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uri3486@daum.net
재미있는 서울 도로명의 유래
원효로 세종로 을지로 충무로 충정로 퇴계로 등
■ 충무로와 충정로
어느 나라나 각각의 도로에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 인구 증가에 따라 도로가 많이 생기고, 이 도로들에 각각 이름을 붙인다.
서울 도로명을 통해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도 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정부는 가로명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일단 일제강점기 일본식 도로 명칭인 ‘○○통(通)’을 ‘○○로(路)’로 모두 변경했다. 또 이름들을 다시 지어 일제의 잔재를 지워 냈다.
일제강점기 가장 번창했던 현 충무로는 일본인이 가장 번성했던 곳이기에 일본을 크게 무찌른 충무공 이순 신의 아호를 따와 충무로라 작명됐다. 본정통(本町通)을 없애고 이순신 장군의 아호를 따서 충무로라고 고쳤다. ‘본정(本町)’이란 이름은 일본에서는 그 ‘도시의 중심이 되는 곳’을 뜻하고, 통(通)은 ‘길’을 뜻한다. 본정통은 우리나라 주요 도시마다 있는 지명이다. 광주(光州)의 본정통도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김덕령의 아호를 따서 ‘충장로’라고 변경했다.
또한 일제의 명칭을 지운 대표적인 또 다른 곳이 충정로이다. 이 일대는 강화도조약 이후 처음으로 일본공사관을 현 지하철 서대문역 인근의 동명여중 자리에 세움으로써 일본의 조선 진출에서 교두보가 된 곳이다. 따라서 일제는 이 일대를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이름을 따서 다케조에마치(竹添町·죽첨정)라 했다. 따라서 이 역시 을사늑약에 분개하며 자결한 민영환의 아호를 따서 충정로라 지은 것이다.
■ 삼봉로와 소공로, 을지로
미국대사관(왼쪽 건물)에서 정도전의 집터인 옛 종로구청을 지나 조계사 방향으로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을 기리는 의미로 그의 호를 따서 작명된 삼봉로(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조계사 앞 교차로)가 있다.
세 번째는 현 소공로이다. 이곳에 있는 황실영빈관 대관정을 당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 일대 지명을 자기 이름을 따서 하세가와초(長谷川町·장곡천정)라 한 것을 이곳의 옛 지명인 소공동을 지나는 길이라 하여 소공로로 바꾸었다. 이곳이 소공동인 것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이곳으로 출가하여 작은공주골이라 불리던 것을 한자로 소공동이라 표현한 것이다.
한편 중국과 관련한 도로명은 을지로다. 이곳은 본래 을지로 1가와 2가 사이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어 먼 곳에서 이곳을 보면 구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다고 하여 ‘구리개’라 불렀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이를 한자로 바꿔 ‘황금정’이라 했다. 하지만 해방 뒤 이를 을지로로 변경했다. 왜냐면 을지로3가의 수표교 일대가 화교가 한반도에 진출하며 처음 화교촌을 형성했던 곳이라 중국 수나라의 침략을 크게 물리친 살수대첩의 주인공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 충정로와 율곡로, 도산대로, 소월로, 소파로, 사임당로
지하철 서대문역 일대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처음으로 진출했던 곳이다. 이에 을사늑약으로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아호를 따서 충정로라 작명했다.원본보기
지하철 서대문역 일대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처음으로 진출했던 곳이다. 이에 을사늑약으로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아호를 따서 충정로라 작명했다.
이처럼 외세와 관련한 명칭이 생겨난 것과 달리 그 일대 살았던 역사적 인물을 따서 이름이 붙여진 대표적인 곳은 율곡 이이가 인사동에 거주했다고 붙여진 율곡로다. 이 밖에도 삼봉 정도전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삼봉로(미국 대사관~조계사 교차로), 백과사전 <지봉유설>의 집필자 이수광이 살았던 지봉로(보문역~동묘앞역), 도산 안창호의 묘가 있는 곳이라 하여 도산대로(신사역~영동대교 남단)라 부르게 됐다.
또한 해당 인물이 실제 살았던 적은 없지만 그 일대 들어선 기관·학교 등의 상징성으로 지어진 도로명도 있다. 예컨대 1970년 남산 기슭에 어린이회관이 건립되고, 이듬해 어린이운동의 창시자 소파 방정환 동상도 세워지자 그 앞을 지나는 도로를 소파로라 했다. 또 서초구의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서울교육대학 앞을 지나는 도로는 이율곡을 키워낸 신사임당을 따서 사임당로로 정했다. 한편 남산 소월로는 도로명 제정 당시 그 도로변에 김소월의 시비가 있다는 점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 이황과 지리적 인연은 없지만 율곡 이이를 기리는 율곡로가 생기는 상황에서 조선 유학의 양대 산맥인 퇴계 이황을 기리는 도로명도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퇴계로(서울역~신당역).
퇴계 이황과 지리적 인연은 없지만 율곡 이이를 기리는 율곡로가 생기는 상황에서 조선 유학의 양대 산맥인 퇴계 이황을 기리는 도로명도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퇴계로(서울역~신당역).
■ 퇴계로와 원효로
하지만 이러한 상징적 건물이나 동상조차 없었음에도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차용한 도로명도 있다. 서울 도심을 지나는 퇴계로는 퇴계 이황의 호를 땄지만 이 도로와 이황은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이황 동상 역시 남산에 있다. 하지만 이 도로를 퇴계로라 정한 것은 해방 뒤 율곡로를 제정하며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유학의 양대 산맥인 퇴계 이황의 이름을 가진 도로명도 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 지어졌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원효로다. 누구나 이 명칭을 듣는 순간 원효대사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원효로는 원효대사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이 명칭은 1946년 가로명제정위원회가 지은 이름인데 충무로, 을지로 등과 달리 어떠한 작명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굳이 그 근거를 상상해 본다면 일제강점기 이 일대를 모토마치(元町·원정)라 했는데 여기서 ‘원’자와 인근 효창원의 ‘효’를 합성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당시 가로명제정위원회 팀장이던 초대 서울시장 김형민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그가 불교계의 대표 인물인 원효대사를 기린다는 차원에서 붙인 것이 아닌가 한다. 서울시는 이런 비판에 대해 뒷수습하는 형태로 1969년 효창공원에 원효대사 동상을 건립했다.
■ 백범로
정부 수립 후에는 용산구에서 마포로 이어지는 길을 한때 용산과 마포를 잇는다고 해서 용마로(龍馬路)라고 했었다. 그러나, 이 글 중간에 백범 김구 선생의 기념관이 있어서 1984년에 ‘백범로’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도로 용마루고개가 있는데 마포구와 용산구의 경계가 된다.
테헤란로는 강남의 대표적 도로이다. 이 도로는 1972년 선정릉(선릉과 정릉)에 묘가 3개 있다고 하여 ‘삼릉로’라 지은 것을 1977년 서울시와 테헤란시(이란의 수도)가 자매결연을 하며 테헤란과 서울에 각각 서울로와 테헤란로를 작명하기로 하며 생겨난 도로명이다.
-------------------------------------------
도로명 명칭 부여 일화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668795?sid=103
어느 나라나 각각의 도로에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 인구 증가에 따라 도로가 많이 생기고, 이 도로들에 각각 이름을 붙인다.
서울 도로명을 통해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도 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정부는 가로명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일단 일제강점기 일본식 도로 명칭인 ‘○○통(通)’을 ‘○○로(路)’로 모두 변경했다. 또 이름들을 다시 지어 일제의 잔재를 지워냈다.
일제강점기 가장 번창했던 현 충무로는 일본인이 가장 번성했던 곳이기에 일본을 크게 무찌른 충무공 이순 신의 아호를 따와 충무로라 작명됐다. 본정통(本町通)을 없애고 이순신 장군의 아호를 따서 충무로라고 고쳤다. ‘본정(本町)’이란 이름은 일본에서는 그 ‘도시의 중심이 되는 곳’을 뜻하고, 통(通)은 ‘길’을 뜻한다. 본정통은 우리나라 주요 도시마다 있는 지명이다. 광주(光州)의 본정통도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김덕령의 아호를 따서 ‘충장로’라고 변경했다.
또한 일제의 명칭을 지운 대표적인 또 다른 곳이 충정로이다. 이 일대는 강화도조약 이후 처음으로 일본공사관을 현 지하철 서대문역 인근의 동명여중 자리에 세움으로써 일본의 조선 진출에서 교두보가 된 곳이다. 따라서 일제는 이 일대를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이름을 따서 다케조에마치(竹添町·죽첨정)라 했다. 따라서 이 역시 을사늑약에 분개하며 자결한 민영환의 아호를 따서 충정로라 지은 것이다.
미국대사관(왼쪽 건물)에서 정도전의 집터인 옛 종로구청을 지나 조계사 방향으로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을 기리는 의미로 그의 호를 따서 작명된 삼봉로(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조계사 앞 교차로)가 있다.
세 번째는 현 소공로이다. 이곳에 있는 황실영빈관 대관정을 당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 일대 지명을 자기 이름을 따서 하세가와초(長谷川町·장곡천정)라 한 것을 이곳의 옛 지명인 소공동을 지나는 길이라 하여 소공로로 바꾸었다. 이곳이 소공동인 것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이곳으로 출가하여 작은공주골이라 불리던 것을 한자로 소공동이라 표현한 것이다.
한편 중국과 관련한 도로명은 을지로다. 이곳은 본래 을지로 1가와 2가 사이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어 먼 곳에서 이곳을 보면 구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다고 하여 ‘구리개’라 불렀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이를 한자로 바꿔 ‘황금정’이라 했다. 하지만 해방 뒤 이를 을지로로 변경했다. 왜냐면 을지로3가의 수표교 일대가 화교가 한반도에 진출하며 처음 화교촌을 형성했던 곳이라 중국 수나라의 침략을 크게 물리친 살수대첩의 주인공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하철 서대문역 일대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처음으로 진출했던 곳이다. 이에 을사늑약으로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아호를 따서 충정로라 작명했다.원본보기
지하철 서대문역 일대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처음으로 진출했던 곳이다. 이에 을사늑약으로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아호를 따서 충정로라 작명했다.
이처럼 외세와 관련한 명칭이 생겨난 것과 달리 그 일대 살았던 역사적 인물을 따서 이름이 붙여진 대표적인 곳은 율곡 이이가 인사동에 거주했다고 붙여진 율곡로다. 이 밖에도 삼봉 정도전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삼봉로(미국 대사관~조계사 교차로), 백과사전 <지봉유설>의 집필자 이수광이 살았던 지봉로(보문역~동묘앞역), 도산 안창호의 묘가 있는 곳이라 하여 도산대로(신사역~영동대교 남단)라 부르게 됐다.
또한 해당 인물이 실제 살았던 적은 없지만 그 일대 들어선 기관·학교 등의 상징성으로 지어진 도로명도 있다. 예컨대 1970년 남산 기슭에 어린이회관이 건립되고, 이듬해 어린이운동의 창시자 소파 방정환 동상도 세워지자 그 앞을 지나는 도로를 소파로라 했다. 또 서초구의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서울교육대학 앞을 지나는 도로는 이율곡을 키워낸 신사임당을 따서 사임당로로 정했다. 한편 남산 소월로는 도로명 제정 당시 그 도로변에 김소월의 시비가 있다는 점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 이황과 지리적 인연은 없지만 율곡 이이를 기리는 율곡로가 생기는 상황에서 조선 유학의 양대 산맥인 퇴계 이황을 기리는 도로명도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퇴계로(서울역~신당역). 사진은 퇴계로에서 가장 번화한원본보기
퇴계 이황과 지리적 인연은 없지만 율곡 이이를 기리는 율곡로가 생기는 상황에서 조선 유학의 양대 산맥인 퇴계 이황을 기리는 도로명도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퇴계로(서울역~신당역). 사진은 퇴계로에서 가장 번화한 신세계백화점(왼쪽) 일대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적 건물이나 동상조차 없었음에도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차용한 도로명도 있다. 서울 도심을 지나는 퇴계로는 퇴계 이황의 호를 땄지만 이 도로와 이황은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이황 동상 역시 남산에 있다. 하지만 이 도로를 퇴계로라 정한 것은 해방 뒤 율곡로를 제정하며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유학의 양대 산맥인 퇴계 이황의 이름을 가진 도로명도 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 지어졌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원효로다. 누구나 이 명칭을 듣는 순간 원효대사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원효로는 원효대사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이 명칭은 1946년 가로명제정위원회가 지은 이름인데 충무로, 을지로 등과 달리 어떠한 작명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굳이 그 근거를 상상해본다면 일제강점기 이 일대를 모토마치(元町·원정)라 했는데 여기서 ‘원’자와 인근 효창원의 ‘효’를 합성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당시 가로명제정위원회 팀장이던 초대 서울시장 김형민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그가 불교계의 대표 인물인 원효대사를 기린다는 차원에서 이러한 편법을 쓴 것이 아닌가 상상해본다. 서울시는 이런 비판에 대해 뒷수습하는 형태로 1969년 효창공원에 원효대사 동상을 건립했다.
정부 수립 후에는 용산구에서 마포로 이어지는 길을 한때 용산과 마포를 잇는다고 해서 용마로(龍馬路)라고 했었다. 그러나, 이 글 중간에 백범 김구 선생의 기념관이 있어서 1984년에 ‘백범로’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도로 용마루고개가 있는데 마포구와 용산구의 경계가 된다.
테헤란로는 강남의 대표적 도로이다. 이 도로는 1972년 선정릉(선릉과 정릉)에 묘가 3개 있다고 하여 ‘삼릉로’라 지은 것을 1977년 서울시와 테헤란시(이란의 수도)가 자매결연을 하며 테헤란과 서울에 각각 서울로와 테헤란로를 작명하기로 하며 생겨난 도로명이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
여기서 광복 후 서울의 거리 이름 제정에 큰 몫을 담당했던 황의돈 선생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황의돈
일제강점기 『대동청사』, 『조선신사』, 『중등조선역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호는 해원(海圓). 충남 서천 출생. 아버지는 황기주(黃麒周)이며, 한말의 문인 황현(黃玹)과는 족친간이다. 전통적인 유학 가문에서 태어나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7세 되는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1907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근대식 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해 1년 만에 수료하고 그 뒤 2년간은 서울과 일본의 동경(東京)을 내왕하며 근대 학문을 섭렵하였다. 1909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존망의 위기에 놓였음을 직시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 중영촌(中營村)으로 이주,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창설하고 국사교육 등을 통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10년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귀국,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방면으로 다시 망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승훈(李昇薰) 등의 만류로 망명을 포기하고, 안주·가산·정주 등지에서 국사교육을 맡아 후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1년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국사교육을 맡았으며, 1913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청년들에게 국사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1916년 YMCA강당에서 국사 강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며, 재직하고 있던 휘문의숙의 교사직에서 파면되기도 하였다. 1920년 이후 약 20여 년 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국사와 한문를 강의하였고,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의 교원도 겸임하였다.
1938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학교에서의 국사·국어교육이 금지되자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다. 조선일보사 기자 재직시에는 고적조사를 담당했으며,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기자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하였으며, 52세 때인 1942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오대산에 입산, 방한암(方漢巖) 선사에게 사사하였다.
그 이후 말년에는 주로 국사와 불교의 선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교육에 진력하다 75세로 세상을 떴다.
그의 생애는 자신이 술회하였듯이 초년에는 한문학, 중년에는 사학(史學), 말년에는 선학(禪學)에 종사하는 등 세 번이나 배움의 길을 바꾸었으며, 이는 국권상실 시대에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그 주된 뜻이 있었다.
저술로는 『대동청사(大東靑史)』·『조선신사(朝鮮新史)』·『중등조선역사(中等朝鮮歷史)』 등의 사서와 『화담 서경덕전』·『이목은전』·『안의사(중근)전』·『손의암(병희)전』 등 전기 다수, 그리고 「갑오혁신운동과 전봉준」 등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한편 여러 사찰의 고승들을 숭앙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오대산에 입산하여 방한암 선사에게, 그리고 부산 범어사에서 하동산 선사에게 사사하는 등 참선 수행 생활을 하였다. 1951년 동국대 교수로 취임한 이후 1961년 퇴임까지 재직하면서 교육과 연구에 매진하였다. 역사는 최선의 행복을 위한 생활개선의 기록이다. 특히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영향을 받아 무한의 생명관을 실현하자고 주장하는 등 역 사와 선을 접목한 역사교육자이자 사학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