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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자유의지, 사랑, 하나님의 섭리
(2월 2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18분)
연구 범위: 눅 13:34; 렘 32:17-20; 히 1:3; 신 6:4, 5; 엡 1:9-11; 요 16:33
기억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섭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 또 악의 문제에 대한 관점이 크게 달라진다.
다양한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건이 일어날 것을 결정해 놓으셨고, 그에 따라 그분의 능력을 행사하신다고 믿는다. 심지어 누가 구원받을 사람이고 누가 멸망 받을지도 하나님이 선택하신다. 이런 견해대로라면 사람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 실제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의 욕망조차도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을 미리 결정하신 것이 아님을 강력히 보여준다. 대신, 그분은 인간 그리고 천사들이 당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까지도 직접 선택할 수 있을만큼 그들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신다. 인류의 타락, 죄, 악의 역사는 이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가 극적이고 참담하게 드러난 것이다. 구원의 계획은 자유의지의 오용으로 인한 비극을 바로잡기 위해 세워졌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은 세상의 일을 미리 결정하시지 않으며 사랑의 본성을 따라 이끄신다.
느끼기: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세상이 무너졌지만 하나님에게는 이것을 바로잡을 계획이 있다.
행하기: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악과 어려움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다.
TMI 위로
2. 전능하신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시 81:11)
*답: 인간이 거절할 때 이루어지지 않는다.
3.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실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마 26:39)
*답: 인간이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그대로 내버려두신다.
4. 인간의 선택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갈 5:13)
*답: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것은 예정해놓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까?(엡 1:11)
*답: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한 것이다.
6.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요 16:33)
*답: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결론: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당신이 본성에 합하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일을 미리 결정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이 원하시지 않는 일도 일어나는 것은 당신의 뜻에 반하는 일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죄와 악의 역사는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이며 하나님은 이 비극을 바로잡기 위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는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지만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소망을 가질 수 있다.
2월 16일(일) 주권자 하나님
한 청소년 담당 목사가 학생반을 가르치고 있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한 중학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럼 제 개가 죽었을 때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셨다는 거죠? 하나님은 제 개를 왜 죽이셨을까요?”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에 더 어려운 일을 대비할 수 있도록 힘든 일을 겪게 하십니다. 저도 제 개가 죽었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더 어려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어요. 이해가 되나요?” 한참을 생각하던 중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하나님께서 제 개를 죽이신 것은 나중에 그분이 할머니를 죽이실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인가요?”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여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일어나는 일인 까닭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또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적어도 이 신학은 그렇게 가르친다.
시편 81:11-14, 이사야 30:15, 18, 이사야 66:4, 누가복음 13:34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뜻이 항상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무엇이라 대답하는가?
[시81:11~14]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13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14 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
[사30:15,18]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사66: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눅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답: 원하지 않으면 도움의 손길을 거두신다.
많은 사람이 세상만사를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셔야 한다고 믿지만, 성경은 매우 다르게 말한다.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묘사한다. 사실은 하나님이 정말 일어나기 원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상반되는 일
이 종종 일어난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것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결과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와 다른 것을 선택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한탄하신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시 81:11, 13, 14).
<교훈> 하나님은 전능하기에 모든 일이 그분 뜻대로 성취된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자유의지 때문에 그분의 뜻대로 일이 성취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부가설명> 군 생활 할 때에 서울대 출신의 상병이 성경 전하는 내게 말했다. “김 병장님 밤새도록 생각해도 대답하지 못할 질문 할까요?” “좋아요.” “하나님은 전능하시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들지 못하는 돌을 만들 수 있어요?”
“이 봐요, 김 상병, 전능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질문이요.” “예?” “전능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오. 전능하다는 것은 부정적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요. ‘만들 수 없는’ 또는 ‘할 수 없는’ 이런 질문이 성립이 안 되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오.” 내가 깨달은 전능하다는 말의 의미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 단시 당신께서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하신다.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에 내포된 권리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어서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하시지 않는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어서 하시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심히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물론 사람과 관계에서 사람 편에서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원하게 하지 않으신다. 이것도 하나님의 전능에 내포된 사항이다. 감사합니다.
<영감의 교훈> 하나님이 할 수 없는 일 -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의의 완전한 표준을 주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들의 창조주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그들은 하늘처럼 높고 우주처럼 넓은 사랑을 증오로 보답한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수준에 맞도록 율법의 요구를 낮추실 수 없고 인간이 자력으로 율법의 요구에 응할 수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죄인은 죄악에서 깨끗함 받을 수 있고 창조주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다”(사도행적, 425).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뜻대로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겸손해집니다. 한 줌도 안되는 힘으로 많은 것을 좌지우지하려 했다면 저의 잘못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그 무엇보다 저의 마음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2월 17일(월) 전능하신 하나님(Pantokrator)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권능을 행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수많은 이야기가 성경에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요한계시록 11:17, 예레미야 32:17-20, 누가복음 1:37, 마태복음 19:26을 읽어 보라. 히브리서 1:3도 살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계11: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렘32:17~20]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19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답: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다 하실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권능으로 세상을 돌보신다고 가르친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반복해서 언급한다(계 11:17, 고후 6:18, 계 1:8, 계 16:14, 계 19:15, 계 21:22). “전능자”(판토크라토, Pantokrator)로 번역된 단어는 문자 그대로 못할 일이 없고, 능력이 무한하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문자로만 표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거나 세상에 기적적으로 개입하는 많은 놀라운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후서 2:13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다고 선언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순되지 않는 일, 즉 논리적으로 가능하고 당신의 본성에 일치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이다. 어떤 일은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되기 때문에 그분에게도 하실 수 없는 일이다. 겟세마네에서 드리신 그리스도의 기도는 한 예가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마 19:26, 흠정역)라고 확언하셨지만, 십자가가 가까워지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고난에서 구하실 절대적인 능력을 소유하신 것이 분명하지만,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수 없었다. 그리스도를 구하거나 죄인을 구원하는 중의 하나만 가능하지 둘 다 하실 수는 없었다.
<교훈>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며 모순이 없고 당신의 본성에 합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부가설명> 일요일 부가설명에서 전능에 관한 것을 자세히 썼다. 그런데 하실 수 없는 것과 하시지 않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기 때문에 죽지 않음이 그에게만 있다(딤전6:16). 그러나 스스로 죽기로 하시면 죽으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예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예수님은 생명 자체시다. 그분도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시다. 그런데 그분은 그 생명을 우리를 살리려고 죽음에 내주셨다. 그것을 끝난 것이 아니고 스스로 부활하셨다. 그래서 그분이 여호와이심을 우주에 증명하셨다. 시편에는 이렇게 계시하였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면 다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지 않을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하고 싶은 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방해되는 것을 하지 않으신다. 또 사람이 기어이 구원을 거절하면 억지로 구원하지 않으신다. 그가 사망에 이르도록 두신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이런 일을 설명할 때 주로 자유의지를 사용한다. 인간은 자기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죽는 자로 출생한다. 그것을 살려주려고 생명이신 말씀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셨다(요3:17,18).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믿지 않으면 사망에 그냥 머물다가 죽는 것이다. 그가 이미 사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감의 교훈> 전능자도 어려운 일 - “하늘의 대주재께서 눈물을 흘리시다니!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마음에 근심하고 고뇌에 눌리다니! 그 광경을 보고 온 하늘은 놀랐다. 그 광경은 죄가 얼마나 사악한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전능하신 분에게 있어서도 죄인을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린 결과에서 구원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려준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를 내다보시고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이끈 그 같은 속임수에 온 세계가 속아 넘어가는 것을 보셨다”(각 시대의 대쟁투, 22).
<기도> 어떤 것도 모순이 없고 무엇을 해도 거리낌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이르기를 기다립니다. 그때까지 제한 많고, 조심해야 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을 수 있도록 부족한 종의 필요를 채우시고 발걸음을 지켜주옵소서.
2월 18일(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컨대, 하나님은 누군가가 당신을 자유롭게 사랑하도록 결정해 놓을 수 없다. 어떤 행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 없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와 모순된다. 우리가 앞서 보았고 다시 강조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그분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이 강요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2:37과 신명기 6:4, 5를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자유의지의 실제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신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답: 사람이 하나님 사랑하기를 택하라고 권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도록 강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냥 모든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게 만들지 않으시는가? 다시 말하지만,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되려면 자유로운 뜻에 따른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6:17, 18과 디도서 1:2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히6:17,18]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딛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답: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신다. 교과 저자는 그것을 도덕적 구속(拘束)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민 23:19),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딛 1:2, 흠정역)이시며,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말씀을 지키시며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으신다(히 6:17, 18 참조). 따라서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약속하셨거나 어떤 것을 맹세하셨다면, 그분의 미래 행동은 그 약속에 대해 도덕적으로 구속된다. 즉,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과 다른 것을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시는 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주기로 하셨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이상적인 바람과 다르게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자유를 행사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런 일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다.
<교훈> 사랑은 강요될 수 없고 진정한 사랑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자유를 주셨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이상과 다르게 행동하며 그분이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
<부가설명> 성경은 아담의 후손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자라고 계시한다(고전15:22). 예수님도 이 세상에 아담 자손들은 죽은 자들이라고 하셨다(마8:21,22).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죽은 자들이라고 하셨다(요5:25). 죽은 자들의 행실은 죽은 행실이다. 바울은 이것을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다(히6:1). 또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옛사람이라고 했다(엡4:22). 그러므로 아담 자손으로만 있는 사람들은 썩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말하면서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생명이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 되는 말이 아닌가? 죽은 자였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난 사람들에게는 이런 논리가 들어맞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에게 이런 논리가 과연 해당할까? 이런 논리의 배경은 영혼불멸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이론은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영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영생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아담 후손들은 사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이미 사망으로 썩고 있기 때문이다(롬8:21,엡4:22).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선택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받아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요5:24)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누리며 서로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요일5:11,12).
<영감의 교훈> 사랑과 행복은 자유의지의 산물 - “사랑의 율법이 하나님 정부의 기초가 되므로 모든 피조물은 그 큰 원칙에 완전히 일치함으로써 행복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사랑의 봉사, 곧 주님의 성품을 이지적으로 이해하므로 따르는 경배를 드리기를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강제적인 충성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셔서 그들이 주님께 자발적 봉사를 할 수 있게 하신다”(각 시대의 대쟁투, 493).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미약한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 큰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저희를 도와주셔서 당신의 큰 사랑을 헤아리며 사랑하고 그 사랑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며 살게 하옵소서.
2월 19일(수) 하나님 의지의 이상적 의미와 보완적 의미
에베소서 1:9-11을 읽어 보라. 이 본문은 예정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또 다른 사람들은 멸망받도록 예정되어 있는가?
[엡1:9~11]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답: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다고 계시하였다.
이 구절과 다른 곳에서 “예정”으로 번역된(롬 8:29, 30 참조) 헬라어 프로오리조(prohorizo) 자체는 하나님이 역사를 정해놓고 그대로 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단순히 “미리 정하다”라는 의미이다.
물론 그 방식은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미리 정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을 고려하면서 미리 정할 수도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방식이 후자라고 말한다.
“미리 정하”셨다고 번역된 용어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자유로운 결정에 대해 미리 아시고, 그것을 고려하여 미래에 대해 계획하셨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 필요한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모든 사람을 위해 그분이 바라시는 선한 목적을 위해 역사를 섭리로 인도하실 수 있다.
에베소서 1:11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신다고 선포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이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일어나도록 결정하신다는 의미인가? 에베소서 1:9-11만 따로 떼어내어 읽으면 본문이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앞서 살펴본 많은 본문과 모순된다(눅 7:30; 눅 13:34, 시 81:11-14 비교). 성경이 스스로 모순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구절들을 서로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의 “이상적인 의미”와 “보완적인 의미”라고 부를 수 있는 두 가지의 차이를 인식할 때 우리는 이 구절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상적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실제로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일이며, 모든 사람이 항상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행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이 가진 보완적인 의미는 때때로 하나님이 선호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조물의 자유로운 결정을 포함한 다른 모든 요소를 이미 고려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1:11은 하나님의 뜻의 “보완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훈>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에 필요한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모든 사람을 위하는 그분이 바라시는 선한 목적을 위해 역사를 섭리적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
<부가설명> 이번 교과 제목이 ‘자유의지, 사랑,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래서 첫날부터 계속 자유의지 이야기가 논의되고 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도덕적 시각으로 읽는 습관이 배어있다. 성경이 말하는 선악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행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이것이 세상작 사고방식이다. 성경은 선과 악을 도덕 행위 이전 상태에서 정의한다. 즉 사람이 생명의 존재인가, 사망의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진정한 생명이 있는 사람은 선이고 사망인 사람은 악이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막3:4),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을 선과 악을 행하는 것과 대조해서 말씀하셨다. 살리는 것은 선이다. 죽이는 것은 악이다. 사탄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다. 처음부터 살인자다(요8:44),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생명을 주신 살려주는 자다(고전15:45). 그래서 예수님은 선이고 사탄은 악이다. 이 악은 위장을 기막히게 한다. 자지가 하나님 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광명한 천사처럼 나타나 성경을 인용하면서 인간 행위 중심의 선악을 가르치고 착하게 살명 영생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악한짓 하면 지옥 간다고 가르친다. 교회와 신학도 이 논리에 놀아나고 있지 않는지 늘 의심이 간다.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해석하고 주장하는 것이 도덕적 선악에 기초했는지 생명과 사망 사상에 기초했는지 기도하며 깊이 생각하고 바른 진리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영감의 교훈> 소수의 구원자만 예정하지 않으심 - “그분께서는 그처럼 많은 사람이 사탄의 깃발 아래 서서 하나님의 정부를 대적하는 반역자로 활약하도록 예정하지 않으셨다. 세상의 구속주께서 당신이 사신 후사들이 자신의 죄악 가운데서 살다가 죽도록 계획하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처럼 적은 수의 사람만 접촉하여 구원하게 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 중 그처럼 많은 사람이 큰 배교자와 동일한 노선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증언보감 2권, 511).
<기도> 우리가 내린 잘못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이끄시기 위해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부족한 저희 삶에도 선을 이루어 주심으로 우리의 생애가 진정으로 복되고 행복한 길을 따르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2월 20일(목)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대로 이루어졌다면 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주는 오직 완전한 사랑과 조화로 가득했을 것이다. 결국 우주는 하나님의 완벽하고 이상적인 뜻대로 회복될 것이지만 그때까지 하나님은 피조물의 자유로운 결정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신다.
모든 참가자가 특정한 재료를 반드시 사용해서 케이크를 만드는 대회를 생각해 보라. 참가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재료를 추가해서 원하는 케이크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어떤 케이크를 만들어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제빵사가 선택하지 않은 특정 재료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제한된 조건으로서 사랑에 필요한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역사를 구성하는 많은 '재료'는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으신 것이며 사실은 그분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마치 그분이 모든 일을 일방적으로 다스리시는 식으로 실현되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는 최소한 2개의 관점을 가지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의 어떤 일들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모든 악을 포함해 어떤 일들은 피조물의 자유로운 결정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일도 많이 일어난다.
요한복음 16:33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가?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답: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
특별히 고난이나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이고 그렇게 하셔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믿음이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신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시련과 환난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지만 소망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요 16:33).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겪는 것은 본래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항상 큰 그림인 대쟁투를 기억해야 한다. 악 자체가 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건들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통해서조차 우리를 당신께 더 가까이 이끄시며 이를 통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돌보는 사람이 되도록 도우실 수 있다.
<교훈>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당신이 세상을 이기셨기에 소망이 있다고 하셨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사망을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생명을 떠나면 생명을 잃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사망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담이 하나님과 생명 관계를 끊었을 때 그는 사망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을 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요일2:25).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것으로 이 언약을 어겼다(호6:7). 그래서 아담은 죽게 되었다(창2:16,17). 그것을 부축인 것이 옛 뱀 사탄이다(계12:9). 그래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롬5:12). 예수님은 마귀가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생명 자체기 때문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요15:5). 아담 후손들이 세상에 살면서 당하는 고난은 사망의 성질이다. 하나님께서 자비로 보호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은혜와 구원의 기회를 주셔서(고후6:1,2) 그것을 수명으로 누리고 있다. 이 기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요5:24,25). 이렇게 생명을 얻은 사람도 아직 사망의 몸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죄의 몸이라고도 한다(롬6:6, 7:24). 사탄은 이 사람들이 생명을 포기하도록 온갖 시련과 고난을 퍼붓는다. 그래서 우리 몸이 구속될 때까지(이것을 양자되는 것이라고 한다. 롬8:23) 함께 사망의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을 겪는 것이다(롬8:22,23).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망을 처리하셨고 그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셨다(딤후1:10, 히2:14).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고난의 이유다. 예수님은 이런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셔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셨다(요일3:8, 요9:3). 부활하셔서 세상과 사망을 이기셨다(요16:33). 그래서 진정한 성도는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영감의 교훈>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 “시련 없이 주님 안에서 어떻게 강해질 수 있겠는가? 힘을 얻기 위해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 강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에 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순교 직전에 디모데에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가려면 많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 구주는 가능한 한 모든 면에 시험을 받으셨으나 하나님 안에서 끊임없이 승리를 거두셨다”(교회증언 3권, 67).
<기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신뢰하기 원합니다. 저희 연약한 믿음은 때로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게 하지만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려운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2월 2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1장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읽어 보라.
“구속의 경륜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세워진 사후 고안(事後考案)이 아니었다. 이 경륜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 알게 하신 그 비밀”(롬 16:25)의 계시였다. 이것은 영세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되어 온 원칙을 공개한 것이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사탄이 반역할 것과, 그 반역자의 기만적인 권세를 통하여 인류가 타락할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 죄가 존재하도록 정해놓지 않으셨으나 죄가 존재할 것을 내다보시고 그 두려운 비상사태를 위하여 대비책을 세워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를 언약하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요 3:16) 었다"(시대의 소망, 22).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세상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게 이루지 못하신 바람이 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답: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2.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사랑은 자유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지만, 그 선택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게 할 것을 알고도 그렇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랑에 내재된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거부하기보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기로 선택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서 사랑이 얼마나 신성하고 근본적인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답: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우주와 반역자에게까지 증명한 것이 십자가이다(롬5:8).
3. 우리는 종종 이 세상의 악과 고통 때문에 탄식하지만, 하나님께서도 고통과 악에 대해 한탄하고 슬퍼하신다는 것을 얼마나 자주 묵상해 보았는가? 하나님께서 악 때문에 고통을 겪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당신이 악과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게 하는가?
*답: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집대성되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깊이 새기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순복해야 한다.
4.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없고 전혀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일 때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나님의 뜻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당신의 고통을 대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답: 세상에 있는 죄와 사망의 법을 깨닫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롬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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