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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립바 왕을 전도하는 바울.
( 사도행전 26 장 )
성경말씀 읽기는
반드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로 연결 되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의 지식 없이는 믿음은 결코 생겨 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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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과
사도 바울이 세상을 사는 것이 달랐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의 중심에는 내 자신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의 기준을 항상 나 자신에게
두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면
행동 하고 손해가 되면 물러서는 것이 우리들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중심에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내게 어떤 불이익이 닥치고
손해가 있게 될 것인가를 계산하지 않고 모든
기회를 틈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도들에게는 양보와 타협이
없습니다. 적당히 절충하면서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은
감추는 법이 없습니다.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에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처럼 자기 백성을
살리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누리고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애써 땀흘리고 거짓말도 하며 다른 사람들과 경쟁합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핍박하던 죄로 인해 악령에
사로잡혀 살다가 예수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영혼
깊은 곳에 자유와 희락의 샘이 솟구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온
사도 바울의 영적인 눈으로 볼 때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의 삶은 어둠의 노예 죄의 노예의 삶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빈곤한 그들을 향해 결박한 것
외에는 모두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1. 아그립바 왕 앞에서.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면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면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사도행전 26 :1-2)
아그립바왕과 베스도 총독과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이
재판정에 모였고 아그립바왕은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청문회가 아그립바 왕을
위하여 열린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25:22) 바울에
대한 청문의 주도권은 아그립바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진행됩니다.
사실상 베스도가 자신은 유대의 종
교적 배경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으므로
바울에 대한 심문을 아그립바에게 일임한 것은 현명한 판단입니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
이니이다.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사도행전 26 :3)
아그립바 왕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잘 아시기 때문에 다행이
여기며 변명하오니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
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사도행전 26 :4-5)
바울의 고향은 '다소'였으나 실질적인 그의 정신적 배경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바울이 구체적인 그의 성장 배경이나 삶의
방식에 대해 유대 사회에 두루 알려져 있는 바임을 힘주어 말합니다.
그는 그의 바리새적 배경과 유대교적 열정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먼저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바리새파에
속하여 바울은 엄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신앙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이라 하면 가장
엄격하고 완벽에 가까운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것이니이다"
(사도행전 26 :6-7)
그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었고 특히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 즉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뿌리를 둔 것입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사도행전 26 :8)
바울은 자신이 신문을 받는 까닭은 바로 부활 문제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부활
시키실 수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왜 못가지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
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사도행전 26 :9-10)
바울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지 못하고 많은 일을 행해야할
줄로 생각하고 예수를 대적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하나님을
바로 믿으려고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탄압자에서 선포자로 바뀌는
극적인 반전(反轉)을,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강렬한
인상과 설득력을 유발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잘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대적하였으며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그들을 죽이는 일이 옳다고 주장하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사도행전 26 :11-12)
그의 열심은 특별해서 각 회당에서 여러 번
사람들에게 벌을 주었고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고
심히 격분하여 외국의 성까지도 가서 성도들을 핍박하였습니다.
바울의 과거의 삶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심기려면 먼저 하나님꽈 그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하겠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2. 가시채를 뒷발질 하는 바울.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사도행전 26 :13-14)
팔레스틴의 정오는 매우 무덥기 때문에 대개 이때쯤이면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을
위해 강행군을 하고 있었으니 그의 열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다메섹 성을 향해
가고 있었을 때 정오 즈음에 길에서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과 그 일행에게 비추었습니다.
그들은 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때
히브리말로 바울에게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 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채는 가시나무 막대기로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인데 밭을 갈 때 소나 말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가시채를 맞은 소나
말이 반항하면 할 수록 더욱 심하게 찔리고 상하여 고통을 받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사도행전 26 :15-16)
바울이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라고
바울이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 라고 그는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랫 동안 침묵하셨으나
이제 그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를 부르실 때가 되었습니다.
부활 승천 하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자신이 나타나신 목적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구원하셔서 일꾼과 증인을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구원의 사역이란 사람의 내면적, 영적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행전 26 :17-18)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빛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 어두움에서
헤매고 있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빛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듯이 바울도 사람들의 소경된 영안을 뜨게 하여 죄악과 방탕한
어두움의 생활에서 벗어나 빛을 발견케 해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어두움이 사단의 권세를 뜻한다면 빛은 하나님의 지배를 뜻합니다.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들에게서 기업을 얻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사도행전 26 :19-20)
그후부터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유대사람과 이방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코 자의적인 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사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된 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처럼 복음을 증거하는 것도 거역할 수 없는 소명입니다.
만일 그가 자기의 본 바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셈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논리로 자기 사역의 정당성을 납득시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
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
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사도행전 26 :21-23)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죽이고자 하지만
하나님이 살리셔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바울을 지금 심문받는
자리에 서게 한 직접적인 죄목은 소위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바울이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전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실천한 까닭에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잘 알고 있던 아그립바는 바울의 소명 즉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바울을 죽이려 하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베스도와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이 빛을 알고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사도행전 26 :24)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자
베스도는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다고 했습니다;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한다" 고 외쳤습니다.
진리의 종은 때때로 세상으로 부터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사도행전 26 :25-26)
바울은
베스도 총독에게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함을
알고 더이상 그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했습니다.
아그립바왕은 대제사장에 대한 임명권을 가진
성전의 보호자였고,유대교와 구약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으므로 바울의 증언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증언이 어떤 은밀한 종교 집단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진 생생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요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공공연하게 선포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사도행전 26 :27-28)
바울은 아그립바왕이 선지자를 믿느냐고 묻습니다. 선지자를
믿으시냐는 말 속에는 '선지자를 믿는다고 하면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부활 또한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선지자를 믿습니다. 아그립바는
성전의 보호자로서 선지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해서
이루어진 신실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이
복음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변명의 기회를 예수님
증거의 기회로, 자기 구원의 기회를 타인 구원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말에 크게
동조도 하지않고 반대도 않는 미지근한 태도를 택했으리라 봅니다.
3.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이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사도행전 26 :29)
바울은 말이 많고 적은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과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결박된 것 외에는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고 구원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습니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사도행전 26 :30-32)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일어나서
공통적으로 바울이 무죄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의 최후 진술이 끝나자 아그립바 왕과 총독과 함께 배석했던
사람들이 일어섬으로써 그날의 청문회는 조용히 마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문소를 빠져나간 참소자들은 다른 장소로
옮겨가 바울의 증언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
하거나 결박하여 둘 만한 혐의점(嫌疑點)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지 않았다면 바울을 석방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무죄가 최종적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
하지 않았다면 석방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그립바의 결론입니다.
바울의 무죄가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않는 것에 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가이사에게 항소를
했기 때문인 것으로 귀결되지만. 그러나 바울이 석방되지 못하고
로마의 가이사에게 가야되는 현재 상황의 배후에는 주님의 뜻이 계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내가 어떤 믿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우리의 운명이 갈라지는 줄 믿습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바른 신앙을 갖지 않으면 자칫
잘못된 지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로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그 옛날 핍박자 바울에게 빛가운데 찾아 오셔서 그를
변화시키시고 도구로 사용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우리들
다 되게 하시고 주께 쓰임받는 귀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 8. 11. -샬롬- 예수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