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짜장면집
함성호
창녀의 보람을 아느냐, 고,
어느 건축가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그는 눈 내린 포도밭을 가리키며 웃었다
나도 웃었다 새벽, 여관비가 없는 나와 영숙이는
벽치기를 했다 영숙이의 빤스로 정액을 닦고
두 손 꼭 잡고 먹던 자비의 새벽 짜장면
유년의 폭설이 가제리 산 70번지로 영숙이 검은 머리 위로 쌓이고
숙아 숙아, 넌 꼭 망부석 같으다 신월동 새벽 짜장면집을 나오며
영숙이와 나는 성당에 가서 무릎 꿇고 빌었다
마리아님, 임신 안 되게 도와주소서 수도원엔 나무 한 그루 서 있었다
하얀 석회 가루로 세례를 받은 떳떳한 모형 나무가
영숙이 알치마처럼 휘날리던 가제리
검은 추억의 면발에 붉은 고춧가루 듬뿍 뿌린
짜장면뿐만 아니라 우동과 짜장밥까지 있던 신월동 근처
영숙이의 입속에서도 맛볼 수 있던 매운 양파 냄새
빛과 어둠이 개벽하던 모형의 세계에서
다시 나는 새로운 우주를 건축중이다
여관비 없어 어두운 골목 조립식 담 밑에서 영숙이와
짜장면 먹고 한 탕 더 뛰던
눈 덮인 나목裸木, 자비의 새벽 짜장면집
―『 56억 7천만 년의 고독 』, 문학과지성사, 1992
첫댓글 <창작반> 수업시간에 문경재 샘의 시를 합평하다가 시적 표현의 '수위'에 대한 논의가 잠깐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개해드리기로 했던 시 두 편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물론 이 시는 어제 <작법반>에서 다룬 시적 대상이나 소재, 표현에 대한 '고정관념'과도 연계됩니다.)
기억이 얼마나 믿을 게 못 되는지, 알고보니 시인도, 제목도 비슷하게 잘못 말씀드렸네요.
시를 찾아놓고 보니, 하필 당시 흔한 이름의 대명사였던 '영숙이'가 등장해서 좀 민망하기도 하지만, 시가 '벽치기'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가난하고 순수했던 청춘의 사랑'과 그 이면의 시대적 비애 등을 말하려는 것일 때 시에서의 표현 수위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겠죠. 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생각해 보시면 될 것입니다.
"창녀의 보람"과 "눈 내린 포도밭"의 의미, 화자가 실제의 세계가 아닌 "빛과 어둠이 개벽하던 모형의 세계에서/ 다시 새로운 우주를 건축"할 때의 '모형의 세계'와 '새로운 우주'의 의미 등을 톺아보시길요. 생의 쓸쓸함이 왈칵 밀려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