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왕 록펠러
존 록펠러는 미국 역사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가장 냉혹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붙는다. 그의 이름은 자연 대단한 명성을 자랑하는 석유회사 스탠더드오일과 떼어놓을 수 없다.
록펠러가 석유산업에 뛰어든 역사는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1861~1865년)로 거슬러 간다. 1870년에 아메리카 스탠더드오일 회사를 세울 때만 해도 사업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으나, 클리블랜드 내셔널 시티은행의 대출을 받은 이후로 그는 사업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찾은 듯했다. 특히 악의적 경쟁이 판치는 곳에서는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몸담은 석유제련업종은 단기적으로 볼 때 수익이 높았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업체끼리 제살 깎아 먹기 식의 악성 경쟁이 성행했다. 록펠러가 여기서 살아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인정사정 없이 경쟁자를 짓밟아버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은 우선 그의 조종을 받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한 회사를 통해 현금을 주고 낮은 가격에 경쟁사를 사들이는 것이다.
만약 제안을 거절하면 무자비한 가격전으로 보복을 하는데, 그 경쟁은 상대방이 굴복하거나 파산까지 가야 끝이 났다. 이렇게 해도 효과가 없을 경우 록펠러는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했다.
즉 경쟁업체의 직원들을 구타하거나 경쟁사 공장에 불을 지르는 등의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경쟁사가 몇 안 남게 되었다. 이 같은 독점 행위는 동종업계의 분노를 불러왔지만, 뉴욕 은행가들은 그의 회사에 큰 흥미를 느꼈다.
독점을 선호하는 은행가들은 록펠러가 독점을 위해 저지르는 고도의 집행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점점 강해지는 미국을 제압하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차라리 유럽의 국왕 한 명을 제압하는 것이 민선 정부를 통제하는 일보다 훨씬 쉬웠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자 로스차일드 가는 미국을 통제할 계획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금융업에는 모건은행과 쿤롭 사가 있었지만 공업계에서는 아직 적당한 대리인을 찾지 못하던 차에, 록펠러의 모든 행동은 로스차일드 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금융 쪽으로 대량 수혈을 해준다면 록펠러가 좁은 클리블랜드 지역쯤은 훌쩍 뛰어넘는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금융 전략가인 쿤롭 사의 야곱 쉬프를 록펠러에게 보냈다.
1875년, 쉬프는 록펠러의 다음 확장 계획을 직접 자문해주었으며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당시 로스파일드 가는 모건은행과 쿤롭 사를 통해 미국 철도운수업의 95%를 장악하고 있었다. 쉬프는 ‘사우스임프루먼트컴퍼니라는 회사를 차려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에 대해 운반비를 대폭 할인해주었다.
다른 제련회사들은 일단 운송 원가에서 록펠러의 상대가 안 되었으므로 얼마 안 가 쓰러졌다.
이렇게 해서 록펠러는 미국 석유산업을 완전히 독점하고, 명실상부한 ‘석유왕’이 되었다.