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샘통신’을 받아보는 한 후배님이 일간신문에 생활칼럼을 보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논설위원실장이 그 코너를 담당하는데, 강추하겠다는 것이다. 나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여, 써본 졸문의 생활칼럼인데, 그 신문에서 실을지 말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의 친구들에게 가장 먼저 읽게 하고 싶어 우리의 홈페이지에 선을 보인다. 기우이지만, 혹시 이 글을 옮기면 나의 입장이 곤란해진다는 것은 아시리라.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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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의 생활화와 친구아내의 호칭 2020.3.20.
전라도 전주에 있는 한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어느새 40년이 훌쩍 넘었다. 객지(서울)에 있는 동창 100여명이 어울렁더울렁 산 것도 그 세월과 엇비슷하다. 희한한 것은, 스스럼없기로 치면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만큼 편한 상대도 없을 듯하다. 3년 동안 같은 반을 한번도 안했어도, 대충 얼굴은 기억하게 마련. 두세 번만 만나면 금세 ‘야’ ‘자’가 되고, 횟수가 거듭되면 거친 말이나 욕도 예사로 하기 일쑤이지 않은가. 그때마다 부딪치는 문제가 동창친구들의 와이프 호칭이었다. 심지어 말다툼한 경험도 있을 터.
‘민증(주민등록증)으로 봐라. 내가 엄연히 형님이거늘. 형수씨가 당연하다’ ‘미친 노오놈. 동생의 아내이니 제수씨가 마땅하다’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친구 아내들을 어떻게 부를까, 고민이라면 큰 고민을 단숨에 해결하는 호칭이 있었으니. 친구의 아내를 존중하는 뜻에서 모두 ‘형수兄嫂’라 부르자는 안건이 어느해 정기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획기적인 일이었다. 일단 형수라 부르기 시작하니 ‘시동생’으로서 ‘친구의 아내’를 대하는 데 있어 격의가 없어지고 편하여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왜 시쳇말로 ‘형수 앞에서는 웃통도 벗을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로부터 20여년, 일년에 최소 서너 번은 부부동반 정례모임이 있다. 6월 6일(6회 졸업) 야유회가 그렇고, 신년 교례회와 여름 천렵행사가 그것이다. 그때마다 최소 30여쌍이 참석하니 장관壯觀이라면 장관일 터. 이제는 암시랑토 않게 익숙해진 ‘규록이형수’ ‘병운이형수’ 등 누구누구 형수라는 호칭에 ‘여고생(남고생들의 옆지기이므로 당연히 여고생이다)’들도 싫지 않은 표정이고, 당연시한 지 오래이다. 형수들에게는 재롱이나 몽니도 허락되니 금상첨화가 아니고 무엇이랴. 물론 형수들은 남편의 친구들을 ‘서방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여기도 형수, 저기도 형수, 나는 형수들을 사랑한다.
하나 더 자랑할 것은, 친구들이 대부분 호號를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15년 전쯤에 성균관에서 한문고전을 배우던 한 친구가 수십 명의 친구들에게 두 글자 호를 선사하기 시작한 게 시발이었다. 호를 지어줄 때마다 남긴 짧은 작호기作號記를 모아놓으니 소책자 한 권이 되었다고 한다. 굳이 조선조 고리타분한 유교와 선비문화를 흉내내고자 함은 아니었다. 나이는 들어가는데, ‘00아’ 등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보다 호로 부르니 훨씬 점잖은 것같고, 뭔가 유식한 티도 나는 듯했다. 호를 받은 친구들이 ‘호턱을 내겠다’며 서울시내 곳곳에서 열린 번개팅도 무릇 기하였던가. 일단 동문회의 단합을 위해서도 아주 좋은 이벤트였다.
한 친구는 감격스러웠는지, 직장 명함에도 호를 버젓이 새기고 다녔다. 하도 호로 부르는 경우가 많으니, 정작 친구의 본명이 생각나지 않아 당황했다는 사례까지 생겼다. 심지어 아직도 호 선물을 받지 못하는 친구는 위화감과 소외된 느낌이라고 불평을 털어놓기도 했다. ‘호의 생활화’는 친구 부인의 아내에게 ‘형수’라고 불러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듯, 친구끼리 예전처럼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러나 사실이 그러했다. 호는 주로 선생님이나 고명한 선배들이 지어주었지만, 애정을 듬뿍 담은 친구가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 지어주는 호인만큼 얼마든지 반길 일이지 않은가. ‘6학년’으로 승급한 다른 학교 동문들도 따라해보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첫댓글 멋진 얘기 가슴에 담아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