를 구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시지만, 저는 이렇게 실망시켰습니다.”
그렇게 그는 강단을 내려와 뒷문으로 나가서 차를 몰고 아내 하이디에게 갔습니다.
그는 다음 예배 시간에 똑같은 고백을 되풀이할 때까지 둘은 내내 함께 울었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를 걷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부부간의 부정(不貞)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교회에서 부정으로 인해 강단을 떠나야 했던 종교지도자들의 이야기를 기사를 통해 많이 접해 왔습니다.
아니, 누군가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는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사자와 배우자들의 고통과 몸부림, 상실감과 굴욕에 대하여 말해주는 이야기들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목회자의 이야기입니다.
목회자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수없이 탕자의 이야기를 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성만찬을 하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죄와 수치에 파묻히며 은혜가 한없이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또한, 결혼 서약을 어기고 공공연하게 자신에게 수치를 안겨준 남편을, 그것도 목회자인 상대방을 이해하고 은혜를 베풀 수 있을까요?
너무나 많은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했던 사람이기에 더욱 위선자로 느껴지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목회자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기에 더욱 힘들지 않았을까요?
남의 이야기에는 자신이 있는데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라면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목회자만의 이야기일까요?
목회자이기 때문에 더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모두 이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자유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 가운데 용서한다는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리 스토로벨 목사는 브래드와 하이디 부부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습니다.
그가 아는 한 이 둘은 더없이 올곧은 사람이었고, 믿음이 반석처럼 견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열정적으로 전하는 사람이었고, 늘 기도하며 다른 사람을 격려했던 사람, 진정성과 일관성 있는 정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정과 불명예라는 것이 얼마나 생소하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인지.
부부의 만남 이야기
브래드와 하이디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회 예배를 마치고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2년 아래 여동생의 친구였던 하이디를 브래드는 짓궂게 놀리고 괴롭히며 자랐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두 사람은 브래드가 열여섯 살 되던 해 다시 만나게 됩니다.
열네 살이 된 하이디의 귀엽고 앳된 얼굴과 금발 머리가 찰랑거리는 모습에 브래드는 마음이 요동치고 말았습니다. 그해 주말 16살과 14살의 두 아이는 서로를 미래의 남편과 아내로 마음속에 두었습니다. 서로에게 이상형이었고, 서로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둘이 다른 사람과 데이트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들이 얼마나 잘 맞는 짝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습니다.
둘은 똑같은 성경공부 교재로 공부하면서 각각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하는지를 편지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똑같은 기독교 대학에 진학하기로 하고, 졸업한 후에 결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브래드는 변호사가 되거나 돈을 잘 버는 직업에 종사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둘의 계획은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한 가지 예견하지 못했던 것은 브래드가 휘튼대학 중창단원으로 유럽을 여행하던 중에 성령의 감화를 받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성공적인 사역
목회학 과정을 마친 브래드는 인턴 과정을 지나 미네소타 주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여섯 가정밖에 되지 않던 교인들은 브래드의 흡입력 있는 설교와 친근한 스타일로 몇 년 새 400명 이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임기 중 교회는 더욱 성장했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는 게 참 좋았습니다. 그분의 임재를 즐거워하며 믿음 안에서 자라가는 그들을 보노라면 감격스러워요.”
그러던 그에게 더욱 좋은 조건의 사역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꽤 크고 혁신적인 교회 중 한 곳에서 그를 남성 스포츠와 기도 사역의 책임자로 부른 것이죠.
그곳에서도 사역을 잘 감당했고, 하이디와의 결혼 생활을 통해 자녀도 셋이나 두었습니다.
비교적 행복한 결혼생활이었지만, 매달 두세 번씩 주말마다 강연을 다니는 것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가중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에 브래드는 미시간 주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고, 성장이 멈춘 지역교회에서 교인이 6년 만에 1,800명에서 4,000명으로 늘어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례 받는 사람이 열 배로 급증했고,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도 헌금이 두 배로 많아졌습니다.
소그룹에 속한 사람의 수는 세 배로 뛰었습니다.
회중들의 칭찬이 이어졌고, 싹싹하고 격의 없는 그의 스타일 덕분에 영적으로 방황하던 많은 사람이 처음으로 과감히 교회를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지도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있는 설교로 자신들을 채워달라는 요구가 계속되었습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는 호감을 주는 스타일이었지만, 지도자들은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브래드의 교만은 지도자들과의 신뢰관계를 회복하는 것보다는 상황에서 도피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새로운 교회로 임지를 옮기는 것이었죠.
그곳은 현대식이었고 격식을 따지지 않으며 스포츠 사역이 활성화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피해 해결하려던 방법은 건강한 사고에서 나온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문제의 시작
도피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한 건강하지 못한 방법은 건강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당시 미시간 주의 주택시장은 암울했고,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이사하기 전 집을 팔아야 했는데 시간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딸은 전학하지 않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세웠습니다.
남편은 동부로 가고 아내는 미시간에 남기로 한 것입니다.
대신 그가 매달 한 주씩 비행기로 집에 다녀가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1년 정도는 무엇이든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이 지나면서 부부 관계에 좌절과 긴장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매달 한 번씩 남편이 올 때를 제외하고 둘의 소통은 전화와 이메일과 인터넷 화상 채팅이 전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서로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와 목회에서의 교만은 많은 불만족을 만들어냈습니다.
더 좋은 대우와 권리의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유혹의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습니다.
유혹의 시작은 미시간에서 날아온 이메일이었습니다.
브래드에게 한 유부녀가 신앙상담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역교회 목사에게 도움을 구하라고 권고했으나, 이 사람은 브래드의 도움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요구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목사가 영적으로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은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신앙 서적을 권해 주면서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전화 통화가 시작되었고 급기야 밀회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외도’가 아닌 ‘간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아내 하이디는 전혀 남편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믿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브래드는 죄에 빠져들면서도 자기기만과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교회가 해를 입을 테니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 주리라 생각한 것이죠.
사람들이 참 많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이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아직 죄가 차지 않아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죄를 회개할 수도 있고 아니면 죄가 가득 차서 그분의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브래드는 자신의 죄를 의식하고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관계를 끝내면 여자가 어떤 반응으로 행동에 나설지 몰라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발각될 일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왔고, 설교할 때면 자신이 위선자라는 생각에 공허하게 느껴지고, 사역에는 능력도 성령의 기름부음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이디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이사한 뒤, 남편의 설교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 왜 저러지?’
그의 설교에는 에너지도 없고 열정도 없었습니다. 몸은 구부정해졌고. 지금 생각하면 죄의 무게가 그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죠.
당시 상황을 브래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이 어찌나 무겁던지요. 설교하러 올라가기 전에 매번 하나님께 몽땅 자백했습니다. 끝없는 자백의 반복이었지요. 그래 놓고는 다시 위선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차단하다 보니 제 마음이 점차 무뎌지더군요.
중간에 관계를 끝내려고 적당한 시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이사 오면 그때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죄가 가득 차서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크리스천 상담사에게 전화했고,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이디에게 말해야 합니다. 말할 때는 짐을 꾸려 미리 차 안에 두십시오. 필시 아내가 떠나라고 할 테니까요.’
이제 브래드는 ‘아내도 잃고 가정도 잃고 교회도 잃고 사역도 잃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죠.
죄의 결과
어느 날 밤 브래드는 아내 하이디에게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하이디는 충격으로 구역질하고 나흘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이 사람을 죽이고 나도 죽어야지. 그는 일자리를 잃을 거야. 모든 것이 날아가겠지. 그럼 생활비는 어떻게 대지? 아이들은 어떡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이제 어느 것 하나인들 그를 믿을 수 있을까? 오 하나님, 제게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이전 어느 때보다도 지금 필요합니다.”
적어도 자신들이 보는 관점에서 둘의 미래는 끝나 있었습니다.
브래드는 담임하던 교회의 지도자를 만났고, 사임했습니다. 주일에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오랫동안 준비하고 사역했던 강단을 떠나야 했습니다. 브래드는 아들과 두 딸에게도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이디와 자신의 부모에게도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을 자랑스러워했던 부모님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브래드의 가족은 살던 집을 나와야 했고, 어느 노부부의 집 위층에 세를 들었습니다. 의료보험도 은퇴 적금도 잃었고, 수입의 90%를 잃었습니다. 하이디는 직장에서 약간의 돈을 벌었지만, 목회만 하던 브래드가 할 일은 없었습니다.
결국, 지방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방송시간을 파는 일로 취직을 했지만, 너무 적은 수입이었고, 이 기간에 브래드는 자신의 혈장(血漿)을 110번이나 팔아야 했습니다.
그 둘에게 있어서 최악의 순간이었고, 상담사는 둘이 성병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절을 지키고 결혼했던 하이디에게 HIV 검사까지 받아야 하는 순간은 정말 당혹스럽고 인생의 불공평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브래드의 죄가 몰고 온, 끔찍하고 굴욕적인 결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해결의 과정
하지만 그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둘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브래드의 간음이 하이디에게 깊은 고통과 참담한 후유증을 안겨 주었지만 ‘온전한 용서’를 위한 작은 여정의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16년 ‘포커스뉴스’에 실렸던 목탄 화가 허윤희 씨의 이야기입니다.
이화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2004년 독일 유학 후 한국에 온 허 작가는 도구 없이 직접 손으로 목탄 작업을 합니다. 그녀가 아주 인상적인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에게 목탄은 “실패가 허용되는 도구”다.
실수를 해도 문질러 지우고 고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화처럼 실패의 흔적을 완벽하게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허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실수의 흔적은 남는다. 하지만 그것이 모이면 오히려 작품이 깊어진다”며 “실수를 통해 길을 찾아 나가는 우리의 인생과 같다”고 강조했다.
여기서부터 죄를 덮으시는 흥미진진한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가 브래드의 삶에서 펼쳐집니다. 비록 죄로 인해 사역과 가정이 깨어진 것 같았던 상황에서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일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하이디의 의지적 결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단은 예수님과의 견고하고 생생한 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이디의 신앙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용서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요구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상대의 잘못이 사소할 때는 그것이 받아들이기 쉬웠지만, 지금 그녀의 상황은 전에 없던 시험에 부닥치게 된 것이죠.
“계속 주님과 동행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마음을 따를 것인가?”
하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결론은 그리스도인들이 용서하고 싶은 일과 용서하기 싫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골라서는 안 된다는 거였어요. 성경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빠져나갈 구멍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스도가 제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도 브래드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한이 저를 삼킬 텐데, 원한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독이거든요. 우리가 계속 부부로 남게 될지는 저도 몰랐지만,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만은 알았습니다.”
용서는 순종의 문제입니다.
하이디에게 있어서 용서와 은혜는 결단의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은혜로 인한 용서’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이디의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전혀 쉽지 않았어요. 브래드를 용서한다는 건 제게 정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모두 고통스러운 일이었어요. 하지만 예수님이 저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에는 비할 바가 아니죠. 그리스도가 겪으신 일에 비추어 볼 때 어찌 제가 브래드에게 용서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어떤 면에서 용서는 용서받는 브래드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하이디에게도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브래드의 감정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브래드가 자신의 잘못을 다 털어놓는다고 안도감이 들거나 평안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찾아온 것은 ‘창피함’이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자 ‘수치’스러웠습니다.
처음에는 아내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감추고 차차 하려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고, 히이디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히이디는 예수님처럼 딱 한 번에 용서해 주었습니다.
물론 하이디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용서의 말을 건넸고 당시로써는 최대한 진심이었지만, 브래드를 향한 용서의 감정으로 느껴지는 데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이디의 말입니다.
“저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어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우리는 결코 감정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는 없잖아요. 때로는 감정이 주님 앞에서 옳은 길을 가지 못하게 우리를 막기도 합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용서와 제 감정이 서로 일치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어요. 감정이 훨씬 오래 걸리더군요. 정말 긴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용서와는 별개의 문제로 둘이 계속 부부로 남을 것이냐의 이슈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브래드는 화해를 원했고 결혼 생활의 지속 여부는 하이디의 결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둘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고, 여전히 자녀의 아버지였고,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되리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브래드가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부부로 살기로 하는 데는 두 달쯤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이디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브래드의 후회와 회개를 본 거죠. 그는 이 모든 일로 정말 마음이 깨져 있었어요. 덕분에 제 신뢰가 점차 되살아나더군요. 하나님이 이혼을 싫어하신다는 것도 알았고요. 갈라서는 건 제게 최후의 수단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죠. ‘하나님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제 마음과 생각을 빚어 주세요. 주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주세요. 주님처럼 사랑하도록 도와주세요.’”
이러한 용서의 과정을 통해 하이디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의 문제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 은혜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습니다.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지금의 자신이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정의 순간부터 하이디는 하나님의 손질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결단하지 않았으면 경험해보지 못할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가정을 돌보고 계심을 보여주셨고, 치유와 화해를 알려주셨습니다.
교훈
브래드가 단순히 하이디에게 용서받았다는 것에서 ‘은혜’는 그치지 않습니다.
하이디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남편이 정절을 지키지 않고 배신했음에도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가르침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브래드 역시 용서를 경험하고 수치와 자책에서 해방감을 느끼기까지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을 지나야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모든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정도만큼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브래드에게 있어서도 변명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었고, 누군가의 인정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교회 사역에는 스트레스가 많았고, 부부 관계 역시 원망하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적으로 신실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이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를 느끼려면 자신의 잘못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책임져야 했습니다. 교회 회중 앞에서도, 아내에게도, 그리고 자식에게도 변명하지 않고 시인했습니다. 무엇보다 ‘수치심’이 그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수치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게 아님을 자꾸 되새깁니다. 제가 과거에 한 일은 죄였지만 지금의 제 자아는 그것으로 규정되지 않고 제 미래도 그것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1절 말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슬퍼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상실감이 들 수는 있지만, 수치는 아닙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마음 아파할 수 있지만, 그것도 수치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것 역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후회스럽습니다. 하지만 수치는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사단이 가져다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분이 직접 수치를 당하시므로 우리가 수치의 형벌에 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모든 죄와 수치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고 은혜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제 중요한 것은 수치에서 벗어나 사실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징계’의 유익을 알아야 합니다.
브래드에게도 죄의 결과로 인한 모든 책임과 징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결과 때문에 당하는 징계가 유익을 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 안에 거룩함과 의와 평강과 고침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려고 자기 죄의 결과를 외면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은혜’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입니다.
죄를 직시하고, 죄의 결과를 직면할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사람들은 수치심으로 인해 사람들을 멀리하고, 모든 관계를 단절하려는 유혹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이디와 브래드는 그 과정을 견뎌냈습니다. 사람들과 만났고, 교회를 나갔으며, 크리스천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람들은 이 둘을 격려해 주었고, 지지해 주었고, 기도해 주었고, 지혜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단에서는 이 둘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받아주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회복시켜서 쓰신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브래드의 잘못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픔을 통해 더 좋은 부부가 될 것입니다. 이들의 아픔을 통해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들 부부는 “부부 관계 바로 세우기”(Build Your Marriage)라는 이름의 사역 기관을 통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누군가 같은 아픔을 경험하고 찾아온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 우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부부의 실패했던 삶의 이야기, 인생의 오점을 남긴 실수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쓰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동에 가면 카펫이 유명합니다. 손으로 짠 것도 있고, 기계로 짠 것도 있습니다. 기계로 짠 카펫은 흠도 실수도 없이 매끈합니다. 그렇지만 손으로 짠 것이 훨씬 값이 나갑니다. 이유는 실수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한 땀 한 땀 노력의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수로 망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실수가 만들어낸 흔적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박정근 목사님이 쓴 [복음의 자유를 누려라]에 보면 자신이 경험했던 은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한때 곁길로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가면 모든 것이 거룩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강의를 듣는데 정말 재미가 없어서, 수업을 빼먹고 다방을 밥 먹듯이 갔습니다. 그때 성적을 보면 낙제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다방의 담배 연기가 몸에 밴 채로 매일 저녁 형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찾아갔습니다.
형님이 그것을 왜 몰랐겠습니까?
제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도록 한마디도 하지 않던 형님이 하루는 저를 불러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어떻다고 생각하니?”
“멋있지요.”
“쭉 뻗은 전나무는?”
“그것도 멋있지요.”
“맞다. 둘 다 멋있지만, 하나님은 곧은 나무를 사용하신단다.”
제가 그런 방탕한 생활에서 돌이킬 수 있었던 이유는 형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열일곱 살이나 많은 아버지 같은 형님입니다.
형님은 끝까지 저를 기다려주셨습니다. 다방에 하루 종일 처박혀 있고, 몸에서 온통 담배 냄새가 나는 저에게 용돈을 주고 뭐 부족한 것이 없느냐고 물으면서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은혜로 대할 때, 그 사람이 쓴 무서운 가면을 하나씩 벗겨낼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가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와 배우자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과감하게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도록 사랑으로 용납하고 포용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껴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은혜가 누군가의 신앙적 결단과 혹은 참 힘겨운 용서를 통해 흘러넘친다는 것입니다.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누군가의 힘겨운 아픔을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죄가 너무 쉽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발생하는 목회자들의 성적 일탈, 그리고 성도들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용서만 받는 우리가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용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죄를 덮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2022년 기윤실에서 ‘목회자 윤리’에 대한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전제는 성적위기와 일탈에서 회복된 사역자 혹은 성경의 ‘다윗’과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이죠.
한 신학자의 발표문이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이진 아웃을 말하고 싶다. 이것은 한 번 탈선한 사람에게 반드시 또 다른 기회가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한 번의 사건만으로도 그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두려워하고 절망해야 한다. 여기에서 한 번이란 피해자 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사건 하나를 말한다. 두 사람 이상을 성추행이나 성폭행한 사람은 환자이며 범죄자다.
미국의 국립 공원에서 한 번 사람을 해친 곰은 반드시 사람을 다시 찾는다. 그래서 그런 곰을 제거하는 것이 공원 관리원들의 중요한 임무다. 그런 짐승에게는 두 번의 기회도 주어질 수 없다. 하지만 두 번의 기회를 남용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짓밟은 자다.
그는 희생자들을 찾아가는 목회자만의 비밀 통로를 갖고 있다. 그를 치유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는 목회 사역을 떠나야 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로운 처분뿐이다.
깊은 절망에서 깊은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렇게 힘겹게 경험한 용서라야 죄를 덮으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진지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깊다는 것은 아주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주 심오한 자유의 선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