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15(일)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진정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고교 동창생인 박원식 사진作家가 카톡으로 보내준 자신이 직접 촬영한 오늘의 사진입니다.
누구를 미워도
누구를 원망도 하지 말자.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 닦은 것과 복지은 것 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 가자.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보고
화내는 자는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오.
사랑하시라.
소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으니까.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인것 같습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화창한 봄날의 토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석가탄신일이 토요일이라 연휴가 아니어서 아쉬웠으나 오늘 재경고교동문회의 사이클 동호회 멤버들이 아침부터 극성스럽게 전화질을 해왔습니다. "선배님! 여주에 팬션을 얻어 놓았으니깐, 꼭 오셔야 합니다."라고...그리고 이어 내일은 재경고교동문회에서 관광버스를 빌려 이른 아침 양주소재의 '축령산과 서리산 등산'이 있다며, 역시 동문회 사무국장도 극성스럽게 꼭 참석해 줄 것을 당부하는 메세지가 계속 날아왔습니다. 이런 화창한 봄날 가족과 같이 나들이를 가야하는 것이 도리였으나, 마나님은 지난번 Bangkok 여행이후 감기몸살 증세가 아직도 심하여 꼼짝도 못하는 입장이라 같이 차량 드라이브라도 하자고 제의하기가 어려워 눈치만 살살 살피다가 마침 성경공부차 말씀의 집을 간다는 것을 격려하곤 1박 2일 모임을 다녀온다고 통고하곤 곧바로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금년들어 최고로 무더운 날 젊은 후배들과 이른 아침부터 여주에서 충주까지 강변 사이클을 탄다는 것은 무리이기에 그들이 사이클을 마치고 팬션으로 돌아 올때쯤에 나타날 생각을 먹었습니다.
특히 지난밤 용산 성당의 옛 사목위원들과 마포 남해횟집에서 너무 과하게 주님을 모셨고 또 이 나이에 주책맞게 노래방까지 갔기에 결국 새벽녁에 귀가한 탓으로 몹시 피곤했기에 사이클은 무리였습니다. 하여 일단 지난밤 한잔 했기에 어쩔수 없이 회사에 세워둔 승용차를 갖고 가기 위해서도 회사로 출근 해야만 했습니다. 사무실에서 그동안 밀린 업무와 더불어 막간을 이용하여 Blog 작성도 하였는데, 사이클 동호회 후배들은 연짱 카톡으로 자전거 투어 전경을 보내왔습니다. 하여 그곳으로 달려갈 수는 없었기에 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김사장과 함께 점심도 할겸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강변북로를 내달려 단숨에 멀리 적성의 영국군 참전기념탑 까지 갔습니다. 가끔 이곳을 찾곤 했는데 그때마다 짠한 아픔을 느끼곤 합니다. 누군가 새롭게 단장한 기념탑 앞에 꽃을 갖다 놓았기에 잠시 묵상기도를 했지요. 그리고 이어 이곳 영국군 추모공원 일대를 둘러보면서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젊은 영웅들의 숭고한 넋에 우리 대한민국 모든 국민을 정말 절대 잊지 않아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해 보았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뒤늦게나마 영국 참전비와 추모공원을 잘 조성 시켜 놓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잠시 당시으 그 절박한 전투 상황을 그려보았습니다.
이 전투상황에 대한 약사는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어서 여기 담아 봅니다.
1951년 봄 제63군의 3개사단은 서울로 향하는 적성연천지구 침공로에 대공격을 감행하여 왔으며, 적군의 진격로에는 영국군 제29여단이 임진강이 굽어 보이는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영국군 “그로세스터샤’ 연대 제1대대는 제 170박격포대대 C중대와 오늘날 ‘임진포대’로 명명된 포병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영국군여단 휘하의 “ 벨즘”대대와 두개의 다른 대대는 “그로세스터스샤” 연대 동축에 포진하였으며, 제8 ‘쎈추리온” 전차대대와 25 “파운드” 포탄의 제45야포대 및 제55공병중대가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단의 방어지역은 12,000미터에 달하는 광범한 전선이였다.
영국군 추모공원에 기술되어 있는 '영국군 실마리 전투비' 내용을 몇차례 반복해 읽어 보면서 당시 중공군의 갑짝스런 출현으로 당황 할 수 밖에 없었던 전황을 느껴 보았습니다.
이 비는 한국전쟁 당시 실마리전투에서 고지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혈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영국군들의 넋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주변의 돌들을 채석하여 쌓아올리고, 상하 각각 2개씩 모두 4개의 비(碑)를 부착하여 만들었다. 위쪽에 있는 비 2개 가운데 왼쪽에는 유엔기를 새기고, 오른쪽에는 희생된 영국군의 부대 표지를 새켰으며, 아래쪽의 왼쪽 비에는 한글로, 오른쪽 비에는 영문으로 당시 전투 상황을 기록하였다. 유엔군의 참전 상황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문화 유산이다.
1951년 4월 22일은 따뜻한 봄날씨였으며, 바로 이날 임진강 격전은 시작되었다. 전투 첫날밤 “그세스터스샤” 대대는 10배에 달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용전하였다. 그러나 다음 2일간의 혈전끝에 실마리계곡까지 후퇴하였다.(전적비 지역) 4월 24일까지의 격전에서 생존자들은 이 기념비 위에 솟아있는 고지에 집결하였으나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탄약은 거의 소모되고 피로와 허기에 지친 상태에서도 대대는 그날 밤 적의 연속적인 공격을 물리치고 고지를 사수하였으며, 4월 25일 아침 적의 포위망을 마지막으로 공파하기 위한 공격을 감행하기까지 진지를 고수하였다. “그로스타”연대는 혈전끝에 67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59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526명은 포로가 되었으며, 이들 중에는 180명의 부상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3년간의 포로수용소에서 34명이 사망하였다. 이 격전에서 “그로스타”연대는 2명이 최고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모든 장병들의 희생정신은 세계전사에 빛나고 있다. 3일간의 걸친 이들의 과감한 격전은 당시 중공군의 진격을 지연 시키고 유엔군의 재편성에 소요되는 시간적 여유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또한 중공군의 서울 침공을 저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중(1950~1953) 영국군은 1,109명이 전사하고 2,674명이 부상하였다.
이 십자가는 1951년 4월 22일 ~25일 벌어진 임진강 전투 당시 글로스터샤 연대 1대대를 지휘했던 칸 중령이 포로 생활중 만든 것으로 1951년~ 1953년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행해진 예배에 사용되었다.
작년에 이곳 적성 소재, '영국군 추모공원'을 찾았을 때와 달리 불과 1년만에 다시 방문한 이곳 공원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추모공원 벽화도 새롭게 만들었고 당시 전투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여 놓아 더욱 실감할 수 있는 산교육장이 되었기에 기뻤습니다.
벽화 뒷면에 수록해 놓은 공원 조성 추지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파주 적성 실마리는 1951년 중국군의 춘계 대공세가 전개될 무렵 임진강 방어선을 중심으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입니다. 영국군 용사들은 4월 22일 “캐술고지”라 일컫던 이곳 칠중성(七重城)에서 전투를 시작해 4월 25일 최후를 맞을 때까지 사력을 다해 공세를 차단하였으며 이로서 중국군의 남하작전은 실패했습니다. 1957년 6월 20일 영군군과 국군 제25보병사단이 실마리 전투의 젊은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전적비를 건립했습니다. 비문 너머 동굴은 금을 채굴하던 금광(金鑛)으로 당시 최후의 전투를 벌이면서 영군군 희생자들을 안치했던 장소입니다. 유해를 수송하고 피와 얼이 밴 그 동굴에 자연석을 쌓아 조성한 것입니다. 정전 61년이되는 지금 역사 속의 화석이 되어가는 6.25전쟁의 교훈과 영국군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고자 국가보훈처와 경기도, 그리고 파주시민이 힘을 합쳐 영국군 실마리 전투 추모공원을 조성합니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과 영국의 우호가 돈독해지고 파주시의 글로스터시의 우정이 싹트기를 기원합니다.
2014년 4월 29일
공원 조성에 함께한 이들
조류방사장(다친 새들의 쉼터)
그리고 영국군 추모공원 옆에는 한국 조류협회 건물이 있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 환경지에 부상당한 조류들을 치료하여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운동을 펼치는 공익재단이 있어서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는 뜻에선 일맥상통하는 시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류동물 자연치료를 하는 시설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 되어 있어서 전시된 내용의 글만 읽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제 점심시간을 막 지났기에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회사로 귀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부흥로 소재의 이름난 유명한 음식점 간판이 눈에 띄어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양순자 낙지전문점에서 점심
바로 양순자 낙지마당이라는 음식점이었습니다. 부처님 오신날인 음력 사월 초파일을 맞아 유난히 사찰이 많은 경기북부 지역은 절을 찾는 불교신자분들이 많아서인지 차량들이 붐볐습니다. 시골 변두리임에도 불구하고 주차장에 엄청 많은 차량들이 주차해 있는 것을 보곤 그곳이 절인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그 곳은 식당이었습니다. 도로까지 차량이 주차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유명한 음식점인 것 같아 무작정 입장했습니다.
시골 산중에 낙지집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 음식점 주차장을 꽉 메운 차량들이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큰 기대를 갖고 무려 30여분이나 순서를 기다려 식당에 입장했는데, 재료가 신선한 것 외에는 그냥 늘 먹던 낙지집 음식과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리 손님들이 많을까?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낙지 음식이라 가격도 만만치 않았는데.... 어떻든 낙지탕 소자를 3만 5천냥에 주문하여 먹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헌데, 낙지탕을 먹고 난뒤에는 거기에 국수나 or 밥을 비벼 주는 것인데, 촌놈이라서 그냥 일어났던 것입니다. 쥔장이 워낙 손님이 많아 바쁜 탓인지 알려 주지도 않아서... 흑~흑~흑~ 그러나 멋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담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재경동문회 사이클 동호회의 숙소인 여주를 向하여....
점심 식사후, 서울로 진입하려니깐, 초파일이라 엄청 차량이 밀렸습니다. 강변북로의 마포와 반포길까지가 제일 밀렸지요. 차량의 네비게이션은 양평길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중부내륙의 신설 고속도로 를 타고 그나마 저녁 6시경, 동문들이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 숲속풍경 팬션에 도착했습니다. 그시각 동문 사이클동호회 휘원들도 무려 80km의 장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막 숙소에 도착해 파김치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곧 거하게 저녁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강릉에서 올라온 황후배(47회)는 바닷가에서 문어를 비롯한 횟감을 한박스 갖고 왔고, 새로 선임된 최회장(50회)은 전복을 한박스나 갖고 왔습니다. 하여 해산물만으롣 진수성찬이었습니다.
후배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어느덧 야심한 밤은 점점 깊어 갔습니다. 안주가 좋아서 모두가 주량의 한도를 벗어났지요. 혹시 안주가 남으면 내일 아침 축령산으로 동문회 산행을 갈때에 갖다줄 생각으로 일부 아이스박스에 넣기도 했습니다.
밤도 깊어갔지만 우리들의 우정도 깊어갔습니다. 허나 내일 아침 재경동문회에서 아침 8시에 잠실종합운동장 앞에서 축령산으로 관광버스가 출발하는 관계로 오늘 장거리 자전거를 탄 후배들은 피로가 몰려와 꾸벅 꾸벅 조는 것 같아 밤 10시에 일단 마감을 하고 모두 거실 바닥에 쭉~ 뻗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엄청 장거리를 뛴 잊지 못할 추억을 많이 만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상기인은 잠자리에 들기前, 궁금해 하고 또 걱정하고 있을 울 마나님께 카카오로 이상유무를 보고한 후에 그냥 깊은 꿈나라로 갔지요.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