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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신화
토마스 벌핀치
[ Thomas Bulfinch ]
1796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뉴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의사였고 아버지는 미국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건축가였다.
보스턴의 라틴어 학교와 하버드 대학에서 명문가의 아들로서 평탄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졸업 후 모교인 라틴어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워싱턴의 실업계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보스턴의 머천트 은행에 근무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는 59세에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신화들을 수집해 쉽게 서술한 대표작 『전설의 시대』를 출간
했다.
그외 저서로는 『기사도 시대』 『샤를마뉴 전설』 『로망스의 시대』 『소년 발명가』 『오레곤과 엘도라도』 등이 있다.
역자 이윤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중견 작가이며 탁월한 번역문학가이자 신화 연구가. 1
947년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주요 저서로는 장편소설 『하늘의 문』 『사랑의 종자』 『뿌리와 날개』, 소설집 『하얀 헬리콥터』 『나비 넥타이』,
산문집 『무지개와 프리즘』 『어른의 학교』 등이 있다.
역서로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변신 이야기』 『그리스 인 조르바』 『신화의 힘』 『샤마니즘』 등 2백여 권이 있다.
1991년부터 2000년 6월까지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객원교수(비교문화)로 재직했다. 1998년에 중편소설
「숨은 그림 찾기」로 제29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한국번역가상을 수상했고 소설집 「두물머리」로 제8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펴낸 일련의 신화책들은 한국 사회에 신화 열풍을 몰고 왔다. 이번에 새롭게 펴낸 이윤기의 테마별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는 벌핀치의 대표적인 저서 『전설의 시대』를 텍스트로 삼아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놓은
것이다.
1.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는 다른 것이 아니다.
로마가, 문화적 열등감을 극복하는 한 방법으로 그리스 신화를 수입, 이것을 로마 화(化)한 것을 우리는 로마 신화라고
부른다.
로마가 자체적으로 흡수한 이탈리아 반도의 선주민(先住民) 신화가 있기는 하나 양적으로 미미하다.
그래서, 로마 작가들인 오비디우스와 베르길리우스의 『변신 이야기』, 『아이네이아스 이야기』를 저본(底本)으로 삼은
저자가 고유명사를 로마 식으로 쓴 경우에도 편의상 그리스 식 표기를 채용하기로 했다.
그리스 식, 로마 식을 섞어 쓰면 독자가 혼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명백한 로마 고유의 신화일 경우에는 로마
식으로 썼다.
2. 그리스 신화가 라틴 어로 번역되면서 자음과 모음에서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라틴 어 표기는 곧 영어 표기가 된다. 가장 빈번하게 접할 수 있는 고유명사의 두 가지 변화는 다음과 같다.
a. 〈-아이(ai)〉가 라틴 어의 중문자(重文字) 〈Æ(æ)〉, 즉 〈-아에(ae)〉로 변하고,
〈-오스(os)〉가 〈-우스(us)〉로 변하는 경우.
보기: 헤파이스토스(Hephaistos) → 헤파에스투스(Hephaestus)
다이달로스(Daidalos) → 다에달루스(Daedalus)
포이보스(Phoibos) → 포에부스(Phoebus)
b. 〈케이(k)〉가, 〈씨(c)〉로 변하는 경우.
보기: 케크롭스(Kekrops) → 케크롭스(Cecrops)
퀴클롭스(Kyklops) → 퀴클롭스(Cyclops)
그리스 식 표기, 로마 식 표기, 영어식 독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리스 식 쓰기 | 로마 식 쓰기 | 영어식 읽기 |
---|---|---|
우라노스 | 우라누스 | 유러너스(天王星) |
가이아 | 가에아 | 지어(地球) |
크로노스 | 사투르누스 | 새턴(土星) |
제우스 | 유피테르 | 쥬피터(木星) |
아프로디테 | 베누스 | 비너스(金星) |
아레스 | 마르스 | 마아스(火星) |
포세이돈 | 넵투누스 | 넵튠(海王星) |
헤르메스 | 메르쿠리우스 | 머큐리(水星) |
하데스 | 플루토 | 플루토우(冥王星) |
헤라 | 유노 | 쥬노 |
아테나 | 미네르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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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파이스토스 | 불카누스 | 발칸 |
디오니소스 | 바쿠스 | 박커스 |
아폴론 | 아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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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 디아나 | 다이아나 |
에로스 | 쿠피도 | 큐피드 |
헤베 | 유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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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포네 | 프로세르피나 |
|
데메테르 | 케레스 |
|
오뒤쎄우스 | 울릭세스 | 율리시즈 |
아스클레피오스 | 아에스쿨라피우스 |
|
헤라클레스 | 헤르쿨레스 | 허큘리스 |
헤스티아 | 베스타 |
|
튀케 | 포르투나 | 포쳔 |
니케 | 빅토리아 | 나이키, 빅토리 |
이윤기(소설가·번역가)
2000년 여름, 한 신문 기자와 첫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와 기자가 나에게 건네준 명함을 다시 읽어 보았다.
명함에 찍힌 것 중에서 요즘 들어 내가 가장 주의를 기울여 읽는 것은 전자 우편의 주소다.
그 신문 기자의 전자 우편 주소의 첫머리는 〈아르고스 애트(argus@)〉였다. 놀랍게도 〈아르고스〉였다.
아르고스가 누구인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르고스는 여럿이다.
그 중 셋만 소개해 보겠다. 그러면 그 신문 기자가 자기 〈ID〉를 〈아르고스〉로 지은 의도가 명백해진다.
나는 〈ID〉를 개인의 〈이드(id)〉, 즉 자아의 바탕을 이루는 본능적 충동이라고 생각한다.
아르고스는, 눈이 백 개나 되는 괴인(怪人)의 이름이다.
이 괴인은 잠을 자면서도 무엇이든 지켜낼 수 있다. 백개의 눈을 한꺼번에 감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백 개 중 몇 개를 감더라도 몇 개는 항상 뜨고 있기 때문이다.
제우스가 아름다운 처녀 이오와 정을 통하다가 본처(本妻) 헤라가 들이닥치자, 애인 이오를 소로 몸바꾸게 하고는 시치미를 뗀다.
그러자 헤라는 이오가 다시 인간으로 몸을 바꾸지 못하도록, 백개의 눈을 한꺼번에 감는 법이 없는 아르고스로 하여금 감시하게 한다.
이 때의 아르고스는 〈감시자〉다.
그런데 이 아르고스는 꾀돌이 신 헤르메스 손에 죽음을 당한다.
헤르메스는 〈카루케이온(karukeion)〉이라는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 신이다.
〈카루케이온〉은 〈전령의 지팡이(herald’s staff)〉라는 뜻이다.
신문의 제명(題名)에 〈헤랄드〉가 많은 것은 신문이, 사건과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전령이기 때문이다.
아르고스는 죽었지만, 아르고스의 눈은 죽지 않는다.
거룩한 결혼의 여신 헤라 여신이, 그 눈을 모두 뽑아 공작의 꼬리에다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공작의 꼬리에 달린 눈은 지금 이 시각에도, 잠드는 일이 없이, 거룩한 결혼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을 감시한다.
아르고스는, 신화 시대 최초의 쾌속선 〈아르고 호〉를 지은 목수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아르고 호를 타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 영웅들은 〈아르고 원정대원들〉이라고 불린다.
그러니까 이 아르고스는, 영웅들을 미지의 세계로 보낼 수단을 제작한 목수다.
이 때의 아르고스는 〈영웅들을 보내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도록 아주 빠른 배를 지어낸 사람〉이다.
아르고스는, 트로이아 전쟁과 바다 위에서의 방황으로 20년 동안이나 집을 떠나 있던 영웅 오뒤쎄우스의 늙은 충견(忠犬)
이름이기도 하다.
이 충견은, 거지로 변장하고 돌아온 주인을 알아보고는, 오래 기다린 보람을 보았다고 생각했던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이 경우의 아르고스는 〈끝까지 살아서 진상, 혹은 진실을 알아보는 충견〉이기도 하다.
그 신문 기자는 얼마나 눈이 밝은가? 신화로부터 〈아르고스〉를 빌어 자신의 소임을 설명하고, 포부를 밝히고, 미래를
예언하고 있으니 그 신문 기자는 얼마나 눈 밝은가?
신화는 포괄적인 상징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신화의 언어를 빌면, 몇 개의 단어로 아주 긴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퀴베르네테스(Cybernetes)〉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발명한 것으로 전해지는, 〈키잡이(steersman)〉가 내장
되어 있는 로봇이다.
20세기 초 인공두뇌 학자들은 〈인공두뇌학〉의 이름을 지으면서 이 이름을 빌려왔다.
그것이 바로 〈사이버네틱스(인공두뇌학)〉이다.
〈사이버(Cyber)〉라는 말이 없으면 이야기가 안 되는 시대를 연 것은 신화, 혹은 신화적 상상력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코르누코피아(Cornucopia)〉는 〈풍요의 뿔〉이다.
이 풍요의 뿔은 비는 법이 없다. 비우면 빈 만큼 다시 차기 때문이다.
신화에 왜 이런 뿔이 등장하겠는가?
가난한 사람의, 〈아무리 퍼내어도 비지 않는 쌀 단지 꿈꾸기〉, 우리 민담에도 등장하는 화수분 단지의 꿈 아니겠는가?
〈케스토스 히마스〉는 애욕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차고 다니는 허리띠다.
이 허리띠를 보면 아프로디테가 요구하는 사랑을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그럴 수 있는 신이나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비아그라다.
사람들은 묻는다.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 웬 신화인가〉하고 묻는다.
신화는, 모듬살이가 꾸는 꿈이다.
어느 나라의 신화가 되었든, 그 나라의 신화에는 그 나라 사람들의 원망(願望)이 고스란히 투사되어 있다.
과학은 그 꿈을 실현시키는 힘이다.
사람들의 꿈을 읽지 않는 과학이 무슨 소용인가?
마르크스는, 〈신화는 상상력을 절묘하게 부려, 자연을 형상화하거나 자연의 정복을 꾀한다〉고 주장한다.
유물론자 마르크스에게까지도 과학사는 과학의 〈신화 따라잡기〉 역사다.
그렇다면 신화란 무엇인가?
미국에서 활동한 인도인 바그완 라즈니쉬가 불경 『반야심경(般若心經)』을 풀어서 쉽게 펴낸, 이름이 같은 책 『반야심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여러분 안에 깃들어 있는 부처님께 문안 드립니다.」
우리 안에 부처님이 깃들어 계시다니?
라즈니쉬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부처가 있다.
우리가 감히 꿈꾸지 못할 뿐, 의식하지 못할 뿐, 우리 안에는 부처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한다는 것은, 깨닫는다는 것은 그 부처의 잠을 깨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민족 종교 천도교(天道敎)는 〈사람이 곧 한울[人乃天]〉이라는 믿음을 섬긴다.
천도교는, 사람이 한울을 믿어, 이 둘이 하나인 경지에 이르는 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사람이 한울과 하나 되는 것은, 사람 안에 한울의 씨가 없고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인도인들의 인삿말 〈나마스떼〉는 〈그대 안에 계시는 신께 문안드린다〉는 뜻이란다.
나는 신화에 대해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우리 안에 신화라는 이름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화 이야기를 할 때는, 듣는 사람들 마음에 깃들여 있는 신화에게 말을 거는 심정이 된다.
거칠게 말하면 신화는 〈신들 이야기〉다.
하지만 신들이 사라진 이 시대에 〈신화〉라는 말은, 두 가지의 두드러지는 용례를 거느린다.
한 기업이나 개인의 성취를 두고 우리가 흔히 쓰는, 〈신화적인 인물〉할 때의 〈신화〉가 그 하나인데, 이 때의 〈신화〉는, 신화 시대에나 있을 법한, 도무지 범용한 인간들의 모듬살이에서는 일어남직하지 않는 일을 성취시켰음을 뜻한다.
이 용례에서 〈신화〉는 〈고대 신화〉라고 할 때의 〈신화〉라는 말의 본 뜻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다.
나는 고대 신화의 나라 그리스의 관광 안내 책자에서 〈신화〉라는 말의 꽤 낯설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또 하나의 용례를
만났다.
「그리스 인들이 친절하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다(The Greeks’ reputation for hospitality is not a 〈myth〉).」
이 문장에서는 〈신화〉를 뜻하는 영어 단어 〈미뜨(myth)〉가 〈거짓말〉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신화는 그러면, 누군가가 지어낸 거짓말일 수도 있는가?
그럴 수도 있다. 거짓말은 거짓말이되, 되게 원초적인 거짓말일 수도 있다.
조금 더 정교한 사전적 정의를 따르면 신화란, 〈씨족이나 부족이나 민족의, 신격(神格)을 갖춘 주동자를 중심으로 펼쳐
지는, 역사적 근거는 없으나, 광범위하게 믿어지는 설화〉, 〈원시적 인생관이나 세계관으로써 한 씨족이나 부족이나 민족의 역사적, 과학적, 종교적, 문화적 요소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 옛 이야기〉다.
그러니까 신화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광범위하게 믿어지는 설화, 혹은 한 모듬살이가 살아온 삶의 배경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 옛이야기〉, 〈거짓말일 수도 있는 옛이야기〉인 셈이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신화는 진리일 수 있는가? 거짓일 수도 있는 이 신화를 두고 많은 학자들은 〈진리〉를 말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신화학자 제러마이어 커틴은, 〈영혼이 육신과 동행하듯이 진리와 동행하는 것을 신화〉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자예프에 따르면 〈종교적인 삶은 신화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신화만이
종교적인 삶을, 살아있는 개인의 격정적인 운명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에 따르면 신화는 무의식적 인식과 의식적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교량이다.
이 교량을 건너다니지 않는 한, 우리 정신 살림은 절반밖에 이루어지지 못한다.
조셉 캠벨에 따르면, 〈꿈은 개인의 신화, 신화는 모듬살이의 꿈〉이다.
나는 인도인 철학자 아난다 쿠마라스와미가 내린 신화의 정의를 가장 좋아한다.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不立文字].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면,
신화의 언어가 그 언어에 가장 가까이 있다.」
신화는, 아주 쉽게 말하면, 〈세상을 꾸며낸 신들에 관한, 거짓말일 수도 있는 황당한 옛이야기〉이다.
〈황당〉이라는 말은, 신화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에다 내가 끼워넣은 말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를 읽어 보고 내가 내린 결론은 〈황당하다〉, 〈그런데 그 황당한 것이, 진리에 아주 가까울 만큼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신화가 황당한 까닭을 나는 두 가지로 설명한다.
어느 민족의 신화가 되었든, 신화는 그 민족이 살고 있는 우주의 발생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이른바 〈우주 기원론(cosmogony)〉이라는 것인데, 오늘날 같으면야, 정교하게 발달한 언어로 우주가 발생한 내력을 설명하고 의미의 그물망에 넣어 명쾌하게 체계화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고대인들에게 그런 언어가 있었을까?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쓰는 정치한 언어와는 같을 수가 없었을 터인데 바로 그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고대의 신화가 다소 황당하게 들리지 않겠는가 싶은 것이다.
신화의 황당함은 어쩌면 신화 작가의 의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노자님 말씀 중에,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이 있다.
〈사물에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그 이름이 그 사물의 본질을 늘 온전하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뜻으로 나는 푼다.
말하자면, 이름 지어버리는 순간 그 사물의 본질은 이름에 갇히게 되는 사태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로 이런 생각에서 옛날의 현자(賢者)들은 사물에다 이름 붙이는 행위, 이름으로써 사물을 정의(定義)하기를 꺼렸다.
말하자면 사물을 정의하고 해석함으로써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넓은 뜻을 비좁은 이름에 가두는 짓을
삼가려 했던 것이다.
노자님의 『도덕경』이 〈바퀴살〉로써 까다로운 〈용무용(用無用)〉을, 〈젖먹이 아기〉로써 돈후(敦厚)한 덕을,
〈작은 생선〉 지지는 일로써 큰 정치를 설명한 까닭,
장자님의 『장자』가 〈곤(鯤)〉이라는 동물로써 세상의 크기를, 〈우물 속의 개구리[井底蛙]〉로써 사람의 크기를,
〈나비의 꿈〉으로써 만물의 유전을 설명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그것은 이와 같다〉는 말씀 끝에 에피소드를 끌어다 진리를 가르쳤다.
〈독화살 맞은 사람〉, 〈가난한 여인의 등불〉, 〈누각의 3층만 지으려는 부자〉 이야기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예수님도, 〈그것은 이와 같다〉는 말씀 끝에 에피소드를 끌어다 진리를 가르쳤다.
이로써 탄생한 것이 저 유명한 〈탕자의 돌아옴〉, 〈등유를 준비하지 않은 신부〉, 〈게으른 포도원 주인〉 이야기인
것이다.
그분들은 모두 자신의 언어로 사물의 이름을 지음으로써 그 사물의미를 그 언어에 가두는 일을 피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열린 의미〉를 지향했던 것이다.
신화가 황당하게 들리는 것은 그 의미의 그물망이 아주 폭넓고, 따라서 해석의 가능성이 폭넓게 열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 모순되는 무수한 개념을 이야기에다 통합함으로써, 초라한 언어가 야기시킬 수 있는 온갖 시비(是非)를
포괄적인 언어에다 녹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문자로 전해질 수 없다는 지극한 진리가 이야기에 담긴 채 전해지는 경우를 자주 목도한다.
그 이야기가 바로 신화 혹은 우화다. 실제로 〈신화(myth)〉와 〈우화(fable)〉는 동의어다.
토마스 벌핀치가 쓴 『벌핀치의 신화(Bunfinch’s Mythology)』는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책의 제 1부를 번역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1부의 제목은 『우화의 시대(The age of Fable)』다.
『신화의 시대(The age of Myth)』와 같은 뜻으로 쓰여진 것이다.
궁극적인 진리에 가장 가까운, 지극한 뜻을 전하는 그릇에 동서가 따로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리스의 우화작가 아이소포스(이솝)와 중국의 철학자 장자(莊子)를 보라.
그들은 우리에게 다른 언어로 같은 말을 들려준다.
아이소포스의 우화에 나오는 〈흰전나무와 가시나무〉 이야기는 이렇다.
흰전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자랑한다.
「곧고 키가 커서 군함이나 상선의 갑판 만드는데 쓰이는 나같은 흰전나무가 어떻게 너 같은 가시나무에 견주어지겠느냐?」
그러자 쓸모 없는 가시나무는 흰전나무에게 충고한다.
「자네를 무자비하게 잘라내는 도끼와 톱을 기억하라.」
이 우화는, 쓰임새 없는 가죽나무[樗]의 그 쓰임새 없음을 찬양하는 장자의 우화를 고스란히 상기시킨다.
혜자(惠子)가 가죽나무의 쓰임새 없음을 비아냥거렸을 때 장자가 그에게 한 다음의 말은 가시나무의 충고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아무 데도 쓰일 바가 없으니 무슨 괴로움이 있겠는가?」
아이소포스의 우화에는 말 우는 소리를 흉내내고 싶어 부지런히 그 소리를 시늉하던 솔개가 말 우는 소리를 배우는 것은
고사하고 솔개 우는 소리조차 잊어 버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의 우화에는, 연나라 소년이 조나라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우러 조나라 서울 한단(邯鄲)으로 갔다가 그 걸음걸이
배우는 것은 고사하고 제 나라 걸음걸이조차 잊어 버리고 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단지보(邯鄲之步)의 고사(故事)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 두 이야기는 드러내는 방식이 다를 뿐, 똑같은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뜻이 넓고 깊은 힌두 경전 『우파니샤드[奧意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명한 사람들이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던 모양이다.
그리스의 고대 도시 델포이는 아폴론의 신전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1999년 8월, 아테네 북서쪽, 자동차로 세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델포이로 달려갔다가, 박물관에서 잠깐 망연자실했던 경험이 나에게 있다.
박물관 전시 유물 중 〈아폴론의 신주헌작(神酒獻酌)〉이라는 제목이 붙은 접시 앞에서 했던 경험이다.
지름 25센티쯤 되는 접시에는 횃대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와, 수금(竪琴)을 안고 걸상에 앉은 채 술을 뿌리는 아폴론이
그려져 있다.
아폴론은 태양신, 음악의 신, 점술(占術)의 신이기도 하다.
까마귀는,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지닌 그의 신조(神鳥)다.
그리스 인들은 큰 일할 때면 으레 델포이로 달려가 아폴론이 여사제(女司祭) 퓌티아에게 맡겨놓은 신의 뜻[神託]을 물었다. 그리스 인들뿐만 아니라 로마 인들까지도 그렇게 했다.
신의 뜻, 즉 점괘 전할 때 제니는 꼭 〈트리포도스(tripodos)〉에 앉는다. 트리포도스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세 발 걸상인 〈삼각대(三脚臺)〉다.
우리 신화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세 발 까마귀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발 까마귀라면 평남 은산의 천왕 지신총에 그림으로 남아 있는 고구려의 삼족오(三足烏), 평남 용강의 쌍영총에 벽화로 남아 있는 바로 그 삼족오가 아닌가?
고구려 삼족오가 태양을 상징하는 새였다는 주장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고구려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신라 사람들도 까마귀를 일신(日神) 혹은 태양신조(太陽神鳥)로 섬겼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시경(詩經)』에도 까마귀 이야기가 나온다.
〈천제(天帝)가 보낸 현조(玄鳥)〉가 그것인데, 이 현조는 여느 새가 아니라 바로 태양을 상징하는 까마귀, 즉 양조(陽鳥),
금오(金烏), 삼족오라는 것이다.
까마귀는 세계 전역에 폭넓게 분포하는 태양의 보편적인 상징이다.
박시인의 저서 『알타이 신화』에 따르면, 까마귀를 태양신조로 섬기는 시베리아의 코리야크 족 무당은 까마귀로 분장하고 푸닥거리를 한다.
태양신이자 점술의 신인 아폴론의 신조 까마귀 및 아폴론 신전의 무녀가 앉는 삼각대······ 이것과 세발 까마귀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일에 관한 한 나는 속수무책이다.
내가 신화읽기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신화의 특성인 〈설명하기 어려움(unclarifiableness)〉, 〈정의하기 어려움(undefinableness)〉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신화를 읽는 일은 아폴론의 까마귀와 고구려의 세발 까마귀 사이를 내 나름대로 사유(思惟)하는 일이다.
끝없는 상상력을 이 까마귀와 저 까마귀 사이에다 풀어놓아 한없이 느린 걸음으로 나름으로 걷게 하는 일이다.
나에게, 신화를 읽는 일은 결국 사유하면서 상상하면서 걸으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정의하기 어려운 저 영원한 생명의 노
래에 나름의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독자도 나름대로 사유하고 나름대로 걷고 나름의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2000년 11월, 과천 작업실에서
데메테르1)
글=토마스 벌핀치
만일 우리 재산을 늘려 주거나 사회적 지위를 높여 주는 지식만을 유익하다고 한다면 신화에는 유익한 지식이라는 이름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나날을 보다 행복하게 하고, 우리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을 지식이라고 이름한다면 신화는
유익한 것이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그 까닭은 신화는 문학의 하녀, 문학은 가장 훌륭한 미덕의 이웃이며, 행복의 후원자이기 때문이다.
신화에 대한 지식 없이는 우리 국어로 씌어진, 뛰어난 문학을 이해할 수도 감상할 수도 없다. 바이런이 로마를 〈제국(諸國)의 어머니인 니오베〉라고 부르거나, 베네치아를 〈바다에서 갓 올라온 퀴벨레2) 같다〉고 노래했을 때, 신화를 익히 알고
있는 독자들 가슴에는 필설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만큼 싱싱하고 선명한 모습이 떠오르겠지만, 신화를 잘 모르는 독자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밀턴의 시에는 이와 유사한 인유(引喩)가 얼마든지 나온다.
『코무스』라는 그의 가면극은 아주 짧은데도 서른 가지 이상의 신화가 등장하고, 『그리스도의 탄생에 부치는 찬가』는
아예 절반이 신화 이미지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실락원』에도, 여기저기에 신화 이미지가 박혀 있다.
어느 모로 보나 도무지 무식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밀턴의 시를 재미없다고 하는 수가 있는데,
이 이유 중의 하나가 신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사람들이 일반인의 수준을 웃도는 신화에 대한 지식에다 우리가 만든 이 조그만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간단한 지식을 올려 쌓는다면, 지금까지 〈어렵고, 범접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되던 밀턴의 시 대부분이 〈아폴론의 수금(竪琴) 소리만큼이나 음악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4)
우리가 만든 책에는 스펜서에서부터 롱펠로우에 이르기까지 25명 이상의 시인들이 쓴 시가 인용되어 있는데, 이것만 보아도 사물을 설명할 때 신화에서 예증을 빌려 오는 관례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지켜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산문 작가들 역시 이 신화를 빌려 뛰어난 문장, 함축성이 있는 문장을 쓴다.
손쉬운 예로, 『에든버러 리뷰』나 『쿼털리 리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매콜리가 쓴 『밀턴 론(論)』에만 하더라도 스무 가지 이상의 신화가 등장한다.
그러나 신화를 공부하려면 그리스 어나 라틴 어를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 어나 라틴 어라는 매개 언어를 이용하지 않고 신화를 배울 수는 없을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이 불가사의한 사건들, 일찍이 도태되어 버린 신앙 체계······ 주로 이런 것에 관련된 학문을 배우려고 힘들여 공부한다는 것은 현대와 같은 실리적인 시대를 사는 일반 독자에겐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은 나이가 많지 않은 독자들까지도 사물에 대한 실로 다양한 과학적 지식을 요구받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공상에 지나지 않을 듯한 이런 학문에 대한 글을, 옛 사람이 써 놓은 글을 원문 그대로 읽을 여유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고대 시인들 작품의 번역판을 읽는 수밖에 없을까?
대답은 이렇다.
이 분야는 범위가 너무 넓어 초심자의 힘으로는 아무래도 무리다.
게다가 이 번역본 자체가, 신화에 대한 어느 정도 예비 지식을 갖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믿어지지 않거든 『아이네이아스 이야기』 첫면을 읽어보고, 신화에 대한 지식 없이 〈헤라의 원한〉이나 〈모이라이의
팔자〉나 〈파리스의 심판〉이나 〈가뉘메데스의 영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라.
그런 것은 해설서를 보면 알 수 있다거나 『고전 문학 사전』을 펴보면 다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해설서를 보든 사전을 펴보든 이런 번거로운 절차 때문에 독서가 중단되는 것은 찜찜한 노릇이다.
그래서 대개의 독자들은 이런 번거로움을 감수하기보다는 그런 것들을 모르는 채로 건너뛰고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해설서나 사전은 무미건조한 사실밖에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야기의 원래 재미는 조금도 맛볼 수가 없다.
시적인 신화에서 시를 제거해 버린다면 뒤에 도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케위크스와 할퀴오네(혹은 알퀴오네)의 이야기는,
우리 책에는 근 한 장(章)에 걸쳐 씌어져 있지만 사전 중에서도 가장 좋은 사전이라는 『고전 문학 사전』에도 기껏해야
8줄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른 사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든 책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의 하나로, 독자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나가려고 했다.
우리는 독자가 어디에서 이런 이야기를 만나더라도 〈아, 바로 그 이야기였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도록 신뢰할 수 있는
고대의 저작을 좇아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하는 데 마음을 썼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까다로운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학문으로부터의 쉼터로서 신화를 가르쳤으면 한다.
우리의 책에 옛날 이야기 책의 재미를 불어넣음으로써 교육이 권장하는 지식의 일부를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대부분은 오비디우스(Ovid)와 베르길리우스(Virgil)의 작품[詩]에서 취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을 곧이곧대로 번역한 것은 아니다.
시라는 것을 그대로 산문화하면 싱겁게 되어 버린다는 게 우리 생각이다.
운문 그대로 번역해도 마찬가지다.
압운이나 운율 등 갖가지 어려운 제약으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책은 먼저 산문으로 풀고, 말 자체는 바뀌어도 원문 속에 깃들여 있는 시적인 요소는 가능한 한 그대로
남도록 마음을 썼다.
그리고 산문으로 바뀌어 버린 이야기로는 적당하지 않은 부분, 곧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경우에는 이를 생략하기도 했다.
시의 인용은 상당히 폭넓고 자유롭게 했는데, 이는 인용하는 시가 중요한 목적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인용한 시는 한 이야기 한 이야기의 중요한 사건을 우리 가슴에 기억으로 터잡게 하며, 고유 명사의 정확한 발음을 익힐
수 있게 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옥같이 많은 시구가 우리 기억을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여기 우리가 인용한 시의 상당수가 책을 읽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자주 인용되거나 언급되는 시구들이기 때문
이다.
우리는 이 책에 수록될 〈문학과 관계가 깊은 신화〉를 가려 뽑으면서 격조 높은 문학 작품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미풍양속을 해칠 만한 이야기나 시구는 하나도 수록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화제에 자주 오르지도 않거니와 설령 오른다 하더라도 모른다고 고백해 버리면 된다.
그런 고백이라면 부끄러울 것도 없다.
우리의 책은 학자들을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다.
신학자를 위한 책도, 철학자를 위한 책도 아니다. 영문학 독자를 위한 책에 가깝다. 남녀 구별 같은 것도 없다.
말하자면 가두 연설가나 강연가나 비평가나 시인이 자주 인용하는 이야기, 일상의 격조 높은 대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인 것이다.
우리는 젊은 독자들이 이 책을 재미있는 심심풀이로 생각해 줄 것으로 확신한다.
나이가 든 독자에게는 유익한 독서의 반려, 여행하거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 분들에게는 회화나 조각 작품의 해설서, 교양 있는 모임에 자주 어울리는 분들에게는 이따금 주고받는 인유(引喩)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열쇠가 되어 줄 것으로
믿는다.
마지막으로 인생을 오래 살아온 노인들에게는 문학의 여로를 되짚어가게 하여 아득한 유년 시절에 이르게 하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마다 인생의 새벽과의 만남을 소생시키는 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원히 계속되는 신화와 독자의 친교는 콜리지의 저 유명한 시구에 이렇게 그려져 있다.
바로 『피콜로미니 부자(父子)』 제2막 제4장에 나오는 시구다.
아득한 시절 시인들이 그려낸 명료한 모습,
고대 종교가 낳은 저 아름다운 인간적 속성.
힘의 신, 아름다움의 신, 주권의 신.
혹은 비좁은 골짜기에
혹은 소나무 우거진 산에,
혹은 숲속에, 혹은 조용히 흐르는 물가에,
혹은 잔돌이 비치는 우물에 혹은 대지의 틈바구니나 깊은 바다에 사는
이 신들은 이제 모두 추방되었다.
이제는 이성(理性)의 믿음 안에도 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말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오랜 본능은 옛 이름을 부른다.
사람과는 허물없이 이 대지에 살던 요정과 신들의 이름을.
지금도 위대한 것으로 불리는 것은
하늘의 제우스5)
아름다운 것으로 불리는 것은
하늘의 아프로디테6)
1 이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를 로마 신화에서는 〈케레스(Ceres)〉라고 부른다. 보리죽의 일종인 〈시어리얼(cererial)〉은 〈케레스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의 데메테르 상을 복제한 4세기 로마의 복제품.
2 프뤼기아 지방에서 그리스 쪽으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대지의 여신.〈마그나 마테르(Magna Mater)〉, 즉 〈크신 어머니 대지〉는 바로 이 여신을 두고 한 말이다. 땅의 여신,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보다는 몇 세대 앞선 여신이다.
3 테바이의 아름다운 왕비 니오베는, 자식 많은 것을 자랑하고, 자식이 둘밖에 없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어머니 레토를 비아냥거렸다가 레토의 저주를 받아 자식을 모두 잃었다. 사진은 기원전 5세기의 대리석상 〈니오베의 죽어가는 딸〉.
4 『코무스』로부터의 인용.
5 제우스의 로마 이름은 〈유피테르(Jupiter)〉, 영어 이름은 〈쥬피터〉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제우스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목성(Jupiter)〉을 가리키는 것 같다.
6 아프로디테의 로마 이름은 〈베누스(Venus)〉, 영어로는 〈비너스〉가 된다. 아프로디테 여신을 지칭하기보다는 그 이름에서 유래한 별 이름 금성(Venus)을 가리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